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으로 다시 개혁이 중단되고 나라가 위기에 처하는 아주 간단한 원리를 생각해 봅시다.

첫 째, 암몬과 모압 사람들이 마술사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했었지요. 발람은 그게 위험한 일인 줄 알았습니다만 그렇게 만든 힘은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바로 뇌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말라고 하셨지요. 뇌물은 재판 판결을 굽게 한다고요.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엘리아십이 성벽 재건에 방해자였던 도비야와 내통했습니다. 도비야는 이스라엘의 귀인들과 혼인동맹을 맺었던 자이지요. 결국 이들은 이스라엘의 적이자,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를 오직 친족이며 힘 있는 자란 이유 때문에 감히 하나님 전의 뜰에 방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혈연, 지연, 학연이 저지른 죄이지요.

세 번째는 백성들이 책임을 다하지 않음입니다.
마땅히 내야 할 십일조를 내지 않자 레위인들이 모두 먹고 살기 위해 다 자기 밭으로 도망갔습니다.

이 세 가지는 언제나 우리 주변에 머물러 있습니다. 직장에도, 교회에도, 나라에도 말입니다. 군사독재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나는 학생 때 이분들을 정말 존경했었기 때문에 더욱 슬프지요) 시절에도 똑 같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라는 여전히 위기이구요.

요즘 교회에서 중요한 연령이 되어버린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 하다 보면, 일부 교회에도 이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진다고 합니다. 직장에서는 어떤가요? 많은 기업들에서 기업이란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해 존재하는 집단이란 것을 실감하지 않습니까?

이 세 가지를 그리스도인들이 막아 나아가지 못하면 우리에게도 희망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언제까지나 기다리시진 않기 때문이지요.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나요?

앞에서 백성의 책임을 다하지 않음으로써 레위인들이 다 떠났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은 중요합니다. 부정과 타락은 소위 사회 상층부로부터 시작되지만 그 파급효과는 모든 국민에게 미친다는 것입니다. 같이 타락한다는 것이지요.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을 마치고 잠시 페르시아의 왕궁에 갔다가 돌아오니 모든 일이 엉망이 되어 있었습니다. 상층부의 타락이 국민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약속한 모든 개혁 조치를 스스로 다시 어기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결국 그 타락은 다시 지도층으로 역류하게 됩니다. 레위인들이 떠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을 아는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도 책임을 추궁합니다.

선거 때만 되면 지역감정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물론 그것의 시작은 일부 타락한 정치인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어떻게 되었나요? 국민들이 지역감정에 충실해졌습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다시 여기에 기대야만 하게 되었지요. 악순환입니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 취해진 몇 가지 개혁조치들을 봅시다. 조치가 나올 때마다, 모두 잘된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조치들에 대해서 이해 당사자들이 반발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와 이해관계가 없는 다른 조치에 대해선 또 한 결같이 잘하는 것인데 이해 당사자들의 밥그릇 싸움 때문에 일이 그르치고 있다고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모두 함께 모든 부문을 개혁하여 깨끗하고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들기보다, 나만 빼고 개혁하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모두 같이 타락하여 비효율적인 시스템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국민 스스로가 말입니다. 악순환이지요.

누군가 이 고리를 끊어야만 합니다. 그게 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느헤미야를 읽고 묵상한 우리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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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하나님은 아직 기다리십니다. 지금 우리도 역사에서 무언가 배울게 있는 것 같지 않으세요?

[9:16] 저희와 우리 열조가 교만히 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9:17] 거역하며 주께서 저희 가운데 행하신 기사를 생각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두목을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사오나 오직 주는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9 : 18] 또 저희가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르기를 이는 곧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이라 하여 크게 설만하게 하였사오나
[9 : 19] 주께서는 연하여 긍휼을 베푸사 저희를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시며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취사 떠나게 아니하셨사오며
[9 : 20] 또 주의 선한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로 저희 입에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의 목마름을 인하여 물을 주시사
[9 : 21] 사십 년 동안을 들에서 기르시되 결핍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사오며
[9 : 22] 또 나라들과 족속들을 저희에게 각각 나누어 주시매 저희가 시혼의 땅 곧 헤스본 왕의 땅과 바산 왕 옥의 땅을 차지하였나이다.

