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주의: 내가 어울렸던, 정확하게는 나를 외국인이라고 외로울까봐 친구가 되어주었던 이들은 성경을 읽을 때 언제나 현재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 예술, 학문, 교육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 분야에서 창조질서를 이야기 하며, 그래서 장애나 난민 문제 등을 하나님의 창조세계 속에서 캐나다라는 축복 받은 땅에 사는 자기들의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실천했었다. 이 모임이 진행되는 Swallowfield farm은 드그루씨의 집 겸 농장이다. 드그루씨는 노예무역을 자기 조상인 네덜란드 무역상들이 시작했다는 사실을 늘 고백하고 회개했다.

(사족1: 지성이라곤 약에 쓰려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윽박지르는 반지성주의 말고…)
(사족2: 이런 행사를 준비할 때면 이들은 보통 한사람이 1000달러-100만원 정도를 기부한다.)
(사족3: 한국의 대형교회는 그 자체로 사이비 종교이다. ‘한국의 요셉’ 파동을 보니 더욱 확신이 든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11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12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13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11-13(새번역)
 
요즘 묵상하는 부분은 잠언이지만, 며칠 전 아침 잠에서 깰 때, 문득 이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벌써 두어달 전의 묵상 내용이지만 내 마음 속에 무언가 미진한 것이 남아있었는데, 작은 울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래 전 여의도의 조 목사 부류의 사람들이 입에 달고 다니던 말씀 중 하나였지요. 마지막 13절만 따로 떼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의미와 아무 상관없이 "불가능은 없다"는 뜻으로 악용되었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행태입니다.
 
사실 앞 두 절(11~12)만 읽었어도 이런 엉터리 해석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의도적인 왜곡이라는 의심도 듭니다. 앞의 두절을 볼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자족하며 살 수 있다는 의미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자족을 강조하는 해석을 지지합니다. 대부분의 성경번역본들도 이런 해석으로 번역했고요.
 
그러나 나는 이 해석이 마치 목에 걸린 가시처럼 개운하지 않게 남아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의 모든 것을 자족으로 해석한다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다른 모든 종교나 철학의 가르침과 다른게 무얼까요? 세상이야 어찌 돌아가든 나만 산중에 들어가 도를 닦으며 만족하면 되는 것인가요?
 
혹시라도 여기에서 '모든 것'이란 자족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할 모든 것'이란 뜻은 아닐까요? 마태복음 25장에는 천국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 담겨있습니다. 거기에는 형제를 돌아본 자들이 받을 복이 포함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모든 것'이란 바로 그것을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단순히 내 처지에 자족하는 수준을 넘어서 어떤 처지에 있든지 형제를 돌아보는 것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주신 능력을 힘입어.
 
요즘 아내가 많이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이 아내를 챙겨주고 사랑을 베풀어줍니다. 사실 그분들을 자세히 보면 본인들도 여러 가지 일로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다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처지에 자족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래서 더욱 형제들을 돌아보는 사랑을 베풀고 사는 것입니다. 그분들이야말로 내게 빌립보서 4장의 이 말씀의 뜻을 깨우쳐주신 소중한 스승입니다.(2015.5.22)

살면서 깨닫는 것이 있다.
언제든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사랑을 할 때 사랑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먼저 내밀지 않았는데 친구가 되었다면, 분명히, 상대방이 먼저 내게 손을 내민 것이다.

그런데 가만 돌아보니 내가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그 사람이 맘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까 내가 먼저 손을 내민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내가 손을 내밀게 만들었다.

그래서 난 아직 제자가 되려면 멀었다.

우리 주님은 먼저 자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 내 놓으셨는데...


내가 좋아하는, 밴쿠버에서 목회하는, Mark목사가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종종 인용하는 성경말씀 가운데 하나인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를 딸이라고 거짓으로 말했던 사건이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이 자신의 아내를 탐내서 자신을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 갈까봐 거짓을 말했고 여기에 속아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차지했다가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돌려주었던 사건이다.(창세기 20장) 여인이 무슨 물건도 아니고...(^^)  Mark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할 것인가? 아니면 두려워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Mark의 글이 계기가 되어 짧은 생각을 쓴다.


사실 많은 신앙서적이나 설교문들이 조용히 하나님을 바라라. 즉 기도하며 기다리라고 한다. 실제로 나 역시 두려움때문에 어떤 행동을 하는 것보다 조용히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이 옳았다는 것을 사후에 확인한 경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 빠지게 된 원인에 따라서 우리는 많은 고민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나의 잘못과 관계없이 만들어진 두려운 상황, 즉 적들이 에워싸고 나를 위협하는 경우에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음을 잘 알고 있다. 아브라함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할 텐데 그는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나의 잘못이 출발점이 되었을 때 혹은 내가 직접 관여되지 않았다고 해도 나에게 책임이 있는 일에 대해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죄하며 문제를 풀어나아가는 것이 좋은 방법일 것이다. 내가 뭉게고 책임을 회피하며 감추려고 할수록 나의 두려움은 오히려 더 커지고 일은 더욱 꼬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사건을 덮은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신은 추가된 두려움의 이유때문에 더욱 큰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한다. 그래서 지옥은 죽어서 가는 징벌적 장소뿐 아니라 이런 두려움 속에서 사는 삶 자체가 지옥이다.


올해 겪은 세월호 사건 속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이 지옥 속에서 사는 것을 본다. 지옥에서 살고있는 자들은 자식을 잃은 분들이 아니다.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지옥에 사는 자들을 명확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회심과 유사 회심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말 회심한 자인가? 아니면 유사(pseudo) 회심, 즉 하나님의 권능에 혹은 사랑에 감동하였고 그래서 세례를 받거나 교회에 나왔지만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자인가? 최근에 읽은 다니엘서에는 유사 회심의 사례가 하나 등장합니다.
  
“1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고는 육십 규빗이요 광은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2 느부갓네살 왕이 보내어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을 자기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게 하매 3 이에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이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여 느부갓네살의 세운 신상 앞에 서니라 4 반포하는 자가 크게 외쳐 가로되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에게 명하시나니 5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라 6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넣으리라 하매 7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자 곧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금신상에게 엎드리어 절하니라”(단 3:1-7)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놓고서 그 금상을 신처럼 섬기라고 명령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부분만 읽으면 바벨론은 이방국가로 우상을 섬기던 나라이니 뭐가 이상하냐고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앞의 2장을 보면 좀 당혹스럽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왕위에 오른지 2년이 되던 해에 꿈을 하나 꿉니다. 문제는 그 꿈의 내용조차 기억하지 못하는데 마음이 매우 불안하여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꿈을 해석해내라고 전국의 학자나 마술사, 점쟁이들을 모두 불러다 명령합니다. 꿈의 내용도 모르는데 그 꿈을 해석하라니 미칠 노릇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꿈을 가르쳐주면 해석해 주겠다고 하는데, 급기야 왕은 꿈을 해석하지 못하면 다 죽이겠다고 선포합니다. 얼마나 그 꿈으로 인한 번민이 심각한 상황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이 꿈이 어떤 내용이었고 그 뜻이 무엇인지 해석해줍니다. 특히 꿈속에 등장했던 거대한 신상의 머리는 정금으로 만들어졌었는데, 그 머리가 바로 느부갓네살 왕을 상징한다고 가르쳐줍니다. 다니엘은, 또 이렇게 꿈을 알아내고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보여주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왕은 놀라운 하나님을 찬미하면서 다니엘과 그 세친구들을 관료로 임명합니다.
  
“28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단 2:28상)
  
“47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자시로다 48 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 귀한 선물을 많이 주며 세워 바벨론 온 도를 다스리게 하며 또 바벨론 모든 박사의 어른을 삼았으며 49 왕이 또 다니엘의 청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바벨론 도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더라”(단2:47-49)
  
여기까지만 보면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의 능력에 감탄했고 따라서 당연히 회심을 거쳐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 다음에 위에서 읽은 것처럼 금신상을 세우고 백성들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나는 이것이 바로 유사 회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하거나 목격하고서 놀라게 되고, 그런 놀람 때문에 입으로 나온 말이 다른 사람들이 볼 때 회심한 사람의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회심하지 않은 가짜 회심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게 주님께서 밭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가시밭에 뿌려진 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사 회심. 이것은 교만과 욕심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바로 정금으로 만들어진 머리 부분에 해당한다는 말을 듣고는 우쭐했을 것입니다. 매우 뿌듯했고 그래서 교만해졌겠지요. 그러니 자신을 상징하는 금신상을 만들자고 속삭이는 자들의 유혹에 넘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심은 그렇지 않습니다. 회심의 증거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회심으로 가장 극적인 사례가 삭개오의 회심입니다.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1-9)
  
세리의 우두머리로 대표적인 죄인 취급받았던 삭개오였습니다. 그런 삭개오를 보시고 예수께서 그의 집에서 머물겠다고 하시니 삭개오는 기쁨으로 주님을 영접합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라고 선언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나 삭개오나 둘 다 하나님의 계시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하게 되지만 그 결과로 나타난 행동은 전혀 다릅니다. 한 사람은 자신을 과시하는 금신상을 세우고는 백성들에게 섬기라고 강요하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자신의 재산을 내놓습니다. 이 둘의 차이가 바로 회심과 유사 회심의 차이입니다.
  
