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부의 새로운 사기극 발표
2월 9일 밤 그리고 2월 13일 오후

우리 일행은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DPNS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을 들은 후 8시 30분 쯤 DPNS사무실 앞에 있는 한 태국식당을 찾았습니다. 아직 저녁식사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여러 가지 태국 음식을 시켜놓고 나누어 먹기 시작합니다. 태국 음식이 원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방콕에서도 그랬는데, 보통 중국음식처럼 요리를 몇 가지 시켜놓고 나누어 먹다가 마지막에 밥으로 배를 채우는 방식이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한사람, 우리를 태우고 왔던 차를 운전했던 젊은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물으니 일이 있어 먼저 갔다고 대답할 뿐입니다.

그런데 린이 누군가의 전화를 받더니 매우 심각한 표정이 됩니다. 그리고는 아무리 식사를 하라고 재촉해도 식사 생각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하며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배도 고팠고 태국음식이 입에 맞는 편이어서 맛있게 식사를 했습니다. 우리가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렸던 린은 중요한 뉴스가 있다며 말을 꺼냅니다. 순간 내 머리 속엔 불길한 생각이 피어오릅니다. 사실 사무실에서 DPNS에 대해 설명을 들을 때 1995년 이곳 메솟의 난민촌까지 버마 군대가 밀어닥쳐 난민들을 무차별 학살했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하는 염려를 하면서 린의 입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린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염려했던 나를 비웃듯이 전혀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린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지만 엉뚱한 걱정을 하고 있었던 내게는 다행스럽게도 가벼운 일(?)이었습니다.

군사정부인 국가평화발전위원회(State Peace and Development Council, SPDC)가 저녁 8:00에 중요한 뉴스를 발표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2008년 5월 18일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국민에게 직접 개헌에 대한 찬반의견을 묻겠다는 것입니다. SPDC는 이 국민투표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면 2008-2009년 중에 개헌작업을 마무리 하고 2010년에 총선거를 치르겠다고 합니다.

새 헌법이 담게 될 주요 내용은,
1) 국회의원의 25%를 SPDC가 직접 임명한다.
2) 국가 비상사태 발생 시에는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군부에 넘겨준다.
3) 헌법의 개정은 군부의 동의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4) 외국인과 결혼했거나 자녀가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은 선출직 공직자 선거에 출마할 수 없다.
등입니다.

이 항목들 중에서 4번째는 야당 지도자이자 유력한 대선 후보인 아웅산 수치 여사의 정치 활동을 봉쇄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치 여사의 남편은 영국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새 헌법안은 민정이양이라기 보다는 군정을 영구화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린에게 슬며시 의견을 묻습니다.

Q: 이렇게라도 투표를 진행할 수 있다면 민주화의 첫 걸음을 시작할 수 있는 것 아닌가?
A: 만약 SPDC가 진정으로 민정이양의 뜻이 있다면 1990년 투표결과에 승복하고 당장 민정이양을 해야 한다.

Q: 1990년에 이미 국민투표에 승리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이번에도 승리할 수 있지 않을까?
A: 천만에, SPDC는 절대로 민주적인 투표를 할 리가 없다. 이런 투표를 하겠다는 것은 이미 지난 번 패배의 경험에 기초해서 불법선거 준비를 마쳤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Q: 무엇이 걱정인가? 유엔 감시 하에 자유 총선거를 추진하면 될 것 아닌가?

사실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은 13일 방콕에 나와서 방문했던 Altesian-Burma의 간사로부터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감바리 유엔특사가 아세안 국가들을 공식 초청해 버마에 대한 아세안의 브리핑을 요청했으나, 아세안 국가의 하나인 버마의 반대로 아세안이 거부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 감바리 유엔 인권특사가 지난해 버마를 방문해서 성과없이 끝났고 지난 1월부터 버마군사정부의 허락 하에 버마를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버마 정부가 이유 없이 이미 허락한 방문 일정을 계속 미루고 있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유엔은 버마에서 전혀 힘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상은 전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감바리 특사가 계속해서 유엔감시하의 국민투표를 요구했지만 군사정부는 끝내 거절했습니다. 심지어는 사이클론 나르기스의 엄청난 피해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투표에 참석할 수 없는 가운데 군부는 5월 10, 24일 강제로 투표를 실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또 한 차례 군사정부의 사기극은 자연재해조차 혀를 내두르게 하며 진행된 것입니다.

사이클론 피해로 시체가 즐비한데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아세안은 듣지도 않는 독재자 탄웨에게 느긋하게 설교 중이라는 만평 -버마난민들의 저항신문 이라와디에서

오늘(7월 3일 오전 11시) 전북지역 대학교수들이 촛불집회로 시작된 이명박 정부가 안고 있는 여러 정책적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적절한 대응책을 강구하기 위한 모임을 결성하고 첫 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성명서를 옮겨 적습니다.


쇠고기 재협상 및 민의의 수용을 촉구한다

쇠고기 협상 문제로 촉발된 국민들의 대정부 저항이 다수 시민들의 희생과 더불어 국가적인 소모전의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이에 우리 전북지역 교수들은 교수사회 고유의 전문성과 절제된 참여 의식에 바탕한 한시적인 연대체로서 ‘지역교수대책회의’를 결성하였으며, 앞으로 도내 교수들의 뜻과 지혜를 모아 이번 사태의 조기 수습을 위한 미래지향적인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돌이켜보면 현 정부는 출범 이전에 이미 ‘잃어버린 10년’을 공공연하게 역설하는가 하면 출범 직후에는 심지어 임기가 보장된 공공기관장들에 대해서마저 사퇴를 강제함으로써, 정부 스스로 국가의 정체성과 국가정책의 연속성을 현저하게 훼손하였다. 그런 가운데 인사, 외교, 교육, 언론, 의료, 복지, 종교 등 여러 부문에 있어 상식 밖의 오만과 독선과 편향성을 드러냈고, 특히 초․중등교육에 있어서는 마치 정부 스스로 청소년들의 창의성을 말살하고 숨통을 조이려는 듯한 기형적인 교육정책들을 쏟아냈다.

이렇게 볼 때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고, 문제의 쇠고기 협상이 절차상의 졸속과 외교상의 굴욕으로 얼룩지게 된 것도 위와 같은 오만과 독선과 편향성에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촛불시위로 대변되는 근래의 범국민적 저항은, 그것이 쇠고기 협상을 계기로 촉발되고 가시화되었을 뿐, 현 정부의 기본 노선과 주요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으로 이해된다. 이와 더불어 대다수 국민들에게 현 정부에 대한 총체적인 불신감과 대통령에 대한 심각한 수준의 부정적인 정서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인식 아래 우리는 우선 온 국민에게 이른바 ‘진보’와 ‘보수’ 또는 ‘우파’와 ‘좌파’라는 막연한 대립을 넘어서서 상생과 평화의 공동체 의식을 공유하고 또 실천할 것을 온 국민에게 간곡히 호소한다. 그리고 현 정부에게 촛불시위로 드러난 민의를 왜곡하거나 억압할 것이 아니라 대폭적으로 수용하는 가운데 그에 상응하는 정책 전환을 조기에 실행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1 . 졸속으로 이루어진 굴욕적인 대미 쇠고기 협상을 원점에서 재개하라.

1. 지난 정부에서 임명된 공공기관장들의 법률상의 임기를 보장하라.

1. 각종 언론을 통제, 탄압, 장악하려는 일체의 기도를 즉각 중지하라.

1. 초․중등교육의 제도적인 공공성과 내용상의 창의성을 제고하라.

1. 모든 정책의 수립 및 집행에 있어 지역, 계층, 종교 편향성을 배제하라.

1. 촛불 민의의 조기 대폭 수용이 국민과 국가를 위한 선택임을 명심하라.

 

2008년 7월 3일

쇠고기재협상 및 민의수용을 촉구하는 전북지역대학교수 일동

며칠 전 중국에 다녀올 일이 있어 간 김에 백두산에 올랐었다.

천지에 오르기 위해 아침 일찍, 6시도 되기 전에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하는데 옆 테이블에 한국에서 오신 노인 부부가 식사를 한다. 어제 백두산에 올랐는데 비가 와서 너무 추웠다며 장갑을 준비해 가라고 충고한다. 에고 무언가 출발이 불안하다. 게다가 천지의 날씨가 좋아 구경할 수 있는 확률이 1/3 ~ 1/4이라고 덧 붙인다.ㅠㅠ

그러나 우리 일행이 그곳에 도착했을 땐 너무 좋은 날씨에 오히려 덥기까지 했다. 그곳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은 이를 천운이라 했다.^^

관광객을 위한 등산로가 두 곳이라는데 나는 서쪽 능선으로 올라가 북한-중국 국경에 섰다. 국경경계비에서 사진을 찍는데 감회가 무량하다. 이곳이 북한 땅이라는 말인가? 물론 금강산에도 다녀왔지만 그곳에선 엄격한 통제를 받았는데 지금 이자리에선 북쪽 사람들은 없고 비록 수십미터에 불과하지만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수있다!!!

들뜬 마음으로 사진을 몇장 찍고 나니 갑자기 회한이 몰려온다. 남북한 양쪽에 두 머저리가 권력을 잡고 있어 내가 우리 민족의 영산을 오르기 위해 중국에 돈 뿌리고 있지 않은가???

직접 북한을 통해 백두산에 오른다면 나는 이 돈을 북한에 뿌려야 했을 것이고 우리가 북한에 보내는 원조금도 줄일 수있을텐데... 그래야 북한경제도 외국의존적인 형태에서 점차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할 것이고... 남북한에 버티고 선 두 머저리가 이를 막고 있어 결국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떼놈이 번다고, 내가 백두산을 오르는데 돈은 떼놈들이 벌고 있구나...

지난 대선에서 다수의 국민들이 오직 경제살리기라는 환상 하나 때문에 소위 ‘경제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이명박 후보에게 몰표를 주어 당선시켰다. 그러나 국민의 기대와 달리 이 대통령 취임 이후 서민경제는 끝 모르는 바닥으로 추락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추락의 이유로 거론되는 원유가 폭등을 포함한 원자재 가격 급등에 앞서 우리 경제를 망친 것은 전적으로 현 정부 경제팀의 정책 실패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만간 있을 개각에서 반드시 강만수 경제팀이 경질되어야만 한다.

현 정부 들어 초창기의 적정 환율은 대략 1달러당 950원 이하였다. 그러나 강장관은 외환시장 개입을 통해 환율을 1달러당 1,050원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이는 1997년 외환위기를 가져왔던 정책과 같은 데, 수출기업들은 약간의 손해를 보고라도 수출만 하면 환차익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보장해주는 정책이다. 당시에는 이런 보장이 기업들로 하여금 수출을 늘리기 위한 투자를 유도하여 경제 성장률을 높였으나 결국 기업부실의 누적과 외채 증가로 외환위기를 불러왔던 것이다.

2008년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이미 외환위기를 겪었던 기업들은 이런 보장에도 불구하고 투자를 늘리지 않고 환차익만 챙기고 있었다. 금년 1사분기에 철강, 정유업계가 사상 초유의 고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강하게 입증하고 있다. 게다가 이런 높은 환율이 국제 원자재가격 상승과 겹쳐 물가를 폭등시켰고, 서민경제는 높은 물가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소비감소는 내수부진을 심화시켰고, 대부분의 제조업체들에게 원가상승 압박으로 작용하였다. 여기에 세계적인 불경기 조짐은 결국 수출부진을 가져와 현 경제팀의 소망과 달리 우리나라를 다시 경상수지 적자국가로 만들었다.

