그 분이 죽었습니다.
대통령 선거 때는 서민과 귀족의 대결에서 서민의 승리를 이끌어 감격을 주었던 사람이지요.
그러나 일부 정책에서 그 귀족들과 다를 바 없는 시각과 행동을 보여 깊은 좌절감을 주기도 했지요.
또 깨끗하고 정직한 정치를 외쳤지만 그 역시 완벽하지 못했다는 것이 밝혀져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지요.
그러나 어디 완벽한 사람이 있던가요.

오히려 다수의 국민들이 경제를 외치며 뽑아 놓아 경제를 말아먹고 있는 2MB 보다야
비교할 수도 없이 좋은 분이었지요.
2MB는 교회장로여서 그리고 대형교회들이 앞장서서 그를 칭송하고 있어서
어디가서 기독교인이라고 말도 못하게 되었으니 더욱 비교되어 날 부끄럽게 만드는데...
이젠 그가 그들이 그분을 죽음으로 몰았으니 더욱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그런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어이 없게도 나는 20여년전 6월 항쟁 중에 있었던 한 일을 기억하며
다음 주에 어떻게 수업을 해야할지 걱정하고 있습니다.

6월 항쟁이 한창이던 때 나는 대학의 한 후배 여학생이 전경의 군화에 밟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모교에 강의를 하러 갔던 날 아침
학교 금잔디광장에서는 그 후배의 장례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하고 강의실에 들렸더니
착하게도(?) 학생들은 수업을 듣겠다고 다 강의실에 있었지요.
나는 갑자기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지요.

아 나쁜 놈들아 너희 친구가 죽었다.
설혹 그 친구의 생각과 주장에 동의하지 못한다 해도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로 장례식에는 참가해야 하는 것 아니냐? 다 나가라.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까지 점심을 거른채 종로 바닥에 몇몇 학생들과 쭈구리고 앉아 노제를 지내기 위해
경찰과 대치해 있었지요.

나는 다음 주에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날처럼 학생들에게 분향을 하러 가라고 소리쳐야 할까요?
아니면 이미 이 나라는 자본가들이 점령했으니 꼬리 팍 내리고
취업을 위해 눈에 불을 켜고 공부나 하라고 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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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중순 대전에서 열렸던 화물연대 시위현장에 노조원들이 깃발을 들고 행진에 나섰다가 깃발을 걸었던 대나무 깃대로 경찰에 맞서서 휘두르게 되었답니다. 이일에 대해 대통령이 "수많은 시위대가 죽창을 휘두르는 장면이 전 세계에 보도돼 한국 이미지에 손상을 입혔다. 이런 후진성을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논란에서 과연 우리들은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언론은 죽창이라고 쓰기가 조심스러워서 죽봉이라고 쓰려고 했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흥분했을 때 손에 무언가가 쥐어 있으면 그것이 무엇이던 휘두르게 됩니다. 그래서 시위대는 손에 아무것도 쥐지 않는 것이 좋고, 경찰은 시위대가 무엇인가를 쥐고 있다면 자극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번에도 만장을 들고 가는 시위대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흥분한 시위대가 만장을 달았던 대나무를 휘둘렀던 것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갑자기 ‘죽창’이라고 말하면서 다시 시끄러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창이라는 표현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대통령이 이를 ‘한국 이미지의 손상’으로 이해하고 있고 나아가 극복해야 할 ‘후진성’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자유선진국이라면 국민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의사표시를 합니다. 그리고 그 의사표시가 강제로 차단되거나 무시되고 있다고 느낄 때는 과격한 방법으로 의사표시를 시도하게 됩니다.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에서 노동자나 학생들의 과격 시위는 종종 있는 일이며 이는 의사가 반영되지 않을 때 택하는 일상적인 방법입니다. 게다가, 최근 태국이나 중국에서 본 것처럼, 선진국에 비해 의사표시의 자유가 훨씬 제한되는 개발도상국들이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 있음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현상이 바로 과격 시위입니다.

따라서 과격 시위 자체가 그 국가의 이미지에 손상을 입히는 것도 아니고 후진성을 보여주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과격한 시위가 발생할 정도로 의사표시의 길이 막혀있거나 국민의 의견이 묵살되고 있는 후진국이라는 점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국가 이미지의 손상이며, 극복해야할 후진성입니다.

기독교방송(CBS)과 인터뷰에서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스스로 가지지 못하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에 대해 전전긍긍하는 우리 사회의 구시대적인 인물의 모습을 그대로 잘 드러낸 심리는 아닐까. … 그때의 심리상태는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지 못하고 남의 눈을 통해 자기를 볼 수밖에 없는 전근대적이고 식민지적인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지적을 많이 하거든요. … 일차적으로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보는가의 문제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지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2009.05.20.)

얼마전 학생들의 봄엠티를 따라서 변산에 갔다가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 한장입니다.
소라 껍질이 오랜 세월 파도에 쓸려 닳고 닳아 모난 데라곤 하나도 남지 않았었지요.
그것을 사진 찍으며 내 인생을 생각했습니다.
아마 사람만이 세월이 흘러도 모난 데가 닳아 없어지지 않는 유일한 동물인가보다...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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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미얀마)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한국에 돌아와서 캠페인 관련 업무를 마무리 한 후 보고회를 가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캠페인에 참여하셨고 그 분들께 결산보고를 하기 휘한 자리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짧은 기간 동안 가서 보고 들은 버마(미얀마) 문제를 설명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버마문제

오늘은 그날 정리해서 말했던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일종의 중간결산인 셈이지요. 아직 정리해볼 부분이 많이 남은 상태로 짧은 기간 동안 생각했던 것을 중간결론 삼아 미리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실태랄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점들을 정리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방문했던 메솟지역은 인구가 15-16만 명쯤 된다고 합니다. 이중 버마 이주노동자가 10만 명이나 됩니다. 즉 버마 이주노동자를 고용하여 산업이 형성된 도시라는 뜻이지요. 이들 이주노동자들은 태국의 법정 최저임금의 반도 안 되는 급여를 받고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버마(미얀마) 내부에서는 실질 임금이 메솟지역보다 더 적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합법, 비합법적 수단으로 국경을 넘어와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경제적인 문제라면 버마 내부가 더 심각하다는 것이지요.

버마 내부의 더 큰 문제라면, 메솟지역에 대규모 난민촌이 건설된 배경이기도 하지만, 소수민족에 대한 인종청소라고 합니다. 샨, 카레니, 몬, 칸, 아라칸 등 주요 소수민족들이 정글에서 강제 이주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IDP(internally displaced people, 국내 강제이주민)라고 부르는 데 짐작할 수 있듯이 강제 이주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들의 근거지를 습격하여 학살하는 인종청소 방식이어서 더욱 심각한 상태입니다. 다시 소개하지만 2008년 초쯤에 개봉되었던 <람보4>라는 영화에 이런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모든 종류의 문제가 다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착취문제, 이주노동자 자녀들과 난민촌의 교육 및 의료 문제, 내부에는 경제적 궁핍과 식량문제가 그리고 민주인사들에 대한 극도의 탄압이 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삶의 희망이라는 절실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내부의 소수민족들에겐 준 전쟁 상태에서의 생존이라는 처절한 문제가 있습니다.

민주화만이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길

사실 내가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돌아다니다가, 그리고 돌아와서 고민하면서 내린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민주화!> 민주화 되지 않고는 이 모든 문제의 해결 실마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아니 실마리를 찾겠다고 덤빌 엄두조차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피스라디오 2차 캠페인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주화의 길은 요원해 보입니다. 버마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 대부분이 국경관리가 허술한 나라들이어서 민주인사들이 쉽게 해외로 망명하거나 잠입할 수 있습니다. 버마 내부에 남아서 지속적으로 활동하지 않기 때문에 늘 새로운 사람들이 나와서 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조직적인 저항력이 키워지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밖에서 여러 가지 희망을 만들어가고 있지만 그들 대부분이 내부가 민주화 되면 금의환향할 생각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민주화 지원 외에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지금 당장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희망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민주화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 밖에는 없는 것일까요?

지금 할 수 있는 일들

몇 가지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주노동자, 난민들을 위한 교육을 지원하는 일입니다. 메솟지역에는 여러 개의 유치원과 학교들이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이 대부분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거리에 방치되어 폭력적인 문제아들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학교로 불러 모아 기본적인 교육을 시킴으로써 당장에는 스스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성인으로 기르고, 나아가서는 민주시민교육을 통해 바람직한 시민으로 성장하게 돕는 것입니다.

교육에는 몇 가지 다른 목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뛰어난 학생들을 발굴하여 한국어를 가르친 후 한국의 의과대학에서 교육시킨 뒤 다시 그곳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곳의 의료문제를 함께 해결 할 수 있습니다. 또 민주화된 버마에서 민주시민으로서 자유버마의 뿌리를 튼튼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자유버마감시자들(Free Burma Rangers)이 하는 일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인종청소의 희생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정글을 헤치고 다니면서 구조하고 치료 및 교육하는 그들의 활동에 필요한 물품이나 비용, 정글 사람들에게 필요한 약품이나 공책, 연필 등을 공급하는 일입니다. 이렇듯 이 모든 문제들의 근본적인 해결할 실마리인 민주화 이전에도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요나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버려져 큰 물고기 뱃속에 3일을 있었던 사람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의 사소한 부분이지만, 풍랑을 만나자 뱃사람들이 승객들에게 각자 자신의 신에게 기도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지금 버마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인지도 모릅니다. 종교가 무엇이든 이들의 구원을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작은 일이라도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전날 병원에서 퇴원했기 때문에 온갖 회의야 자문이야 방송출연 등의 요청을 조용히 물리치고 있었는데.
저녁에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아내가 운전하는 차에 앉아 길을 나섰다.
난 조용히 평소에 잘 안입던 검정색 쉐터와 검정색 바지, 그리고 콤비 저고리를 찾아 입었다.
그렇게 힘없이(?) 나도 동참했다.