2014년 봄부터 여름에 이르는 긴 시간을 지방선거를 거쳐 총리와 장관을 뽑느라고 청와대와 정치권이 아무 일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부끄럽게도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많은 후보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불법으로 사용하여 특권을 누렸던 것으로 드러나 온 국민을 실망시켰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압권은 그리스도인 후보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국민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이었는데도 교계의 지도자를 참칭하는 자들이 거기에 기름을 붓는 말을 덧붙인 사건들일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끊이지 않는 것일까요? 혹시 이들도 느부갓네살 왕처럼 미국의 선교사나 교회들이 지원해주는 엄청난 물질의 권능에 눈이 어두워져 입으로만 회심했던, 유사 회심 때문은 아닐까요? 나도 또 다른 유사 회심자는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교회가 과부의 명부를 작성한 까닭과 공동체복지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고독사라는 말이 관심을 끌고 있다. 그리고 고독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회복지전문가들은 공동체복지라는 방안을 말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편지를 보면 이미 초대교회 시절 교회는 공동체복지를 실천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교회가 전통을 다시 기억해볼 때인 같다.

 

고독사란 누군가의 죽음을 주변에서 상당 시간 동안 알지 못한 주검이 방치되어 있는 죽음을 말한다. 짧게는 며칠간, 길게는 수년 동안 주검이 방치되었다가 발견되어 우리를 충격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고독사를 포함하여 노인 인구의 급증으로 복지 수요는 증가하고 복지 인력을 늘이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회복지 전문가들은, 공동체복지라 하여 동네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는 것을 복지의 방안으로 제시한다.

 

사실 어느 시대나 가난한 노인의 문제를 안고 있다. 특히 여성 노인들이 문제가 된다. 크고 작은 전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크게 적었던 시대나 혹은 지금 우리나라처럼 평화시기에도 여성의 평균수명이 훨씬 길기 때문에 노인문제의 핵심은 언제나 과부의 문제로 귀결된다.

 

디모데전서 5장에는 이런 과부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먼저 과부는 가족(4) 책임져야 하고 가족이 없다면 친족(8, 16) 책임져야 한다. 효도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나 돌볼 가족이나 친족이 없는 참과부(NIV영어성경에는 widows really in need, 진짜 도움이 필요한 과부) 교회에서 명부에 올리라고 한다.

 

교회의 명부에 올린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할까? 10절은 선한 행실이 있었던 자로 한정하는 듯한 말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1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은 젊은 과부들에 대한 것으로, 학자들은 이런 말씀들을 근거로 교회가 재정적인 지원을 하고 교회 안의 선한 일을 하도록 했다고 해석하는 같다. 아무튼 적어도 교회가 참과부들에게 오늘날 사회복지제도가 해결하려고 하는 무언가를 제공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것이 재정적인 것이 되었든,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이 되었든, 혹은 다이든지 말이다.

 

특히 젊은 과부들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보면 참과부란 경제적 능력이 없거나 재혼이 불가능한 연령층의 과부들에 해당한다. 그런데 출애굽기 22: 22~24 보면 과부를 정의와 사랑으로 대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고, 율법서에는 여러 차례 이런 명령을 반복한다. 우리 주님도 과부를 옹호하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다. 따라서 그러한 참과부를 교회가 돌보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전통이 최근 빚어지는 고독사 문제나 혹은 공동체복지라는 관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교회 안에서 노인 신자들이 서로 의지가 되는 어떤 제도들이 마련된다면 교회가 바로 공동체의 역할을 하면서 고독사는 물론이고 다른 여러 문제들을 풀어갈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때 많은 교회가 잘못 적용했던 사례인 교회 유치원을 세우는 것과 같이 다시 양로원과 같은 시설을 만들자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무언가 할만한 일이 있지않을까?

많은 경우에 예배시간이면 우리는 주기도문을 외.운.다.! 믿음으로, 삶으로 고백하지 않고 그저 입으로 중얼거린다는 뜻이다. 소저너스에 바로 주기도문을 외우는 우리의 진짜 모습을 고백하는 글이 올라왔다.(아래 링크) 


http://sojo.net/blogs/2013/10/01/rewriting-lords-prayer-what-if-how-we-prayed-matched-how-we-live


이글을 읽다가 내가 지금 삶으로 증거하고 있는 가짜 주기도문을 작성했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소저너스에 있는 원글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다만 그 내용을 한글로 작성해 보았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빛을 가리는 삶을 사는 나의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두렵게 하시며

나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나의 뜻이 땅에서와 같이 하늘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갖게 하시고,

나의 죄를 용서하시되 내가 지불해야할 대가는 가능한 아주 작게 하시고,

나에게 죄를 지은 자에게는 모든 죄를 철저히 따져서 모든 대가를 지불하게 하시고,

내가 나의 이기심을 발견하는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나와 달리 생각하는 모든 것, 모든 자들로부터 나를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현재에 -영원이면 더 좋고- 나의 것입니다. 아멘

 


진짜 그리스도인의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페이스북에서 읽은 영어로 쓴 글을 한국어로 번역했습니다. 원저자를 확인할 수없어 밝히지 못합니다)


어머니의 자궁에 두 태아가 있었다.
한 아기가 다른 아기에게 물었다. “넌 출산 후의 삶을 믿니?”
다른 아기가 대답했다. “당연하지. 출산 후에 분명히 무언가 있어야만 해. 아마 우리는 나중에 될 무언가를 위해 우리 스스로를 준비시키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일 거야.”

“웃기는 소리” 다른 아기가 말했다. “출산 후에 다른 삶이란 없어. 그런 삶이란 어떤 것이지?”
“나도 몰라. 그렇지만 그곳은 여기보다 더 많은 빛이 있을 거야.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발로 걷고, 우리 입으로 먹게 될 거야.”
다른 아기는 “멍청한 소리! 걷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그리고 우리 입으로 먹는다고? 어리석기는! 탯줄이 영양을 공급해 주는데, 출산 후에는 생명이 사라져. 탯줄은 너무 짧거든.”이라고 말했다.
“내 생각에는 무언가 있는데 아마 여기와는 다른 무엇일거야.”
다른 아기가 대답했다. “아무도 그곳에서 돌아온 사람은 없어. 출산은 생명의 끝이고 출산 후의 세계에서는 오직 어둠과 불안만 있을 뿐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지는 못해.”
“그래, 나도 잘 몰라.” 다른 아기가 말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분명히 엄마를 보게 될 것이고 그가 우리를 보살펴줄 거야.”
“엄마?? 넌 엄마를 믿니? 그녀가 지금 어디 있는데?”
“그녀는 우리 전체를 감싸고 있어. 우리는 그녀 안에서 사는 것이지. 그녀가 없었더라면 이 세상도 없었을 거야.”
“나는 그녀가 보이지 않아. 따라서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이 논리적이야.”
여기에 대해 다른 아기가 대답했다. “때때로 네가 조용히 있을 때 너는 그녀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녀를 느낄 수 있어. 나는 출산 후에 실재가 있고 우리는 그 실재를 위한 준비를 위해 여기에 있다는 것을 믿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나 많은 글과 책이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도' 혹은 '선교'란 단어가 한국 교회에서 갖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생각해 보면 교회가 이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전도나 선교를 지상 최대 명령이라고 주장하는 말을 여기 저기에서 듣거나 읽었습니다. 이게 왜 지상최대명령인지, 사실, 나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전도나 선교가 지상최대명령이라고 말하는 것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리스도는 '사랑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전도나 선교가 지상최대명령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냥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지상최대명령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또 다른 논쟁이 있습니다. 선교 자체가 크리스텐돔(기독교왕국주의)적인 문화적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네 종교는 구원을 주지 않으니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이루라고 전하는 행위 자체가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전하는 방법이 "예수천당 불신지옥" 류의 메세지라면 그 전도 방법이 옳은 것인지 심각하게 검토해야만 합니다. '너 이거 가입하지 않으면 나중에 중병 걸려서 고생할 때 돈마저 없어 치료도 못받는다'고 공갈치며 보험에 가입시키는 공포마케팅처럼,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보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논쟁이 전파행위 자체를 금지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즉 종교의 자유는 믿음과 전파의 자유인데 이를 믿음의 자유로 크게 제한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가르치는 자가 오직 국가가 정해놓은 내용만을 가르치게 하는 것처럼 위험한 생각입니다. 객관화가 가능한 과학분야에서 객관화가 이루어진 내용만을 가르친다고 해도 상상력을 제한하는 어리석은 일인데, 하물며 십인십색의 해석이 가능한 인문사회분야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교사의 해석이 아닌 국가의 해석으로 제한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세뇌교육으로 변질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적 신념에 대해서 자기의 신념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정신적 폭력입니다. 기자가 어떤 사실을 알고 있지만 기사로 쓰지는 못하게 하는 것을 모든 사람이 독재라고 비난하면서 종교에 대해서는 이를 정의라고 말하는 이상한 논리입니다. 게다가 공산주의국가로 종교의 자유가 없다고 비난받는 중국조차도 믿음의 자유는 허용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다 그정도의 자유만을 허용해야한다는 주장이라면 분명히 심각한 일입니다.


