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와 권력은 왜 불평등을 허락하는가? EQUALITY 기울어진 평등>

이 책은 <21세기 자본론>의 저자 토마 피케티와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이 만나 정의에 관한 대담을 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와이즈베리 출판사가 장경덕의 번역으로 발간했다. 번역서의 제목은 마치 원제목이 ‘기울어진 평등’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었지만 원 제목은 그냥 평등(EQAULITY)이다. 이 책의 마지막 여섯 페이지에 있는, 장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일부를 인용하면서 나눈 마지막 대화를, 전체 줄거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요약한다.
피케티는 이렇게 말한다. “문제는 재산이 소수의 손에 믿기 어려울 만큼 집중되고, 이는 권력의 집중과 더불어 생긴 것이라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권력을 쥐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통제권도 갖지 못하지요. 부와 재산의 소유권은 단지 돈에 관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삶과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협상력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거나 빚만 지고 있다면, 어떤 노동 조건이나 임금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중략) 불평등은 실제로 권력과 협상력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샌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자, 우리는 평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왜 중요한지 탐구하려고 소득과 부에서 권력과 발언권, 존엄성과 인정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영역을 다뤘습니다. 루소처럼 평등의 의미를 생각하다 보면 경제학과 철학, 그리고 정치 이론을 가로지르게 된다는 것도 알았고요.”
즉 이 책은 기울어진 평등이 관심사 라기 보다는 평등의 넓은 의미들을 살펴 그것이 특정한 좁은 영역에서만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1.    왜 불평등을 걱정하는가?
평등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왜 불평등이 문제가 되는지를 묻는 것이 좋다. 이 질문에 대한 피케티의 답변을 샌델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영역에 대한 것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첫 번째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에 대한 모두의 접근권에 관한 것. 두번째는 정치적 평등, 다시 말하여 발언권과 권력 참여에 관한 것. 그리고 세 번째는 존엄성에 대한 것이다.
피케티는 장기적으로 볼 때 더 큰 평등을 향해 나아왔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그러나 두 가지 한계가 있다고 한다. 첫째 과거에 기본적이었던 것과 현재 기본적인 것이 같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예를 들어 교육에서 어떻게 공정한 교육 시스템을 만들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다. 둘째. 국제적 차원에서 본 남북문제가 남아있다.

 2.    돈이 덜 중요한 사회로 가야 할까?
샌델은 사회적 관계, 즉 존엄성과 지위, 존중에 관한 것을 먼저 다루자고 제안하면서 피케티의 관심사인 경제와 사회적 삶의 점진적인 탈상품화*에 관해 질문을 한다.
*피케티가 주장하는 ‘사회적 삶의 탈상품화’란 시장 논리에 의해 모든 가치가 상품처럼 거래되는 현실을 비판하고, 교육·의료·복지 같은 기본재를 시장에서 분리해 공동체적 권리로 보장해야 한다는 개념
피케티는 스웨덴에서 20세기 초까지 사람들의 소득과 부를 기준으로 투표권을 배분하던 것을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사회민주당이 노동운동을 통해 집권했을 때, 그들은 사람들의 소득과 부에 따라 높은 누진세를 내게 함으로써 교육을 비롯해 금전과 이윤의 논리를 벗어난 시스템에 재정을 지원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탈상품화는 재분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소득과 임금의 격차를 줄이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십 세기 중반에 미국은 최고 소득과 최고 상속재산에 80~90 퍼센트의 세율을 매겼는데, 이러한 세율은 그 어떤 중요한 일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3.    시장의 도덕적 한계
샌델은 사회적, 경제적 삶의 지나친 상품화를 걱정하는 두 가지 이유로 하나는, 지나친 상품화는 돈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하고 경제적 불평등 속에서 사람들이 교육과 의료, 정치적 발언권과 같은 기본제에 접근할 수 없게 차단한다는 점과 두 번째로 모든 것을 판매할 상품으로 여긴다면 그것을 구매할 여력이 없는 이들의 접근권을 저해하는 것을 넘어 그 재화의 의미를 깎아내리거나 타락시키거나 격하시킨다는 점을 지적한다.
피케티는 미국의 대학교육과 의료를 예로 들면서, 탈상품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이 분야에서 일하도록 하는 내적 동기가 금전적 동기나 이윤 동기에 의해 파괴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샌델은 의료와 교육, 문화 활동의 가치를 평가할 때, 어떤 가치 평가 방식이 다른 가치 평가 방식보다 더 훌륭하고 의미 있는지 정치적 토론을 붙여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피케티는 지난 20세기 북부에서 발전한 사회민주주의와 복지형 자본주의의 프로젝트 갖는 중대한 한계를 세 가지 지적하는데, 첫째는 교육에 투입된 공공 자원은 모든 것을 1980~90년대 수준으로 동결해왔는데 그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고등교육을 받는 비율은 20~30%에서 50~60%로 증가해 (상대적으로) 공공 고등교육이 위축되어 왔다는 점이다. 두 번째 한계는 정치적 숙의와 정치적 삶에서뿐 만 아니라 기업의 의사결정에서도 참여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가간 차원에서 드러났다. 북부를 부유하게 해준 것은 글로벌 노동 분업과 전 세계적인 자연자원 착취 과정이었다.