이 정부는 토공과 주공의 통합을 막가파식으로 밀어 붙일 게 뻔합니다. 이는 지난 정부에서 공공기관이전 사업으로 전북에 할당한 핵심 기관이었던 토공이 전북으로 이전할지 불투명해 진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전북은 새만금 하나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 왔습니다. 따라서 새만금이 잘못되면 전북은 글자그대로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새만금사업이 내 생각과는 다르지만 그렇다 해도 전북도민의 희망대로 새만금이 전북의 미래를 밝혀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분명히 할 게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이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에 기초한 합리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새만금 사업을 두바이에 비유하여 한국의 두바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우려해왔습니다. 두바이는 나비 한 마리의 날개 짓에도 무너져 내릴 허상일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대선 때 후보초청 TV토론회에 나갔던 나는 ‘새만금을 한국의 두바이로 만들겠다’던 현 대통령에게 두바이에 대해 물었으나 사실상 아는 게 없는 것을 보고 속으로 경악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자리에서 몇 사람에게 새만금이 완공되었다는 소식보다 두바이가 부도 위기에 몰려있다는 소식을 더 먼저 듣게 될 것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난 2월 11일자 뉴욕타임스는 두바이의 경제가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자 외국인의 탈출 러시가 진행되고 있다고 전합니다. 두바이 인구가 140만이 조금 못되는데 이중 90%가 외국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실업자들은 취업비자가 취소되고 비자취소 후 1개월 내에 출국해야 하는데, 하루 1,500명 정도씩 비자가 취소되고 있다고 합니다. 외국인들이 급히 버리고 간 승용차가 두바이 공항에 3,000대 이상 버려져 있다고 상징적으로 전합니다.

사실 이런 일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랍에미리트연합이라는 7개 부족의 연맹국가를 구성하는 한 자치국가인 두바이는 원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원유로 막대한 돈을 번 같은 동맹의 아부다비와 해외에서 돈을 가져다가 지역 허브 공항을 짓고, 이를 발판으로 금융, 관광, 부동산 중심으로 경제를 세웠습니다. 그 덕분에 지난 몇 년 동안 마치 남의 돈으로 경제를 눈부시게 발전시킨 영리한 부족인 것처럼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경제시스템은 부동산 개발을 위해 돈을 끌어 오고 그 돈으로 외국인 엔지니어를 고용하여 인구를 늘리고 이들이 주택을 구입하고 소비를 함으로써 다시 경제를 순환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이 자체 생산이 없기 때문에 외국의 갑부들이 이곳에 와서 돈을 흥청망청 써주지 않으면 이 순환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세계적인 경제불황이 시작되자 이 약점을 잘 아는 아부다비가 돈의 공급을 중단하고 해외자금을 빌리는 것도 여의치 않자 이제 반대 방향으로 순환이 시작되었습니다. 실업이 늘고, 주택부금(모기지 론)을 못 갚고 도망가는 외국인이 늘어나면서 부동산 가격은 폭락하고 소비는 줄어 다시 경제가 악화되는 역순환은 결국 두바이를 붕괴시킬 것입니다.

뉴욕타임스는 부동산가격이 불과 2-3개월 만에 30% 이상 하락하였고 고급 중고승용차 가격이 40% 하락했다고 전합니다. 두바이의 상징, 인공섬이 가라앉고 있다는 흉흉한 소식도 돌아다닌다고 합니다. 두바이 정부는 새 미디어법을 통해 두바이의 명성이나 경제에 해를 끼치는 행위에 최고 4억원 가량의 벌금을 부과하겠다고 합니다. 물론 이 법이 당장은 효과를 거두겠지요.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결국 두바이의 신기루가 걷히면, 그 동안 애써 건설한 부동산들은 헐값에 아부다비나 외국에 팔려나가게 될 것입니다.

두바이의 기적은 경제 성장의 기적이 아니라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가장 헐값으로 팔린 나라라는 면에서 기적이 될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공무원들이 부디 냉철한 분석을 거듭하시기를 진심으로 부탁합니다. 이 땅의 정치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이성을 잃은 광란의 질주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다시 개혁이 중단되고 나라가 위기에 처하는 아주 간단한 원리를 생각해 봅시다.

첫 째, 암몬과 모압 사람들이 마술사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했었지요. 발람은 그게 위험한 일인 줄 알았습니다만 그렇게 만든 힘은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바로 뇌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말라고 하셨지요. 뇌물은 재판 판결을 굽게 한다고요.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엘리아십이 성벽 재건에 방해자였던 도비야와 내통했습니다. 도비야는 이스라엘의 귀인들과 혼인동맹을 맺었던 자이지요. 결국 이들은 이스라엘의 적이자,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를 오직 친족이며 힘 있는 자란 이유 때문에 감히 하나님 전의 뜰에 방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혈연, 지연, 학연이 저지른 죄이지요.

세 번째는 백성들이 책임을 다하지 않음입니다.
마땅히 내야 할 십일조를 내지 않자 레위인들이 모두 먹고 살기 위해 다 자기 밭으로 도망갔습니다.

이 세 가지는 언제나 우리 주변에 머물러 있습니다. 직장에도, 교회에도, 나라에도 말입니다. 군사독재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나는 학생 때 이분들을 정말 존경했었기 때문에 더욱 슬프지요) 시절에도 똑 같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라는 여전히 위기이구요.

요즘 교회에서 중요한 연령이 되어버린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 하다 보면, 일부 교회에도 이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진다고 합니다. 직장에서는 어떤가요? 많은 기업들에서 기업이란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해 존재하는 집단이란 것을 실감하지 않습니까?

이 세 가지를 그리스도인들이 막아 나아가지 못하면 우리에게도 희망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언제까지나 기다리시진 않기 때문이지요.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나요?

앞에서 백성의 책임을 다하지 않음으로써 레위인들이 다 떠났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은 중요합니다. 부정과 타락은 소위 사회 상층부로부터 시작되지만 그 파급효과는 모든 국민에게 미친다는 것입니다. 같이 타락한다는 것이지요.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을 마치고 잠시 페르시아의 왕궁에 갔다가 돌아오니 모든 일이 엉망이 되어 있었습니다. 상층부의 타락이 국민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약속한 모든 개혁 조치를 스스로 다시 어기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결국 그 타락은 다시 지도층으로 역류하게 됩니다. 레위인들이 떠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을 아는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도 책임을 추궁합니다.

선거 때만 되면 지역감정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물론 그것의 시작은 일부 타락한 정치인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어떻게 되었나요? 국민들이 지역감정에 충실해졌습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다시 여기에 기대야만 하게 되었지요. 악순환입니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 취해진 몇 가지 개혁조치들을 봅시다. 조치가 나올 때마다, 모두 잘된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조치들에 대해서 이해 당사자들이 반발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와 이해관계가 없는 다른 조치에 대해선 또 한 결같이 잘하는 것인데 이해 당사자들의 밥그릇 싸움 때문에 일이 그르치고 있다고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모두 함께 모든 부문을 개혁하여 깨끗하고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들기보다, 나만 빼고 개혁하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모두 같이 타락하여 비효율적인 시스템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국민 스스로가 말입니다. 악순환이지요.

누군가 이 고리를 끊어야만 합니다. 그게 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느헤미야를 읽고 묵상한 우리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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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하나님은 아직 기다리십니다. 지금 우리도 역사에서 무언가 배울게 있는 것 같지 않으세요?

[9:16] 저희와 우리 열조가 교만히 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9:17] 거역하며 주께서 저희 가운데 행하신 기사를 생각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두목을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사오나 오직 주는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9 : 18] 또 저희가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르기를 이는 곧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이라 하여 크게 설만하게 하였사오나
[9 : 19] 주께서는 연하여 긍휼을 베푸사 저희를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시며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취사 떠나게 아니하셨사오며
[9 : 20] 또 주의 선한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로 저희 입에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의 목마름을 인하여 물을 주시사
[9 : 21] 사십 년 동안을 들에서 기르시되 결핍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사오며
[9 : 22] 또 나라들과 족속들을 저희에게 각각 나누어 주시매 저희가 시혼의 땅 곧 헤스본 왕의 땅과 바산 왕 옥의 땅을 차지하였나이다.

아시다시피, 유다인들은 그렇게 여러 차례 은혜를 입고, 경고를 받아도 여전히 타락했습니다. 심지어는 이방의 밥이 되기까지 당하면서도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주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민족이 그 많은 고난 가운데서도 아주 죽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9 : 31] 주의 긍휼이 크시므로 저희를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그런고 이제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운동으로 말미암아 이들이 정신을 차립니다. 그 정신 차렸음을 나타내는 증표로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모두 도장을 꽉 찍었습니다. 서명을 한 게지요. 우리가 먼저 언약을 세우고 지키겠노라, 하는 약속에 말입니다. 여기서 레위인에 대해 잠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방백들과 제사장이 서명한 것은 이해가 됩니다만 레위인은 왜 한 것일까요? 바로 레위인들은 각 지방에서 선생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들이 바로 세우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선생이 바로 세우면, 교육이 바로 세워지면 그 나라에 희망이 생깁니다.

[9 : 38]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인하여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을 치나이다 하였느니라

이제 백성들이 나서서 약속을 합니다. 이방 족속과 결혼하지 않겠다는 약속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약속들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유다주의의 시작입니다. 당시에는 구원의 역사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혈통의 순수성 유지나 각 종 제사의식 등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서 매우 중요했습니다.

지금 중동지방이 세계의 화약고라고 한답니다. 그 화약고는 바로 이 유다주의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새 언약을 인정하지 않는 이 유다주의는 결국 세계를 불안하게 하는 전쟁의 씨앗입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누구든지(민족이나 성별이나 피부색에 차별 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 아닙니까? 이 진리를 거부하는 유다주의는 평화를 선포하는 하나님의 뜻(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지요? 무슨 복이냐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복입니다)과는 관계없이 세상을 어둠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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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성벽을 완공했습니다.
이 큰 일 앞에 적들도 하나님의 역사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도비야
의 행위를 잘 살펴보십시오. 유다인들과 결혼동맹을 맺고 그들을 통해 계속 느헤미
야를 위협했습니다.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과 유다의 자치에 가장 큰 적은 내부에
있었습니다. 적과 동맹을 맺고 자기 백성을 두렵게 하는 자들 말입니다.

서해 교전 당시를 기억해 보십시오.
많은 보수 정객들과 언론들이 "전면전도 불사하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전면전, 그
게 가능한 일입니까? 물론 전쟁을 하면 남한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재래식 전
쟁이라면 말입니다. 남한의 군사력이 월등하게 좋고, 게다가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
을 데리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누구를 데리고 있는지는 좀 의심스럽지만 말입니
다. 그런데 말입니다. 눈을 조금만 돌려서 주위를 살펴보십시오. 우리에겐 많은 원
자력 발전소가 있습니다. 북한이 궁지에 몰려 가미가제식 공격으로 원자력 발전소
몇 개만 날려 버리면 으~~~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우리는 전쟁에는 승리하지만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소위 매파라고 하는 무력주의자들의 눈
치를 살피면서 자기 민족의 운명에 서슴없이 총구를 들이대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
이 느헤미야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존재하나 봅니다.

유다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듣게 됨에 따라 그들의 역사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역사에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무엇인지 한번 볼까요?