심지어 나는 한 학자로부터 '기독교인들이 선한 일을 하는 것도 전도를 위한 것이니 선한 일도 하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들을 적이 있습니다. 나는 속으로 우리 주님이 하셨던 기도,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를 기억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선한 일 하는 것을 멈추면 세상이 얼마나 더 악해질까 혹은 그들을 대신하려면 얼마나 많은 세금과 얼마나 많은 인력이 필요할까를 헤아려 보지 않고 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미워보인다 하지만 소리없이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이 또 얼마나 많이 있는지 헤아려 본 적이 없는 사람의 말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에 신중한 자기 검열이 필요합니다. 이는 어떤 사람들처럼, 현대 사회가 이렇게 종교자유를 제한하려는 움직임에 대하여 기독교가 로마의 박해 아래 있을 때에 더욱 널리 퍼졌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용기 백배하자고 말할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가 로마의 박해 아래에서도 더욱 널리 퍼졌던 것은 그 시절 믿음의 선배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켜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더욱 늘어나게 했던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으로 세상을 감동시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이지 악다구니를 써서 오히려 세상이 그리스도를 욕하게 하는 사람들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은 이곳 시간으로 2012년 마지막 밤입니다. 이미 한국은 새해 첫날의 오후가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가족이 함께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가진 뒤, 1년을 돌아보고 2013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기도로 가족의 신앙나눔을 마쳤습니다.


오늘 나눈 말씀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에서 시편 1편으로 정했습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세상에서 말하는 복있는 사람과 성경이 말하는 복있는 사람은 그 근본이 전혀 다릅니다. 우선 끝에 있는 6절에서 거꾸로 시작해 봅시다. 세상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합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그리고 그 길의 끝은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심판과 연결됩니다. 의인의 길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다고 합니다. 이말은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 혹은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시편 37:18, 121:5) 그러나 악인의 길은 망한다고 심판이 예정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지요.


특히 시편 145:20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라고 말하십니다. NIV는 여기서 보호한다는 말에 앞의 '인정하신다'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번역하고 있습니다. 또 의인이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 심판이 없다면 박탈당하는 자의 아픔을 위로할 방법이 없습니다. 흑자를 내고 있으면서도 주주의 이익을 최대화 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직원을 모두 해고하고 필리핀으로 도주하려는 한진중공업의 경우를 이야기 했습니다.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노동자들이 나타나게 하는 그 경영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세상의 위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무심한 분이 아닙니다. 이집트 땅에서 외치는 이스라엘 노예들의 비탄의 소리를 들으시고 해방의 역사를 시작하셨던 분입니다.(출애굽기 2:23)


이제 다시 앞으로 가봅시다. 그렇다면 의인, 즉 복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율법이란 모세 5경, 특히 율법이 주로 기록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이 말씀을 모호하게 성경이라고 이해하면 다시 두 가지 문제를 안게 됩니다. 하나는 사실이당시의 율법은 이 책들이었음을 간과하게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사상에 적당히 물타기를 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두번째는 그 율법에 나타나는 사상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율법서를 읽으면 종교적 의제, 의식에 대한 내용을 빼고 보면 매우 분명하게 부각되는 하나의 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안식일-안식년-희년이라는 축입니다. 예를 들어서 십계명의 처음 몇개의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의제입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사회적인 윤리입니다. 이둘을 연결하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즉 안식일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명령에 이어 그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고, 안식일을 지키는 그 신앙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생활윤리를 나열하는 구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자는 안식일-안식년-희년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자라고 좁혀서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렵게 해석해서 이해해야할 그 어떤 다른 뜻도 없습니다. 그대로 직설적입니다. 안식일에는 너와 네 종이나 육축이나 네 집에 거하는 그 누구도 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안식이지요. 왜? 그것은 하나님도 창조하실 때에 엿새 일하고 하루 쉬셨기 때문입니다. 생명 있는 것들의 안식의 근거를 절대자인 하나님에게 둔 것입니다.

그말을 하기 위해 그 앞에 다른 계명이 필요합니다. 다른 신(우상)을 두지 말라(바알처럼 돈과 권력을 위해 다른 생명의 안식을 빼앗는 거짓 신이나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이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을 이렇게 좁은 의미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지만 이점은 분명합니다.


안식년은 여기에 추가하여 토지의 안식과 종족 중의 노예된 자의 해방을 명령합니다. 희년은 아예 모든 노예의 해방과 더불어 원래 자기 땅이었던 곳의 회복을 명령합니다. 부자나 가난의 대물림을 규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50년 동안은 자기 노력에 의해 더 부자가 될 수도 있지만 자기 노력이 아닌 부나 가난의 대물림은 안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이런 정신을 제도속에 녹여 넣어여 하고, 동시에 개인은 나눔을 통해 이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편 1편은 바로 그 율법을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율법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자는 그 말씀을 지켜 행하게 됨은 당연합니다. 그런 사람이 악인의 길이나 죄인의 길에서 떠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한 일은 그런 사람이 진짜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3절).


오늘 우리 가족은 이 말씀을 통해 2012년을 돌아보고 2013년을 생각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2013년을 시작하면서 좌절과 실의에 빠져있는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 특히 비정규직이나 특수고용직(화물차기사, 택배기사 등)에 있는 사람들, 생활터전을 유린당하는 제주 강정마을사람들, 쌍용차 등등 우리 사회의 현안이 되고 있는 모든 눌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남아공의 흑인들에게 찾아가 설교했던 투투주교의 말로, 새해 인사를 대신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우리 스스로를 미움으로 채우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보여줍시다. 복수에 대한 열망으로 우리를 채우지 맙시다. 우리의 자유는 여기에 우리의 손에 금방 닿을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질투에 빠져서 아니야 그들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려고 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상을 빼앗아가게 하지 맙시다. 우리는, 그의 백성을 노예에서 해방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그런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사람들)입니다. [God Is Not a Christian. pp.168-169])


“Children of God, let us show that we are the children of God by not being filled with hatred. Let us not be filled with a desire to revenge. ...... Our freedom is here we are about to touch it and there are people who are jealous, who say no they don’t want us to be free. Don’t allow them to take away our prize. ...... We worship a God who we know is a God who leads his people out of bondage into the Promised Land.”

내가 페북에서 나누는 대화의 많은 내용은 성경을 읽으며 깨달은 내용을 공유하는 것들입니다. 물론 그 깨달음이 내 삶에 주는 의미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로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나도 다른 사람들의 글에 반응을 보이지요. 그러다 보니 어느 곳이나 글을 쓰고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누군지 비록 이름뿐이지만 대충 알고 지냅니다.

 

그런데 선거 이후 심리적 충격에 빠진 일부 페친들이 계속 대선 결과를 놓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나는 결과보다는 미래를 이야기하면 좋겠다는 게 진심입니다. 그러나 선거 이후 급박하게 벌어지는 일들(현대차가 비정규직을 용역깡패를 동원하여 공격했다거나 한진중공업이 슬그머니 김진숙씨의 농성으로 합의했던 내용을 뒤로 뒤집어 노동자를 자살에 이르게 하는 등) 때문에 많은 분들이 대선 결과를 놓고 울분을 토할 수밖에 없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거의 볼 수 없었던 인물들이 이런 글들에 댓글을 달고 다닙니다. 전부터 종종 봐왔던 이름이라면 아, 이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하고 그냥 넘어갈 텐데, 안보이던 분들이기 때문에 걱정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들의 공통점은 아주 점잖게 하나님을, 혹은 신앙을 이야기 하면서 슬그머니 누구누구, 혹은 어떤 집단은 배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빨갱이가 어떻고 종북좌파가 어떻고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몇 가지 서로 연결되지 않는 단편적인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1. 이들이 진짜 그리스도인일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 내말은 진짜 회심한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아니라 공작교육을 받고 나선 공작원 같다는 느낌입니다. 암튼 아주 차분하게 사람 속에 불을 지르고는 인사까지 하고 갑니다.

 

2. 그럼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가능성이 의심됩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한풀이를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선거운동의 일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3. 그러나 이번 기회에 아예 노동운동이나 진보적인 사고는 물론 합리적인 보수까지 싹을 없애 버리자는 것입니다. 수구언론의 사설들이 그렇게 말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공약은 공약일 뿐이다. 지킬 필요 없다라고 당선자에게 요구하는 사설들 말입니다. 스스로 내놓았던 공약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한편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무언가 석연치 않습니다.

 

암튼 그 진실이 어디에 있든지, 그들이 노리는 것은 아주 단순합니다.

1. 우리를 멘붕에 빠트려 도무지 움직일 엄두를 못 내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고통 속에서 이런 상태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2. 우리 스스로 진보적 가치를 포기하고 진보 정치인들을 배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일부 정치 평론이나 민주당 일부 인사들이 이 대열에 합류했더군요.