 4.    세계화와 포퓰리즘
피케티는 먼저, 샌델이 2022년에 개정판을 낸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에서, 두 차례에 걸쳐 각각 팔 년이라는 아주 긴 집권 기간에 민주당 대통령이 이끈 행정부가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정당화해 주었다고 언급한다. 여기서 정당화란 민주당 행정부가 1980년대에 레이건 대통령이 시작했던 누진 세제 해체를 계속했다는 뜻이다. 이어서 그는 지나친 세계화에 대응하는 방식을 1) 자국민 보호와 이민 반대를 주장하는 일종의 국가주의적 대응 2) 미국에서는 샌더스와 같은 대응 방식인 사회 민주주의적 대응으로 분류한다.
샌델은 미국 정치에서 포퓰리스트라는 말은 본래 19세기에 산업 노동자와 농민이 철도산업 그리고 나중에 석유회사를 장악한 전형적인 북동부의 경제적 엘리트로부터 권력을 쟁취하려고 뭉친 데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요즘 권위주의적 이민배척주의를 내세우는 우파 포퓰리즘의 성공은 진보 정치 혹은 사회민주주의 정치의 실패에 따른 하나의 증상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 때 조지 부시에게서 권력을 넘겨받은 오바마 민주당 행정부가 금융과 경제의 관계를 개조할지 복원할지 선택해야 했는데 오바마는 후자를 택했다. 납세자들이 월가를 구제하도록 한 결과, 좌파진영의 월가 점령운동으로 나타났고 급기야 2016년에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민주당 정부가 우파 포퓰리즘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중도좌파 정치인들은 시장이 승리한다는 전제, 다시 말해 시장 메커니즘이 공공성을 규정하고 성취하기 위한 주된 도구라는 기본적인 전제에 도전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시장이 어느 영역에서 공공선에 봉사하고 어느 영역에서 그러지 않는지 공론장에서 제대로 토론한 적이 없다. 그건 결국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 것이고 민주적인 숙의를 겁내는 것이다. 또 재분배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샌더스는 2020년에 하나의 정강을 내세우고 도전했다. 누진 세제 면에서는 루즈벨트보다도 더 나아간 정강이었고, 기업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의 권한에 관한 매우 실질적인 요소를 포함하며, 이사회에서 노동자들이 강력한 대표성을 갖도록 했다. 국립대학과 공공의료체계를 통한 대단히 현실적인 탈상품화 전략도 포함했다.
포퓰리즘은 주로 재분배에 관한 것이 아니라 대중들을 위해 엘리트로부터 권력을 되찾아 사람들에게 정치적 목소리를 찾아주고 힘 있는 자들에게 맞선 사람들을 대변하며 경제에서 대기업들의 힘을 억제하여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