아시다시피, 유다인들은 그렇게 여러 차례 은혜를 입고, 경고를 받아도 여전히 타락했습니다. 심지어는 이방의 밥이 되기까지 당하면서도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주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민족이 그 많은 고난 가운데서도 아주 죽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9 : 31] 주의 긍휼이 크시므로 저희를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그런고 이제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운동으로 말미암아 이들이 정신을 차립니다. 그 정신 차렸음을 나타내는 증표로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모두 도장을 꽉 찍었습니다. 서명을 한 게지요. 우리가 먼저 언약을 세우고 지키겠노라, 하는 약속에 말입니다. 여기서 레위인에 대해 잠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방백들과 제사장이 서명한 것은 이해가 됩니다만 레위인은 왜 한 것일까요? 바로 레위인들은 각 지방에서 선생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들이 바로 세우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선생이 바로 세우면, 교육이 바로 세워지면 그 나라에 희망이 생깁니다.

[9 : 38]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인하여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을 치나이다 하였느니라

이제 백성들이 나서서 약속을 합니다. 이방 족속과 결혼하지 않겠다는 약속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약속들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유다주의의 시작입니다. 당시에는 구원의 역사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혈통의 순수성 유지나 각 종 제사의식 등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서 매우 중요했습니다.

지금 중동지방이 세계의 화약고라고 한답니다. 그 화약고는 바로 이 유다주의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새 언약을 인정하지 않는 이 유다주의는 결국 세계를 불안하게 하는 전쟁의 씨앗입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누구든지(민족이나 성별이나 피부색에 차별 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 아닙니까? 이 진리를 거부하는 유다주의는 평화를 선포하는 하나님의 뜻(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지요? 무슨 복이냐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복입니다)과는 관계없이 세상을 어둠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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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성벽을 완공했습니다.
이 큰 일 앞에 적들도 하나님의 역사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도비야
의 행위를 잘 살펴보십시오. 유다인들과 결혼동맹을 맺고 그들을 통해 계속 느헤미
야를 위협했습니다.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과 유다의 자치에 가장 큰 적은 내부에
있었습니다. 적과 동맹을 맺고 자기 백성을 두렵게 하는 자들 말입니다.

서해 교전 당시를 기억해 보십시오.
많은 보수 정객들과 언론들이 "전면전도 불사하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전면전, 그
게 가능한 일입니까? 물론 전쟁을 하면 남한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재래식 전
쟁이라면 말입니다. 남한의 군사력이 월등하게 좋고, 게다가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
을 데리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누구를 데리고 있는지는 좀 의심스럽지만 말입니
다. 그런데 말입니다. 눈을 조금만 돌려서 주위를 살펴보십시오. 우리에겐 많은 원
자력 발전소가 있습니다. 북한이 궁지에 몰려 가미가제식 공격으로 원자력 발전소
몇 개만 날려 버리면 으~~~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우리는 전쟁에는 승리하지만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소위 매파라고 하는 무력주의자들의 눈
치를 살피면서 자기 민족의 운명에 서슴없이 총구를 들이대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
이 느헤미야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존재하나 봅니다.

유다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듣게 됨에 따라 그들의 역사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역사에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무엇인지 한번 볼까요?

[9 : 16] 저희와 우리 열조가 교만히 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
하고
[9 : 17] 거역하며 주께서 저희 가운데 행하신 기사를 생각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두목을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사오나

나는 IMF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이 말씀을 함께 기억합니다. 우리는(나, 그리고 우
리 민족 말입니다) 이상하게도 IMF 사태를 쉽게 극복했습니다. 물론 진짜 극복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문제
에 대해서 문외한이니까요
[지금 다시 외환위기로 힘들어진 걸 보니 극복한 게 아니었던 가 봅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아는 것도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살아가는 것은 주님의 은혜라는 거 말입니다. 남미 대부분의 국가들이 사실상 국가
부도 상태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그런데도 우린 목을 굳게 하고 서있는 것은 아
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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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의 지도력에 겁이 난 주변 민족들은 느헤미야를 죽이는 일을 구체적으로 추진합니다. 불러내서 죽이는 방법을 시도했지요. 그러나 성을 다시 세우는 일에 바쁜 느헤미야는 그들의 속셈을 알고 응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술책은 느헤미야가 반란을 꾀한다는 소문을 내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힘 있는 지배자 페르시아를 자극함으로써 느헤미야가 겁먹고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느헤미야는 기도합니다. 내 손에 힘 있게 하시라고.