여기에 놀란 강만수 경제팀은 부랴부랴 환율을 적정 환율로 되돌리려고 정책 변경을 시도했지만 미국이 강한달러 정책을 들고 나오면서 성공하지 못하고 높은 환율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결국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물가상승과 서민경제 파탄은 국제 원자재가격 급등과 미국의 강한 달러 정책에도 이유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현 경제팀의 시대착오적 발상을 정책으로 집행하면서 생긴 일이다. (2008. 6. 24.)

내 연구실 입구 게시판에 오래전에 티벳사태 관련 사진을 게시해 두고 있었습니다. 제목은 Free Tibet이라고 달았지요. 그곳엔 이라크전쟁 관련 사진(Shame on you, U.S.A.)과 미얀마 싸이클론 피해 관련 사진 등을 게시해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 낮에 바쁘게 밖에 나가는 데 한 학생이 서서 무얼 적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돌아와 보니 중국유학생이 아래와 같은 글을 적어 놓았습니다. 그 학생의 한국어가 서툴어 약간 수정했습니다.

"중 한 일 삼국은 경제 고속발전했을 때 언제인가? 아십니까? 바로 독재했을 때이다. 일본은 100년 전에 군인들 독재했을 때 경제 발전이 되었고 한국은 80년대 군인독재했을 때 경제 빨리 발전이 되었다. 중국은 지금 독재하면서 경제 고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왜냐하면 중한일 세 개나라는 뿌리깊게 단단하게 계약한 계급관념이 있다. 중국은 빨리 발전하다가 세계 여러 나라의 질투를 느껴서 여론으로 중국에 공격이다. 중국의 정치를 간섭하지 마세요. 2008년 8월 8일에 중국의 실제로 강한 모습을 세계 여러 나라에게 보여주겠습니다. 여러분 기대하세요."

[저는 주말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중국유학생에게 무얼 가르쳐서 보내야 할까... 그러다가 이렇게 다시 글을 게시했습니다. 이런 글을 쓴 것은 그들이 한국에 와서 그저 전공만 엉터리 수준으로 배워가는 것으로는 배워야 할 것의 반도 못배운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배워가지 못한다면 너무 안타깝지 않습니까? 다만 A4한쪽 분량에 글씨는 크게 써야 했기 때문에 글 속에 약간의 비약이 있습니다.]


여기에 글을 남긴 중국학생에게

나도 중국을 사랑하고 중국이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의 자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학생의 역사인식(歷史認識)에 문제가 있어 간단히 적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면 언제든지 내 연구실에 방문해 주십시오.

1. 한국과 일본의 경제발전이 군사독재시절 때에 이루어졌다는 의견에 대해

일본은 군사독재 때문에 아시아를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켰고 그것 때문에 망했습니다. 경제발전의 결과가 이웃나라를 침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중국과 한국은 모두 그 전쟁의 피해자들입니다. 그 후 일본과 한국이 외견상(外見上)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은 냉전시대 미국이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실시한 경제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며, 한국의 80년대는 세계적으로 원자재가격이 폭락해 자원이 없는 한국의 가공공업이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중국도 군사독재 때문에 경제성장이 되고 있다는 의견에 대해

너무 단순한 논리이지만, 한번 스스로 비교해 보십시오. 마오쩌둥(毛澤東) 시절의 중국과 덩샤오핑(鄧小平) 시절의 중국 중 언제 중국이 더 경제발전을 이룩했습니까? 그리고 어느 시절이 더 자유로운 나라였습니까? 지금 상하이(上海)나 다른 경제특구(經濟特區)와 내륙지방(內陸地方) 중 어느 곳이 더 잘 사는 중국입니까? 그리고 어느 곳이 더 자유롭습니까? 텐안먼(天安門)사태 이전과 이후 언제 더 경제가 빨리 성장했습니까?

3. 중국은, 일본이 아시아를 전쟁터로 만든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강대국이 되기를 바랍니다.

일본이 군사독재시절에 경제발전을 이룩했다면 중국도 경제성장을 이룩한 후엔 과거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아시아를 전쟁터로 만들고 싶습니까? 만약 티벳 사태를 중국의 경제성장을 위해 불가피하게 군사독재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학생의 주장과 달리, 지금 중국은 빨리 발전해서 질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이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중국이 경제발전을 하게 되면 아시아를 티벳같은 전쟁터로 만들지도 모르니까요.

4. 나는 중국이 강대국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중국이 강대국이 되었을 때 아시아가 좀 더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독재는 벌어들인 돈을 소수의 사람들이 독차지 못하게 재분배할 때에나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사회주의(社會主義)의 진정한 정신이지요. 그리고 사람의 생명이 걸린 문제를 말하는 것은 정치간섭이 아니라 인류보편(人類普遍)의 인권발언(人權發言)입니다.

광우병 가능성이 있는 미국산 소고기를 무분별하게 수입하도록 한 한미 간의 소고기 협상 결과를 놓고 국민의 약 80%가 반대하면서 이대통령은 취임한지 2개월 만에 얼리 덕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심각한 권위상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일이, 김영삼정부가 결국 IMF사태로 끝났듯이, 우스갯소리에 그치지 않고 국민들에게 비극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정부여당은 진지하게 반성하고 하루빨리 방향전환에 나서야 합니다.

이 국민적 저항의 직접적인 계기는 소고기 수입에 있습니다만, 사실 이런 징조는 취임 전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장관임명 때부터 강부자, 고소영이라는 비난을 받더니 이런 일은 보좌관임명 때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대운하를 추진하겠다고 했다가 반대가 심하면 이리 저리 말만 바꾸는 과정을 지켜보면 문제가 부각되어 소란스러워지면 아닌 것처럼 꼬리를 내리다가 슬그머니 말만 바꾸어 다시 밥상에 올려 놓는 일을 목격합니다. 이런 태도가 국민을 철저히 우롱하는 것으로 비치면서 극한 저항이 시작될 가능성을 품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어떤 문제가 있어도 한번 한다고 한 것은 한다는 CEO식 국정운영은 결국 소고기 수입파동으로 극적인 신고식을 시작했습니다. 몇몇 언론사의 보도를 통해 드러났습니다만 광우병 위험 소고기는 물론이고 광우병 위험물질까지도 무제한으로 수입을 허용할 뿐 아니라 검역주권은 물론 위험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처리권한까지도 모두 미국에 위임한 것이나 다름없는 협정의 토대가 이미 취임 전에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그 내용과 실익이 확인되지 않은 한미FTA를 위해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건강권을 팔아 넘겼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분노한 국민들이 특히 선택권을 완전히 박탈당한 10대 청소년들이 촛불시위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나는 이 과정을 보면서 지난 대선 때 가까운 친지들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나 전율하였습니다. ‘이후보가 당선되면 6개월 내에 레임 덕이 올 가능성이 매우 크다. 문제는 이것이 내가 반대하는 후보가 잘못되는 것이니 기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그런 대통령이 5년 임기를 채우는 동안 결국 우리나라는 다시 한 번 결딴나, 김영삼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외환위기에 준하는 심각한 위기로 끝나게 될까봐 걱정스럽다.’는 것이었습니다.

부탁입니다. 정부여당은 지금이라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정책의 방향을 전환하십시오. 국가를 두 번씩이나 위기에 빠뜨린 정당이라는 오명을 피하시기 바랍니다. 소수의 이해집단이 만들어낸 왜곡된 보고서만 외우지 말고 전체 그림을 꼼꼼하게 살펴서 정책을 수립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파동에서 그리고 대운하보고서에서 수도 없이 확인되었듯이 보고서는 돈 주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데로 만들어집니다.

얼리 덕(early duck): 이 대통령이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했기 때문에 이를 의미하는 얼리 버드와 권력자의 임기 말에 나타나는 권력누수 현상을 의미하는 레임 덕의 합성어로 일찍부터 레임 덕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의 신조어.

어느분이 무한도전과 운동을 비교하며 한탄하신 글을 읽었습니다. 무한도전이라니... 하고 약간 의아해하며 읽다가 마침 오늘 낮에 한 동료교수와 나눈 이야기가 생각나 몇자 적습니다.

무한도전의 모습은 일단 바른 이해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세상이 변해서 돈이 시키면 무슨 짓이든 하는 세상에서 그들의 모습은 전혀 존경스러울게 없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제가 우연히 한 유선방송에서 보고 기가 막혀 그날부로 유선방송 끊고 난시청 공중파만 보게 만든 프로가 있습니다. 우연히 채널돌리다 본 프로여서 제목도 모르지만 내용은 남자(이들은 무한도전 등 유명연애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도 많이 포함된 제법 유명한 연애인들입니다)들이 신체에 센서를 달고 있고 한국과 일본의 20대 요염한 아가씨들이 포르노마스코트복장을 하고 나와 온갖 애교로 남자를 유혹합니다. 남자에게 부착한 센서가 남자의 흥분을 감지하면 그 남자가 패하는 게임인것같았습니다. 돈만 주면 무슨짓이든 다하는 것이지요.

요즘 대학생들은 아무 생각이 없다는 의견도 있군요. 사실 오늘 동료교수와 나눈 이야기도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촛불집회에 초중고생은 있는데 대학생은 별로 없다며 한심하다는...
저는 이말에 제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희망이 있습니다라고 강하게 이야기 했지요.
90년대에 소위 X세대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과거 기준으로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애들이 나타났다는 의미였지요. 세대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이 변하면 사회구조에 따라 전혀 다른 인종들이 나타납니다. 민간정부가 선출된 이후에 나타난 X세대는 반정부 투쟁이 필요없으며 오직 한 아이만을 낳았던 시대의 산물로 오직 자기만을 아는 이기적인 세대들입니다. 도대체 왜 우리가 시대적 소명을 가져야 하고 사명감을 갖고 희생해야 하는가? 그들에겐 이해할 수없는 일이었지요.

마찬가지로 지금 대학생들은 지금 이 시대의 주류인 신자유주의 세력이 요구하는 무한경쟁에 매몰되어 정신을 못차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자기 공부만하고 있습니다. 오직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는줄 아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희망은 그 다음 세대 즉 지금의 초중학생들에게 있습니다. 이 시대가 아이들을 쥐어짜면 짤수록 그대로 당하면 자기들에겐 희망이 없어지는 대다수의 학생들은 서서히 이대로 살면 안된다고 깨닫게 되지요. 자아실현이나 자기성취가 무식한 학습경쟁이 아니라 자기가 만족할만한 일에서 찾을 수 있다고 깨닫고 그길로 나서게 될 것입니다. 그게 오늘 나타나는 촛불집회의 양상이지요. 그리고 국제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일부 청년들이 선구자들입니다. 그들에게서 이미 그런 전조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오직 사명감과 시대적 소명으로 시작했던 우리 세대의 운동가들에 눈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미 그렇게 혁명은 시작된 것입니다.
이 곳에 슬며시 들어와 내글에 비밀댓글을 달아 놓았습니다.
피디가 되는게 꿈이라고 일찍부터 방향 잡아 놓고 지금 대학에서 그걸 전공하고 있는 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써 놓은 글이 오늘 괜히 날 우울 모드에 빠지게 합니다.

광우병소 수입허용 파문 때문이지요.
거기에 언론의 보도 태도가 맞물려 있고요.
언론이 원래 그렇다고 익히 듣고 , 읽고, 그래서 알고 있지만...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한탄합니다.