 5.    능력주의는 왜 위험한가?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은 최근 몇 십년 간 발전한 능력주의라는 일종의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에 대해 다루고 있다. 능력주의는 세계화, 금융화와 함께 신자유주의 시대의 3번째 기둥이다.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그들의 성공이 그들 자신이 얻은 것이고 그들의 능력을 가늠해 주는 척도이며 따라서 자신들은 시장이 주는 상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경쟁에 뒤진 이들과 힘겹게 애쓰는 이들은 그런 운명에 처할만해서 그런 것이라고 믿게 됐다. 성공에 대한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한 승자는 상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 원칙 때문이다.
능력주의의 두 가지 문제. 한 가지 문제는 우리가 자신이 공헌한 능력주의 원칙에 맞게 살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회는 진정으로 평등하지 않다. 예를 들어 아이비리그 대학들의 경우, 한해 소득이 85,000 달러에 못 미치는 가정의 학생들은 수업료나 기숙사비, 식비, 책값을 전혀 내지 않는데도 이들 대학에는 소득 하위 50% 가정 출신의 학생들을 다 합한 것보다 상위 1% 가정 출신의 학생이 더 많다. 또 능력주의는 공동선을 부식시킨다. 능력주의는, 성공한 사람들이 그들의 성공에 이르는 길에서 그들에게 도움을 준 행운과 요행을 잊어버리고, 그들이 성공할 수 있게 해준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도록 부추긴다.
지금의 미국 민주당이나 영국 노동당, 프랑스 사회당은 한때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됐던 노동계급 유권자보다는 교육을 잘 받고 지위가 있는 전문직 계층의 가치와 이해 관계, 세계관과 더 동일시한다. 이는 성공에 대한 능력주의적 이념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도덕적 동반자가 되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특히 빈곤 계층에 압박이 심하고 상위 계층 자녀들도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끼게 한다. 따라서 대학들이 신입생을 선발할 때 소득 하위 계층에 속한 학생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어야 한다.

 6.    대입과 선거에 추첨제를 활용해야 할까?
전 세계적으로 대학시스템이 젊은이들을 선별하거나 서열화 하는 일종의 거대한 기계가 되어버렸다.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추첨(대입의 경우, 일정한 기준 이상인 사람으로 정원의 10배를 뽑은 후 이중 10%를 무작위 추첨으로 선발) 하자. 주된 이유는 대학 입학의 의미를 달리 생각하고 승리와 패배에 대해 지금과 같은 광란의 대입제도가 부추기는 태도를 바꾸는데 있다.
주류 정당들은 불평등 문제를 다룰 때 주로 학력 수준을 높여서 개인의 상향 이동을 꾀하는 방식을 강조한다. 이는 성공의 사다리를 경쟁적으로 기어오르도록 사람들을 무장시키는 데 집중하면서도 그 사다리의 칸 사이가 갈수록 멀어지는 걸 간과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을 능력주의 경쟁을 위해 무장시킬 것인지 보다는 어떻게 노동의 존엄성을 인정할 것인지, 어떻게 전체 경제와 공동선에 공헌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미국 연방정부가 대학에 지원하는 보조금은 한해 1,620억 달러나 되는데 직업교육과 기술교육에 쓴 돈은 연간 11억 달러에 그친다. 이는 정책 입안자들이 가진 학력주의와 능력주의의 편견이 반영된 결과이고, 불공정할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이 하는 일에 대한 존중도 부족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양원제 입법부나 의회를 개혁할 때 하나의 기구는 선출된 대표들로 구성하고 다른 기구는 귀족원 같은 형식이 아니라 추첨으로 뽑은 시민들로 구성되는 원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는 정치적 운동에서 엄청나게 커진 돈의 역할을 줄이고 공직에서 어떤 순환 효과를 얻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또 능력주의 시대가 만들어낸 학력주의자의 편견에 맞설 수 있다. 인도는 1950년 이후 선거구의 25%를 무작위로 골라내 이 선거구에서는 모든 정당이 지정 카스트와 지정 부족 출신의 후보를 내 내도록 하고 있다.