[9 : 16] 저희와 우리 열조가 교만히 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
하고
[9 : 17] 거역하며 주께서 저희 가운데 행하신 기사를 생각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두목을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사오나

나는 IMF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이 말씀을 함께 기억합니다. 우리는(나, 그리고 우
리 민족 말입니다) 이상하게도 IMF 사태를 쉽게 극복했습니다. 물론 진짜 극복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문제
에 대해서 문외한이니까요
[지금 다시 외환위기로 힘들어진 걸 보니 극복한 게 아니었던 가 봅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아는 것도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살아가는 것은 주님의 은혜라는 거 말입니다. 남미 대부분의 국가들이 사실상 국가
부도 상태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그런데도 우린 목을 굳게 하고 서있는 것은 아
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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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의 지도력에 겁이 난 주변 민족들은 느헤미야를 죽이는 일을 구체적으로 추진합니다. 불러내서 죽이는 방법을 시도했지요. 그러나 성을 다시 세우는 일에 바쁜 느헤미야는 그들의 속셈을 알고 응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술책은 느헤미야가 반란을 꾀한다는 소문을 내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힘 있는 지배자 페르시아를 자극함으로써 느헤미야가 겁먹고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느헤미야는 기도합니다. 내 손에 힘 있게 하시라고.

얼마 전[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군요]에 미군 장갑차가 여중생 둘을 치어 죽인 사고가 있었지요. 미군은 안하무인으로 버팁니다. 그들의 행동을 우방군대가 아닌 점령군대의 행동인 듯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밝히고 잘잘못을 따져야 할 일인데도 자꾸 덮으려고만 합니다. (이건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란 잘잘못을 밝힌 뒤에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언론과 보수 인사들 중에서 미국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들렸습니다. 반미가 되어선 안 된다는 논리지요. 우리 느헤미야처럼 기도합시다. 우리의 손에 힘이 있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서 그러니까 입 다물라는, 성을 재건하지 말라는 협박으로부터 자유 하는 힘을 달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이젠 유다의 선지자들을 매수합니다. 선지자가 예언하기를 오늘 밤에 그들이 널 죽이러 올 테니 성전의 외소에 가서 문을 잠그고 있자고 합니다. 한마디로 독안에 가두겠다는 것이지요. 느헤미야가 어떻게 이 유혹을 이겼는지 아십니까? 그가 선견지명이 있어서 함정인줄 알고 가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백성을 생각했기 때문에 함정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나 혼자 살겠다고 숨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원통하고 화가 나겠습니까? 그래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비방이 두려워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살았습니다. 느헤미야의 생존법칙, 그거 멋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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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귀족들이 대들면 자기 지위를 지키기가 쉽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많은 경제적 부를 이용해서 사병을 모집하면 순식간에 쿠데타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문명사회 어쩌고저쩌고 하는 요즘도 재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비록 하찮은 집일지언정 소유하고 있던 집주인들을 깡패들을 동원해서 마구 폭력을 행사하면서 쫒아내는 게 기업과 가진 자들의 행동 아닙니까? 그것도 버젓이 경찰의 보호 아래 말입니다[당시에 쓴 이 부분을 다시 읽어 보니 이번 용산학살이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관행적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번에는 더 악한 일이 벌어졌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그 시절엔 얼마나 쉬웠겠습니까?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것을 해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느헤미야 자신이나 형제, 그리고 수하 사람들조차 고리대금업을 했음을 자백하고 함께 이런 일을 중단하자고 설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잘못은 감추거나 잘못이 아니라고 우기면서 너희들이 문제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어지는 성구를 직접 읽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5 : 14] 내가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부터 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5 : 15] 이전 총독들은 백성에게 토색하여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취하였고 그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치 아니하고
[5 : 16] 도리어 이 성 역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나의 모든 종자도 모여서 역사를 하였으며
[5 : 17]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일백오십 인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사면 이방인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5 : 18]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하나와 살진 양 여섯을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니라.
[5 : 19]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너무나 떳떳했습니다. 백성들과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강력한 요구를 관철 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처음 취임할 때는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운명이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개혁을 추진했고 나라의 운명을 지금까지 연장시켜왔습니다. 남북관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었지요. 그런데 그는 후반기의 개혁은 손도 대지 못한 채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저는 나라의 운명에 대해 매우 염려하고 있습니다. 모든 상황이 IMF 이전으로 돌아간 때문이지요. 모든 개혁 조처들이 다 물거품이 되었거나 될 운명에 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구요?
IMF 상황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다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절대 다수당이 되었지요. 그나마 남은 개혁 조처들은 이제 다시 원위치 되는데 몇 초도 걸리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그 후로 참여정부시절 뒤집어졌지만 결국 지금은 IMF 상황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여당으로 절대 다수당이 되었습니다].

그럼 이런 일들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스스로 떳떳하지 않았기 때문에(자식들 비리 말입니다) 그에겐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말입니다. 요즘 말 많은 병역비리 문제도 빨리 명확히 밝혀지기를 기도합니다. 이 문제가 분명하게 매듭지어지지 않은 채, 그 분이 혹시 대통령이 된다면 이 일이 결국 (김대통령을 후반기에 식물인간을 만든 것처럼) 처음부터 그 분을 식물인간으로 만들 것이고, 이는 다시 IMF와 같은 위기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백성들이 살아야지요. 그게 나라의 힘인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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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잘 보십시오. 느헤미야와 유다 사람들이 어떻게 성전 재건 사역에 임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들은 칼을 차고 전쟁에 대비하면서 일했습니다. 밤에는 경계를 서기도 했고, 여러 가지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힘들게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냐구요?
백성들이 성전 재건에 나서느라고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웃 민족들의 위협 때문에 모두 자기 집과 농토를 비워두고 예루살렘 성 안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때면 반드시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말한 적이 있는 귀족들이지요. 이들은 고리대금으로 백성들의 토지와 집과 심지어는 자녀들까지도 돈으로 사 버렸습니다. 자기들의 책임은 하지 않으면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백성들을 약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IMF 환난이 왔을 때도 그랬다지요? 나라의 존립이 위기에 처했을 때 부자들은 더욱 부자가 되었다지 않습니까? 그래서 빈부격차가 더욱 심해졌답니다. 그들은 외국으로 떠나면 그만이기 때문에 나라의 위기를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기회로 삼은 것이지요.

다행히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우리는 그런 위기로 발전하지 않았습니다만, 남미의 여러 나라들이 그렇게 해서 결국 나라가 사실상 부도 상태에 있지 않습니까? 미국이 지명하는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의 맘에 안 드는 사람이 대통령이 될 것 같으면 너네 망하게 하겠다고 협박하지 않습니까? 경제위기 때 일부 부자들만 더욱 부자가 되고 대다수 백성들은 생계도 꾸릴 수 없는 상태로 되어버렸기 때문에 나라에 힘이 없어진 까닭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백성들이 힘을 잃으면 나라도 힘을 잃는 것이지요. 그래서 느헤미야는 이게 주변민족들의 위협보다 더 큰 위협임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몇 년 전[이글을 쓴 때로부터 몇 년 전] 이 부분을 읽으며, 슬퍼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에게 이런 지도자가 없음을 말입니다. 그래서 한 때는 그리스도인 지도자 과정이란 걸 운영해 보고 싶었던 적도 있습니다. 느헤미야와 같은 지도자를 꿈꾸면서 말입니다. 그게 제가 지금 쓰는 느헤미야서 묵상의 제목이 "느헤미야를 꿈꾸며"인 까닭이기도 합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민족이 행하고 있는 이런 가증한 범죄에 대해 호되게 비판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확실하게 조치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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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에는 온통 누구누구가 어디어디를 재건하였다는 말 뿐입니다. 이 일에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참여한 것 같습니다. 대제사장과 제사장들도 나섰습니다. 모든 지방 사람들도 참여했지요. 심지어는 강 서편, 즉 느헤미야의 감독 아래에 있지 아니하는 유대인들도 참여했습니다. 금장색(기술자)들도 참여했습니다. 동문지기(관리)도 참여했습니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참여한 것이지요.

정말 그럴까요?
아닙니다. 5절을 보면 ‘드고아 사람들 중에 그 귀족들은 그 주의 역사에 담부치(일정한 책임을 부담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왜 귀족들은 참여하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에는 스스로 대답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귀족스럽게 예수를 믿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참고로 덧붙인다면, 지난주[이글을 쓴 때를 기준으로]는 남북평화 공동기도주일이었습니다. 나는 그 기도예배에 참석해서 평화통일을 위한 북한지원사업이 얼마나 주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것이며, 우리의 평화에 정말 중요한 일이란 점을 잘 배웠습니다. 기분 좋게 예배를 마치려는데, 갑자기 광고가 있었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보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모 의원이 그 자리에 참석했다고, 앞으로 불러내서 인사를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나오면서 마치 맛있는 음식을 먹고 기분 좋게 마신 디저트가 입맛에 맞지 않아 입안이 씁쓸해진 기분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참석했다면 조용히 예배하고 기도한 후에 돌아가면 될 일입니다. 누가 참석했든지 주님의 말씀을 선포했으면 그것으로 예배를 마칠 일이었습니다. 이것도 교회 안에 침투한 세속적 귀족주의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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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느헤미야의 실천과정을 봅시다.
왕의 총애를 받는 관원으로서, 유다의 총독으로 부임했으니 기고만장할 법한 일 아닙니까? 일제 때 그랬다고들 하지요? 역대 대통령의 자녀들이 그랬다지요? 최근에 서울시장에 취임하신 분[그 분 지금은 대통령이지요]이 그랬다더군요.

그런데 느헤미야를 보십시오.
조용히 밤중에 나가서, 오직 가장 충직한 부하 몇 만 데리고 말입니다, 자기 할 일을 살핍니다. 현실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면서 의지를 더욱 불태웁니다. 그리고는 자기 민족에게 고합니다. 우리의 처지는 우리 스스로의 눈으로 보고 있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역설적이지만 그 땐 언론이라는 게 없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이상한 오리무중의 말로 독자의 눈을 홀리는 그런 이상한 것들 말입니다.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을 이제 해결하자고 외칩니다. 그러니 백성들은 잘 따르겠지요.

그러나 그 길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오랜 역사를 지내오면서 유다 땅에는 이방 민족들이 버젓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위 앗시리아의 식민지 시절부터 시작된 강제 이주정책 때문이지요. 이들이 딴죽을 걸고 나옵니다. 그것은 역사가 바른 길을 가야할 때면 언제나 등장하는 시험입니다. 민족 간의 이해, 학연, 지연이라는 이해, 이런 것들이 역사의 흐름을 왜곡시키려고 날뜁니다. 그래서 인류는 평화를 눈앞에 두고서도 금 새 사탄의 유혹에 빠져 다툼으로 치닫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의 대들보는 먼지로 보이고 남의 먼지는 대들보로 보입니다. 그래서 남에겐 정의를 외치지만 자기가 한 일은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아하, 벌써 눈치 채셨군요. 그렇습니다. 이들이 바로 장차 느헤미야가 극복해야할 준비된 또 다른 시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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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성경의 느헤미야서를 묵상하며 썼던 글입니다. 묵상노트 성격의 글인데, 최근 다시 읽어 보니 공개해도 될만한 글이고 또 최근 세상 돌아가는 모습 가운데에서 다시 생각할 만한 내용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신앙을 가진 분이 아니면 조금 거북한 말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분량이 많아 나누어 올립니다. 아, 이번에 몇마디 첨가한 것은 [ ]안에 따로 적었습니다.