사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보다 세상 좋아졌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지만
그 아이(아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겐
이건 헛소리일 뿐입니다.
과거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가 전부입이다.
현재가 내게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여전히 세상은 좋아진게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은 다시 젊은이들에 의해 진보하는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6시 나는 경기전 정문으로 급히 나갔습니다.
학교에서 일을 마치기 무섭게 달려 나간 것이지요.
몇몇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몇 해전 중앙일보 홍회장이 탈세혐의로 구속될 때 중앙일보의 기자중 일부가 검찰청사 앞에 도열해서 외쳤던 소리.
"회장님 힘내세요"
이소리에 분노해 '기자가 쓸건 안쓰고... 그러고도 기자냐?' 대자보를 붙이고 사표를 내 던졌던
중앙일보의 오동명기자라는 분이 있지요.

전주에 오신다고. 그래서 경기전 근처 한옥마을에 있는 언젠가 시민행동 간사들 오셨을 때 저녁 식사했던 곳에 가서 밀린 회포 풀고 식사에 겸해서 청주 한잔 했더랬습니다.
지독할 정도로 신나게 오랜만에 이빨 깠습니다.
대한민국 힘쓰는 넘들 죄다 씹어 넘겼습니다. ㅋㅋ

사실 그자리엔 강준만교수도 함께 하려고 했습니다만 요즘 임플란트 하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는 중이라 해서 둘이서만 만났지요.
나는 요즘 눈이 안보여 고생한다고 하면서 강교수는 치아때문에 고생이시라고 했더니,
그새 오기자가 못참고 한마디 날립니다.
거참, 한사람은 맨날 남을 씹고 사니까 치아가 문제고, 한사람은 맨날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며 사니까 눈이 문제라고.
미안했던지 살짝 한마디 덧 붙입니다.
"그렇게 살아도 건강은 잃지않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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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이 겨우 지켜온 나라, 대통령이 나서서 망쳐서야

-곡물파동의 진실-

  요즘 곡물가격이 폭등하면서 전 세계에 걸쳐 1억 명 정도의 사람들이 식량부족으로 신음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농민들의 투쟁으로 쌀시장 개방이 늦춰져 이런 위기를 비켜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부는 국민을 죽이려 들었으나 농민들이 살린 것입니다.

  아시아, 아프리카에선 식량폭동이 일반화되었으며, 유럽도 식량걱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이집트처럼 세계 최대 쌀 생산국은 물론이고, 원유가 풍부해 부자나라인 아랍에미리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필리핀은 이미 군대를 투입하였으며, 스리랑카도 농업입국 캠페인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유엔이나 국제기구들은 식량위기가 미국의 금융위기나 유가폭등을 무색하게 만드는 지구촌 안보의 최대 위협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지구촌 안보의 최대 위협, 곡물파동

  보리, 밀, 옥수수, 콩 등은 지난 1년 동안 50%-100% 정도 올랐다고 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쌀입니다. 주로 아시아 국가들이 주식으로 사용하는 쌀은 1년 전보다는 2배, 2001년보다는 무려 5배나 올랐습니다. 이런 상황에 주요 쌀 수출국인 중국, 인도, 베트남 등이 쌀 수출을 통제한다고 하자 쌀값은 더욱 가파르게 오르고 있습니다. 일부 전문가는 쌀값이 앞으로도 2년 동안은 더 오를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곡물가격이 폭등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중국, 인도와 같은 신흥경제대국들의 쌀 소비가 늘어난 탓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기상이변으로 수확량이 줄어든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셋째는 바이오연료를 만들기 위해 옥수수를 전용하고 있기 때문에 식량이 줄어든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부분적인 이유는 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이렇게 급등할 이유는 아닙니다.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농협경제연구소는 최근 한 보고서(‘국제 곡물 수급요인 분석과 향후 가격전망’)에서 흥미로운 결과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옥수수가격을 예로 1975년부터 2007년까지의 데이터를 분석하여 현재 적정가격이 1부셀(27.2kg)당 4.21달러임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실제 가격은 지난 3월 5.59달러였으며, 그 후로도 계속 폭등행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바로 현 가격의 25% 정도는 투기자본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투기자본이 바로 폭등사태의 주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가격이 오르는 이유는 곡물별로 조금씩 다릅니다. 우선 옥수수의 경우에는 식량과 에너지 사이의 갈등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에너지 자립도 향상을 위해 옥수수에서 에탄올을 추출하여 휘발유 대신 사용하겠다는 이른바 바이오연료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옥수수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습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일찍부터 이런 움직임이 식량난을 부추길 것이며, 식량을 자동차연료로 사용한다고 비난해왔습니다.

  밀 가격이 폭등하고 있는 것은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세계 최대 쌀 생산국가 중 하나인 이집트의 폭동이나 비옥한 농토를 가진 스리랑카가 곤경에 빠진 이유가 바로 밀 때문인데, 이 상황은 스리랑카의 라자팍세 대통령의 말 속에 잘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매우 비옥한 토지를 갖고 있는데도, 수입밀가루가 처음에는 무료로 나중에는 외상으로 제공되는 과정에서 밀에 중독돼왔다.” 결국 거대 곡물기업들과 결탁한 몇몇 국가들이 원조를 통해 이런 나라들의 식생활습관을 바꾸어 버렸고, 어리석은 그 나라들은 밀가루 빵에 의존하게 되어 이제 밀가루 값이 오르자 폭동이 벌어진 것입니다.

  쌀 가격이 오르는 것은 지구온난화와 깊은 관계를 갖습니다.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은 여러 가지 형태로 농사에 영향을 주는데,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쌀의 주 생산지가 삼각주 저지대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베트남의 메콩강 삼각주와 같은 곳은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면 곧 물에 잠기게 됩니다. 여기에 중국, 인도 등의 소비량 증가도 한몫 거들었습니다.

곡물별로 폭등의 배경이 조금씩 달라

이렇게 곡물가격이 상승할만한 이유가 조금씩 다르지만 거기에는 공통된 숨은 요인이 있습니다. 바로 전 세계 곡물 공급의 70% 정도를 몇몇 거대 곡물기업이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있어 가격 조정은 정말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투기자본이 조금만 가세해도 금방 통제불능의 상황에 빠져버립니다. 이들 두 집단은 모든 것을 오직 돈벌이 수단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에 기근으로 한해 1억 명의 목숨이 위협받는 현실조차 돈벌이의 좋은 기회로 인식할 뿐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는 이런 현실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으며 여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숨겨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곡물을 수입에 의존하여 매우 낮은 식량자급률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다행히 그동안 정부가 농산물시장 개방을 추진할 때마다 농민들이 격렬한 반대로 주식인 쌀시장 개방만은 막아왔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주식은 아직 이 세계를 조종하려는 두 집단의 마수에서 비켜나 있습니다.

정부가 위협하는 국민의 생존권을 농민이 보호하는 아이러니


그러나 정부는 틈만 나면 쌀시장 개방을 추진하여 왔고, 결국 조금씩 열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은 쌀시장 전면개방에 대비한다는 명분 아래 쌀농사 직불금 규제강화와 목표가격 인하로 농업의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쌀 재배면적은 매년 2~3%씩 감소하여 지난 90년 이후 사라진 논면적이 29만4,000㏊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부가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곡물시장 개방을 주장하는 것은 사실은 소수의 국제적인 거대 곡물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우리 국민의 생존권을 넘겨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미 우리는 쌀을 제외한 대부분의 곡물을 외국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데, 아무 생각 없는 이 대통령은 미국에 가더니 쇠고기 시장을 전면 개방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두 집단의 이익에 충실한 결정입니다. 옥수수 가격을 통해 사료 값을 올려서 한우 사육농가의 채산성 나빠지게 한 후 쇠고기 시장을 넘겨받습니다. 한우 육성산업이 완전 붕괴되면 다시 쇠고기 가격을 올립니다. 스리랑카 대통령의 한탄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웃는 이대통령

  이들의 다음 시나리오는 무엇일까요? 최근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곡물파동을 빙자해서 유럽과 일본, 한국 등에 유전자조작 작물을 허용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신문은 전통적으로 투기자본의 옹호자 역할을 해온 신문입니다. 거대 곡물기업들과 유전자조작 종묘회사들, 그리고 여기에 가세한 투기자본의 이익을 위해 어떤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지 조금 보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를 확인이라도 해주듯 지난 2월에는 우리나라의 식료품 대기업들이 공동으로 유전자조작 옥수수를 수입하여 사용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비옥한 농토를 충분히 갖고 있으면서도 뒤늦게 농업을 육성하겠다고 발버둥치는 필리핀이나 스리랑카처럼 되기 전에 쌀시장을 개방하겠다는 한미FTA 등 자유무역협정을 수정해야만 하는 때입니다. 그런데도 부시에게 쇠고기시장을 전면 개방해 주었으니 이제 한미FTA를 빨리 승인하자고 말하는 이 대통령을 보니 참으로 미래가 암담합니다.

새로운 사회를 위한 민주당(DPNS)

2월 9일 저녁

우리를 맞아준 것은 한국에서 이미 접촉해왔던 버마의 새로운 사회를 위한 민주당이라는 의미의 DPNS(democratic party for a new society)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한 직후 양초희라는 한국 여대생이 도착했습니다. 양초희씨 역시 한국에서부터 접촉해왔던 전남대 3학년 여학생으로 518기념재단에서 실시하는 국제인턴쉽 프로그램에 따라 Forum Asia라는 국제단체에 인턴으로 방콕에 왔다고 합니다. 이곳에서의 일이 주로 문서를 통한 운동인데, 여기에 답답함을 느꼈던 초희양은 좀더 필드에서 직접 뛰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여 다시 치앙마이에 있는 ERI(erath right international)이라는 단체에 파견되어 활동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ERI에서 하는 일은 한국의 대우인터내셔날이 버마 안에서 저지르고 있는 만행에 대한 국제 연대운동이었습니다. 그녀의 인턴 기간은 2008년 4월까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잠시 인사를 나눈 뒤 본격적으로 DPNS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종일 자동차 여행을 한 후여서 조금 피곤하기는 했지만, 2000년경에 미국을 여행할 땐 하루에 13시간 이상을 직접 운전하고 돌아다닌 적도 있기 때문에 아직은 체력이 남아 있습니다.

DPNS 홈페이지의 로고(http://www.dpns.org/)

DPNS는 1988년 소위 8888운동 당시에 대학생들이었던 학생운동 멤버들이 구축한 정당으로 전국에 걸쳐서 다양한 대학생들과 일부 지도자들이 참여한 정당이랍니다. 이들은 1988년의 시위로 달성하지 못한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해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정당을 결성하였는데, 당시에는 아웅 산 수지 여사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 (NLD)에 이어 전국적으로 25만 명의 당원과 120여 개의 지부를 거느린 대규모 정당이었습니다. 특히 대학생들과 청년층의 지지가 절대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1990년 5월 27일의 총선거에서 DPNS는 대중적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NLD의 승리를 위해 NLD에 대한 지지운동과 지원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표를 분산시켜 군사정부를 돕는 결과가 될까봐 아예 선거를 포기하고 NLD를 지원했던 것이지요. 이들의 행동이야말로 학생운동다운 발상 아닐까요?