 7.    누진 세제와 공동체
아이비리그 대학에 들어가는 작은 집단에 영광을 돌리느라 소비된 그 모든 시간에 비해 기술 훈련 과정에 공공의 관심이 덜한 것은 완전히 균형을 잃은 것이다. 우리가 공공 재원으로 서비스를 개선하지 않으면 의료 서비스에 더 많은 민간 자원이 투입된다. 모든 관점에서 민간자원 투입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안은 우리가 공공의 자원을 늘려야 한다는 구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방법은 소득과 부에 대해 매우 가파른 누진세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임금이나 소득의 격차를 축소하는 것이다.
이는 존엄성의 문제이다. 자신의 소득 중 아주 조금만 할애하면, 자기가 원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이 시간을 들여서 하도록 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최저임금은 물론이고 최고임금도 한도를 정해야 한다. 실제로 미국에서 1940~1960 년대까지 최고 세율이 80~90% 이르렀다.
지적 우파(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로버트 노직, 밀턴 프리드만, *대개 신자유주의자들)는 누진 세제를 무너뜨리려고 싸우고 있지만, 지적 좌파는 그것을 방어하는데 그다지 열의가 없었다. 진보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공유성과 공동체, 정체성의 도덕적 기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누진세제를 정당화하려고 했던 것은 정치적으로도 실수였다. 모든 부는 개인적 성취에 따른 게 아니라 집단적 산물이다. (그래서)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만날 일이 없는 사회에서, 우리는 공유하는 삶을 위한 시민적 인프라스트럭처를 건설해 여러 계층이 섞이는 기회를 늘려주어야 한다.

 8.    남북 간 불균형은 해소될 수 있을까?
샌델은 피케티에게 평등과 불평등의 초국적 차원에 대해 묻는다. 어떻게 자원 공유를 위한 하나의 동기로서 공유된 정체성의 중요성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연방의 형태와 소극적인 형태로 범 세계적인 재분배와 더 큰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
피케티는 장기적으로 세계합중국을 제안한다. 중도좌파 정부들이 최근 몇 십 년 동안 자유무역이라는 종교를 발전시킨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첫째로 각국이 사람들에게 어떤 집단적 의무도 지우지 않고 국경을 넘어 원하는 어디로든 이동할 권리를 주었다. 그래서 자신의 부를, 개별 국가의 정부가 추적하고 과세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다른 관할권으로 옮겨갈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가장 부유한 이들이 공동의 의무를 완전히 회피할 수 있게 해주는 국제법 체계를 만든 것이다. 예를 들어 민주당이 통과시킨 NAFTA 법에 사회적 요소와 임금조항을 넣으려고 대체 법안을 제정한 쪽은 오히려 트럼프의 공화당 행정부였다. 중국의 WTO 가입 당시에 프랑스 북동부의 작은 도시들은 압도적으로 반대했다. 지금도 중국과의 경쟁 때문에 일자리가 가장 크게 줄어든 지역에서 르펜이나 트럼프를 지지한다.
예를 들어 보자. 만약 프랑스의 기업이 이익에 내는 세금이 30%이고 프랑스에 수출하는 다른 나라에 경우 세금이 10%에 불과하다면 그 상품과 서비스를 프랑스에 수출할 때는 20% 만큼의 조세 적자에 대한 세금을 매기는 것이다. 이는 보호주의가 아니다. 피케티는 이것을 보편주의적 주권주의라고 했다. 글로벌 경제의 통합이 지속될 수 있는 조건들을 규정하기 위해 사회적 환경적 정의의 보편적 기준을 활용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자본과 무역의 흐름을 통제하기 위해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노동의 흐름을 통제하려는 이민 배척주의들과 정체성에 집중하는 사람들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샌델은, 다른 방법으로, 기업에 대한 최저한의 세율을 정하기 위한 글로벌 협정을 맺거나 초국적 기구들을 설립하는 것에 대해 묻는다. 이에 대해 피케티는 OECD가 15 퍼센트의 최저한의 세를 물리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소개한다. 여기에 대부분 국가가 동의했는데, 그 세수가 기본적으로 남부의 가난한 나라들은 1% 미만을 가져가고 나머지를 전부 다 주요 국가(미, 프, 독)들이 나눠 갖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아무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남아시아 국가들이 녹색에너지와 태양광에너지에 투자하고 학교와 병원에 투자하려면 최소한의 세수가 필요하다.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여론이 그것을 받아들이게 할 유일한 방법은 특별히 고액 자산가와 대기업들을 겨냥해 직접 돈을 내게 하는 것이다. 가장 힘센 경제주체들이 민주적 통제의 책임을 지도록 하고 공공재의 재원조달에 기여하게 만드는 평등주의 의제를 밀고 나아가야 한다.