******

성경 속의 인물들 중 세례 요한과 느헤미야는 내게 중요한 선생들입니다. 그래서 그 분에 대한 묵상이 시작된 오늘이 참 좋습니다.

느헤미야는 늘 자기 조국과 민족의 처지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에게 현실을 묻습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라진 조국과 민족의 처지를 묻는 일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말을 듣고 슬퍼합니다. 자기 조국의 현실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슬퍼한다는 말은 자신이 공동의 책임감을 가질 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화를 내지요. 정치인이 잘못해서, 기업가들이 이기적이어서, 노동자들이 말을 안 들어서, 공무원이 교사가 부정하기 때문에, 교수가 실력이 없어서, 학생들이 버릇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기도합니다. 그 책임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자각은 우리를 기도하게 만듭니다. 먼저 자신과 자기 민족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고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기도를 합니다. 자기 민족의 처지를 슬퍼함과 회개, 그리고 약속을 기억하는 기도가 오늘 느헤미야가 우리에게 온몸으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이제 느헤미야에겐 큰 근심이 생겼습니다. 자기 조국과 민족의 처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느헤미야에게 묻습니다. 물론 느헤미야가 왕에게 가장 큰 신뢰를 받는 사람 중의 하나인 술 관원이었기 때문에 왕은 관심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느헤미야의 행동을 살펴보십시오.

자기 조국의 현실을 이야기 하고 자기가 가서 예루살렘 성을 재건축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왕의 신임을 받는 관리로써 편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데, 아니 지금 그렇게 즐기면서 살고 있는데, 고생할 게 뻔히 보이는 그 곳으로 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격은 좀 다릅니다만, 요즘[몇 년 전] 자식 군대에 안보내기 위해 여러 가지 불법과 편법이 자행되었다고 해서 시끄러운 우리 정치 지도자들의 현실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곳까지 가는 도중에 만날 관리들에게 통행을 허가하라는 증서까지 요구한 것을 보면 그냥 편한 자리를 박차고 고생하러 가는 정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가는 도중에도 목숨에 위협을 받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진정한 민족의 지도자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평안한 삶을 버리고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곳으로 기꺼이 떠난 데서도 찾을 수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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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유로도 학살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나는 지난 한달 간을 계속 글을 써야 하는지 참담한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새해 들어 계속 들려오는 여러 종류의 학살 소식 때문입니다. 아마 세상 소식을 들으며 사는 분이라면 중동의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이스라엘군의 민간인 학살이라든가, 용산의 재개발 지구의 학살 소식, 그리고 강모라는 사람이 저지른 연쇄살인 이야기를 잘 알 것입니다.

학살피해자에서 학살을 즐기는 흉악범으로 변한 유태인들

올 초 이스라엘군은 모든 외국 언론을 통제한 상태에서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공격의 대상이 군사시설이나 군인이라고 하지만 많은 목격자들과 증거들은 민간인 학살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시장을 폭격하고, 의약품과 식량을 보관하던 유엔 구호시설과 피해자들을 치료해야 할 주요 병원들을 모두 폭격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틈만 나면 독일의 나찌 치하에서 수많은 동족을 잃었다고 울면서 세계의 동정을 유도하던 그들이 사실은 더 잔인하고 치밀한 방법으로 학살을 자행하고 심지어는 이를 구경하며 즐기는 미치광이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용산 민간인 학살

재개발 사업이 얼마나 큰 이권이 걸린 일인지는 수시로 들려오는 재개발 비리사건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곳에서 밀려나는 세입자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일궈온 삶의 터전과 생계수단에 대해 최소한 보장도 받지 못합니다. 오직 이익이라는 거대한 마귀 앞에 할퀴고 희생될 뿐입니다. 그래서 공정성이 생명인 경찰 혹은 공권력이란 사회적 합의에 의해 문제가 풀릴 수 있도록 안전을 보장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과적으로 어느 한쪽만의 이익을 보호하게 되는 작전 때문에 벌어진 이 사건은 ‘용산참사’가 아닙니다. ‘용산 민간인 학살입니다. 죽은 경찰관 역시 상관의 지시 때문에 죽음의 자리에 뛰어든 것 아닙니까?

강모라는 연쇄살인범과 다를 게 없어

우리가 보고 있는 이런 집단은 겉보기엔 별 문제 없는 이웃이지만 뒤에서는 흉악한 살인마였던 강모라는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겐 나찌의 희생자로 동정을 받지만 자신은 학살을 일삼는 것. 시민을 보호해야 할 경찰에게 용역회사까지 앞세우고 대규모 사상자가 날게 뻔히 보이는 작전을 지시하는 것. 사상자와 가족들에게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주는 발언을 하는 것. 모두 다 연쇄살인과 다를 게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철학이나 이념, 종교와 사상도 사람 죽이는 것을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악마의 발광일 뿐입니다.

 

피스라디오에 대한 반응
2월 10일 저녁 ~ 2월 11일 아침

사실 10일은 내 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달식이 끝난 후 함께 간 푸른소와 아렌지 등이 슬그머니 사라지더니 맥주와 과자를 몇 봉지 사들고 들어와 축하해주었습니다. 다른 단체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고 DPNS 소속 사람들만 남아 있었는데 이들도 함께 둘러 앉아 내 생일을 빙자한(^^) 소박한 파티가 열렸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내 평생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준 생일파티였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나는 또 한 번 가슴 벅찬 말을 들었습니다. 21살이라는 카렌족의 한 아가씨에게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묻자, “유학을 다녀와서 난민캠프에서 마더 테레사 수녀처럼 사는 것이 꿈이다.”고 대답합니다. 사실 난 참 어리석었습니다. 나는 속으로 이 아가씨에게 과연 희망이라는 게 있을까? 하는 의문과 이들은 문명세계가 돌봐 줘야할 대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아가씨는 나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성숙한 문명인이었습니다. 오직 돈과 권력만 설쳐대는 야만적인 세계에 갇히지 않고 가장 문명인다운 꿈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도 역시 피스라디오가 화제의 중심이었습니다. 이들은 어제(9일) 저녁에 있었던 버마군부의 발표가 우리들의 피스라디오 캠페인에 꽃을 피워준 꼴이었습니다. 군부가 5월 국민투표를 통해 합법적 영구집권을 꾀하는데 민주진영에서 라디오를 이용한 홍보전을 펼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더 많은 라디오를 시급하게 보내주길 희망한다고 입 모아 말합니다.

다음 날인 11일 아침에는 전날 밤의 모임 때문에 그만 늦잠을 잤습니다. 사실 늦도록 잠들지 못하다 새벽에 잠이 들었고 결국 늦잠을 잔 것이지요. 그래서 아침에 있었던 피스라디오 캠페인에 대한 라디오 방송을 하나(RFA) 밖에 듣지 못했습니다. 린의 말에 따르면 3개 방송(BBC, RFA, DVB)이 모두 방송했다고 합니다. 방송은 버마어로 진행되었고 린이 번역해준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었습니다.

“피스라디오 캠페인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DPNS, 이주노동자, 난민캠프, KNU, ABSDF 등이 참석했다. 이 라디오는 버마 사람들에게 특히 이주노동자들에게 매우 필요한 것이다. 라디오를 공급하는 이런 캠페인은 처음 있는 일이다. 캠페인을 한 사람들은 한국인들로 이들은 앞으로도 이런 캠페인을 계속할 예정이다.” 그리고 태국에서 이 캠페인의 파트너 역할을 했던 사람들 몇 명의 인터뷰가 나갔습니다. RFA는 이런 방송을 두 번 내보냈습니다.

사실 이곳에 와서 우리들은 피스라디오 캠페인이 매우 적절한 때에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은 캠페인이고 기존의 여러 자유버마 돕기 캠페인들과 차별되는 캠페인이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군부가 추진하는 국민투표 때문에 더욱 가치가 돋보였습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이들의 기대처럼 한 동안 계속 할 사업이라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한국이 점점 불경기의 늪으로 빠져들 조짐이고, 이번 캠페인을 위한 기부금을 모으는 것도 힘들었던 터라 이들의 기대가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시민행동이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문제로 후속 캠페인을 계속할 처지가 아니어서 우리가 귀국한 후에 캠페인을 정산하고 남은 자금을 2차로 보내주는데 그쳤습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다음 캠페인을 기약합니다.

내 생애 최대 인파(^^)가 몰린 생일모임


앞쪽이 이번 캠페인의 실무를 책임졌던 아렌지이고, 뒤가 바로 마더 테레사를 꿈꾸는 아가씨입니다.

(왼쪽 그림) New Era journal 이라는 자유버마 인터넷 신문에 실린 피스라디오 캠페인 관련 기사. 사진 속의 인터뷰하는 사람은 시민행동의 푸른소 (오른쪽 그림) Yoma3 News Service라는 역시 자유버마 인터넷신문에 실린 피스라디오 캠페인기사. 사진은 내가 HRDP의 간부에게 라디오를 전달하는 모습 (피스라디오캠페인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음)

피스라디오 전달식
2월 10일 저녁

영치우노동자연합을 방문을 급하게 마치고 5시 30분 우리 일행은 급하게 숙소를 겸하고 있는 DPNS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이날 저녁 6시부터 피스라디오 전달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비해 지나치게 더운 날씨에다 가는 곳마다 냉방이 되는 곳은 전혀 없기 때문에 더욱 지친 몸으로 DPNS 사무실에 돌아온 우리는 당황했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조촐하게 기념사진을 찍는 정도였습니다. 한국에서 모금에 참여하신 분들에게 결과를 알려드릴 최소한의 자료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모여들기 시작한 사람들은 대규모 행사임을 직감하게 했습니다.

이날 진행순서는 개회사에 이어 DPNS의 린 총무가 버마어로 경과보고를 하고 이어서 시민행동의 오 처장이 한국어로 경과보고를 했습니다. 물론 콩-예가 버마어로 통역을 했습니다. 이어서 버마의 각 조직을 대표해서 3사람이 연설을 했습니다.