결국 1990년 5월의 총선에서 전체 485의석 중 400여석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둔 후 DPNS는 군사정부에게 NLD로 정권이양을 요구하였고, 이에 군사정부는 DPNS를 타겟으로 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섭니다. 이에 따라 핵심 당원 1500여명이 구속수감되고 지도자들은 가택연금되었습니다. 또 선고기간도 대부분 장기간이었고 강제노역이 포함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약 백 명이 감옥에 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버마 내에서 민주화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DPNS 중앙위원회는 군부에 대한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안전한 지역에 본부를 건설하고자 1991년 태국-버마 국경지대의 자유지역인 마너플라우로 옮겨 당을 재결성하였습니다. 마너플라우에는 많은 버마민주화운동단체들과 소수민족군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DPNS는 역시 자유버마동맹(Democratic Alliance of Burma, DAB)과 버마연방국회(National Council of the Union of Burma, NCUB)의 멤버가 되어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DPNS는 이제 버마 내부에서 시민사회의 성장과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다민족간의 동맹을 유도하고 국제협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특히 당원들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다양한 교육과 전문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장래에 자유버마에서 경쟁력 있는 정당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심지어는 정책연구센터를 두고 분기별로 버마의 민주화를 위한 다양한 경험과 시각들을 전파하는 연구잡지를 발행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학생운동 출신이지만 정당운동에 관심이 없는 학생들은 한국의 한총련과 유사한 학생운동을 조직하거나 지하운동을 해왔습니다. 이런 지하운동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몬(Mon)족인 민꼬나잉(Min Ko Naing)이란 사람입니다. 뒤에 다시 쓰겠습니다만 가는 곳 대부분에서 수치여사의 사진과 함께 그의 사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버마전국학생연합(All Burma Student Federation Union, ABSFU)의 지도자였고, 지하운동도 이 단체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주로 시위를 조직하고 유인물을 배포하거나 정당 지지활동을 통해 학생과 국민 그리고 정치인을 이어 주는 다리가 되고 있습니다. 

고려인과 조선족


다 아시다시피 우리 민족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이들 중 내가 오늘 이야기 하고 싶은 사람들은 옛 소련에 살고 있는 고려인과 현재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에 대한 것입니다. 이들의 유래와 현실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메솟을 들어가기 직전 태국군 검문소에서 보았던 미얀마사람들의 모습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직접 보지 못했지만 우리에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싶어서입니다.


먼저 조선족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봅니다. 원래 중국공산당은 공산주의 이념에 충실하여 소수민족을 피지배자들로 보지 않고 보호해서 함께 가야할 사람들로 보았기 때문에 소수민족들끼리 따로 모여 사는 자치구를 지정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 민족도 연변(옌볜)지역에서 자치구를 구성하고 살아 우리말과 글을 잃지 않고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해 왔습니다. 물론 이들의 이주가 시작된 시기가 조선시대였고 게다가 동맹관계에 있던 북한이 자신을 조선으로 부르는 등의 이유들 때문에 조선족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들 조선족들은 중국민화 된 한민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중국국민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중 관계가 개선되고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조선족의 가치가 돋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우리와 말이 통하는 같은 민족이라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 되어 저임금 노동자 유입의 가장 중요한 그룹을 형성하였으며, 중국 내에서도 한국과 관계를 맺고 있는 다양한 사업들에서 한국어 통역자로서 역할이 부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국이 시장경제체제를 심화시켜 나아가면서 당연한 결과로서 소수민족들의 민족 정체성이 자라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과거에는 동일한 국가 안에 수용되었던 소수민족들이 부분적으로 독립을 주장하는 단계에 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이에 놀랜 중국 당국은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을 바꾸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서북공정이나 동북공정 등으로 나타난 성장의 결과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방법에 의한 민족 동화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구 소련의 고려인들입니다. 먼저 고려인이라는 호칭의 유래를 살펴보면, 러시아어로는 한국인을 '카레이스키'라고 하는데 이는 코리언, 즉 고려인이 되어 구 소련 내 한민족을 고려인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옛 소련은 소수민족 흡수정책을 표방하여 연방 내 모든 민족을 다 자기민족으로 흡수하여 융화시키는 정책을 썼습니다. 이 흡수정책이라는 게 말이 융화이지 사실은 민족 말살정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들도 민족 정체성을 박탈당한 채 살도록 강요받았습니다. 이런 정책의 결과로 1세대를 제외하면 대부분 한국어를 잊게 되었고 혼혈화 되어 외모도 변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민족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당당한 한민족입니다. 


일제는 대동아공영권을 기치로 시작한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1939년부터 45년 사이에 약 72만 5천명의 한국인 일반 노동자와 14만 5천명의 군 징용노동자를 동원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한국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 중국, 사할린, 동남아시아, 남태평양의 광산이나 건설현장, 그리고 공장 등에 투입되었습니다. 물론 그밖에도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는 많은 노동자들이 전쟁 마지막 해에 터널, 비행장 혹은 다른 시설의 긴급 공사현장에 징발되었으며, 공장이나 군대의 매춘굴에 끌려간 여성과 소녀들의 수에 대해서는 기록조차 정확하게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중 15만 명 정도를 조선총독부는 사할린의 광산이나 비행장 혹은 다른 군사시설 건설에 투입하였습니다.


물론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가난에 찌든 사람들과 일제의 압제를 피해 도망 나온 사람들,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이 연해주일대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우수리강 일대에 정착하였는데 그 수는 파악할 수 없다고 합니다. 다만 1914년 블라디보스톡에 신 한인촌을 건설할 당시 고려인수가 6만3천명에 달했다고 하는 기록을 볼 때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1920년대에 연해주가 소련으로 귀속되면서 국경이 폐쇄되어 억류되었습니다. 반면에 사할린에 징용되었던 분들은 일제 패망 이후 억류됩니다..


연해주지역 교포사회가 전통적인 생활모습을 잃게 된 것은 스탈린 정권이 추진한 집단농업정책 및 러시아화정책이 본격화된 1928년 말 부터라고 합니다. 스탈린이 급속한 산업화와 농업의 집단화를 추진하면서 고려인들의 삶도 크게 변한 것입니다. 이에 비해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은 광복 2,3년 전에 강제로 동원되어 탄광에서 일한 동포들입니다. 해방 후 미국과 소련의 협정에 의해 일본인은 전원 일본으로 귀국하였지만 한인들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대로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한인들의 강제 이주 경로나 숫자 등은 교학사에서 발행한 고등학교 역사부도에 그림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스탈린 정권은 우리 교포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당시에 교포들을 수송하다가 일정한 간격으로 사람들을 떨어뜨려 고립시킴으로써 사실상 얼어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유명한 인류 잔혹사의 하나입니다. 이런 살인적 강제 이주는 1937년 9월에 시작하여 12월 중순에 완료되었습니다. 스탈린은 고려인을 강제 이주시키기 전에 고려인 동포 지식인 2,500명 총살시켰으며, 이주 고려인들은 이후 1953년까지 약 16년간 집단 수용소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수용소 생활에는 민족교육의 금지, 국가기관 취업과 취학의 제한, 사회․정치적 진출 봉쇄 등이 포함됩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이 모든 제한은 비로소 완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려인의 비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1991년 구 소련의 해체와 독립 국가들의 탄생에 따라 새로운 이주와 유랑의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마치 스탈린의 잔혹한 강제이주 시대처럼 고려인들은 다른 구 소련 내 소수민족과는 달리 모국으로의 귀국지원프로그램도 없고, 반겨주는 나라가 없기에 고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생존을 위해 유랑하거나 현지에서 정착하기 위해 오늘도 피와 땀을 쏟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 국회의원 총선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지난 2월 방콕의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분들을 만나 나눈 대화중 으뜸은 역시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한국인이 외국인 동료에게 듣는 가장 많은 질문은 어떻게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그렇게 기뻐하던 한국 사람들이 다시 구체제의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답니다. 그러면서 4월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70%를 차지할 것이란 기사를 인용하여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당시에 그분들에게 한국인의 역동성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며 한나라당이 절대로 60%를 넘지 못할 것이며 50%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국민들이 지난 대선에서는 반 노무현 정서에 휩쓸려 이명박체제의 속성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채 투표했지만, 신정부가 출범할 때쯤이면 그 속성이 드러날 수밖에 없고, 한나라당의 내분까지 겹치면 지지분위기는 급격히 무너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즘 분위기를 보면 이는 어느 정도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하여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는 소위 ‘강(남땅)부자’정권이라고 하는 이 정부의 속성 때문입니다. 저는 최근 몇 분의 경제학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왜 이 정부가 대운하를 그렇게도 억지로 추진하려 하는가에 대한 힌트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꼭 환경문제가 아니더라도 경제성, 물류, 식수문제 등 그 어떤 논리로도 대운하가 타당성이 없는데도 추진해야 하는 이유는 대운하 주변 토지의 개발이익 때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강부자’정권다운 발상이지요.

지난 외환위기 때도 기업들은 수익성을 무시한 무한 투자경쟁을 벌였고, 이것이 경제성장률을 높인다는 점 때문에 이를 통제하지 않고 오히려 부추겼던 현 집권당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투자수익성을 생각하지 않고 투입한 외채가 부메랑이 되어 외국의 자본들이 부채상환연기를 중단하자 하루아침에 한국경제가 결딴났던 것입니다. 대운하사업 역시 똑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지만 사업 자체에 수익성이 없기 때문에 투입 자금을 마련할 방법이 뚜렷하지 않습니다. 정부가 수익을 보장하는 방식은 세금을 투입하여 대기업 배만 불리는 결과가 나온다는 점 때문에 반대가 심할 것이고 결국 정부보증 외채로 이를 조달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는 90년대와 똑 같은 상황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이를 추진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다시 외환위기가 온다하더라도 그들은 알바 없다는 태도인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외환위기는 빈부격차를 더욱 벌려 다수의 국민은 고통 속에 살아도 그들에겐 더욱 살기 좋은 세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외환위기 과정을 통해 절실하게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외환위기 당시 고급 경제관료였던 사람이 이 정부에서 다시 경제정책의 최고 수장이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두 번째 문제는 대운하 사업을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이번 총선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점입니다. 현 정부임기 말까지 더 이상 예정된 선거는 없습니다. 따라서 한나라당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결과는 결국 국민 스스로 이런 위기를 자초하는 것이 됩니다. 박근혜씨가 무소속으로 살아남아 한나라당으로 복귀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일단 한나라당의 사당화를 막아 대운하를 저지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이들이 다시 한나라당에 합류하면 여전히 한나라당이 절대다수당이 된다는 점이 목에 가시가 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번 총선을 보는 시각에서 매우 정교한 조정이 필요합니다. 대선 때는 심판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폭 넓은 공감이 있었고 또 다른 선택의 대안이 떠오르지 못했지만, 이번 총선은 다릅니다. 우리 앞엔 놓인 2차 외환위기에 대한 냉철한 위기의식이 필요한 때입니다.

국경도시 메솟으로 가는 길

2월 9일 아침

8일 저녁 호텔 카운터에 9일 아침 5시 30분에 모닝콜을 부탁합니다. 아렌지(함께 갔던 시민행동 이미희 간사의 별명입니다)가 가져온 태국 여행 가이드북에 적힌 정보에는 메솟으로 가는 VIP버스가 방콕 북부버스터미널인 모치터미널에서 7시 30분에 출발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벨보이에게 물으니 우리가 묵은 호텔에서 터미날까지 택시로 30분 정도 소요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계획은 여유 있게 6시 40분쯤 호텔을 나서 7시 30분 버스를 탈 생각이었습니다.

아침 6시 호텔의 아침식사 제공시간이 시작되는 순간을 기다려 아침식사를 합니다. 나는 그 예민한 성격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데다 아침식사를 많이 하지 않는 습관 때문에 적당히 먹습니다만 아렌지와 푸른소(시민행동 오관영사무처장의 별명입니다)는 충분히 먹습니다. 아렌지는 어디가도 굶어죽진 않을 팔자라며 왕성한 식욕을 자랑합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가장 부럽습니다.