9.    경제와 정치의 미래
마지막 주제는 좌파의 미래이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가장 큰 정치적 취약성 중 하나는 애국심과 공동체의식, 소속감 같은 가장 강력한 정치적 정서들을 우파가 독점하도록 허용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기업들이 상품을 팔고 이익을 내는 나라에서 세금을 내기보다 조세 회피처를 찾는다면 이는 경제적 애국심을 저버린 것이다. 하지만 좌파 정당들이 특히 최근 몇 십 년간 일체감, 소속감, 공동체 의식, 공유된 정체성의 윤리를 명확히 밝히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피케티는 트럼프나 르펜이 표를 얻은 지역은 이민자가 없는 소도시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실업과 무역 경쟁, 교통, 주택 같은 구체적인 문제들 때문에 유권자들이 중도우파 정당과 중도좌파 정당 모두로부터 버림받고 있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정체성 문제를 놓고 국가주의 우파와 경쟁하려는 정치인들은 이런 유권자들을 끌어들이지 못했다. 유권자들이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은 경제의 세계화와 경제 시스템이 조직된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요컨대 좌파의 문제는 경제가 조직된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체제의 발전을 옹호해 왔다는 것이다. 좌파들은 주장은 하지만, 국제적인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아무것도 실행하지 않는다.
샌델은 초세계화 시대의 무역 정책에 따른 실험이 엄청난 정치적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고삐 풀린 자본의 흐름과 경제의 금융화가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 영향으로) 공동화된 산업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은 단지 임금 정체나 실업 때문만은 아니다. 사회의 다른 사람들 혹은 사회를 통치하는 사람들이 동료 시민으로서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들을 인정하거나 존중하지 않고 존엄성을 무시한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고통받았다.
피케티: 순전히 경제적인 것은 없다. 그것은 언제나 다차원적이다. 미국에서 이제 가장 부유한 지역에서는 사실상 민주당에 표를 던지는데 트럼프식 공화당을 가능한 것이 바로 이런 변화이다. 민주당이 그런 지역에서 다수표를 차지하는 한 그들의 제안에 뭔가 잘못된 게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들이 가난한 지역에서 표를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뜻한다. 어떻게 보면 정체성 정치이다. 낮잡아 보인다는 느낌에 관한 것이다.

“이 대담 내내 우리는 평등의 세 가지 측면을 논의했다 하나는 경제적인 것으로 소득과 부의 재분배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는 정치적인 것으로 발언권과 권력 참여에 관한 것이다. 그 다음은 존엄성, 지위, 존중, 인정, 명예, 그리고 존경에 관한 범주가 있다. 이 세번째 차원이 정치적으로도 가장 강력하고 아마 도덕적으로도 그러하다. 그리고 앞에 두 가지 차원인 경제적•정치적 불평등을 줄이는 데 있어서 우리가 어떤 희망을 품든 그것은 인정과 명예, 존엄성, 그리고 존중 면에서 더 큰 평등의 조건을 만들어내는 데 달려 있을 것이다.”
 
 

오늘자(2026/8/26) 한겨레에 실린 박민희 기자의 차이나퍼즐이다. 재미있게 읽었다. 나도 그렇고 모든 전문가들은 오랜 시간 자신의 관점(view 혹은 insight)이 만들어질 때까지 읽고 생각하고 전망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분도 역사적 사실들을 엮어 자신의 시각을 잘 드러낸다. 다만 제목으로 뽑은 사모노세키조약 운운한 것이 글쓴이의 생각인지 궁금하다.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 나는 박기자를 심각한 혐중인사로 분류할 생각이다.
사진에 하이라이트한 두 부분을 이야기 하고 싶다.