 

그런데 회가 그렇게 저주해 마지않는 유물론적 가치관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은 대기업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기업의 이익만 생각하는 물질 중심 사고방식이 글자 그대로 유물론이지요. 그런데 소위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행동하는 그들이 정반대로 생명의 가치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종북좌파라고 손가락질 하고 그들을 배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들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진짜 빨갱이라도 어떻게 함께 갈 것인가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하물며 유물론자들에게 목숨을 저당 잡힌 채 죽어가는 자들을 향해 비수를 던지는 모습을 보면 도저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친히 주셔서 대속하신 구원을 돈으로 대체해 놓은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멘붕을 운운하지 맙시다. 두 눈 부릅뜨고 당선자가 공약을 어떻게 지키는지 지켜봐야 합니다. 지금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현실은 현실입니다. 그리고 당선자를 위해 댓글 달기에 여념이 없으신 분들께 부탁합니다. 당신들이 정말 그리스도인이고 양심과 인정을 가진 진짜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고 당선자에게 지금 벌어지는 이 죽음의 행렬이 멈출 수 있도록 의지를 밝히라고 말씀하십시오. 지금 괴로워하는 이 사람들은 당신들이 건들이지 않아도 다시 살아납니다.

나는 오래 전 환경문제를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해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당시의 글에는 성경적 근거와 교회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들(http://alafaya.tistory.com/194)을 적었습니다. 그런데 캐나다에서 발행되고 있는 Faith Today라는 기독교 잡지(이 잡지는 캐나다 복음주의권을 대표하는 신앙잡지입니다)11/12월호에 “How to Green your Church”라는 제목의 기사(http://digital.faithtoday.ca/faithtoday/20121112#pg36)가 있어서 요약 정리하여 소개합니다.

 

1. 먼저 환경문제에 대한 복음주의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은 선언들을 참고하면 됩니다.

1) 2002 지구온난화에 대한 옥스퍼드선언(Oxford Declaration on Global Warming)

2) 2009 창조책무와 기후변화에 대한 미가선언(Micah Declaration on Creation Stewardship and Climate Change)

3) 2010 환경책무의 도전(Lausanne’s Conversation Paper of The Challenge of Environmental Stewardship)

4) 2012 개혁교회 창조책무보고서(CRC Creation Stewardship Report)

* 1)-3)은 2-3쪽짜리 선언문이어서 상징적인 내용이지만 4)는 12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2. 교회당의 신축이나 개축을 할 때 친환경건축을 도입

1) 이중창으로 해서 보온 및 단열효과

2) 지붕의 색을 회색으로 해서 태양열 차단효과로 여름 냉방수요 줄기기

3) 십자가를 따로 설치하는 대신 지붕에 십자가모양으로 태양전지 패널을 설치하여 태양광발전

 

3. 교육

1) 기독교세계관교육: 창조-타락-구속의 과정을 환경관점에서 바라보기

2) 주일학교 학생들과 함께 텃밭 가꾸기

3) 매월 마지막 주에는 전교인이 걷거나 자전거, 대중교통으로 교회오기, 국산 의류를 입고 오기

 

4. 교회 내에서 당장 실천 가능한 것들

1) 일회용 컵 사용하지 않기

2) 공정무역 커피 등 공정무역 상품이용하기

3) 지역 제과점 이용하기

4) 교회의 미션리스트에 '환경활동에 기부하기'를 추가

5) 교회 정원에 재래종 식물을 심기

6) 정원에 빗물받이를 설치하여 물사용 줄이기

7) 시골 교회라면, 방풍림을 조성하여 겨울철 난방수요 줄이기

"Don’t let any feel they have been left over.

그 누구도 자신들이 남겨졌다고(배제되었다고) 느끼게 하지 말라."

(1991년 북아일랜드의 장래에 대한 협의에서 영국이 북아일랜드공화군이 폭력적이라면서 북아일랜드공화당을 대화 주체에서 배제한 일에 대해 TV로 중계된 더블린 성공회당의 예배 설교에서, [God Is Not a Christian. 82p.])

 

"I deplore just as strongly the use of violence, whether it is the violence of those seeking to change the staus quo or those seeking to uphold it. It is necessary, though, to go beyond vigorous denunciation of violence. We must go further by insisting on the removal of the conditions which are conducive to violence.

나는 그것이 현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이든 아니면 현상유지를 꾀하는 것이든 폭력의 사용에 대해 매우 한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폭력을 조장하는 조건들을 제거하도록 주장하는데 까지 나아가야만 합니다."

(예루살렘의 성죠지성당에서 크리스마스 예배를 마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책임 있는 협상을 촉구하며 투투가 한 말. 다음 날(1226) 아침 투투 일행이 홀러코스트 박물관을 향해 성당을 나서자 벽에는 밤새 다음과 같은 구호로 덮여 있었다. “Tutu is a black Nazi pig. 투투는 검은 나찌의 돼지이다.” 이를 보고 투투가 쓴 방명록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난다. [God Is Not a Christian. pp.93-94])

 

"Forgive all people who oppress others, dear God.

오 하나님 다른 사람을 압제하는 모든 자들을 용서하소서."


WCC에 대한 한국교회의 논란

한국복음주의협의회(한복협)의 11월 월례회에서 내년에 열릴 WCC 부산총회를 주제로 연찬회가 열렸다고 합니다.(“복음주의, WCC 비판하지만 성공하길 바라”, 11월 10일*) 이 기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김명혁목사가 대독한 발제문을 통해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는 WCC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고 합니다.

“선교 과정에서 교회가 도구적인 기능으로서 실패를 하면, 하나님이 다른 도구(다른 종교 혹은 정치 해방운동)를 통해 사용한다는 WCC의 논리는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구원 역사와 인류 역사' 간의 구분을 제거했다”

또 지난 10월 8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기독교사상연구원(최덕성 원장) 주최로 열린 WCC 토론회에서는 찬성 패널은 참석하지 않은 채 반대측만의 일방적 성토장이 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주최측인 최덕성원장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역시 뉴스엔조이 기사("WCC 가입은 에이즈 환자와 동침한 꼴", 10월 9일 **)는 전합니다.

“최 원장은, WCC 홈페이지에 있는 문헌을 살펴본바 WCC는 복음 전도를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 통행으로 규정한다고 했다. 최 원장은 "타 종교도 진리일 수 있기에 쌍방 통행해야 한다는 말인데, 이는 예수만이 구원(한다는 신앙)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넘어선 구원이 다른 종교에도 있다면 굳이 기독교를 믿을 필요가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략)
토론회가 끝날 즈음, 최 원장은 과격한 비유를 들며 WCC를 찬성하는 교단들에 대한 비난 수위를 높였다. 그는 한국교회 내 5%도 안 되는 목회자들이 WCC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면서 "이들이 신앙무차별주의를 조장하고, 종교다원주의를 주창한다"고 했다. 최 원장은 "(에이즈 환자와) 동침 자체는 쾌락을 주지만 곧 죽음을 맞이하는데, WCC에 가담한 목회자와 교단은 이미 그 수준을 넘어섰다"고 평가했다. 최 원장은 "WCC에 속한 영국·독일·미국·캐나다·네덜란드·호주에 있는 교회들이 사실상 죽었다"면서 한국교회도 다른 나라 교회처럼 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사람의 생각이란 참 재미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WCC에 속한 영국·독일·미국·캐나다·네덜란드·호주에 있는 교회들이 사실상 죽었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그분은 지금 많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한국 교회가 이미 사망 단계를 지나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고 한탄하는 말을 들어보기나 했는지, 그리고 들어 보았다면 왜 두 시각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를 수 있는지 의문을 가져보았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그렇게 여러 차례 읽었으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읽었다가 어느 날 새로 읽는 도중이나 혹은 다른 사람의 글을 통해 ‘어? 그런 말씀이 있었던가?’하는 느낌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최근에 읽은 투투주교의 책속에서 바로 그런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이사야 45:1-4]의 말씀입니다.

1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2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3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4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나 주가 기름 부어 세운 고레스에게 말한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굳게 잡아, 열방을 네 앞에 굴복시키고, 왕들의 허리띠를 풀어 놓겠다. 네가 가는 곳마다 한 번 열린 성문은 닫히지 않게 하겠다. 고레스는 들어라!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산들을 평지로 만들고, 놋쇠 성문을 부수며, 쇠빗장을 부러뜨리겠다. 안보이는 곳에 간직된 보화와 감추어 둔 보물을 너에게 주겠다. 그 때에 너는, 내가 주인 줄을 알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부른 것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을 도우려고 함이었다. 네가 비록 나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너에게 영예로운 이름을 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주다.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다. 나 밖에 다른 신은 없다. 네가 비록 나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는 너에게 필요한 능력을 주겠다. 그렇게 해서, 해가 뜨는 곳에서나, 해가 지는 곳에서나, 나 밖에 다른 신이 없음을 사람들이 알게 하겠다. 나는 주다. 나 밖에는 다른 이가 없다. 나는 빛도 만들고 어둠도 창조하며, 평안도 주고 재앙도 일으킨다. 나 주가 이 모든 일을 한다.””
‭‭이사야서‬ ‭45‬:‭1‬-‭7‬ ‭새번역성경

1절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표현은 바로 메시아이신 예수께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고레스는 페르시아(바사, 지금의 이란)의 왕입니다. 4절을 보면 고레스는 아예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자였습니다. 그런 그의 앞길을 열어주고 복을 주었으며, 이스라엘을 위해 그를 택하였다고 하십니다 . 심지어 메시아와 같은 격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사야서의 45장 근처에는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나 최덕성원장이 읽는다면 ‘이건 성경이 아니야’라고 주장하고 싶을 만한 말씀이 여기저기 등장합니다.