첫 번째 강연에 나선 이는 카렌족을 대표한 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현재 정글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카렌족에 대한 군사정부의 학살을 증언했습니다. 군인들은 밀림 속 카렌족 마을을 습격해서 성인남성은 다 죽이고 오직 여자들과 아이들만 남겨둔 채 논과 마을을 불태워 없앤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폐허화한 마을 주변에 지뢰를 설치함으로써 마을 주민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막는 영민함까지 보인다고 합니다. 영상자료는 고문, 강간은 물론이고 인종청소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피난처에서 조차 어린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임시학교를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단체는 나중에 소개할 자유버마순찰대(Free Burma Rangers)라는 조직입니다. 그는 지금 자기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약품과 음식이며, 밀림 속 소수민족들이 희망을 유지하기 위해 라디오가 매우 요긴하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강연자는 빈민자녀를 위한 학교를 운영 중인 분이었는데, 그는 라디오를 보내준 한국 사람들이 너무 고맙다는 인사로 말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피스라디오 캠페인을 반긴다고 하면서 이 라디오를 통해 버마 사람들이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이렇게 정보를 얻은 사람의 입을 통해 이웃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강연자는 2007년 9월 민주화시위 이후 메솟으로 탈출해 정착한 아웅-웨이라는 분으로 유명한 시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1988년 시위에도 참여했고, 2007년 시위에도 참여했는데, 1988년 시위 때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라디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 1,000명의 시위대가 모였으나 이 사실이 라디오를 통해 알려지자 시위군중은 순식간에 10,000명으로 불었다고 합니다. 2007년 시위 때는 인터넷과 TV가 있었지만 모두 쇼 프로그램만 보여주고 있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버마를 탈출할 때 오직 사전 1권과 라디오만 들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라디오 배포에 참여할 각 단체에 라디오를 나누어 드렸습니다. 배포에 참여할 단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옆에 적힌 주소는 제가 확인 가능한 수준에서 기록한 그 단체의 공식 홈페이지 주소입니다. 워낙 부족이 많은 나라이다 보니 단체도 다양합니다.

1. Karen Youth  Organization (KYO): http://www.akyp.org.au/kyo.html
2. All Kachin Students and Youth Union(AKSYU): http://www.aksyu.com/
3. All Arakan Students' and Youths' Congress (AASYC)
4. Kayan New Generation Youth (KNGY)
5. Mon Youth Progressive Organization (MYPO): http://mypo31.blogspot.com/
6. Zomi Students and Youth Organization (ZSYO)
7. Palaung Youth Network Group(PYNG)
8. Tavoyan Youth Organization (TYO)
9. Democratic Party for a New Society  (DPNS): http://www.dpns.org/
10. All Burma Student's Democratic Front (ABSDF): http://absdf8888.org/
11.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Liberated Area, Youth)(NLD_LA, Youth)
12. BLSO(Burma Labour Solidarity Organization): http://www.burmasolidarity.org/
13. YCOWO(Yaung Chi Oo Workers Organization)
14. JACBA(Joint Action Committee for Burma Affairs)
15. HRDP(Human Resourse Development Program)

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HRDP소속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한 젊은 여성에게 라디오 상자를 건네줄 때였습니다. 저는 너무 가슴 아파 잠시 망연했습니다. 그곳에 자리한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음식을 충분히 먹지 못하고 자란 탓인지 체구도 작고 매우 마른 몸매였는데, 이 여성은 제가 한 손으로 가볍게 들 수 있는 라디오 상자를 두 손으로 받고도 제대로 들지 못해 제가 계속 함께 들고 있어야 했습니다.

이후 우리는 우리가 시민행동이 한국에서 제작하여 가지고 간 영상을 모면서 버마 음식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8시 30분이 되자 모두들 서둘러 돌아갔습니다. 이들의 설명에 의하면 이들이 밤늦게 돌아다니다가 태국 경찰에 붙잡히면 200Baht의 벌금을 내야 한답니다. 불법체류이기 때문에 무조건 체포해서 과거에는 버마로 추방했으나, 요즘은 국제사회가 정치적 망명에 준하는 보호를 요구하기 때문에 대신 벌금을 받고 풀어준답니다. 그러다 보니 태국 경찰에게 이들은 좋은 사냥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날 저녁 전달식 풍경은 시민행동의 피스라디오 공식 홈페이지에서 자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 www.peaceradio.kr

암담한 연말이지만 모든 것은 다 지나갑니다.

우리 국민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정말 암담한 연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미국의 금융위기로 시작된 세계적인 불경기의 여파로 겪는 경제적인 고통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로 계속되는 권력의 횡포로 빚어진 경제적, 정신적 고통입니다. 사실 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도 합니다.

미국 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가장 고통을 겪는 나라 속에 우리나라가 포함된 것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지난 1997년의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받아들인 금융시장개방으로 우리 금융시장이 미국에 종속되어 나타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상품무역에 관한 협정인 FTA가 금융시장에 관한 협정으로 변질된 한미 FTA 법안을 한나라당 단독으로 상정해 놓았습니다. 한미FTA는 한번 발효되면 무조건 20년 동안 따라야 합니다. 적어도 앞으로 20년간은 이런 위기가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계속 반복될 외환위기

불경기는 사실 금융시장개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대기업들이 수출하여 돈을 벌어도 이미 대기업의 주식중 상당부분이 외국인 소유이기 때문에 배당금 등의 형태로 국외로 유출됩니다. 돈을 벌어들인 것에 비해 실제로 국민이 쓸 수 있는 돈은 줄어드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이 정부는 공공기관의 정규직을 2만 명 감축하면서 대신 비정규직 인턴 1만 명을 채용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정책은 국민들이 쓸 돈을 더욱 줄어들게 만듭니다. 정말 구조조정이 필요할 정도로 방만하다면 그 규모만큼 축소하면 되는데 비정규직으로 대체한다는 말은 필요 이상으로 감축한다는 말이고, 이는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대체해서 국민들을 점점 더 가난하게 만들겠다는 것이지요.

국민을 더 가난하게 만들겠다는 정부

여기에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온갖 폭력적인 조치들로 정신적인 고통까지 안겨줍니다. 임기에 관계없이 각 기관의 수장들을 갈아치우더니 이젠 1급 공무원 전체를 물갈이 하겠다고 합니다. 일제고사 관련 교사들을 파면하는가 하면 이미 문제가 드러난 서울시 교육감은 전혀 손 댈 생각을 안 합니다. 한마디로 과거 독재 정권이 해보고 싶었던 일은 다 하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1/5을 맛보고 있는 것

이는 사실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국민들이 선택한 결과이고 우리는 치러야 할 대가의 1/4도 아직 못 치룬 것입니다. 아직도 임기가 4년이나 남았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은 다 지나가는 때가 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걸 아셔야 합니다. 지금 정신 차리고 마음을 다잡지 못하면 다음 선거에서도 이런 암울한 현실을 끝낼 수 없다는 것 말입니다.  (2008. 12. 23.)

진짜 기독교인 지도자라면

나는 요즘 다시 한 번 성경 속의 인물인 느헤미야를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왜냐 하면 요즘 우리나라의 현실과 지금으로부터 약 2450년 전의 이스라엘의 상황이 좋은 대조가 되기 때문입니다.

B.C. 440년경의 이스라엘은 정말 암담했습니다. 남(유다)과 북(이스라엘)으로 분단되었던 이스라엘은 결국 모두 망했고 몇 나라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페르시아가 이 지역을 식민지로 통치하면서 모든 식민지 백성들에게 자기 종교를 섬기도록 허용합니다. 이때 느헤미야라는 유다사람이 페르시아 왕의 신임을 얻어 유다사람들을 데리고 유다의 상징이었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을 재건하도록 허락 받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던 중 문제가 생깁니다. 성경의 느헤미야서 5장이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사람들이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동원되다 보니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해 먹을 곡식이 없었습니다. 식량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논밭과 집을 팔았습니다.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부자들에게 고리대금으로 돈을 꾸었으나 그 빚을 갚지 못해 자기 자녀들을 돈 대신 넘겨 주어야했고, 이들은 다시 이웃나라 사람들에게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물론 부자들은 귀족들과 관리들이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우리와 비슷합니다. 세계적인 불경기와 외환위기로 빚어진 국가위기와 멸망한 이스라엘의 처지가 비슷하고, 이를 재건하기 위해 애쓰는 국가적인 운동이 비슷합니다. 그 과정에서 빚어진 부익부 빈익빈도 어쩜 그리 비슷한지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 후가 전혀 다릅니다.

느헤미야는 매우 화가 나서 백성들을 모아 놓고 고리대금으로 번 돈을 즉각 반환하고 노예로 팔려간 동족들을 되사오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자신과 자기 수하들도 돈과 곡식을 빌려주는 일을 했다고 자백합니다. 그리고 즉각 고리대금업을 중단하라고 명령합니다. 자기 백성에게 샀던 집, 논과 밭을 모두 돌려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두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식민지에서 돌아와 아무런 힘도 없던 그들이 예루살렘 성 재건이라는 큰일을 짧은 시간 동안에 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기독교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이 정부도 화를 내기는 마찬가지입니다만 모두가 과거에 이룩한 일들을 부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위기가 가난한자들을 얼마나 더 힘들게 만들고 중산층이 어떻게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 기회에 부자들에게 더욱 많은 부를 보장해주기 위해서만 머리를 쓰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위기를 극복할 수도 없고, 설령 극복한다 해도 그 후의 한국사회는 지금보다 더욱 암울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08/11/25)

영치우노동자연합
2월 10일 오후

늦은 점심식사를 마친 후 오후 4시쯤 되어 영치우노동자연합(Yaung Chi Oo Worker's Association, YCOWA) 사무실을 방문했습니다. ‘영치우’라는 말은 버마말로 ‘새벽’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영치우노동자연합은 모쉐(Moe Swe)의 주도로 학생운동가들과 이주노동자들이 함께 1999년에 설립한 버마노동자단체로 10개 공장의 7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회원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메솟의 버마 이주노동자들의 인권보호, 권리교육, 보건증진 활동과 노동자들의 여러 가지 사회활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물론 국제적인 연대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었습니다.

태국 내의 버마 노동자 200만 명 중에 반 정도가 메솟과 인근지역에 있으며 메솟에만 10만 명 정도가 있으나, 1999년까지 메솟의 운동가들은 오직 독재정권과 싸우는 데만 열중했기 때문에 이들의 실정에는 무관심했다지요. 그러는 동안에 버마 노동자들은 고용주로부터 성폭행과 착취를 당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 살해되기 까지 했답니다. 또 공장이 폐쇄되면 오갈 데 없는 이주노동자들이 노숙을 하다가 성폭행을 당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공식통계로도 2002년 한 해 동안 메솟이 속한 탁지방에서 30명의 버마 노동자들이 살해되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YCOWA의 요청으로 그 단체의 주요 활동가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래서 YCOWA는 먼저 피난시설을 만들고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윤락여성으로 팔려간 이주노동자들을 구조하여 교육시킨 뒤 취업을 하도록 하거나 임신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여성 노동자, 그리고 노동착취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을 보호하면서 교육하고 이들을 위한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또 2002년 9월부터는 의사 1명과 간호사 2명으로 조직된 무료병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노동현실은 매우 암담합니다. 태국의 법이 정한 최저임금은 1일 147바트이지만 메솟지역의 버마 이주노동자들은 1일 60바트 정도 밖에 받지 못합니다. 일부 악덕업주들은 그나마도 체불하고 있다가 노동자들이 항의하면 적당한 시점에 불법체류 노동자로 신고하여 버마로 보내버린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다른 업체에도 취업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답니다.