첫째는, "왕이 부장이 거듭 강조하는 한국의 독립자주'는 당장 한미동맹을 끝내라는 뜻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이 한미동맹에서 점점 멀어져 중국의 영향권으로 들어오는 미래를 그리고 있을 것이다." - 모든 외교적 언사는 자국에 유리한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별로 신선한 정보는 아니다. 그런 장기적인 목적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단기적으로 그들의 목표를 이해하고 이를 우리의 것으로 완벽하게 장악하는 것이다.

둘째는 "하지만, 한국과 중국의 전략적 목표는 다르다 트럼프발 한미동맹 위기, 국제 질서의 대혼란, 계속되는 북한의 핵∙재래식 무기 증강 속에 한국은 전략적 자율성을 강화하고 '독립자주'를 더 고민할 것이다. 그것이 중국이 훈계하는 '독립자주'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 중국이 말하는 '독립자주'는 글쓴이가 말하는 장기적인 목표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부분이 내가 박기자와 다르게 보는 지점이다.

최근 타계한 주룽지총리는 1997년 아시아외환위기 당시 한국이 빠르게 외환위기를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조치를 했었다. 그는 당시 위안화 평가절하 압력에 대해, 중국은 아시아의 맹주국가로서 위안화를 절하하여 아시아 국가들의 더욱 어렵게 만드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일로 당시 환율이 폭등한 한국의 제품들은  중국산보다 품질은 월등하면서도 가격은 중국산과 경쟁력을 갖추었고, 수출이 증가해 빠르게 외환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중국이 말하는 '독립자주'는 책임있는 국가를 말한다. 중국이 2000년대 초반에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노력했던 것이나 유엔 공식 국가명칭인 조선을 사용한 것 등도 다 그런 의미에서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 대해 종종 '독립자주'를 말하는 이유는 한국이 책임감 없는 나라라는 질책이다. 한반도와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를 상대로 스스로 책임을 질 행동을 하지 않고 미국과 일본의 리모트컨트롤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 성향을 보인다는 원망이다. 일본은 현 단계에서는 일찌감치 포기해도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나라를 빼았겼던 한국은 그러면 안 되는 것이라는 희망의 언어이다.

그래서 미중의 대립관계 속에서 한국은 세계에 대해 책임감 있는 진정한 '독립자주'의 길을 찾아야 한다. 결론은 같을지 몰라도 가는 과정에 대한 판단이 왜곡되면 '독립자주'의 길은 요원하다.

(기사는 링크)
본 기사는 여기에서 읽을수 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274621.html

#한국지엠 #중국지엠 #지엠의한국철수

시점만 미정인 GM의 한국 철수

지난 8월초, 지엠은 2027년으로 예정되었던 중국 상하이자동차와 합작 계약을 다시 20년 연장하여 총 50년 동안 중국사업을 지속하기로 했다. 중국 시장에서는 프리미엄 브랜드인 캐딜락과 뷰익에만 집중하기로 했고 보급형 브랜드인 쉐보레는 철수하기로 했다. 쉐보레는 원래 한국 지엠의 모델을 KD로 가져다가 조립해서 판매하는 것을 시작으로 병행개발 단계를 거쳐 완전히 중국화했었다.
그런데 오토모티브 월드의 보도에 따르면, 이번 합의는 쉐보레가 중국 내 판매만 중단한다는 것이다. 지엠은 중국 상하이차 및 우링과 합작을 통해 쉐보레 모델을 계속 생산하여 수출할 예정이다. 즉 중국에서 생산한 차량을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남미, 멕시코 등지로 수출한다는 것으로, 중국산 자동차의 안보 규제로 수출이 불가능한 미국으로의 수출 차량만 한국 지엠이 생산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재명 정부이다. 지엠은 민주당 정부가 들어섰을 때 공장폐쇄를 협박무기로 삼아 한국 국민의 세금을 약탈했었다. 문재인 때 군산공장이 그것이다. 이제 또 민주당 정부니 같은 일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재명 대통령은 속지 말기 바란다. 그들은 교묘하게 마치 민주당 정부가 무능한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돈을 뜯어가는 상습범이다..