흔히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을 비난할 때 ‘한손에는 칼을 한손에는 코란을 들었다’고 표현합니다. 이 말 역시 쌍방통행이 아닌 일방통행을 표현하는 가장 강력한 문구입니다. 똑 같은 주장을 그리스도인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복음전도가 ‘믿을래, 죽을래?’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반응이 나타나기를 기도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철저히 쌍방통행입니다. 물론 WCC가 항상 옳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잘못도 있겠지요.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의 첫 질문은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자신의 안위와 성공과 풍요를 위해 존재하는 다른 많은 이방신들과 야훼 하나님을 구분하는 너무나 명확한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 가운데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자기들을 위해 존재하는 독점소유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2542
**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2259


제3성전 주장은 중동전쟁을 촉발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요즘 김종철감독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한다고 해서 널리 알려진 제3성전은 기독교는 물론이고 성경이나 심지어는 유대교와도 관계없는 이데올로기일 뿐입니다. 김종철 감독이 만든다는 영화의 내용을 정확하게 언급한 곳은 없지만, 어느 기사에 김 감독이 ‘제3성전 건립을 위해 기도해야하는지 고민’이라고 했다더군요. 그 영화 내용이 그냥 객관적인 사실을 소개하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면 그 메시지를 볼 때까지 김 감독이나 그 영화에 대해서는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제3성전이라는 주장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마가복음 13:14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것을 보거든’이라는 말씀을 이용합니다. 이는 원래 주님께서 다니엘서 9장의 예언을 인용해 하신 말씀입니다. 유대가 멸망할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바벨론에 잡혀 가는 기간이 70년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다니엘서 9장은 그것을 알게 된 다니엘의 기도로 시작하고 있지요.
 
이들의 주장처럼 성전에 번호를 붙인다면, 제1성전은 솔로몬이 지은 것이고, 이는 유다가 망할 때 소실됩니다. 이를 재건(제2성전)하는 과정이 느헤미야서에 기록된 사역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스룹바벨, 느헤미야, 헤롯을 거쳐 예수님 시대에도 서 있었지요. 주님은 이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언했고 실제로 서기 70년 로마의 침략으로 파괴됩니다. 마태복음 24장에는 주님이 제자들과 이런 내용의 대화를 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에 의해 멸망할 때 주의할 것을 가르치는 내용이지요. 그런데 이 말씀이 종말에 대한 가르침과 섞여 기록되어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멸망과 종말을 혼동하게 된 것입니다.(성경의 장과 절은 후대에 나눈 것이어서 원래는 혼동되게 기록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주장을 인용한다면, 제3성전인데 이는 바로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교회 그 자체입니다. 요한복음 2:18-22에는 잘 알려진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유대인들이 너의 권위를 입증할 기적을 보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너희가 성전을 허물면 3일 만에 다시 세우시겠다고 하시지요. 요한은 친절하게 21절에서 이는 주님의 몸이 바로 성전이라고 설명을 달아두었습니다. 제3성전 건설 운운하는 자들의 있을 줄 알고 미리 입을 막으신 것입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이런 말씀이 사마리아에도 선포됩니다. 요한복음 4:20-26에 있는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나눈 대화이지요. 이 말씀의 중요한 내용은 건물로서의 성전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여인이 ‘어디에서 예배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요. 시온산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마리아인들처럼 그리심산(그리심산은 출애굽 당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 받는 내용을 선포하여 따라 외치게 했던 산)에서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주님은 둘 다 아니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해야 할 때가 온다고 대답하십니다. 장소는 의미 없고 오직 우리의 중심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바로 그때가 주님이 오신 그 ‘때’라고 선포하십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또 교회(그리스도인의 모임) 자체가 성전입니다.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 3장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말은 복수와 단수가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아 가장 오해되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만, 원어로는 이 ‘너희’는 단수가 아닌 복수형입니다. 즉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3성전은 건물이 아니고 바로 우리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 명령도 ‘성전을 지어라’가 아니라 ‘증인이 되라’인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린도전서 3:16-17)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누가복음 24:46-48)
 
오랫동안, 특히 19세기에 더욱 더, 러시아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나라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1890년경에 시오니즘운동이 시작되었지만, 1930년대까지 별 수확이 없었습니다. 유대교는 메시아가 와서 이스라엘을 다시 건설한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경건한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릴 뿐이었지요. 그런데 아브라함 아이작 쿡이라는 랍비가 자기들이 나라를 직접 건설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빨리 이루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추종하던 정치인들은 나라 건설을 위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라거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몰아내고 자기들이 정착하는 일에 ‘비도덕적인 측면은 전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음만도 못한 상황에 몰아넣는 장벽을 건설하기도 합니다. 이는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종교적진리나 도덕조차도 왜곡시킨 채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전형적인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런데 제3성전과 관련한 논쟁 속에도 똑 같은 이데올로기가 숨어있습니다. 첫째는 이일을 추진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에게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법궤라고 말합니다. 법궤는 모세가 하나님께 받았던 십계명 돌판을 담은 상자인데 솔로몬시대 이래 기록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의 모세오경을 통해 이미 말씀이 기록되어 이 돌판은 용도가 다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 자체가 신비한 힘이 있는 것으로 오해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것은 또 다른 우상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여 이스라엘을 전쟁에 패하게 하실 뿐 아니라 이것을 적군에게 빼앗기게 했던 사건으로 미루어 보아 폐기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한 가지 가능성은 나중에 식민지 시절에 적에게 넘어가 사라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것이 예루살렘에 세워진 이슬람 모스크의 지하에 묻혀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제3성전을 건설하려면 이슬람 모스크를 파괴해야 하는 것이지요.
 
두 번째 부류는 이를 하나님의 시간표 운운하며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의 계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그 때를 알지 못한다고 하셨던 것은 그 시간이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아래 있기 때문에 그 시간에 관심을 갖지 말고 늘 깨어 있으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척척 맞아 떨어진다’는 둥의 말로 성도들을 미혹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야 비로소 종말이 오고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하면서 모스크를 파괴하고 제3성전을 건설하는 것을 지원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랍비 쿡이 주장했던 것과 본질적인 의미가 같습니다.
 
이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중동은 또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될게 분명한 데도 자기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또 다시 거짓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데올로기가 작동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적그리스도 같은 생각이 한국에서 숨 쉴 수 있는 배경의 하나는 바로 예배당(교회당)을 성전으로 부르는 한국교회의 오류 때문입니다. 교회가 바로 서지 않으면 미혹하게 하는 영이 설치게 됩니다. 

 구약성서의 많은 내용은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갑자기 웬 성서 이야기냐고요? 그들의 역사 속에서 지금 우리의 상황을 돌아보게 만드는 기록이 있어서 함께 생각해 보자는 게지요.


이스라엘이 우리처럼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던 시기에 북쪽의 이스라엘에는 아합이라는 왕이 있었답니다. 그는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왕비로 맞이했는데, 이 여자는 바알이라는 신을 섬기는 선지자이자 한 부족의 왕이었던 엣바알의 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합은 이스라엘의 신이었던 여호와를 배반하고 바알신을 섬기게 되지요. 그들이 어떤 종교를 가졌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요? 그렇지요. 상관은 없습니다만 한 상징적인 사건을 통해 그 속에 담긴 뜻을 살피면 이게 결코 남의 일 같지가 않을게니 조금 더 참고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합왕의 궁전 근처에 포도밭이 하나 있었는데, 나봇이라는 사람의 것이었지요. 아합은 그 포도밭을 자기 채소밭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봇에게 그 포도밭을 다른 좋은 포도밭이나 또는 돈과 바꾸자고 제안합니다. 이 요구에 나봇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조상의 유업을 왕에게 넘기는 것을 금하실 것입니다.”


참고로 말하면, 여호와는 조상이 물려준 땅은 그 주인이 빚 때문에 팔았을 때조차 가장 가까운 친척부터 시작해서 친척들이 그 땅을 되무를 수 있도록 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50년 간격으로 찾아오는 희년)에는 무조건 그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정해놓았답니다. 그래서 아합은 자신의 욕심을 채울 수 없었고 근심으로 끼니를 거르기까지 했다지요. 이 때 왕비 이세벨이 이렇게 핀잔을 줍니다.

왕이 그러고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모름지기 왕이라면 힘없는 백성의 것을 마음대로 빼앗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세벨은 나봇이 사는 성의 귀족들에게 연락해서 나봇을 모함하여 죽이도록 하고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았습니다. 이세벨은 아합에게 이스라엘의 신이었던 여호와와 달리 가진 자와 힘 있는 자들의 폭력적 특권을 보장하는 바알신을 섬기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를 가르쳐 준 셈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힘 있는 자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이세벨의 폭력 앞에 굴복하여 어쩔 수 없이 바알을 섬겼지만 점점 가진 자의 특권의 맛에 길들여진 것입니다.