택시를 타니 터미널까지 200바트를 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는 미터요금을 내고 타려하면 가끔 요금을 많이 나오게 하기 위해 빙빙 돌아 시간을 끈다는 설명을 읽은 적이 있는 터라 차라리 그게 낫다고 여기고 흔쾌히 가자고 합니다. 택시는 30분도 채 되지 않아 터미널에 도착했고 우리는 터미널 건물 외부의 매표소에서 메솟행 버스표를 사려고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영어로 소통하는 데 애를 먹습니다. 미국식 영어에 익숙한 나는 그들의 답변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 인수위원회장이 말했다는 영어발음 이야기가 생각나 슬며시 웃습니다. 영어가 만국 공통어라고 하면서 미국어 만을 가르치겠다는 발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사실 세계에는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나라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들 중에 미국식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는 내가 알기로 미국과 캐나다 뿐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어렵게 하나하나 물어서 겨우 메솟행 VIP버스편이 밤에 출발하는 것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대신 1등버스가 9시 10분에 출발한다고 합니다. 터미널에서 1시간 40분 이상을 기다려야 합니다. 게다가 9시간 이상 걸린다는 버스여행길이 은근히 걱정됩니다. 1시간 40여분을 기다리는 동안 태국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아내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건강히 다녀오라는 당부를 듣습니다.

아렌지만 짐과 함께 두고 우리는 터미널 안을 둘러봅니다. 터미널은 건물이 낡았고 지저분해서 그렇지 매우 넓습니다.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 무슨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제자리에 섰습니다. 이건 또 뭐야??? 아하 내가 학생 때 우리나라에서도 매일 있었던 국기 하강식 같은 행사인가 봅니다. 푸른소와 내가 터미널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도중이었는데 우리도 하는 수 없이 제자리에 섰습니다. 모든 외국인들이 우리처럼 엉거주춤 섭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렌지는 용감무쌍하게도 자리에 앉아 자기 볼일을 봅니다. 역시 세대차를 느끼면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아렌지가 부럽습니다. 운동을 하며 살았다고 하면서도 불필요한 문제를 피하고 싶은 마음을 갖도록 주입받고 자란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는 그 근본부터 다른 것입니다.

시간이 되어 버스를 보니 안심이 됩니다. 우리가 탈 버스는 장거리 여행에 적합한 버스였습니다. 화물칸도 충분하고, 화장실이 딸린 편안한 2층버스였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오래 전 사라진 차장이 승객들에게 서비스를 해주는! 버스였습니다. 차에 오르자마자 간단한 간식을 나누어줍니다. 작은 케잌과 마실 것 그리고 인스탄트 커피가 들어 있습니다. 1층에는 뜨거운 물이 준비되어 그 커피를 타 마실 수 있습니다. 물론 이와는 별도로 중간에 차장이 승객들에게 차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이 버스는 중간에 여러 곳에 들러 승객을 내리거나 태웁니다. 알고 보니 VIP와 1등버스의 차이는 우리 고속버스의 일반고속과 우등고속의 차이처럼 좌석의 넓이만 다를 뿐입니다.

좌석 앞에 받은 간식을 올려놓았습니다.


내 손바닥의 매운 맛에 죽어있는 모기



아, 한 가지 더. 중간에 점심시간이 되어 점심을 어떻게 먹을까 걱정하고 있는데, 버스가 어느 도시의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나라 식으로는 휴게소쯤 될텐 데, 그냥 도시 내에 있습니다. 그리고 차장의 안내에 따라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밥을 타 먹습니다. 태국말로만 설명하고 안내문도 태국말로만 되어 있어 당황스러웠지만 어디 내가 그리 만만하던가요? 눈치가 몇 단인데. 같이 줄지어 서서 밥을 타 먹습니다. 그러고 보니 승차권을 살 때 승차권 말고 다른 딱지를 한 장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식권이었습니다. 그래서 점심도 간단히 태국식으로 해치웠습니다. 우리 볶음밥 같은 음식인데 주문에 따라 고기 볶은 것을 한 가지 얹어줍니다. 태국사람들이 즐겨먹는 보통 음식이라고 합니다. 푸른소가 얹어주는 고기를 두 가지 지정하니까 돈을 더 내라 합니다. 푸른소는 황급히 한 가지만 받아 돌아섭니다.

이틀을 연속 잠을 제대로 자지 않아 눈이 무척 피로했는데도 신경만 예민해진 채 잠은 오지 않습니다. 차가 중간 기착지에 들를 때마다 모기들의 공습이 시작됩니다. 하는 수 없이 유리창에 앉은 모기마다 손바닥 장풍 맛을 보여주었습니다. 한참을 가다가 보니 얼마나 많은 모기가 죽어 있는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습니다. 요놈들 태국 모기들이 내 장풍 솜씨를 우습게보았다가 큰 코 다친 것이지요.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한국에서 가져온 작은 지도를 통해 내가 지금 지나고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확인하면서 갑니다. 버스는 중간 중간 여러 도시를 들렸다 갑니다. 방콕을 벗어 난 후론 한 곳을 제외하곤 거의 교통량이 많지 않아 상쾌한 여행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버스는 과속을 할 줄 모릅니다. 가는 길은 한없는 평야였습니다. 아마 방콕을 떠 난 뒤 거의 3시간 반 만에 처음으로 산 비슷한 것이 눈에 띄었는데 이 산은 산이라기보다는 경주에 흔한 옛 왕릉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그곳에 이르자 비로소 멀리 산다운 산도 보입니다만 이내 다시 끝없는 평야가 펼쳐집니다. 날씨가 따뜻해서인지 한쪽 논은 벼가 제법 자랐는가 하면 바로 옆의 다른 논은 이제 농사를 시작하려는지 불로 태운 상태입니다. 이렇게 농사를 지으니 세계 제일의 쌀 수출국이 된 모양입니다.

한쪽에선 벼가 자라는가 하면

바로 옆 논은 농사가 시작되지도 않았습니다.


오후 3시쯤 탁(TAK)이라는 지방도시에 들렀다가 출발 한 후 지도를 보니 직선거리로는 30-40분 정도 소요될 거리입니다. 그러나 거기서부터는 산길로 들어섭니다. 가파른 산길에서 버스는 그야말로 거북이걸음을 합니다. 제법 깊은 산이어서 그런지 산 정상 부근에는 대나무와 억새가 자라고 있어서 우리나라의 강원도 어디쯤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또 미국식 관광표지판인 'Scenic Area', 'Culture Tourist Village' 등이 눈이 띕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만 이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랍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적겠습니다.

3시간여를 달린 후에 처음 본 산

탁을 지나자 산길이 시작됩니다.



버스 안을 살펴보니 우리 옆에 앉아 있는 중간에 승차했던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의 모습이 유난히 어둡습니다. 젊은 부부거나 연인사이인 것으로 보이는 커플조차 대화하는 모습에 전혀 생기가 없습니다. 동남아 사람들은 원래 저렇게 무미건조한 것일까요? 옷조차도 에어컨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따뜻하게 입었습니다. 국경이 가까운 때문인지 군데군데 군 검문소가 눈에 띕니다. 잠시 후 마지막 검문소에서 여권 검사가 시작됩니다. 하사관쯤으로 보이는 나이 들은 군인이 우리 여권을 보더니 ‘꼬레아!’라고 외치며 환하게 웃습니다. 그러나 옆자리의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익숙하게 짐을 챙겨 차에서 내립니다. 그리고 모두 길가의 군부대 앞의 모여 섭니다. 그리고 버스는 언제 그들을 태웠었느냐는 듯 그냥 길을 재촉합니다. 그제서야 깨닫습니다. ‘아, 이들이 바로 불법 체류 중인 버마인들이로구나.’ 그래서 그들에게 아무런 웃음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조국에서 탈출하여 남의 나라에 빌붙어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의 슬픔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아마 우리 선조들이 만주나 시베리아에서 같은 슬픔을 겪어야 했겠지요? 갑자기 고려인이나 조선족의 과거와 현재가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이들을 두고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Resort Area'가 있고 다시 종일 보았던 평야지대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드디어 메솟 지역인 것입니다. 메솟 터미널엔 오후 5시 20분 쯤 도착했습니다. 8시간 20분쯤 버스를 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파트너인 DPNS 사람들과 통화한 후 잠시 기다리며 방콕으로 돌아가는 차 시간을 확인하고 있는데 우리를 태우고 갈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DPNS 사무실에 도착하니 6시경이 되었고, DPNS 총무(general secretary)인 능웨-린과 콩-예 등이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아줍니다. 종일 걸렸던 국경도시 메솟으로의 버스 여행이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양배추와 콘돔이라는 이 희극적인 이름의 식당은 방콕 시내 중심가에 있습니다. 나는 이 식당 이름을 지난여름 여행길에 처음 여행 가이드북에서 보고 무슨 술집 이름이려니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첫날 저녁 식사를 이곳에서 하면서 들은 남 박사의 설명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식당을 들어서자 입구부터 온갖 장식이 모두 콘돔이어서 놀라야 했습니다. 아마 남 박사의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나는 그저 혼자서 속으로 킬킬거리며 ‘방콕이 국제적인 환락의 도시라더니 식당도 별 희한한 방법으로 장식을 하는군.’ 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내가 남성으로서 들은 정보로는 그렇다고 했으니까요.


Cabbages & Condoms 입구

입구에 세워진 콘돔 산타

식사 후 나누어준 콘돔. 반은 한국산 유***제품이었다.

그러나 이 식당에는 의미를 짚어야 할 부분이 있었습니다. 태국에는 두 가지 사회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성병의 확산, 특히 에이즈의 확산문제였습니다. 한 때 태국은 에이즈로 망할 것이란 이야기가 돌 정도로 확산되었는데, 현재는 보균자 100만 명 선에서 더 이상 증가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두 번째 문제는 다출산의 문제였습니다. 아이를 지나치게 많이 나아 일반 국민들은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식당의 주인은 상원의원이랍니다. 현직의원인지는 물어 보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이분이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콘돔을 나누어주었는데 사람들이 콘돔을 받는 것을 어색해 하며 받지 않자 양배추와 콘돔을 같이 나누어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가난했던 당시 사람들은 양배추를 받기 위해 콘돔을 함께 받기 시작하여 산아제한과 성병예방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런 일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가지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문란한 성문화를 먼저 고쳐야 한다든가, 오래지 않아 저출산의 후유증을 겪을 수도 있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지요. 그러나 이런 문제들이 어디 한 사람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던가요? 결국 이렇게 너무 큰 주제를 들고 나오는 것은 사실상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전락해 버리는 것을 종종 보아 온 나로서는 참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이분이 이 식당을 운영하는 것도 두 가지 목적에서라고 합니다. 하나는 식당 안의 온갖 장식을 콘돔으로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콘돔에 대해 친숙해지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식사 후엔 모든 손님들에게 콘돔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렇게 벌어들인 돈을 다시 농촌지역의 계몽사업 등에 투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식당을 들어서면서 식당 입구에서 한번 놀랐던 나는 이분의 삶에 다시 한 번 놀라야 했습니다.  