그래서 YCOWA는 노동자 권리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급한 상황에 대해서는 태국의 변호사를 고용하여 법률구조활동을 벌이는데, 지난 6년 동안 1,716건의 소송에서 승리하여 총 1,054만 바트를 배상받았다고 합니다. 또 보호 중인 노동자들이 블랙리스트 때문에 취업이 곤란할 경우 재교육을 통해 다른 업종으로 이직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활동에는 태국법률가회의(The Lawyer Council of Thailand)나 태국의 NGO인 MAP재단과 같은 단체들과의 국제연대가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살펴보면, 2003년 5월 편직물공장에 다니던 한 소녀가 태국 국경수비대경찰관에게 성폭행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음에 국경을 소개할 때 자세한 배경을 쓰겠습니다만 이런 일은 종종 있다고 합니다. 이 소녀는 YCOWA의 도움을 얻어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이 경찰관은 공개적으로 사실을 시인하고 50,000바트를 배상해 주었습니다.

40대 초반인 YCOWA의 대표인 모쉐(Moe Swe)는 랭군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전버마학생민주전선(ABSDF)소속이었다가 영치우노동자연합을 설립한 후 2000년에 ABSDF를 탈퇴했습니다. 그는 88운동 이후 89년 국경지대로 이동하여 카렌족과 함께 정글에서 생활하다가 96년부터 메솟 근처에서 동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거점을 구축한 것이 계기가 되어 처음 이주노동자들을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을 찾은 노동자들이 외친 ‘우리도 버마사람들이다’라는 말에 자극 받아 이런 활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의 이런 활동을 태국의 공장주들이 가만 둘리 없겠지요. 공공연하게 ‘모쉐는 죽어야만 한다’고 말하던 그들은 결국 2003년 12월 그의 목에 10만 바트(당시 환율로 2,500달러)의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그후 수차례 습격을 받게 됩니다. 특히 그를 도와 함께 활동하던 미국 워싱턴 소재 노동인권단체의 덴마크인 벤트 게르트는 복부에 칼을 맞았고, 다른 활동가들도 공개적으로 테러를 당했습니다. 그는 결국 치앙마이로 피신하여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이런 사실 때문에 국제사회가 공장주들을 비난하게 되었고, 국제기구들의 압박을 받은 태국정부가 태국인권위원회를 통해 태국경찰의 안전보장을 약속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홍콩의 어느 노조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이 모쉐의 도피생활을 직접 와서 보고 지학순 정의평화상 시상위원회에 추천하여 YCOWA는 2004년 12월 제8회 지학순정의평화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YCOWA는 2004년 지학순정의평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이상은 한국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크게 기여했던 고 지학순주교를 기념하여 제정한 상으로 자기 나라에서 평화와 인권에 크게 기여한 공로가 있는 사람이나 단체에 주는 상입니다.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피스라디오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최대 걱정꺼리가 라디오를 버마로 보내는 수단을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는데, 우리는 이곳에서 아주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의 노동자 10만여 명 중에 약 반은 매년 4월의 명절(이들의 달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때)에 고향을 방문하기 위해 국경을 넘는다고 합니다. 이들 편에 보내면 아주 자연스럽게 버마 내부로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끝으로 우리는 모쉐에게 그의 꿈을 물었습니다. 그는 ‘버마로 돌아가 자유 버마에서 모든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노조를 건설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연락처

전화: (66 89) 5659 899, (66 55) 542 622

이메일: zawwinlwin88@yahoo.com 혹은 yaungchioo_info@yahoo.com

주소: YCOWA, PO. Box 37, Mae Sot, Tak 63110, Thailand

군산고가 자율형개방고로 지정되는 것을 어떤 분들은 기대의 눈길로 또 어떤 분들은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올해 군산고 홈페이지에서 발견한 입학안내 문건은 안타깝게도 그리 기분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내용의 일부가 학원생 모집광고 전단 수준이었기 때문입니다.

"군산고등학교에 오면 매우 힘이 듭니다." "입학하여 후회하지 말고 미리미리 마음을 준비하고 지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문건의 전체 내용을 읽으면서 이 광고 문안을 작성하신 분이 혹시 입시학원의 광고를 카피한 게 아닐까 의심했습니다. 이 두 문장은 광고문안의 시작부분과 끝부분에 있는 내용이었는데, 이 말의 의미를 오직 입시를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운영할 테니 아무 생각 없이 따라올 사람만 입학하라는 것으로 느꼈다면 지나친 것일까요? 학원의 광고라 해도 씁쓸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광고에는 '인성교육과 학력신장'에 치중한다고 했지만 나열한 내용들 중에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인성교육의 첫 번째(!) 항목이 "신입생은 입학과 함께 학부모 동의의 서약서를 학교에 제출해야 합니다." 였습니다. 서약서 내용이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 앞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 무조건 따르겠다는 서약서일 것입니다. 서약서를 내야 하는 사람도 학생이나 보호자가 아닌 학부모로 되어 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심화된 우리 사회의 가정해체를 감안할 때 이는 사려 깊지 못한 것입니다.

"생활지도는 다른 학교에 비해 엄격하며 교문에서부터 동창회선배들이 지도합니다." 저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혹시 '한번 xx는 영원한 xx이다' 라는 구호가 생각났습니다. 이 말은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병폐를 만들어 내는 '패거리주의'를 조장하고 최악의 경우 폭력을 정당화할 우려도 있습니다. 따라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 입학한 후 학력신장 교육과정에 최선을 다해 참여하여야 하며 본인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합니다." 책임이란 자기 선택에 대한 책임입니다. 무조건 따르라고 하고 책임을 거론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적성을 찾아 자아실현을 위해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도록 가르치는 것이 바람직한 교육이겠지요.

이외에도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모든 문장들은 의욕과 세심하지 못함이 빚어낸 해프닝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광고를 보고 그 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부모가 정말 제대로 된 부모일까요?

공교육을 사설 입시학원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군산고의 인재 유치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이런 광고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해프닝 수준의 일이라면 빨리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육관련 단체들이 여러 차례 예상했던 '자율형개방고가 결국 공교육을 입시학원으로 전락시킬 것'이라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으로 정부는 이 제도를 크게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

모조신문사 (MoeJoe News Press)
2월 10일 오후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오전 일정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태국식 중국식당이었지만 콩 예가 우리 입맛에 맞는 메뉴들을 골라주어 맛있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식당 마당엔 이름 모를 열대 식물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식당 내부(윗쪽)와 마당에 핀 이름 모를 꽃(아래쪽). 진분홍색 꽃잎 속에 하얀색 작은 꽃이 솟아나 진분홍 꽃잎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식사 후 3시경이 되어 방문한 곳은 1999년 1월에 설립된 모조신문사였습니다. 현재 버마사람들이 발행하는 신문은 4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가장 큰 신문은 이라와디(Irrawaddy)로 태국의 치앙마이에 근거지를 두고 있습니다. 치앙마이에는 이 외에도 미지마(Mizzima)라는 신문이 있습니다. 미지마는 인도에서도 발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방콕에는 새시대(The New Era)라는 신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오늘 우리가 방문한 메솟의 모조신문사입니다.

모조는 버마 말로 번개라는 뜻인데, 모조신문사가 하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월간 신문을 발행하여 국경지대 노동자들과 버마 내부에 보급합니다.

2) 웹페이지를 통해 뉴스를 전합니다.(http://www.binamojo.org) 이 사이트는 버마어로 된 뉴스만 제공합니다.

3) 비디오도 모아서 매월 영상뉴스를 발행하는데, 이들은 주로 메솟 상황을 촬영하고 버마 내부에서 촬영한 영상물을 받아 발행하기도 합니다.

4) 기록문서 도서관을 운영합니다.

우리가 방문했을 당시에 기록문서는 총 2,000권 정도라고 했습니다. 주요 보관 자료들은 버마 상황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각종 책들로 책을 출판하기 위해 마마지출판사(Momagyi Press)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마마지라는 버마 말은 원래 나이 많은 언니라는 뜻으로 부모가 없으면 부모를 대신하는 맏이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 신문은 1999~2002년 까지는 해외자금이 지원되어 매월 5,000부를 발행하였으나 2002년 이후 재정지원이 줄어 해외에 거주하는 친구들의 지원에 의존하게 되면서 발행부수를 1,000부로 줄였다고 합니다. 이중 200부 정도를 버마 내부로 보내고 있습니다. 메솟에서는 직접 인편으로 배포하지만 버마 내부로 보내는 것은 비밀장소에 감추어 두면 내부 사람이 가져다가 나누어 보는 방법으로 배포중이라고 합니다.

버마 내부의 언론 상황에 대해 묻자 우리나라의 5공 시절이 생각나는 말들이 쏟아집니다. 버마 내의 모든 언론사는 군사정부인 SPDC의 선전물만을 출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를 통제하는 방법은 직접통제 방식으로 검열관이 언론사에 상주하고 있으면서 검열하여 승인한 내용만 출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부 사람들은 자신들이 직접 보도할 수 없는 뉴스를 작성하여 외부로 보내준답니다. 내부에서 이를 출판하였다가는 중형(7년형)에 처해진다니 정말 살벌한 상황이지요. 게다가 외부에서 언론 활동을 하다가 귀국하여 붙잡히면 무려 20년형에 처해진다고 합니다.

 


(윗쪽사진) 우리 일행이 모조신문사 사람들과 대화중입니다. (아래쪽사진) 가는 곳 어디서나 아웅산 수치여사의 사진을 볼 수 있고, 여전히 감옥에 있는 학생운동지도자 민코나잉의 사진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위 사진 속의 포스터에는 노벨상 수상자인 수치여사의 가택연금해제를 위해 당장 행동에 나서자는 구호가 적혀 있습니다.