이 때가 바로 기독교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갈멜산에서 엘리야라는 여호와의 선지자하고 바알의 선지자 450명 사이에 대결이 벌어질 무렵입니다. 대결과정은 생략하고 아무튼 엘리야는 바알신의 선지자들을 도륙해 버립니다. 그러나 기세등등한 이세벨과 돈과 권력 맛에 길들여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엘리야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고, 실제로 많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한답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엘리야는 여호와께

저들이 다 죽이고 나만 남았다

고 말합니다. 이 때 여호와가 대답하기를

이스라엘에 아직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 칠천 명을 남겨두었다

고 말합니다. 이게 오늘 제가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게냐 구요?

최근 정치판 돌아가는 꼴과 각 언론사가 발표하는 대선 후보 지지율 한번 보십시오. 그리고 그 후보들의 면면을 살펴보십시오. 그것들을 염두에 두고 이글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오. 2002년 가을 그리고 겨울의 한국정치는 바알을 섬기는 자들과의 싸움 같지 않으십니까? 어떻습니까? 우리는 남은 칠천 명입니까?                                 (2002.1.14)

나는 하나님이 도덕적인 우주를 창조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정의와 불의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진짜 신념을 말하고 있었다. 불의한 정권은 부인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부인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항상 망한다. 귀중한 하나님의 세상에서 불의, 압제, 인종주의, 미움, 그리고 인간성말살은 최종적인 세상을 차지할 방법이 없다! 마지막 날에, 즉 바울 사도의 멋진 말을 이용한다면, “때가 이르면하나님의 높은 법이 충만할 것이다. 금상첨화인 것은 전 세계의 수많은 기도자들이 우리를 놓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실패할 수 있었겠는가? - 문제투성이 시대의 희망(밥 구즈와드 지음)의 서문에 쓴 투투주교의 글

 

I was expressing my real conviction that God has created a moral universe, that God cares deeply about justice and unjustice. Unjust regimes ultimately always fall because they seek to deny something that can not be denied. In God’s precious world, there is no way that injustice, oppression, racism, hatred, and dehumanization can have the final world! At the end of the day, “in the fullness of time”(to use the apostle Paul’s marvelous phrase), God’s higher laws would prevail. To top it off, the prayers of so many people around the world unheld us. How could we fail? - Foreword written by Tutu in HOPE IN TROUBLED TIMES(Bob Goudswaard etc) 

초기 기독교회 저작물 영어번역본을 읽고 싶으신 분은

 http://www.earlychristianwritings.com 

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바알신앙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았지만 많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면 거의 병적인 거부반응을 보이면서 요즘 잘나가는 뉴라이트연합이나 한기독교총연합인가 하는 단체들은 빨갱이라고 공격해대니 그저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정말 내가 하나님 편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 평가에 도움이 될 성경이야기이다.
 

때는 이스라엘이 남북 왕조로 나뉘어 멸망해 갈 때이다. 열왕기상서 16장을 보면 시므리가 쿠데타를 한 후에 다시 오므리가 쿠데타를 해 사마리아를 건설한다.(열상 16:16) 


오므리는 군대장관으로 당시 기준으로는 지주계급이었다. 오므리는 자기 출신성분에 맞게 북왕국 이스라엘에 지주제도와 노예제도를 정착시킨다.(미가 6:16) 이렇게 뿌리내린 여호와 보시기에 사악한 제도는 이스라엘을 결국 아합왕이 나타날 정도로 타락시켰다. 아합은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하는데 엣바알은 '바알과 함께'라는 뜻으로 바알교의 사제를 지칭한다. 즉 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제사장의 딸과 결혼했던 것이다. 



결과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당시까지 이스라엘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며 따라서 개인이 전적인 소유권을 갖지 못하였다. 하나님이 전적인 권능으로(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차지하는 전쟁은 모두 하나님이 승리해 주신 것이지 이스라엘사람들이 승리한 것이 아니었다) 주신 땅을 다시 하나님 앞에서 제비뽑아 나눈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합왕은 이세벨의 꼬임에 넘어가 이를 무시하고 탐나는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 나봇을 모함하여 죽이고 그 땅을 차지했다. 이스라엘이 비로소 왕정 지주제도를 정착시킨 것이다. 이래서 안식년과 희년이 역사에서 사라진다. 땅이 하나님의 것이었을 때는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안식년과 희년을 지켜야 했지만 일단 바알을 섬기기 시작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이 차지하는 것이 축복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역사가들의 눈으로 보면 이것이 고대국가 체제의 완성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사악한 범죄였다. 그래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바알사제들을 몰살시키신 것이다. 


(이 부분에서 오해 없기를 바란다. 바알이라는 이방신을 섬기지 말라던 여호와의 명령은 단순히 이방종교 즉 미신을 섬기지 말라가 아니라 그 이방신을 섬기는 종교, 철학의 가치관을 말살하라는 명령이다. 이를 자꾸 종교의 틀 안에 가두어 놓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하나님의 눈에는 말살해야할 종교로 변해가고 있다.) 


남왕국 유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 기록은 이사야서 36, 37장에 있다. 


앗수르의 왕 산헤립은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이제 유다를 마저 없애러 온다. 그런데 산헤립은 전쟁을 하지 않고 희한한 말을 한다. '내가 너희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겠다.'는 취지의 말을 한 것이다. 즉 유다 역시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이미 토지를 차지한 소수의 지주들이 있었고 다수의 백성들은 토지가 없이 가난에 허덕이며 노예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산헤립은 그 약점을 비집고 들어왔다. 너희에게 토지를 나누어 줄테니 쓸데없이 저항하지 말고 지주들을 배반하고 자신에게 투항하라는 제안을 한 것이다. (이사야 36:16-17) 


이 때 히스기야왕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듣는다. (이사야 37:30) 


이 징조는 잘 해석해 보면 바로 희년을 선포하라는 말이다. 7번째 안식년인 49년째에는 농사를 짓지 않는다. 또 50년째에는 희년이기 때문에 농사를 짓지 않는다. 그리고 51년째에 비로소 농사를 짓는다. 희년이 되면 모든 토지를 원 소유주에게 돌려주고 노예를 해방한다. 이 희년의 선포로 비로소 유다 사람들은 앗수를에 대항하여 싸워야할 이유가 생겼다. 물론 하나님은 희년을 지킨 유다에 해방을 주셨다. 하나님의 군대가 앗수르를 물리쳤고 이때 병든 산헤립은 결국 죽어버려 앗수르의 역사는 끝난다. 


구약의 이 역사 기록은 하나님이 얼마나 바알신앙을 미워하시는 지를 전적으로 보여준다. 왜 가나안에 들어갈 때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그 땅을 도말하여 없애라 하셨는가, 왜 그 땅의 이방신뿐 아니라 그 땅의 풍습을 따르지 말라고 하셨는가? 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인류의 역사는 여호와를 섬김으로써 생명을 구원하는 여호와 신앙과 바알을 섬김으로써 부와 권력을 우위해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바알신앙(신역에서는 맘몬신앙) 사이의 갈등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 편인가? 



내가 그리스도인들과 이야기하면서 환경보호에 대한 생각을 물으면 대부분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환경보호는 좋은 일이잖아요. 그리스도인이니까 좋은 일에 동참해야지요.’ 맞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좋은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윤리적인 대답은 가끔 문제를 일으킵니다. 세상의 윤리와 성경의 윤리가 항상 같지는 않아 좋은 일에 대한 판단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세상의 윤리는 시대에 따라 또 환경에 따라 수시로 바뀌기도 합니다. 환경보호에 대해서도 성경적 관점이 아닌 세상 윤리를 기준으로 삼으면 교회의 입장도 그렇게 변덕스럽게 됩니다. 물론 성경이 환경보호에 대해 명확하게 이야기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심지어는 환경보호가 자연신을 숭배하는 것처럼 비칠 때도 있습니다.

정말 그리스도인은 환경보호가 좋은 일이니까 동참해야 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우리의 세상사를 시시콜콜히 이야기하는 책이 아닙니다만, 그러나 우리 삶의 중요한 기준(가치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규칙을 적용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사가 혼란스러울 때면 성경이 가르쳐주는 기준에 따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다스리는 존재, 사람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기록입니다. 마지막으로 만든 것이 사람이고, 이 사람에게는 특별한 명령을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위에 적은 창1:28의 말씀입니다. 1)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2) 땅을 정복하라. 3)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사실 이 하나하나는 기독교 신앙, 혹은 성경적인 삶(가치관)에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만, 결국 사람은 번성하여 땅을 채우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에서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다스리다는 말은 지배한다는 말과 다릅니다. 폭군은 지배하지만 선한 임금은 다스립니다. 다시 말해 다스리다에는 폭력성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영어단어로는 subdue인데 오늘날의 의미는 정복하다, 진압하다의 뜻이지만, subdue가 합쳐진 말입니다. due마땅한또는 합당한의 의미이고 sub‘~의 아래의 의미입니다, 합하면 마땅히 그러해야 할 모습 아래에 있게 하다정도의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생물을 마땅히 그러해야 할 모습대로 관리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은 자연신을 숭배하는 것과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우리가 관리자이기 때문에 그들을 숭배할 수 없습니다. 자연재해 때문에 산에 혹은 바다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땅에 정복당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파괴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생물의 관리를 위탁받은 존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학을 공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관리해야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지요.