크리스천 독자들을 위해 제가 버마국경마을에서 가져온 팸플릿의 한 내용를 우선 번역하여 싣습니다. 제 여행후기에 이글을 올릴 때면 이미 기도일인 3월 8일을 넘길 것 같기 때문입니다. 도배질을 용서하시길...^^;;

배경설명: 지금 버마 군부는 버마 내 소수민족들(카렌, 샨, 몬, 커레니, 카친, 친, 아라칸 족 등)에 대한 인종청소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마을을 습격하여 남자들은 닥치는대로 사살하고 여성들은 성폭행하고 마을을 불태운 뒤 지뢰를 설치하여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하게 막는 영민함까지 보이고 있답니다. 구조팀은 그런 마을 사람들을 치료하거나 구조하여 정글 내의 임시 거주지로 안내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팸플릿이 필요하신 분은 댓글 남겨주십시오. 여러 부 가져와서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버마를 위한 기도의 날
2008년 3월 9일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이 메시지는 CCE(Christian Concerned Burma)가 버마를 위한 2008년 기도의 날을 준비하는 중에 버마 안에서 새로운 구조팀을 훈련시키고 있는 구조팀 리더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나는 버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염려하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을 그의 손 안에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우리가 있는 정글의 아름다운 계곡을 둘러보다가 달리는 강물과 솟아오른 봉우리들 그리고 내가 정말 감사하는 열정적인 새 팀을 바라봅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 우리를 돕고 있는 여러분으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나는 이런 사역을 우리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할 수도 없고 또 그 동안 한 일들도 우리만의 힘으로 한 게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이런 사실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관대하심, 그리고 여러분의 통찰력의 넓이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만듭니다. 이것은 또한 이곳의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과 여러분 모두의 명예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전적으로 자유롭고 유용한 삶을 살겠다는 각오를 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1) 하나님은 버마 사람들을 사랑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한 힘 안에서 강해져야만 한다.
2) 백마 탄 사자(요한계시록 19:11-14)가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 싸울 것이다.
3) 우리는 넓고 얕거나 옆길로 새지 않고, 오직 깊이 있게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4) 하나님은 어둠 속에 감춰진 것들을 드러내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전체 삶을 돌보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또 영감을 느낍니다.

기도자 여러분의 사랑과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버마 카렌주의 구조팀 리더.



March 9, 2008

Dear friends,

This message was sent by a relief-team leader training new relief teams inside Burma as we were planning this year's day of prayer:

I am thankful to all of you pray and care for the people of Burma and to God who has all things in His hands. As I look around the beautiful jungle valley we are in and see the rushing streams and rising mountains and enthusiastic new teams I am filled with gratitude. All of this is a gift from God and those of you who help us in this.

I was reminded again that we can not do this alone nor have we ever done anything alone here. This fills me with wonder at God's provision and the generosity and breadth of vision from people like you. It also motivates all of us here to do our best and live full, free and useful lives that glorify God and honor you all.

We believe that:

1) God loves the people of Burma and we should be strong in the might power of God.

2) The rider on the white horse (Rev. 19:11-14) will fight for the oppressed.

3) We should go deep and go ahead, not broad or shallow or sideways.

4) God reveals what lies in darkness.

We are reminded and inspired that God cares and takes action in all of our lives.

Thank you all for your prayers, love and support.
God bless you,
A relief-team leader, Karen State, Burma.

한국을 자랑스럽게 만드는 사람들

(2월 8일 오후 5시 경 방콕에 도착한 후 6시경 국제기구 사람들을 만남.)

방콕 여행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지난해 여름, 학회 때문에 며칠 머문 적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방콕의 스완나폼 공항이나 방콕 시내가 낯설지 않습니다만 방문 목적이 달라서인지 내가 느끼는 감정은 전혀 다릅니다. 그런 감정을 채 정리해보기도 전에 저녁식사 약속이 잡혀 나갑니다. 시민행동의 간사들이 방콕의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들과 만나기로 했다고 합니다. 함께 만난 장소는 Cabbages & Condoms라는 관광객들에게도 제법 유명한 식당이라고 합니다. 이 식당에 관해서는 따로 쓸 생각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그곳에서 몇 분의 한국인들과 식사를 같이 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화 도중에 찍은 사진입니다. 위가 남박사, 아래가 필자입니다.
웨이트리스의 표정이 너무 근엄하지요? (^^)

제일 먼저 만난 분은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아태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는 남상민 박사. 이분은 국내에 있을 때 녹색연합에서 활동하다가 유엔으로 옮겼다는데, 우리가 방콕에 머무는 3일간의 숙소를 잡아주고 비용까지 지불해 주셨습니다. 고마우면서 한편으로는 미안했습니다. 두 번째로 도착하신 분은 Forum-Asia라는 아시아지역 NGO의 이성훈 님입니다. 이분과는 국경마을에서 방콕으로 돌아온 후 포럼아시아 사무실을 방문해서 많은 이야기를 더 나누었습니다. 세 번째로 도착하셨던 분은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의 이은영 님이었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포럼아시아에서 인턴과정을 수행 중인 경희대 4학년 Heather양(영어 이름밖에 기억하지 못함을 양해 바랍니다)이 합류했습니다.

남상민 박사로부터 유엔의 인력채용 시스템을 설명 들으면서 우리 청년들도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왜 내가 젊었을 때는 이런 꿈을 갖지 못했을까 아쉬웠습니다. 방콕에는 국제기구가 총 26개나 자리 잡고 있고 유엔기구만도 10개나 된다고 합니다. 사실상 아시아 지역에 위치한 국제기구들은 거의 다 방콕에 있는 셈이지요. 지리적으로 중앙에 위치한 중립지대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대화는 한국과 아시아 운동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한국의 정세나 아시아의 움직임 등이 부정적인 우려를 갖게 한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습니다만, 우리에게는 또 다른 희망의 싹이 자라고 있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우리 현실에 미치는 미국 등 강대국의 영향이나 이라크전과 같은 지구적인 사건들 속에서 국제관계를 생각해 본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인 의미에서 국제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번 버마상황이 처음의 일입니다. 그렇게 나는 이제껏 한국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었는데, 이미 많은 한국인들이 국제 활동을 하고 있어서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내가 진짜 희망의 싹을 본 것은 우리 청년들에게서 입니다. 그날 나온 이은영 님은 우리 세대 식의 운동을 했던 분이 아니었습니다. 국제기구 일이 좋아서 이 일을 택하였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만난 Heather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국제기구에서 활동하고 싶어 포럼아시아에서 인턴쉽으로 1년간 일한다고 했습니다. 또 한 사람 국경마을에 가서 만나게 될 예정인 양초희라는 전남대 3학년 학생 역시 포럼아시아에 인턴으로 온 뒤 좀 더 역동적인 일을 해 보고 싶어 태국 북부에 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청년들이야말로 우리 사회, 대한민국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만들어 주는 촛불들이라는 믿음에 흐뭇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국내의 민주화 문제에 말목을 잡힌 체 젊음을 보냈지만, 이제 국제문제에서 우리의 경험을 활용하여 기여할 때가 된 것입니다. 이때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운동에서 사랑과 재미가 빠지면 '꼬장'이 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사실 나는 꼬장 부리는 것이 운동이었던 시대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잠시 생각했습니다. ‘나도 학교에서 이런 제자를 길러 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들의 활동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만 해도 우리의 미래를 더욱 밝게 하는 것이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랬지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그래서 새 시대의 운동은 역시 새 세대가 그들의 감각으로 개척해 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랬을 때 우리에게 희망이 보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가능성을 벌써 국제 감각 익히기에 여념이 없는 그들에게서 발견하고 흐뭇해합니다.

2월 8일

아침 5시 30분 인천공항을 향해 집을 나서면서

 

우리 세대는 미얀마라고 하면 잘 모른다고 하다가 버마라고 하면 “아하, 그 나라”라고 외치며 한국과 킹스컵 등에서 축구경기로 맞붙은 적이 많았던 동남아의 한 나라를 기억해 냅니다. 그리고는 “그게 이번에 군부가 시민과 스님 시위대를 학살했다는 그 미얀마야?”하고 되묻습니다. 영국과 일본의 식민지였던 그들이 독립한 이래 버마라는 국호를 사용하다가 어느 날 이 나라를 독재하고 있는 군부가 국호를 미얀마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버마는 해방 이후 계속 군부독재 하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88년 대규모 민주화 요구 시위가 있었습니다. 이때 시위가 1988년 8월 8일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하여 8888민주화시위라고 한답니다. 이 시위의 진압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만 3,000여명에 이른다지요. 그리고 그 당시 학생으로 시위를 주도했던 분들이 그 후 군부의 박해를 피해 해외에 나와 버마민주화 단체들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때의 시위장면을 담은 비디오는 YouTube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비디오는 내가 이번에 방문한 곳 중 하나인 DVB(Democratic Voice of Burma, 버마 민주의 소리)에서 제작한 것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TOgp3aTLVjM

 

8888시위 이후 군부 내에서 다시 쿠데타가 있었고 새로 권력을 잡은 군부는 시민과 국제사회의 압력에 굴복하여 1990년 국민총선을 실시하여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선거에서 민주 진영은 민족민주동맹(NLD)을 구성합니다. 군부는 NLD의 지도자 아웅산 수치여사를 연금한 채 선거를 치루지만 NLD는 무려 82%의 지지율을 획득하는 승리를 거둡니다. 군부가 지지한 국민통합당은 겨우 2%의 지지만 획득했을 뿐입니다. 그러자 군부는 다시 선출된 국회의원 100여명을 체포하고 독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2003년 데파인이라는 곳에서 아웅산 수치여사와 지지자들에게 테러를 가하기도 합니다. 수치여사는 1990년대 초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07년 9월이었지요. 다시 대규모 시위가 있었습니다. 8월에 처음 시작될 때는 급등하는 물가에 대한 항의 시위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88세대(8888시위의 지도자들이었던 당시 학생들을 일컫는 말이랍니다)들이 주도한 8월 시위였다고 하지요. 주동자들이 구속되고 소강상태에 빠지는 듯 했던 시위는 9월 들어 승려들의 시위참여로 다시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게 되었답니다. (사진참조)

 

 

 

 

 

 

 

SPDC는 군부가 자신들을 지칭하는 이름입니다. 지옥에나 가라는군요.

어떠세요?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있는 것 같나요?

 

 

 

 

 

 

 

 

승려들이 거리로 나선 시위현장입니다.

총기란 악마와 같아서 손에 들면 사용하게 되지요. 피로 범벅이 된 시위현장입니다.

 

 

 

 

 

 

 

 

자유버마, 이것이 시위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 프리랜서 사진작가가 피살된 장면입니다.

 

 

1988년 당시에는 우리도 막 6월 항쟁을 거쳐 나와 민주화의 첫 단추를 꿰던 때였고 게다가 88 서울올림픽 때문에 그들의 소식이 내 귀에 크게 들리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2007년의 시위와 군대가 시위대에 발포하여 많은 시민들을 사살했다는 민중학살 소식은 지난 여러 달 동안 내내 내 마음 속에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광주항쟁과 부마항쟁. 그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도 서울의 봄을 운운하던 무렵 시위에 참여하였습니다만, 계엄이 내려지고 무기력하게 고향집에 내려왔다가 우연히 주한미군방송인 AFKN을 통해 처음 광주소식을 들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당시 시위에 특별히 한 역할도 없고 또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기에 돌이켜 보면 참 어이없는 일이지만 당시의 나는 무작정 겁에 질려 한 산골마을의 친구집에 숨어 지내다가 광주항쟁이 진압된 후에야 비로소 집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광주항쟁 시기에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는 사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지레 겁을 먹고 숨어 지냈다는 창피한 경험은 내 마음 속에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이 짐을 내려놓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예수가 그렇게 죽었다고 그래서 내가 살게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무고한 양민이 학살 되는 현실을 모른 채 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여행을 떠날 때는 모든 것이 너무 분명했습니다. '버마의 민주화운동은 여러 나라 여러 기구나 사람들이 지원할 것이고 결국 버마는 민주화될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 후에는? 민주화 이후에 국가를 이끌어 갈 정신무장이 잘 된 인재들이 길러지지 않는다면 악순환이 계속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박정희 사후에 더 악랄한 전두환이 등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해방 이후에 친일파가 여전히 한국의 현대사를 농락하고 있듯이 말이다'. 그래서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다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보고 들은 엄청난 현실 앞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습니다.