지구온난화 두번째 이의 제기
지난번에는 전쟁을 중요한 원인으로 보는 의심을 제시하였다.(그 내용은 댓글에 링크) 이번에는 원자력발전이 중요한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제기한다.

아래 두 세계지도는 위는 해수면 온도, 아래는 원전의 분포도이다. 지금 세계에서 폭염에 시달리는 지역과 산불이 극심한 지역들의 공통점은 원전 밀집지역이다. 과학적 배경은 이렇다. 원전은 폭주로 인한 폭발을 막으려면 엄청난 양의 냉각수가 필요하다. 이 냉각수는 보통 해수면 온도보다 7-10도 높은 상태로 바다에 방류된다. 당연히 인근 해역의 해수면 온도를 높이게 된다. 이산화탄소를 내보내지 않으니 마치 친환경에너지인듯이 인류를 속이고 있지만, 이산화탄소가 복잡한 과정을 거쳐 온난화에 영향을 주는데 비해 원전은 직접! 가열하는 온난화 원인이다.

그림에서 북미대륙연안과 동아시아가 원전으로 인한 직접 가열지역이고, 유럽(지중해 포함)은 원전과 중동 전쟁의 영향을 동시에 받는 지역이다. 유럽이 매년 끔찍한 폭염에 시달리는 이유이다. 상식이지만 참고로 추가하면 중북부 유럽은 위도가 엄청 높다. 대서양의 해수면 온도가 높게 표시된 것은 바로 대서양 난류인데 이 난류 덕분에 중북부 유럽에 사람이 살 수 있었다. 그런데 해수면온도 사진을 보면 이 난류가 유럽대륙에 닿기 전에 옅어진다. 그런데도 폭염에 시달리는 것은 원전과 전쟁을 빼면 설명할 수 없다.


미국 NASA의 기온변동그래프에 주석을 추가했음.

양산의 오늘(2026.8.2)
최고기온이 42.5도였다고 한다. 오래전 아열대기후 지역에 거주할 때 낮 최고기온이 43도를 오르내리면, 도로의 아스팔트 포장은 녹아서 마치 진흙길처럼 변했지만, 대신 매일 오후 소나기(스콜)가 내려 대지를 식혀주어서 살아갈 만했다. 한국의 기온은 아열대기후지역 만큼 높아졌으나 비는 내리지 않는 지옥같은 온난화이다.

지구온난화에 가장 임팩트가 큰 것은 산업화가 아니고 전쟁이다. 지난 100년 이상의 온도변화를 보면 분명하다. 산업화는 누적효과를 보여주지만 전쟁보다 임팩트가 작다. 이는 2차 대전 후 유럽과 일본의 재건 과정이 이어진 1945-1970년대에 지구는 전혀 온난화가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기온이 떨어졌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동안 전후 복구 및 산업화과정에 배출된 이산화탄소가 가장 심각한 온난화 원인이라고 믿어왔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쉬지 않고 중동에서 전쟁질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그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중동지역을 벗어나 유럽이 가장 비싸게 치루고 있다. 그런데도 기후학자든 환경기구든 누구도 전쟁을 탓하지 않는다.

특히 산업화만 탓하는 학자들은 결과적으로 미-이의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아래 첨부한 그래프는 1990년 이래 갈수록 화력이 커진 무기와 잦은 미사일, 드론 폭격 그리고 유전이나 가스전이 불타는 중동에서의 전쟁과 지구온난화 가속 사이에 관계가 있을 수 있음을 강력하게 보여준다.

NASA가 작성한 온도변화 그래프 최신 동영상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조금만 역사를 살펴봐도 산업화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전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https://svs.gsfc.nasa.gov/vis/a000000/a005100/a005190/GISTEMP_Spiral_English_degC_2160p60.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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