 

생물을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

 

9:9~11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우리집 거실에는 멋없이 크기만 한 탁자가 하나 있습니다. 집에 오는 사람마다 웃으면서 집하고 안 어울린다고 돈 있으면 탁자 하나 사지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 탁자는 제가 어느 여름날,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만든 것이어서 내게는 너무 소중합니다. 생명도 없는 이 탁자 하나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께 이 세상 생물들이 얼마나 소중할지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노아의 홍수라고 말하는 대홍수 사건 이후에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무지개를 주시며, 언약하십니다. 누구와 했을까요? 성경은 모든 생물하고 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하고만 언약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착각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재림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으실 때(이사야 66:22)까지 이 땅과 하늘을 그리고 생물들을 관리할 책임을 맡은 하나님의 청지기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적용: 광우병과 줄기세포연구

 

이제 이런 기준을 실제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적용하여 봅시다. 첫째 적용 사례는 광우병입니다. 광우병은 되새김질을 하는 채식동물인 소에게 다른 소의 내장 등 버려지는 부위를 사료에 섞어 먹여서 생긴 병입니다. 비록 그렇게 함으로써 소들을 더 빨리 살찌울 수 있었지만 광우병이라고 하는 저주스런 병이 인류에게 왔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처음부터 채식을 하도록 만들어 놓은 동물들에게 같은 종류의 동물 사체를 먹임으로써 발생한 부작용인 것입니다.

애당초 많은 동물학자들이 이럴 경우 어떤 부작용이 나타날지 모른다고 경고했지만,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진화론적 가치관에 근거하여 허용했고 결국 이런 질병이 나타난 것입니다(진화론은 그것의 과학적 사실 여부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가치관에 있지만 이 글에서는 주제를 벗어나기 때문에 적지 않습니다).

또 다른 예는 몇 년 전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줄기세포연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줄기세포 연구를 불치병을 고칠 수 있는 획기적인 연구로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인간이 영생할 수 있을 것이란 허황된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줄기세포는 아직 신체기관으로 분화되지 않은 초기 세포입니다. 그래서 특정 신체의 질병을 대체하는 단계에 나아가려면 생명의 신비 자체를 밝혀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의 유전자정보를 주입하여 복제인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카톨릭 교회가 줄기세포 대신 성체세포를 연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체세포는 신체기관으로 분화한 후의 세포이기 때문에 그럴 위험이 없지요.

처음 연구를 시작할 때의 목표와 관계없이 자본과 인간의 욕심은 줄기세포 기술을 복제인간을 만드는 데 사용할 것입니다. 이 때 사용할 난자를 얻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이 희생됩니다. 가난한 젊은 여자들의 건강을 담보로 난자를 얻어 부자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그 과정에 만들어진 부산물인 복제인간은 도살됩니다. 생명경시 풍조가 넘쳐날 것입니다.

이런 사례들은 모두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물을 다스리지 않고 폭력적으로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교회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행위를 묵인하는 것이 바로 세속화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공격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키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는 사람(7:21)임을 의미합니다.

 

실천: 개인과 교회, 그리고 전체 한국교회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까요? 개인이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생각해보면 교회에서 종이컵 사용을 줄이는 것이 있습니다. 종이컵을 줄이자는 캠페인은 여기저기에서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캠페인은 남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강제로 또는 다 같이 하자라고 말하기 전에 그냥 나부터 실천합시다. 엄격하지 않아도 됩니다. 실수로 컵을 가져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긴 사람들부터 이런 일을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실천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가장 손쉬운 것은 예배당 지붕에 태양전지를 설치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태양전지를 국내에서 대량생산하고 있어 가격도 많이 싸졌다고 합니다. 게다가 예배당이 전기를 소모하는 패턴이 주중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다가 주말에 집중적으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산업체들이 전기를 많이 소비하는 주중에는 전기를 생산하여 한전에 보내주고 대신 사용량이 적어지는 주말에는 한전의 전기를 가져다 쓰면 됩니다. 시골 미자립 교회를 돕는 방법도 같습니다. 다달이 후원을 하는 것도 좋지만 태양전지를 달아주면 전기료를 통해 다달이 후원을 받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전체 한국교회 차원에서는 좀 더 큰 문제에 대해 세상을 향해 외치는 선지자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4대강사업 같은 일에 대해 전문위원회를 구성하여 검토하게 하고 성경적인 기준에 따라 말을 해야 합니다. 세상이 하나님께 도전하는 데도 아무 말을 하지 않으면서 전도와 선교를 이야기하는 것은 균형 잡힌 신앙태도가 아닙니다. 그것도 사람들 앞에서 우리 주님을 부인하는(12:9)’ 태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비록 완전할 수는 없지만 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실천하며 살기 위해 애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런 실천은 늘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또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남에게 동참하라고 폭력적으로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그저 내가 먼저 노력하고 선한 말로 동참을 권유하면 됩니다. 그 다음은 성령님의 사역 범위입니다. 개인이 할 일과 사회가 할 일에 대해 균형 잡힌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래서 내가 기독교인들의 장로대통령 만들기에 동의하지도 동참하지도 않았지만, 이 대통령과 정권이 저지르는 온갖 만행을 보며 진심으로, 눈물로 사죄드립니다. 다수의 국민이 오직 더 부자가 되겠다고 여러 부정 의혹에 쌓인 이를 경제대통령이라고 광분했던 시대, 그래서 기독교라는 이름이 헐값에 팔리는 시대를 사는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7월 22일 오후 국회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소위 미디어법 파동의 끝이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몸 개그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처음엔 팔목을 자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도박판에서 사기도박을 하다가 발각되면 팔목을 자른다지요? 투표종료 선언 후 재투표를 하는 것을 보고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내 회개의 눈물을 흘립니다.

사실 미디어법으로 불리는 언론관련 법들이 만들어지고 개정되는 이유는 원래 야당이나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장기집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의 진짜 목표는 소수 기득권층의 부의 확대와 지배력강화를 위한 것입니다. 한나라당은 그 과정에 장기집권이라는 떡고물을 챙기려고 조연을 하고 있을 따름이지요.

그동안 한국사회는 누구나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나름대로 멋진 나라였습니다. 그렇게 되는 데는 비록 불완전하지만 몇 가지 장치가 있었습니다. 고교평준화를 통해서 특정 인맥이 모든 분야의 권력을 독식할 수 없었습니다. 의료보험제도는 많은 사람들의 삶이 질병 때문에 파괴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권력으로부터 비교적 독립된 공공방송이 사회의 감시자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육, 의료 및 언론에서 최소한의 그물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정부는 이 모든 분야에 자본을 들이 밀고 있습니다. 다양한 이름의 귀족학교를 통해 자신들만의 이익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영리병원의 설립과 의료보험민영화를 추진 중입니다. 그동안 남아 있던 영역도 자본이 지배하게 함으로써 사회의 모든 체제가 오직 소수 기득권층의 이익에 종사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 일반 국민의 눈과 귀와 입을 막기 위해 언론을 자본에 넘긴 것입니다. 권력으로 언론을 장악하는 시대는 끝났기 때문에 그 역할을 자본에게 맡겨 그들 스스로 알아서 통제하게하고 대신 장기집권이라는 떡고물을 상납 받는 것이지요.

스스로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지도자 여러분이 이 사실을 모르고 현 정권의 행동에 동참하는 것이라면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입니다. 만약 알고도 동참하고 있다면 ‘바알신상에 입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망했던 이유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 뿐 아니라 나라를 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대신 두려움에 떨며 회개를 말합니다.

진짜 기독교인 지도자라면

나는 요즘 다시 한 번 성경 속의 인물인 느헤미야를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왜냐 하면 요즘 우리나라의 현실과 지금으로부터 약 2450년 전의 이스라엘의 상황이 좋은 대조가 되기 때문입니다.

B.C. 440년경의 이스라엘은 정말 암담했습니다. 남(유다)과 북(이스라엘)으로 분단되었던 이스라엘은 결국 모두 망했고 몇 나라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페르시아가 이 지역을 식민지로 통치하면서 모든 식민지 백성들에게 자기 종교를 섬기도록 허용합니다. 이때 느헤미야라는 유다사람이 페르시아 왕의 신임을 얻어 유다사람들을 데리고 유다의 상징이었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을 재건하도록 허락 받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던 중 문제가 생깁니다. 성경의 느헤미야서 5장이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사람들이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동원되다 보니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해 먹을 곡식이 없었습니다. 식량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논밭과 집을 팔았습니다.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부자들에게 고리대금으로 돈을 꾸었으나 그 빚을 갚지 못해 자기 자녀들을 돈 대신 넘겨 주어야했고, 이들은 다시 이웃나라 사람들에게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물론 부자들은 귀족들과 관리들이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우리와 비슷합니다. 세계적인 불경기와 외환위기로 빚어진 국가위기와 멸망한 이스라엘의 처지가 비슷하고, 이를 재건하기 위해 애쓰는 국가적인 운동이 비슷합니다. 그 과정에서 빚어진 부익부 빈익빈도 어쩜 그리 비슷한지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 후가 전혀 다릅니다.