 


(윗쪽사진) 모조신문의 1면 모습 (오른쪽사진) 발렌타인데이 기사의 각 문장 앞 글자로 탕쉐를 비난했던 기사를 소개하고 있는 모조신문

 

우리가 방문했을 때 최근에 발행한 신문을 보여주었는데 버마어로 되어 있어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곳 기자의 설명으로 한 기사를 보았습니다(사진참조). 버마 내부의 한 신문이 발렌타인데이에 대한 기사를 실었는데 그 기사의 각 문장 첫 글자만 모아서 읽으면 독재자 탕쉐를 비난하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사전 검열에는 통과되었으나 그 기사가 신문에 실리고 난 후에 비로소 눈치를 챈 군사정부에 의해 글쓴이는 구속되었습니다. 사진은 모조신문이 이를 옮겨 실은 것입니다.

과거 역사 속에서 민주화운동이나 인권운동의 뒤에는 언제나 언론이 있었습니다. 언론이 혹은 기자들이 자신을 희생하며 진실을 전할 때 비로소 국민이 바로 알고 의로운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이들의 피나는 노력이 하루 빨리 결실을 맺게 되기를 빌어 봅니다.

「빠가야로」
-교육을 생각하며-

나는 중학생시절에 있었던 몇 가지 일들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기억들 중에서 하나를 이야기 하면서 교육에 대한 생각을 함께 나누고 싶다.
2학년 때 한 반이었던 「빠가야로」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에 대한 일이다. 그 친구는 그 별명에 걸맞게(?) 전교생 720명 중에 715등 이내에 들어온 적이 없는 친구였다. 나하고는 짝이었기 때문에, 나는 학교 안에서 그 친구의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3학년이 되면서 우리는 반이 달라졌다.
3학년이 되어 몇 달이 지난 뒤 그 친구가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는 그 길로 그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그는 자기도 공부를 잘하고 싶은데 생각처럼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도 담임선생님은 성적이 나쁘다고 매만 때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친구를 달래서 다시 학교에 나오게 했다. 그리고 그는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던 모양이다. 시간이 흘러 다음 시험을 본 뒤에 그 친구가 자신의 노력 결과에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반에서 꼴찌를 면했다고 했다. 중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700등 이내에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며칠 후부터 그는 다시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내가 다시 그의 집을 찾았을 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성적이 발표된 날, 그는 다시 담임선생님께 걷기가 힘들만큼 죽도록 맞았단다. 성적이 나쁘다고…. 그가 학교에서는 생애 처음으로 맛보았던 그 성취감은 성적순이라는 기준에 의해 무참히 잘려 나갔던 것이다. 나는 끝내 그 친구를 다시 학교에 나오도록 설득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 경험은 30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도 내가 어떤 교육자로 살아야 하는가라고 스스로 물을 때마다 떠올리는 기억이다.
 
(2003년 어느 날, '시민의도시'에 실었던 글을 수정해서 옮겨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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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10년

지난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기 전부터 강남과 영남을 중심으로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구호가 만연했었습니다. 그 구호는 경제대통령을 뽑겠다는 국민의 어리석음을 자극하여 이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요. 즉 경제대통령을 뽑는답시고 뽑아 놓은 대통령이 바로 현 대통령입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볼 때 과연 지난 10년이 잃어버린 10년인지 아니면 우리가 현 대통령을 뽑는 순간, 과거 10년을 잃게 된 것인지 아리송하기만 합니다.

나는 최근 한 친구로부터 지난 30여 년 동안 우리나라의 무역수지 동향을 살펴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국가경제의 흐름을 살펴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일단 경제의 호황여부는 무역수지(=수출액-수입액)가 얼마나 흑자이냐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돈이 많고 금융산업이 크게 발달한 나라들은 무역수지가 적자여도 돈장사로 돈을 벌기도 합니다만 우리나라는 아직 그런 처지가 아니지요.

그림에서 보듯이 지난 71년부터 우리나라의 무역수지를 보면 아직 산업화가 덜되었던 박대통령시절부터 시작하여 줄곧 만성 적자국가였습니다. 그러다가 전대통령 말기부터 노태우대통령 초기까지 잠깐 흑자를 기록했습니다만 금 새 적자에 빠져 김영삼대통령 임기 끝까지 적자국가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물론 김대통령 임기의 끝이 외환위기라는 점은 모두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럼 강남의 부자들과 한나라당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외쳤던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은 어땠을까요? 역시 그림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만, 10년 내내 엄청난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기간에만 온전히 외국에서 돈을 벌어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 대통령이 들어서기가 무섭게 다시 엄청난 적자국가(2008년 7월까지 83.5억 달러 적자)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현 대통령이 경제대통령이라고요?
맞습니다. 다만 국민경제를 위한 경제대통령이 아니라 종부세 무력화와 재산세 인상시도에서 드러났듯이 그들만의 경제대통령이지요.

잃어버린 10년이라고요?
천만에요. 지난 10년 동안 좋았던 과거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현 대통령을 뽑는 순간 우리는 좋았던 지난 10년을 잃어버리고 다시 외환위기의 암흑기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버마 민주의 소리 방송국 (Democratic Voice of Burma, DVB)
2월 10일 낮

버마정치범수감자지원연합 방문 일정이 예정된 시간을 훨씬 넘겨 끝났기 때문에 12시 경이 되어 비로소 두 번째 방문지인 버마 민주의 소리(DVB, Democratic Voice of Burma) 방송국을 찾았습니다. 이곳은 방송 기능이 없었기 때문에 녹음용 PC와 헤드셋 등을 갖춘 간이녹음실로 우리나라의 일반 가정 수준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DVB는 노르웨이와 일본의 지원금으로 세워졌으며, 노르웨이에 본부를 두고 인도, 태국 치앙마이, 그리고 태국 메솟에 거점을 두고 있는 비영리 방송매체입니다. 우리가 방문한 메솟DVB는 전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All Burma Students Democratic Front) 소속인 한 부부가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라디오실과 비디오실을 갖추고 리포터들을 통해 뉴스를 제작하고 있었습니다. 메솟의 리포터들은 주로 메솟지역의 버마 어린이들의 처지, 특별한 이슈가 생겼을 때 그 주제에 관한 인터뷰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메솟이 버마를 탈출하는 사람들이나 태국 체류 노동자들이 태국으로 들어오는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양한 사람들이 일정한 요일마다 방송국에 들려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녹음해 두면 방송용으로 제작한다고 합니다.

제작된 방송은 치앙마이를 거쳐 노르웨이 본부로 전달되며 실제 방송 송출은 노르웨이 본부에서 이루어집니다. 메솟DVB는 주로 메솟지역의 버마인들에 관한 소식을 다루지만 치앙마이DVB는 메솟과 달리 버마 내부 소식을 전합니다. 버마 내부 소식은 리포터들이 전화로 버마 내부의 정보 제공자들과 통화하여 얻는답니다.

방송은 아침저녁 각 1시간씩인데, 스포츠뉴스 10분, 보건뉴스 7분, 정치뉴스 40분, 메솟지역에 새로 도착한 버마 양심수들 인터뷰 3분 정도로 구성됩니다. 이들은 버마인의 약 25% 정도가 DVB를 포함한 여러 민주적 방송을 청취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버마 내부로 방송을 송출하는 버마어 라디오 방송은 모두 같은 입장에서 방송하는 것은 아니지만 몇 개가 더 있습니다. Radio Free Asia, 영국의 BBC, 미국의 대외 선전방송인 Voice of America(VOA) 등이 그것입니다. 특히 중국은 버마 군부를 지지해주고 대신 자원수탈을 위해 국경지대에서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을 자행하는데 비해 미국은 버마의 민주화에 가장 적극적인 지원을 하고 있어, 버마의 민주화 운동가들은 대부분 VOA에 대해 높은 신뢰를 보내며 심지어는 친미적 성향을 보여 70년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과 비슷한 양상을 보입니다.

이들에게 들은 이야기들 중 일부는 현실적으로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조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버마 사람들이 가난하지만 그래도 라디오 정도는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건전지가 없어서 듣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특히 최근 물가가 더욱 가파르게 상승하여 건전지 가격이 너무 많이 올라 라디오를 들을 엄두도 못 낸다고 합니다. 전기도 밤 8시에서 10시까지만 공급될 정도라고 하니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또 라디오를 구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감시자들이 많아서 정치뉴스를 들으면 처벌 받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집 내부에서 비밀리에 청취할 뿐이랍니다. 그렇지만 방송이 있다는 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버마 내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방송이 있다는 것을 알고 듣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궁금한 것을 물었습니다. ‘도대체 그 많은 인구를 어떤 식으로 감시할 수 있는가?’ 그런데 그 대답은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버마인구의 반 가까이가 무직자들인데 이들 중 일부에게 하루 3달러를 주고 이웃 감시를 시킨답니다. 만약 이웃사람이 민주방송을 청취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여 고발하면 건당 1달러를 보너스로 지급받는다는 것이지요. 버마에서는 노동자들이 일당을 받아 차비와 세금을 빼면 실소득이 1달러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런 유혹을 이겨내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직자의 10% 정도는 감시원이란 말도 있습니다. 사실 버마는 엄청난 천연가스를 수출하여 돈을 벌어들이고 있고, 그 돈을 모두 군부가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할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라디오실에서 운영자가 작업 중입니다. 우리나라의 가정에서 컴퓨터를 사용하는 수준의 설비입니다.

DVB는 다음과 같은 사명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Mission Statement 우리의 사명

- 버마 국민들에게 정확하고 편견 없는 뉴스를 제공한다.
- 버마의 다양한 부족, 종교간 이해와 협력을 증진한다.
- 독립적인 여론을 지지하여 사회적, 정치적 토론을 가능하게 한다.
- 버마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와 인권의 이상을 전파한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이들의 비디오방송을 인터넷을 통해 시청할 수 있습니다.

버마어방송: http://www.youtube.com/dvbTelevision ;유튜브의 UCC 방식입니다.
http://www.dvb.no/
;이곳이 노르웨이 본부의 웹사이트입니다.
영어방송:
http://english.dvb.no/

8월 후반부터는 개강준비 때문에 무척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꾸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느 신문사(?)에서 제가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싣고 싶다고...
그래서 블로그 필명 그대로 싣는다면 좋다고 했습니다만, 그 쪽에서는 제 사진과 함께 싣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사실 블로그를 쓸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 걱정이 있습니다.
글 속에 나타난 내 모습과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 사이엔 엄청난 괴리가 있기 때문이지요.
글이란 사실과 제 생각에 위선이라는 양념과 위장이라는 조미료가 첨가되어 탄생한 요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블로그를 벗어나 다른 동네에 소문이 난다면, 그 글로서만 알려지는 게 좋다는 생각입니다.
괜히 글쓴이까지 드러나서 내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들에게 그 매체까지 우습게 되는 일은 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글로만 존재하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내가 만났던 좋은 선생님 이야기
-회현중학교의 이항근 교장선생님께-


나는 최근에 전교조전북지부장을 지냈던 이 선생님께서 군산회현중학교의 공모제 교장에 응모해 선발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으며 나는 오래 전 내가 중학생 때 겪었던 일이 기억 나 이 선생님께 드리는 축하의 인사를 겸해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일은 내게 교육자의 가치관을 결정해준 중학생 시절의 두 경험 중 하나입니다.