물론 이 여행의 직접적인 계기는 피스라디오(peace radio) 캠페인이었습니다. 버마 민중은 오랜 군부독재 하에서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군부 우두머리가 사실상 전제국가의 왕처럼 군림하면서 모든 국부를 독차지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모든 언론은 철저한 사전 검열을 통해서 차단되기 때문에 국민들은 점점 진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졌습니다. 다행히 몇 개의 라디오 방송이 해외에서 버마로 전파를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라디오만 보내줄 수 있다면 정말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피스라디오 캠페인입니다. 이 캠페인을 통해 모아진 기부금으로 라디오를 사서 태국-버마 국경지대에 보내기 위한 여행에 참여한 것입니다.

이 여행에는 이 캠페인을 주도했고 또 내가 창립 당시부터 참여했던 <함께하는 시민행동>의 오관영 사무처장과 이미희 간사가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행후기는 그 짧은 여행기간 동안 보고 들었던 많은 것들을 복기(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경기가 끝나면 경기과정 전체를 기억하여 다시 두면서 바둑공부를 하는데 이를 복기라고 한다지요)하면서 내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입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2월 7일 밤

 

마음속의 상념으로 잠들지 못합니다. 잠이 들지 못할 때면 늘 그랬듯이 잠자리에서 슬며시 손을 뻗어 아내의 손을 잡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이내 손을 뿌리치고 등을 보이며 돌아눕습니다.

내가 버마 난민들이 있는 타이-버마 국경도시를 방문하여 그곳의 사정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아야겠다고 계획하고, 그 생각을 밝힌 뒤로 아내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언제나 내게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내가 계속 여행을 만류하는 말과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이 여행의 가장 큰 짐은 그 동안 내게 가장 좋은 후원자였던 아내를 설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내 삶의 반려자로 내가 하는 일에 큰 이의 제기 없이 20년 이상을 협력해주었던 아내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일까요?

처제와 통화한 듯 처제의 말이라며 차라리 여행비용을 돈으로 보내주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군산의 한 지역아동센터에 난방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매우 추운 곳에서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는데 차라리 그곳에 제대로 된 난방시스템을 갖추어주라고도 합니다. 마침 한 절친한 친구가 난방시스템을 갖추는 데 필요한 비용을 보내왔습니다. 나는 철부지처럼 아내에게 “이제 그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떠나도 되는 거지?” 라고 묻습니다.

사실 아내는 불안한 모양입니다. 내가 하려는 일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여 인간방패로 나섰던 유은하나 임영신님처럼 위험한 일에 뛰어드는 것이 아닌데도 아내는 두려운 모양입니다. 당연한 일이겠지요. 아마 조금이라도 내 신변에 위험이 있을까봐 그러는 것일 테니까요. 아니 한번 마음먹으면 주변에서 어떤 위협이 있을지라도 그저 묵묵히 내 길을 가는 내가 이다음엔 또 어떤 충격적인 계획을 들고 나올지 몰라 미리 겁먹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더욱 미안합니다. 이번 여행이 아니라 함께 살아온 지난 20년 세월이 말입니다.

그래서 밤새 잠들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웁니다. 여행의 출발을 앞두고 피곤하게 시작하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합니다.

며칠 전부터 끙끙 앓다가 내 블로그에 넋두리를 하려고 컴 앞에 앉았습니다.
둥글이라고 불리는 친구가 있습니다.
제가 군산에서 반핵운동에 포섭(?)되어 TV토론회에 불려 다닐 때입니다.
혼자서 줄기차게 뛰어다니던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는 청년이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아후로도 자기 활동소식을 늘 전해주는 친구입니다.
물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그저 활동비의 일부를 보조해 주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갑자기 전국 유랑에 나섰습니다.
초등학교 마다 찾아가서 환경 보호와 욕심버리기 캠페인을 시작한 것이지요.
텐트메고 돌아다니니 오죽하겠습니까만,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스티커 만들 비용 때문에 아이들 방학엔 노동으로 비용을 벌고 학기중엔 켐페인 다니며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최근엔 한 동안 태안반도에 기름제거하러 가 있었지요.

그 친구가 얼마전 제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어디 좋은 기업 하나 없느냐구요.
도저히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데, 이젠 저나 몇몇 후원자에게 손벌리기도 어렵다고
일정하게 계속 후원해줄 기업을 찾는다는군요.
나도 그런 기업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래 링크를 겁니다.
이 친구의 삶을 읽어보시라구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모습이지만 정말 감동의 실천가입니다.


http://cafe.daum.net/my80go

이라크, 평화

지난 연말, 국회는 슬그머니 이라크파병연장 동의안을 가결했습니다. 저는 이 과정에서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이 사실이 전혀 뉴스거리가 되지 못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라크파병연장 반대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던 신당의 의원들조차 모두 반대에 투표하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현상은 노무현정부의 반복되는 말장난으로 이라크파병이 이미 식상한 주제가 된 데다 이명박씨에게 줄서기에 바쁜 언론들 탓이 겹쳐진 때문이라고 추측됩니다. 두 번째 현상은 신당의 정체성이 여전히 모호한 집단이라는 의미이겠지요. 뭐, 상관없습니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 아니던가요. 몇 가지를 빼면 가장 우파적인 정책(특히 경제정책)을 썼던 노무현정부의 경제실패가 우파의 실패가 아닌 좌파의 실패로 규정되는 황당한 나라니까요.

저는 오래 전 그리고 얼마 전 각각 이라크 전쟁의 현장에서 기록한 평화를 말하는 책을 한권 씩 읽었습니다. 그리고 평화의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이 책들은 심오한 비밀을 밝히는 연구서도, 깃발 들고 나서니 나를 따르라 외치는 함성도 아닌 평범한 기록일 뿐입니다만 그러나 이를 기록한 분들은 목숨 걸고 기록한 것들입니다.

사실 저는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부끄럽게도 이 기록을 남긴 분들처럼 목숨 걸고 길을 나서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글에서 평화나 이라크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여러분들도 저처럼 다시 한번 평화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분들의 책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바람을 덧붙이자면 우리들도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작은 평화만들기를 행동으로 옮겨보면 좋겠습니다.

아, 한 가지 더. 이분들은 모두 여성 기독교인들입니다. 한분은 이라크전쟁 당시 인간방패로 나서서 국내에서도 한동안 뉴스에 올랐던 분인데 당시에 쓴 편지를 모은 것이고, 다른 한분 역시 당시에 그곳에 있었던 세 아이를 둔 엄마이자 목사의 사모입니다. 이분들이 기독교인임을 밝히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버려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했던 뜻과는 반대로 남의 목숨을 버려 나의 안위를 꾀하는 기독교인들이 아직도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유은하, 아이들에게는 전쟁이 없다, 열림원.  
임영신, 평화는 나의 여행, 소나무

(이글은 시민의 도시 2월호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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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ve You Ever Seen The Rain
(듣고 싶으신 분은 아래부분을 마우스 우측버튼으로 클릭하여 새창으로 열기를 하십시오)
http://www.youtube.com/watch?v=TS9_ipu9GKw

이 노래는 그룹 CCR이 불렀던 노래이다.
이곡에서 the rain(비)은 미군이 베트남전쟁 당시에 투하했던 고엽제를 말한다.
대부분 알고 계시듯이 고엽제는 이후 베트남 뿐 아니라, 미군들 자신과 한국군들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CCR은 이를 고발하는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물론 한국군은 그후 피해보상을 전해 받지 못하고 있다.
용병이었으니까... 말이다.

Some one told me long ago
There's a calm before the storm,
I know; It's been comin' for some time.
When it's over, so they say,
It'll rain a sunny day,
I know; Shinin' down like water.
I want to know, Have you ever seen the rain?
I want to know, Have you ever seen the rain
Comin' down on a sunny day?

Yesterday, and days before,
Sun is cold and rain is hard,
I know; Been that way for all my time.
'Til forever, on it goes
Through the circle, fast and slow,
I know; It can't stop, I wonder.
I want to know, Have you ever seen the rain?
I want to know, Have you ever seen the rain
Comin' down on a sunny day?

Yeah!
I want to know, Have you ever seen the rain?
I want to know, Have you ever seen the rain
Comin' down on a sunny day?

전에 누군가가 내게 말했어. 폭풍전에는 고요가 있다고
난 알아요. 그 고요가 오고 있다는 것을
고요가 끝나면 그들은 말하죠. 맑은날 비가 내릴 것이라고
난 알아요 물처럼 빛내며 떨어지는 것을
난 알고싶어요, 당신은 그 비를 보신적이 있나요?
난 알고싶어요, 당신은 그 비를 보신적이 있나요?
화창한 날에 내라는 비 말이예요.

어제, 요전날에,
태양은 차갑게 빛나고 비는 엄청 뿌렸죠.
난 알아요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동안 계속되리란 것을
영원히, 계속 반복될거예요,
원을 따라 빨리 그리고 천천히
난 알아요, 두렵게도 그것을 멈출수 없다는 것을,
난 알고싶어요, 당신은 그 비를 보신적이 있나요?
난 알고싶어요, 당신은 그 비를 보신적이 있나요?
화창한 날에 내라는 비 말이예요.

예!
난 알고싶어요, 당신은 그 비를 보신적이 있나요?
난 알고싶어요, 당신은 그 비를 보신적이 있나요?
화창한 날에 내라는 비 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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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반성할 일도 없다.
반성하지 않는 사람에겐 진보도 없다.

내가 살면서 가장 슬픈 일은 운동하며 사는 사람들의 단점을 지적하면서 욕하는 사람들을 만낫을 때이다. 제법 깨우친 게 많고 잘잘못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처럼 이야기하면서, 그러나 그것을 실천에 옮기며 사는 사람들의 문제점을 나열하기에 바빠서 자신은 전혀 행동하지 않거나 혹은 오히려 자신이 주장하는 삶과 반대의 행동을 하면서 인생을 즐기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에게 분노하지 않는다. 그렇게 가식으로 치장해야만 살수 있는 현실이 슬플 뿐이다.

번 대선에서 대부분의 매체들이나 후보들은 모두 경제문제를 쟁점으로 삼았다. 일찍부터 경제문제가 쟁점이 됨에 따라 이번 선거를 역대 주요 선거 중에서 가장 흥미 없는 선거로 만들었다. 여기서 경제문제란 양극화로 빈부격차, 수출의 호황과 내수부진, 비정규직의 양산,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 등으로 표현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렇게 된 것은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국제금융자본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고 문제가 있을 때만 사후적으로 정부가 개입하는 영미계 신자유주의를 수용해 생긴 부작용이었다. 그러나 후보들은 저마다 경제성장률 몇 %라는 공약을 내걸기에 바빴다.

양극화의 원인은 금융시장의 전면적 개방

환위기 당시 자본시장을 전면 개방하고 거의 모든 공기업을 민영화함으로써 우량기업의 자본을 상당부분 외국자본이 잠식하였다. 이때 들어 온 외국자본의 대부분이 산업자본이 아니라 빠른 시일 내에 일정한 수익을 올리고 다른 투기처를 찾아야 하는 금융자본이었다. 이들 자본들은 속성상 경영진에게 무조건 수익을 올리도록 압박을 넣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경제양극화의 원인이다.