얼마 전[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군요]에 미군 장갑차가 여중생 둘을 치어 죽인 사고가 있었지요. 미군은 안하무인으로 버팁니다. 그들의 행동을 우방군대가 아닌 점령군대의 행동인 듯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밝히고 잘잘못을 따져야 할 일인데도 자꾸 덮으려고만 합니다. (이건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란 잘잘못을 밝힌 뒤에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언론과 보수 인사들 중에서 미국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들렸습니다. 반미가 되어선 안 된다는 논리지요. 우리 느헤미야처럼 기도합시다. 우리의 손에 힘이 있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서 그러니까 입 다물라는, 성을 재건하지 말라는 협박으로부터 자유 하는 힘을 달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이젠 유다의 선지자들을 매수합니다. 선지자가 예언하기를 오늘 밤에 그들이 널 죽이러 올 테니 성전의 외소에 가서 문을 잠그고 있자고 합니다. 한마디로 독안에 가두겠다는 것이지요. 느헤미야가 어떻게 이 유혹을 이겼는지 아십니까? 그가 선견지명이 있어서 함정인줄 알고 가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백성을 생각했기 때문에 함정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나 혼자 살겠다고 숨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원통하고 화가 나겠습니까? 그래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비방이 두려워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살았습니다. 느헤미야의 생존법칙, 그거 멋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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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귀족들이 대들면 자기 지위를 지키기가 쉽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많은 경제적 부를 이용해서 사병을 모집하면 순식간에 쿠데타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문명사회 어쩌고저쩌고 하는 요즘도 재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비록 하찮은 집일지언정 소유하고 있던 집주인들을 깡패들을 동원해서 마구 폭력을 행사하면서 쫒아내는 게 기업과 가진 자들의 행동 아닙니까? 그것도 버젓이 경찰의 보호 아래 말입니다[당시에 쓴 이 부분을 다시 읽어 보니 이번 용산학살이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관행적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번에는 더 악한 일이 벌어졌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그 시절엔 얼마나 쉬웠겠습니까?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것을 해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느헤미야 자신이나 형제, 그리고 수하 사람들조차 고리대금업을 했음을 자백하고 함께 이런 일을 중단하자고 설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잘못은 감추거나 잘못이 아니라고 우기면서 너희들이 문제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어지는 성구를 직접 읽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5 : 14] 내가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부터 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5 : 15] 이전 총독들은 백성에게 토색하여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취하였고 그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치 아니하고
[5 : 16] 도리어 이 성 역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나의 모든 종자도 모여서 역사를 하였으며
[5 : 17]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일백오십 인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사면 이방인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5 : 18]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하나와 살진 양 여섯을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니라.
[5 : 19]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너무나 떳떳했습니다. 백성들과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강력한 요구를 관철 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처음 취임할 때는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운명이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개혁을 추진했고 나라의 운명을 지금까지 연장시켜왔습니다. 남북관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었지요. 그런데 그는 후반기의 개혁은 손도 대지 못한 채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저는 나라의 운명에 대해 매우 염려하고 있습니다. 모든 상황이 IMF 이전으로 돌아간 때문이지요. 모든 개혁 조처들이 다 물거품이 되었거나 될 운명에 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구요?
IMF 상황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다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절대 다수당이 되었지요. 그나마 남은 개혁 조처들은 이제 다시 원위치 되는데 몇 초도 걸리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그 후로 참여정부시절 뒤집어졌지만 결국 지금은 IMF 상황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여당으로 절대 다수당이 되었습니다].