내가 아마 중학교 1학년쯤 되었을 때, 전북에서 전국 중고등학교 교장대회(?)라는 것이 열렸고 그 중 한 행사가 우리학교에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학생회 대의원이었던 나는 그 행사에 동원되었고, 맡았던 일이란 게, 교장선생님들께서 행사장에 들락거릴 때마다 신발을 신고 벗는 것이 불편하다고, 발에 검정 비닐봉투를 씌워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여고(정확한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기독교계통의 외국어이름이었습니다)의 여자교장선생님 한분이 내 손에서 봉투를 빼앗아 직접 씌우셨습니다. 그리고는 “장차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너에게 이런 일을 시킬 수는 없지”라고 하시며 미소를 지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경험은 아주 오랫동안 뇌리 속에 남아,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대학에 온 후로는 내가 어떤 교수가 되어야 하는지를 내게 속삭여 주는 가르침의 목소리였습니다. 소설책 읽기에 푹 빠져 늘 도서관에서 온갖 소설책 빌려 읽는 것 외엔 관심이 없었던 평범한 중학생에게 그 분의 한 마디는 두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남겨주셨습니다.

첫째, 학생을 가능성의 크기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내가 어떤 학생인지, 성적이라든가, 장단점, 능력, 그리고 성격 등 아무것도 알지 못하셨지만, 날 마치 대통령이 될 사람인 것처럼 대우해 주셨습니다. 내가 꼭 대통령이 될 거란 의미에서 그렇게 대우하신 게 아닙니다. 내 안의 무한한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 가능성의 크기로 나를 대우해 주셨던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어쩌면 나보다 공부를 못하고, 머리도 나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능성의 크기로 볼 때, 이미 남은 인생의 대부분을 결정된 데로 살아가고 있는 나보다 백배, 천배 뛰어난 기회의 사람들입니다.

둘째, 그런 대우가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 한마디는 마냥 개구쟁이로 살아가던 내게 인생의 목표라는 것을 생각해볼 단서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내가 공상에 빠질 때마다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드셨습니다. 당시의 공상은 막연히 어떤 직업, 혹은 어떤 화려한 상황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유치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좀 더 성장하여 철이 들면서 이런 공상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었고, 그것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던 것입니다.

이 글은 사실 주제넘게 선생님께 드리는 글이라기보다는 오랜만에 나 스스로 현재의 내 좌표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보고 싶어 쓴 글이기도 합니다. 축하합니다. 그리고 부디 오랫동안 학생들의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버마 정치범수감자지원연합
2월 9일 밤 그리고 2월 10일 오전

9일 밤 9시 40분경이 되어서 비로소 우리 일행은 긴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DPNS사무실 2층의 게스트하우스로 올라갔습니다. 비록 푸른소와 나는 남자이기 때문에 마루에서 잠을 청했지만 매우 청결해서 방콕의 호텔보다 오히려 심리적 안정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렌지와 초희양은 방에서 묵을 수 있었습니다. 손님맞이를 위해 특별히 청소를 했겠지만, 사무실 한쪽 벽에 붙은 다음 표어는 이들의 정신상태를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영어로 쓰인 그 말은 “이곳의 청결상태는 당신의 정신상태를 보여준다.”였습니다. 그러나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자지 못하는 나는 그 긴 하루를 마치고도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게다가 아직 이곳 음식에 적응을 못 한 듯 여러 차례 화장실을 들락거리기까지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현간 앞 간이 소파에 앉아 아침 햇살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린이 나와서 몇 가지 자료를 읽어보라며 던져줍니다. 반갑게 읽으려고 자료를 집어 들었으나 순간 멍해집니다. 피로가 쌓인 탓인지 노안이 갑자기 심해져 글을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몇 년 전부터 책을 읽을 때는 평소에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야 했지만, 이날 아침엔 안경을 벗어도 글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깜짝 놀라며 순간 지나온 인생을 후회하게 됩니다. 좀 더 젊어서 건강한 몸을 가졌을 때 이런 일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오늘의 첫 방문지는 AAPP(Assistance Association for Political Prisoners, 버마정치범수감자지원연합)입니다. AAPP는 글자 그대로 버마 내의 감옥에 수감된 민주화운동가들(국제사회는 이들을 정치범이라는 포괄적 용어로 부릅니다)을 돕는 단체입니다. 이들은 1996년 12월의 학생운동 이후 태국-버마 국경지대에 모인 활동가들 중 수감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모여 만든 조직에 외국에 망명 중이던 다른 수감자들의 합류로 확대되어 2000년에 정식 발족한 단체입니다.

이곳에서 우리 일행을 맞아 안내와 설명을 해준 이는 한눈에도 오랜 수감 생활로 건강이 엉망이 되어 버린 것을 알아 볼 수 있는, 청년시기가 넘어가고 있는 이였습니다. 그는 88년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후 1991년 체포되어 변호인조차 없는 약식재판으로 12년 형을 선고받았다고 했습니다. 수감 중 7년으로 감형되었으나 1999년 다시 7년 형이 추가되어 2005년 출소 하였습니다. 7년형이 추가된 것은 유엔고등판무관이 버마를 방문하였을 때 감옥상황을 고발하는 문서가 전달되었는데 여기에 서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일 덕분에 버마의 감옥 안에서 비록 검열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독서와 편지쓰기가 허용되었다고 합니다. 그 전에는 감방을 벗어 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하루 한번 20분 샤워시간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가장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인 인세인(INSEIN) 감옥에도 7년 동안 있었답니다.

 

위사진: 안내자와 함께 사망자 사진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
아래사진: 윗변의 두 모서리에 있는 구멍에는 두 발을, 아래 모서리에 있는 구멍에는 두 팔을 끼운 채 24시간을 서 있게 하는 고문도구

AAPP는 발족하면서 바로 감옥에 수감된 정치범들을 사진이나 이력과 함께 목록으로 작성했습니다. 이들이 주로 하는 일은 1. 정치범들에 대한 정보나 감옥내부의 실태에 대한 정보 수집, 2. 정치범들을 돕는 일 등을 합니다. 그 결과 1400명 이상의 수감 정치범들, 감옥에서 숨진 80명 이상의 정치범들, 감옥에 대한 정보들을 축적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접촉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감옥 안에서 응급상황에 있는 정치범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 석방된 정치범들에게 의료지원을 하고 다양한 언론 매체에 버마의 정치범관련 실정을 알리는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마련해 놓은 전시장을 둘러보았습니다. 전시장에는 그 동안 여러 가지 형태로 희생된 사람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모형 감옥과 감옥에서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징벌도구, 징벌 모습을 그린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런 활동을 통해 수감된 정치범들의 인권과 정의에 대한 정보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AAPP가 하는 일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AAPP가 하는 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1. 수감된 정치범의 가족들이 사랑하는 가족을 방문하도록 돕는 일

2. 수감자들에게 음식이나 의약품을 공급하는 일

3. 감옥 안의 실태 감시

4. 체포된 사람들을 공개하고 수감된 운동가들이나 예술인들의 상황을 널리 알림

5. 국제기구들과 연대하여 수감자들의 변론활동. 국제앰네스티, 국제적십자사, Human Rights Watch 등에 정보제공

6. 정치범으로 수감생활을 하면서 고문과 격리로 인해 생긴 정신적, 신체적 상처 치유

1. AAPP의 일을 돕기 위한 기부

2. 자신의 나라에서 버마군부와 거래하는 기업들에 버마와 관계를 끊도록 압력행사하기

3. 버마 관광이나 버마 상품 보이콧 하기

4.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버마의 고문희생자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국제앰네스티나 AAPP를 돕도록 요청하기

5. 모든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하기

6. 임의 체포와 모든 형태의 고문을 비난하기

더 자세한 정보나 이들과의 접촉을 원하시는 분은 다음 정보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주소: AAPP, P.O. Box 93, Mae Sot, Tak Province 63110 THAILAND
e-mail: aappb@cscoms.com
website: http://www.aappb.org

 

성경의 사무엘서라는 책을 보면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최근에 그 책을 읽다가 대통령의 가장 큰 책임은 국민을 평안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역사 초기부터 계속 블레셋이라는 부족과 전쟁을 해왔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더러 알고 있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바로 다윗이 이스라엘 사람이고 골리앗이 블레셋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울왕이 이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였습니다. 이 시절만 해도 블레셋은 철기문명을 가지고 있었고,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해서 이스라엘에는 칼을 가진 사람이 사울왕과 그 아들 요나단뿐이었습니다. 당연히 전쟁에 크게 불리했지요.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굴 같은 곳에 숨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요나단이 혼자서 적진에 들어가 적진을 흔들어 놓습니다. 덕분에 그 날에는 다시 전쟁을 해볼 만한 상황이 되고 전쟁에 나선 사울왕은 전쟁에 승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전쟁에 나설 때 그는 백성들에게 저녁, 즉 사울이 블레셋사람들에게 복수를 마칠 때까지 어떤 음식이라도 먹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전쟁을 하면서 아무 음식을 먹지 못하여 저녁이 되자 너무 피곤하였습니다.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느냐 하면 요나단이 숲속에서 꿀을 발견하고 지팡이에 꿀을 찍어 먹은 것만으로도 눈이 번쩍 떠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피곤한 상황인데도 왕의 저주 때문에 백성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요나단은 만약 백성들이 음식을 먹으면서 전쟁을 했더라면 더 큰 승리를 했을 거라고 말하면서 가축들을 잡아먹게 합니다. 그러나 너무 배고픈 백성들은 그만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가 내렸던, '가축을 피 있는 채로 먹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게 됩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만약 왕이 백성의 피곤함을 헤아려 전쟁을 하는 도중에 적절히 음식을 먹게 했더라면 첫째, 전쟁에서 더 큰 승리를 얻었을 것이며, 둘째, 신의 명령을 어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백성들은 덜 피곤한 상태에서 더 기쁜 마음으로 전쟁을 했겠지요.

이런 결과의 차이는 단 하나, 왕이 백성을 평안하게 해주기 위해 통치를 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감정과 목표를 위해 협박하는 통치를 하느냐 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 출발점의 차이가 대통령의 통치행위 전반에 영향을 미쳐서 국민을 평안하게 하기도 하고 피곤하게 하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쇠고기 파동에서 시작하여 언론장악을 위해 억지를 쓰는 등 역사를 전두환 시절로 되돌리려는 이명박 대통령을 보면서 평생 다윗에게 주눅 들어 살면서 비참한 왕으로 살아갔던 사울왕의 모습이 비쳐 보여 안타깝습니다. (2008.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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