느헤미야는 매우 화가 나서 백성들을 모아 놓고 고리대금으로 번 돈을 즉각 반환하고 노예로 팔려간 동족들을 되사오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자신과 자기 수하들도 돈과 곡식을 빌려주는 일을 했다고 자백합니다. 그리고 즉각 고리대금업을 중단하라고 명령합니다. 자기 백성에게 샀던 집, 논과 밭을 모두 돌려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두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식민지에서 돌아와 아무런 힘도 없던 그들이 예루살렘 성 재건이라는 큰일을 짧은 시간 동안에 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기독교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이 정부도 화를 내기는 마찬가지입니다만 모두가 과거에 이룩한 일들을 부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위기가 가난한자들을 얼마나 더 힘들게 만들고 중산층이 어떻게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 기회에 부자들에게 더욱 많은 부를 보장해주기 위해서만 머리를 쓰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위기를 극복할 수도 없고, 설령 극복한다 해도 그 후의 한국사회는 지금보다 더욱 암울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08/11/25)

성경의 사무엘서라는 책을 보면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최근에 그 책을 읽다가 대통령의 가장 큰 책임은 국민을 평안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역사 초기부터 계속 블레셋이라는 부족과 전쟁을 해왔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더러 알고 있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바로 다윗이 이스라엘 사람이고 골리앗이 블레셋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울왕이 이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였습니다. 이 시절만 해도 블레셋은 철기문명을 가지고 있었고,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해서 이스라엘에는 칼을 가진 사람이 사울왕과 그 아들 요나단뿐이었습니다. 당연히 전쟁에 크게 불리했지요.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굴 같은 곳에 숨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요나단이 혼자서 적진에 들어가 적진을 흔들어 놓습니다. 덕분에 그 날에는 다시 전쟁을 해볼 만한 상황이 되고 전쟁에 나선 사울왕은 전쟁에 승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전쟁에 나설 때 그는 백성들에게 저녁, 즉 사울이 블레셋사람들에게 복수를 마칠 때까지 어떤 음식이라도 먹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전쟁을 하면서 아무 음식을 먹지 못하여 저녁이 되자 너무 피곤하였습니다.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느냐 하면 요나단이 숲속에서 꿀을 발견하고 지팡이에 꿀을 찍어 먹은 것만으로도 눈이 번쩍 떠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피곤한 상황인데도 왕의 저주 때문에 백성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요나단은 만약 백성들이 음식을 먹으면서 전쟁을 했더라면 더 큰 승리를 했을 거라고 말하면서 가축들을 잡아먹게 합니다. 그러나 너무 배고픈 백성들은 그만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가 내렸던, '가축을 피 있는 채로 먹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게 됩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만약 왕이 백성의 피곤함을 헤아려 전쟁을 하는 도중에 적절히 음식을 먹게 했더라면 첫째, 전쟁에서 더 큰 승리를 얻었을 것이며, 둘째, 신의 명령을 어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백성들은 덜 피곤한 상태에서 더 기쁜 마음으로 전쟁을 했겠지요.

이런 결과의 차이는 단 하나, 왕이 백성을 평안하게 해주기 위해 통치를 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감정과 목표를 위해 협박하는 통치를 하느냐 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 출발점의 차이가 대통령의 통치행위 전반에 영향을 미쳐서 국민을 평안하게 하기도 하고 피곤하게 하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쇠고기 파동에서 시작하여 언론장악을 위해 억지를 쓰는 등 역사를 전두환 시절로 되돌리려는 이명박 대통령을 보면서 평생 다윗에게 주눅 들어 살면서 비참한 왕으로 살아갔던 사울왕의 모습이 비쳐 보여 안타깝습니다. (2008.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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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종교와 미신을 구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주된 관심이 생명에 있는 것을 종교라고 합니다. 생명을 구하는 일, 생명의 가치를 존귀하게 여기는 믿음을 가진 것을 종교라고 본다는 것이지요. 이에 비해 돈과 명예, 권력을 구하는 것을 미신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종교와 미신은 우리가 아는 이름의 종교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종교를 믿는다고 말 하는 각 개체(개인이나 집단)를 말하는 것이지요.

인도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에 가면 화장터가 있습니다. 오래전 일입니다만 제가 그곳에 갔을 때 인도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제 기억력이 형편없어 숫자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화장을 하는데 보통 장작이 120개 정도가 필요하답니다. 그 장작은 화장 일을 하는 사람들이 파는데 하나에 우리 돈으로 만 원 정도라더군요. 그러니까 화장을 하는데 120만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당시 인도에서 대졸자 월급이 3만 원 정도 했으니까 얼마나 큰 돈인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도사람들은 평생을 이 장작 값을 마련하기 위해 산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구요? 힌두교에서 윤회는 고통이고 윤회를 끊고 해탈하기위해서는 갠지스강에서 화장하여 재를 강물에 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화장 일을 하는 사람들은 글자 그대로 언덕 위의 하얀집에서 산답니다. 보통 언덕 하나를 소유하고 그곳에 집을 짓고 산다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종교와 미신이 갈라집니다. 만약 힌두교가 종교라면 가난한 사람들의 해탈을 위해 무료로 혹은 최소한의 비용만으로 화장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것으로 부를 누리는 집단이 존재하면 그것은 미신이라는 것이지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시 말한다면 힌두교가 종교가 아니라는 주장이 아니고 그 종교를 이용하여 부를 누리는 사람과 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힌두교는 미신이라는 말입니다. 이 기준은 모든 종교집단에 적용됩니다. 우리나라에 많이 있었던 무당을 요즘은 문화로 보기도 합니다만, 종교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것도 미신입니다. 굿이라는게 순간순간 정성이 부족하다며 돈을 요구합니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어떤 종교든 제 관점으로 볼 때는 미신과 종교가 섞여 있습니다. 보통은 이 미신을 믿는 사람들 때문에 특정한 종교가 욕을 먹고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요즘 말 많은 종교문제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불교는 종단권력 쟁취싸움이 그치질 않습니다. 교회는 목사 세습 등의 사건으로 시끄럽습니다. 이게 다 왜 그렇습니까? 그 소란스러운 사건 속의 인물들은 그 종교를 종교가 아닌 자신을 위한 미신으로 바꾸어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7.8.23. 수정)

외국을 여행할 때면 늘 그 나라의 역사 속에서 지혜를 얻곤 합니다. 최근에 과거의 여행지들을 떠올리며 종교문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이 글에서 종교를 이야기 하는 것은 종교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고 종교가 다른 세력에게 악용되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특정 종교를 가진 분들의 오해가 없으시길 부탁드립니다.

태국은 불교국가입니다. 윤회사상의 영향으로 국민들은 여유가 있고 너그럽습니다. 다음 세상에 더 좋은 것으로 태어나면 된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은 죽음을 겁내지 않고 아파도 병원에 가는 이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항의하거나 분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의 태국은 오직 인구의 90%가 넘는 국민들에게만 해당하는 태국입니다. 인구의 9% 정도에 불과한 왕족, 귀족, 종교지도자들이 대부분의 부를 장악하고서 국민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태국에서 불교 혹은 윤회사상이란 지배자들이 다수의 국민들로 하여금 평등개념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그 자리에 머무르게 만드는 이데올로기로 악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도는 잘 아시듯이 힌두교 국가입니다. 많은 인도 여행자들이 지적하듯이 인도사람들을 보면 정말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이 겉보기 평화 속에 숨긴 역사를 지나치면 안 됩니다. 인도는 우리나라처럼 아주 오랫동안 외국의 침략으로 고통을 겪은 나라입니다. 침입자가 전쟁에 승리하면 자신이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더라도 국민들에게는 과거 지배자들이 그랬던 것과 같은 계급체제를 강요하기위해 힌두교를 은근히 권장한 탓에 지배계급만 다른 사람들로 바뀔 뿐 국민의 삶이 바뀐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전쟁은 지배계급만이 하는 것이고 따라서 외적을 이겨 본 적이 없습니다. 힌두교는 국민들이 비참한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이데올로기로 악용되었습니다.


과거 제정 러시아에서 정교회는 왕정체제와 결탁하여 최고의 번성기를 누렸다고 합니다. 아직도 이 시절에 만든 황금 성경이 여러 권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당시 러시아 국민들은 매우 피폐한 생활을 하였는데도 종교지도자들은 왕족이나 귀족들과 어울려 호화로운 생활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러시아 공산 혁명의 원인중 하나가 되었고 공산주의와 기독교 사이의 악연이 시작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기독교 복음은 비참한 한국 민중의 삶에 눈물 흘리던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한국 민중의 아픔을 치료하기 위해 각 지방으로 흩어져 병원과 학교를 세워 현대 한국을 건설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전국에 산재해 있는 미션스쿨과 기독교병원들이 그렇게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이런 역할이 국민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고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널리 받아들여진 이유였습니다.


인구대비 교회밀도가 가장 높아 기네스북에 올라야 한다는 도시가 있는 한국의 기독교 아니 전국 방방곡곡에 자리 잡은 종교들이 지금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진리의 종교입니까? 마약의 종교입니까? 평화의 종교입니까? 갈등의 종교입니까? 희망의 종교입니까? 물질의 종교입니까?
(2007.06.22, 2012.1.14 부분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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