런 압박을 받으면 대기업들은 단기적으로 가장 확실한 수익창출방안인 첫째, 정규직을 집단해고하고 비정규직으로 대체하는 것과 둘째, 하청업체를 압박하여 납품단가를 인하하는 것으로 반응하게 된다. 이렇게 원가절감을 통해 경쟁력을 갖춘 상품은 수출이 일시적으로 증가한다. 늘어난 수익의 일부는 대기업의 경우 강력한 노조를 바탕으로 임금 증가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상당부분 해외자본의 배당금이나 주식, 자산 등의 매각대금 형식으로 해외로 빠져나간다. 물론 이 과정에서 국내 일부 자산가들도 금융소득을 누린다. 그러나 수출로 벌어들인 돈 중에 국내에 남는 양이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크게 줄어 국내서는 돈이 돌지 않아 내수시장은 불경기에 빠진다. 비정규직 양산으로 소비가능인구가 감소한 것도 이를 거들었음은 물론이다. 소득격차는 부유층의 명품소비와 저소득층의 중국산 구매로 이어져 유통업의 수입은 급증하는데도 내수형 제조업은 경영난에 허덕이는 모순이 나타난다.

리나라가 외환위기 시기를 포함해도 여전히 세계 주요 경제국가 중에서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은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심각한 양극화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의 경제문제가 경제성장률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제는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 도입한 금융시장개방의 부작용을 해소할 수 있는 방향으로 경제정책의 전환이 필요하다.

외환위기 극복과정에 풀어 놓은 것을 다시 살펴봐야 해

제 성장의 과실을 전 국민에게 확산시키는 정책이 필요하다. 이런 정책은 단순히 복지정책으로 소득을 재분배하는 것에 그치면 안된다. 그 동안 외환위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확대된 금융시장개방을 다시 정부가 일정정도 개입하여 통제하는 정책이 도입되어야 한다. 그것만이 지금의 경제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이기 때문이다.

당이 이번 대선에서 패배한 이유 중 하나는 외환위기가 극복되었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한미FTA를 통해 오히려 금융시장 개방을 확대하는 정책을 썼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의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화시키는 것이다. 양극화가 경제문제의 핵심인데 말로는 이를 해결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이를 심화시켜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새 정부가 대형 토목공사와 재정투자를 늘리면 일시적으로 양극화를 완화시킬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이는 한국경제를 지금까지 그 고생하며 극복한 외환위기 이전 상태로 되돌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부디 새 정부가 올바른 정책으로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바란다.

(이글은 열린전북 2008년 1월호에도 실립니다.) 

울입니다. 이 겨울, 추위를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따뜻한 운동을 하면 열이 납니다.

번 대통령선거에 대해 말들이 많습니다. 첫째는 다시 확연하게 지역구도를 보여주었다는 의견입니다. 노대통령이 호남사람이 아닌데도 이런 말이 나올 만하게 구도가 만들어진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둘째는 노무현정부 심판론입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의견입니다. 지역에는 노무현을 심판하는데 왜 정동영이 당해야 하느냐며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참여정부의 잘잘못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분이기는 아예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경제문제가 일찍부터 대선의 쟁점이 된 탓에 선거다운 선거를 하지도 않은 채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소수지만 교묘하게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삼성비자금사건, 총기탈취사건, 태안반도 기름유출사고 등이 대선 자체를 재미없는 사건으로 전락시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는 이런 의견들이 옳고 그른지를 평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것은 소위 개혁세력이 민주화 이후의 역사를 개척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민주화 과정은 투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얻은 값진 것이었지요. 그러나 역사는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민주화라는 열매는 단맛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여는 밑거름이어야 했던 것이지요. 이미 오랫동안 많은 민주화 세력이 현실 정치에 참여했다가 실패했던 원인과 같은 바로 그것 말입니다.

여정부를 만들었던 시민운동세력의 운동방향은 따뜻한 운동이어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냉철한 정신과 뜨거운 가슴으로 몸부림치는 게 민주화 운동이었다면, 민주화 이후에는 민주화를 완성하기 위한 정치운동 뿐 아니라 외환위기로 어려워진 이웃의 아픔을 감싸 안으며 위로하고 사랑을 나누는 운동을 해야 했지 않은가 돌아보게 됩니다. 민주화운동이 권력을 쟁취하여 남을 공격하고 과실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행동으로 삶으로 보여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론 참여정부에 참여했던 개혁세력에게 더 큰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만 우리에게도 변화를 주도하지 못한 책임이 있습니다. 게다가 은근히 힘을 즐기려하는 마음이 우리에게는 없었는지 반성할 일입니다. 그리고 추운 겨울이 시작되는 지금 따뜻한 운동으로 몸을 덥혀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글은 제가 편집을 책임지고 있는 시민의 도시 2008년 1월호에도 실립니다.)

버마(미얀마)를 위해 역사를 쓰자.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이, 버마(미얀마)의 군사정부는 얼마 전 또 다시 시위대에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물론 88년 민주화 시위와 달리 이번 시위의 시작은 연료비 인상에 따른 생활고로 촉발되었고, 88년 학생운동 지도자그룹의 지휘 아래 서서히 진행되다가 승려들이 주도하면서 대규모시위로 발전하였다는 평가입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서로 다른 평가를 내 놓기도 합니다만, 어떤 이유에서든 물가의 폭등과 민중학살이 가능한 것은 야만적 군사독재 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버마에 가장 시급한 것은 민주화를 통한 자발적 민주정부의 수립입니다.

그렇다면 이라크에 했던 것처럼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이라도 만들어서 버마를 초토화해야 할까요? 물론 아닙니다. 버마 국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싸워야합니다. 우리는 다만 그들의 그런 긴 싸움에 협력자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 역할의 하나로 단파 라디오를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으며 국제사회가 버마민중을 지지하고 있음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버마인 스스로 계몽하고 희망을 주는 일, 스스로 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나누는 일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단파라디오 보내기는 함께하는 시민행동(http://action.or.kr/)의 피스라디오 보내기운동(www.peaceradio.kr) 참조)

저는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버마를 위한 긴 역사를 쓰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폭력적인 방법은 당장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문제를 더 악화시키고 어렵게 만들 뿐입니다. 우리는 이미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을 통해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길이 사실은 가장 빠른 길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런 일을 해야 할까요? 우리에겐 남 다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식민지 시대와 군부독재시대를 겪었을 뿐 아니라 그러고도 경제적으로 성공한 몇 안 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을 통해 치열하게 피 흘렸던 우리가 이유 없이 피 흘리는 역사를 중단시키는 긴 역사 쓰기에 나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Alafayawoods)

요즘 내 블로그에 글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가끔 근황을 묻는 멜이 온다.

근황?
근황이라면 요즘 어찌 지내느냐는 말이렸다.

그런데 그게 별게 없다.
호남지역 언론 4사 주최의 대선후보 초청 정책대담에 불려나가 대담자가 되는 것 말곤 뚜렷이 하는게 없다.
선거판이 너무 화가 나서 가끔 울화통을 터뜨리는 것 말곤...
아니 하는 게 너무 많아서 특별히 내세울게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랜 전 나도 젊었을 땐(이렇게 말하면 인디언님이 "교수님은 아직도 젊어요" 라고 아부할 것이다. ㅋㅋ)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데 선수였다.
오죽하면 어느 해인가는 연구원 50명이 일하는 연구소에서 그해 수행한 프로젝트의 1/3을 내가 해치웠겠는가...
그런데 요즘은 그게 안된다.
한 가지 일을 하면 다른 일은 어느새인가 슬그머니... 먹통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난 지금 하는 일이 없다.

아니 그것도 아니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을 뒤로 미루고 발 앞에 떨어진 일만 하느라고 스스로 하는 일이 없다고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짜 하고 싶은 일.
그건 또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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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나는 소설책을 몇 권 읽었다.
여름이라고 계속 비만 내려서 할일없이 책을 읽은 것인데...
이 때 읽은 책 중에 일본 소설가의 책이 있었다.

남쪽으로 튀어, 오쿠다 히데오, 은행나무 발행
Southbound, Okuda Hideo
라는 책이었다.

이 책 속에 이런 말이 있었다.
오랫동안 운동을 한다고 껍죽거리면서 늘 마음 한쪽에 모셔두었던 말인데
어쩜... 내마음을 이렇게도 잘 드러내주다니...

"혁명은 운동으로는 안 일어나.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으로 일으키는 것이라고!"

"집단은 어차피 집단이라고, 부르주아지도 프롤레타리아도 집단이 되면 다 똑 같아. 권력을 탐하고 그것을 못 지켜서 안달이지!"







고등학생시절 나는 늘 고개를 우측으로 5도정도 기울인채 걸어다녔다. 한마디로 자세가 바르지 않았던 것이다.
전주에서 내과를 개원하여 요즘 돈을 빗자루로 쓸어담는다는 소문이 들리는 한 친구와 내가 늘 그 자세로 다녔는데 우리는 그것을 12시 5분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문제는 남들이 그렇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12시 5분전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분명히 우파였는데 친구들이 바라볼 때는 그게 좌파로 둔갑되었다.

이게 원래 다 그런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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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흐르듯 운전하라고요?  (2) 2007.03.13

내게는 종교와 미신을 구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주된 관심이 생명에 있는 것을 종교라고 합니다. 생명을 구하는 일, 생명의 가치를 존귀하게 여기는 믿음을 가진 것을 종교라고 본다는 것이지요. 이에 비해 돈과 명예, 권력을 구하는 것을 미신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종교와 미신은 우리가 아는 이름의 종교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종교를 믿는다고 말 하는 각 개체(개인이나 집단)를 말하는 것이지요.

인도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에 가면 화장터가 있습니다. 오래전 일입니다만 제가 그곳에 갔을 때 인도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제 기억력이 형편없어 숫자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화장을 하는데 보통 장작이 120개 정도가 필요하답니다. 그 장작은 화장 일을 하는 사람들이 파는데 하나에 우리 돈으로 만 원 정도라더군요. 그러니까 화장을 하는데 120만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당시 인도에서 대졸자 월급이 3만 원 정도 했으니까 얼마나 큰 돈인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도사람들은 평생을 이 장작 값을 마련하기 위해 산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구요? 힌두교에서 윤회는 고통이고 윤회를 끊고 해탈하기위해서는 갠지스강에서 화장하여 재를 강물에 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화장 일을 하는 사람들은 글자 그대로 언덕 위의 하얀집에서 산답니다. 보통 언덕 하나를 소유하고 그곳에 집을 짓고 산다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종교와 미신이 갈라집니다. 만약 힌두교가 종교라면 가난한 사람들의 해탈을 위해 무료로 혹은 최소한의 비용만으로 화장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것으로 부를 누리는 집단이 존재하면 그것은 미신이라는 것이지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시 말한다면 힌두교가 종교가 아니라는 주장이 아니고 그 종교를 이용하여 부를 누리는 사람과 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힌두교는 미신이라는 말입니다. 이 기준은 모든 종교집단에 적용됩니다. 우리나라에 많이 있었던 무당을 요즘은 문화로 보기도 합니다만, 종교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것도 미신입니다. 굿이라는게 순간순간 정성이 부족하다며 돈을 요구합니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어떤 종교든 제 관점으로 볼 때는 미신과 종교가 섞여 있습니다. 보통은 이 미신을 믿는 사람들 때문에 특정한 종교가 욕을 먹고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요즘 말 많은 종교문제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불교는 종단권력 쟁취싸움이 그치질 않습니다. 교회는 목사 세습 등의 사건으로 시끄럽습니다. 이게 다 왜 그렇습니까? 그 소란스러운 사건 속의 인물들은 그 종교를 종교가 아닌 자신을 위한 미신으로 바꾸어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7.8.2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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