그럼 이런 일들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스스로 떳떳하지 않았기 때문에(자식들 비리 말입니다) 그에겐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말입니다. 요즘 말 많은 병역비리 문제도 빨리 명확히 밝혀지기를 기도합니다. 이 문제가 분명하게 매듭지어지지 않은 채, 그 분이 혹시 대통령이 된다면 이 일이 결국 (김대통령을 후반기에 식물인간을 만든 것처럼) 처음부터 그 분을 식물인간으로 만들 것이고, 이는 다시 IMF와 같은 위기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백성들이 살아야지요. 그게 나라의 힘인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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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잘 보십시오. 느헤미야와 유다 사람들이 어떻게 성전 재건 사역에 임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들은 칼을 차고 전쟁에 대비하면서 일했습니다. 밤에는 경계를 서기도 했고, 여러 가지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힘들게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냐구요?
백성들이 성전 재건에 나서느라고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웃 민족들의 위협 때문에 모두 자기 집과 농토를 비워두고 예루살렘 성 안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때면 반드시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말한 적이 있는 귀족들이지요. 이들은 고리대금으로 백성들의 토지와 집과 심지어는 자녀들까지도 돈으로 사 버렸습니다. 자기들의 책임은 하지 않으면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백성들을 약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IMF 환난이 왔을 때도 그랬다지요? 나라의 존립이 위기에 처했을 때 부자들은 더욱 부자가 되었다지 않습니까? 그래서 빈부격차가 더욱 심해졌답니다. 그들은 외국으로 떠나면 그만이기 때문에 나라의 위기를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기회로 삼은 것이지요.

다행히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우리는 그런 위기로 발전하지 않았습니다만, 남미의 여러 나라들이 그렇게 해서 결국 나라가 사실상 부도 상태에 있지 않습니까? 미국이 지명하는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의 맘에 안 드는 사람이 대통령이 될 것 같으면 너네 망하게 하겠다고 협박하지 않습니까? 경제위기 때 일부 부자들만 더욱 부자가 되고 대다수 백성들은 생계도 꾸릴 수 없는 상태로 되어버렸기 때문에 나라에 힘이 없어진 까닭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백성들이 힘을 잃으면 나라도 힘을 잃는 것이지요. 그래서 느헤미야는 이게 주변민족들의 위협보다 더 큰 위협임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몇 년 전[이글을 쓴 때로부터 몇 년 전] 이 부분을 읽으며, 슬퍼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에게 이런 지도자가 없음을 말입니다. 그래서 한 때는 그리스도인 지도자 과정이란 걸 운영해 보고 싶었던 적도 있습니다. 느헤미야와 같은 지도자를 꿈꾸면서 말입니다. 그게 제가 지금 쓰는 느헤미야서 묵상의 제목이 "느헤미야를 꿈꾸며"인 까닭이기도 합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민족이 행하고 있는 이런 가증한 범죄에 대해 호되게 비판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확실하게 조치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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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에는 온통 누구누구가 어디어디를 재건하였다는 말 뿐입니다. 이 일에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참여한 것 같습니다. 대제사장과 제사장들도 나섰습니다. 모든 지방 사람들도 참여했지요. 심지어는 강 서편, 즉 느헤미야의 감독 아래에 있지 아니하는 유대인들도 참여했습니다. 금장색(기술자)들도 참여했습니다. 동문지기(관리)도 참여했습니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참여한 것이지요.

정말 그럴까요?
아닙니다. 5절을 보면 ‘드고아 사람들 중에 그 귀족들은 그 주의 역사에 담부치(일정한 책임을 부담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왜 귀족들은 참여하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에는 스스로 대답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귀족스럽게 예수를 믿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참고로 덧붙인다면, 지난주[이글을 쓴 때를 기준으로]는 남북평화 공동기도주일이었습니다. 나는 그 기도예배에 참석해서 평화통일을 위한 북한지원사업이 얼마나 주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것이며, 우리의 평화에 정말 중요한 일이란 점을 잘 배웠습니다. 기분 좋게 예배를 마치려는데, 갑자기 광고가 있었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보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모 의원이 그 자리에 참석했다고, 앞으로 불러내서 인사를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나오면서 마치 맛있는 음식을 먹고 기분 좋게 마신 디저트가 입맛에 맞지 않아 입안이 씁쓸해진 기분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참석했다면 조용히 예배하고 기도한 후에 돌아가면 될 일입니다. 누가 참석했든지 주님의 말씀을 선포했으면 그것으로 예배를 마칠 일이었습니다. 이것도 교회 안에 침투한 세속적 귀족주의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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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느헤미야의 실천과정을 봅시다.
왕의 총애를 받는 관원으로서, 유다의 총독으로 부임했으니 기고만장할 법한 일 아닙니까? 일제 때 그랬다고들 하지요? 역대 대통령의 자녀들이 그랬다지요? 최근에 서울시장에 취임하신 분[그 분 지금은 대통령이지요]이 그랬다더군요.

그런데 느헤미야를 보십시오.
조용히 밤중에 나가서, 오직 가장 충직한 부하 몇 만 데리고 말입니다, 자기 할 일을 살핍니다. 현실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면서 의지를 더욱 불태웁니다. 그리고는 자기 민족에게 고합니다. 우리의 처지는 우리 스스로의 눈으로 보고 있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역설적이지만 그 땐 언론이라는 게 없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이상한 오리무중의 말로 독자의 눈을 홀리는 그런 이상한 것들 말입니다.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을 이제 해결하자고 외칩니다. 그러니 백성들은 잘 따르겠지요.

그러나 그 길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오랜 역사를 지내오면서 유다 땅에는 이방 민족들이 버젓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위 앗시리아의 식민지 시절부터 시작된 강제 이주정책 때문이지요. 이들이 딴죽을 걸고 나옵니다. 그것은 역사가 바른 길을 가야할 때면 언제나 등장하는 시험입니다. 민족 간의 이해, 학연, 지연이라는 이해, 이런 것들이 역사의 흐름을 왜곡시키려고 날뜁니다. 그래서 인류는 평화를 눈앞에 두고서도 금 새 사탄의 유혹에 빠져 다툼으로 치닫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의 대들보는 먼지로 보이고 남의 먼지는 대들보로 보입니다. 그래서 남에겐 정의를 외치지만 자기가 한 일은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아하, 벌써 눈치 채셨군요. 그렇습니다. 이들이 바로 장차 느헤미야가 극복해야할 준비된 또 다른 시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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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성경의 느헤미야서를 묵상하며 썼던 글입니다. 묵상노트 성격의 글인데, 최근 다시 읽어 보니 공개해도 될만한 글이고 또 최근 세상 돌아가는 모습 가운데에서 다시 생각할 만한 내용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신앙을 가진 분이 아니면 조금 거북한 말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분량이 많아 나누어 올립니다. 아, 이번에 몇마디 첨가한 것은 [ ]안에 따로 적었습니다.

******

성경 속의 인물들 중 세례 요한과 느헤미야는 내게 중요한 선생들입니다. 그래서 그 분에 대한 묵상이 시작된 오늘이 참 좋습니다.

느헤미야는 늘 자기 조국과 민족의 처지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에게 현실을 묻습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라진 조국과 민족의 처지를 묻는 일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말을 듣고 슬퍼합니다. 자기 조국의 현실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슬퍼한다는 말은 자신이 공동의 책임감을 가질 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화를 내지요. 정치인이 잘못해서, 기업가들이 이기적이어서, 노동자들이 말을 안 들어서, 공무원이 교사가 부정하기 때문에, 교수가 실력이 없어서, 학생들이 버릇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기도합니다. 그 책임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자각은 우리를 기도하게 만듭니다. 먼저 자신과 자기 민족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고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기도를 합니다. 자기 민족의 처지를 슬퍼함과 회개, 그리고 약속을 기억하는 기도가 오늘 느헤미야가 우리에게 온몸으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이제 느헤미야에겐 큰 근심이 생겼습니다. 자기 조국과 민족의 처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느헤미야에게 묻습니다. 물론 느헤미야가 왕에게 가장 큰 신뢰를 받는 사람 중의 하나인 술 관원이었기 때문에 왕은 관심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느헤미야의 행동을 살펴보십시오.

자기 조국의 현실을 이야기 하고 자기가 가서 예루살렘 성을 재건축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왕의 신임을 받는 관리로써 편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데, 아니 지금 그렇게 즐기면서 살고 있는데, 고생할 게 뻔히 보이는 그 곳으로 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격은 좀 다릅니다만, 요즘[몇 년 전] 자식 군대에 안보내기 위해 여러 가지 불법과 편법이 자행되었다고 해서 시끄러운 우리 정치 지도자들의 현실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곳까지 가는 도중에 만날 관리들에게 통행을 허가하라는 증서까지 요구한 것을 보면 그냥 편한 자리를 박차고 고생하러 가는 정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가는 도중에도 목숨에 위협을 받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진정한 민족의 지도자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평안한 삶을 버리고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곳으로 기꺼이 떠난 데서도 찾을 수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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