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나 사회가 번영이나 건강, 문화나 단체의 일체감, 안전과 같은 목표에 마음을 두는 것은 전적으로 합법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루겠다는 상태에 빠져들면 절망의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 상태가 지나면 우리의 목적을 위한 수단들이 우상이요 신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에게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데려다 주는 개발권력이라는 왕관을 씌워주게 준다.

 

그런데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이나 사회들은 번영이나 건강, 안전과 같은 것들에 몰입하면 자기 손으로 만든 상징물을 신앙으로 믿게 된다고 한다. 신들은 그것을 만든 사람들을 결코 가만 놔두지 않는다. 사람이 만든 물건과 힘이 그것을 만든 사람들을 통제하여 결국 그들을 다스리는 지배권력이 된다. 우리는 물질적 풍요라는 목표에 사로잡혀 우리의 책임, 우리 사회의 다양한 힘이나 수단들, 그리고 권력들을, 신이 되어 우리에게 그의 뜻을 강요할 신들 앞에 내려놓은 것이다.

 

예를 들어, 경제성장을 지속해야 국민경제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이 더욱 효율적이 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공장을 제3세계로 옮겨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국내고용은 줄어든다


(HOPE IN TROUBLED TIMES, Bob Goudzwaard 지음, Baker Academic 출판)


[우리가 그토록 사모하고 섬기는 경제성장이 결국 우리의 직업을 빼앗고 있다!!!]

발전의 그늘


지금까지 명백한 해법이라 믿었던 더 많은 돈, 기술, 과학, 그리고 시장의 힘은 기대와 달리 종종 글로벌 빈곤, 글로벌 불안, 환경파괴, 그리고 금융시장의 횡포와 같은 더 큰 파괴의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발전의 그늘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데도 오늘날 지도자들은 다른 대안(There is no alternative, TINA)이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분명히 성장과 발전의 권력이 이를 추진하는 국가나 사람들의 힘보다 더 강력하다.

 

오늘날의 문제들은 발전의 도구나 수단들로는 점점 더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그 수단과 도구들이 우리에게 점점 더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바로 그 발전을 위해 그 수단과 도구들을 불가피한 것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전 자체가 우리에게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주고 있다. Karl Lӧwith발전은 스스로 발전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를 멈추게 하거나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일까?”라고 말했다. 또는 우리가 다소간에 발전의 권력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 권력은 다시 우리를 무력하고 얼게 만들어 아무런 행동을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HOPE IN TROUBLED TIMES, Bob Goudswaard 지음, Baker Academic 출판)

이곳에 머무는 동안 이곳에서 출석하는 교회가 한국교회(정확히는 내가 한국에서 출석하는 서부중앙교회)와 다른 점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쓸 거리가 많이 밀려 있는데, 게으르고 일도 많고 해서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새가족 교육에 대하여 간단히 적어보려고 합니다.


주보에 몇 주 동안 새가족 교육을 한다고 광고가 실렸길래 신청해 보았습니다. 이틀 동안 저녁에 두 시간 씩 교육을 합니다. 담당자는 어린이 담당교역자인 여성 목사인데, 지난번에 사진과 함께 소개했던 유아세례를 담당했던 바로 그 목사였습니다.


첫날은 1) 이 교회의 몇가지 중요한 신앙고백을 공개하였습니다. 이는 다른 교단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거나 혹은 이단 여부에 대한 의문을 가진 사람을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2) 기본 신앙 교육(공교롭게도 나와 함께 교육받은 5명은 모두 기존 세례교인들이어서 간단히 확인만 했습니다)을 하였습니다. 3) 마지막으로 크리스쳔 리폼드 처치 교단에 대한 역사와 기독교사를 교단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둘쨋날에는 1) 교단의 규모 등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교단이 하는 일을 중심으로 교단을 소개하였습니다. 특히 교단이 하는 일에 이 교회가 어떻게 참여하는지와 각 교인이 참여할 수 있는 일과 방법을 소개했습니다. 2) 신앙생활의 요소들에 대해 설명하고, 3) 이 교회의 조직이나 행정, 홈페이지 운영, 헌금에 관한 사항 등 교회 전반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였습니다.


이 교육과정을 미치고 1달 쯤 뒤에 정식으로 우리를 이 교회의 일원(공동의회의 구성원)으로 받아 들이는 간단한 절차를 거치면 비로소 이 교회의 멤버쉽을 갖게 됩니다.


내가 이 과정에 참여하면서 느낀 점 등을 간단히 적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이 교단의 뿌리가 캘빈으로부터 시작되고 그 캘빈이 메노나이트들을 종교탄압했던 장본인들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개혁(reform)이란 바로 잘못을 끊임없이 계속 바로잡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교육시간의 상당 부분을 교단에 대한 설명으로 채울만큼 교단 중심의 운영방식을 보여주었습니다.


2) 새로운 멤버를 받아들이기 위해 진지한 절차를 거칠 뿐 아니라 처음부터 이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해줌으로써 새가족에게 이 교회에 들어올 것인지를 선택할 기회를 줍니다. 사실 새가족이 오면 처음에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지속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면, 비로소 관심을 갖고 대해주는데 이때부터는 특정 교역자나 장로, 집사들 뿐 아니라 모든 교인이 다 말을 걸고 궁금해 하며 대화합니다. 즉 교회를 탐색하는 동안 자유롭게, 편하게 예배에 참석하면서 생각할 시간을 주다가 교회 일원이 될 것 같으면 비로소 적극적으로 친구가 되는 것이지요. 


또 새가족교육을 통해 교회의 일원이 되는데 필요한 신앙적, 행정적 안내를 해줌으로써 교회에 나오면서도 어리둥절하지 않도록 교육하는 것입니다. 새가족이 나타나면 처음부터 친밀한 행동으로 그 사람을 사로잡아버리는 한국교회와는 많이 다르지요. 그래서 내가 온 후에도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3-4번 예배에 참석했지만 모두 한번 나온 뒤에 다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3) 교육 자료가 다양하고 잘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교육자료는 교단이 발행하는 자료와 교회가 직접 제작한 자료가 있습니다.



4) 소그룹모임(우리나라의 구역모임과 유사하지만 구역과 달리 지역이 아닌 관심사나 필요에 따라 그룹을 나누고 있습니다)을 소개할 때는 원로 장로(다음에 쓰겠지만 장로도 3년 임기제여서 현재 장로가 아닙니다)가 한분 오셔서 소그룹을 처음 시작할 때의 상황과 운영과정 등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 교회가 겪었던 어려움(분란)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개혁이라는 정신을 잘 이해하고 있는 이들은 과거의 잘못을 감추지 않습니다.


다음에는 이 교회의 조직에 대해서 써 볼 생각입니다.

금융시장-이 시대의 문제와 해법의 모순4


원래 금융은 실물경제를 뒷받침하여 안정적인 경제운용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금융자본이 실물경제를 장악하고서 단기 수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경제를 더욱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글로벌 자본들의 위협은 국가들을 잠 못 들게 하고 있다. 새로운 빅브라더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왜 국가들과 세계 전체가 현대의 글로벌 금융시장의 자율에 그토록 의존하게 되었는가? 무엇이 정부들로 하여금 오직 감시의 눈을 늦추지 않는 빅브라더의 눈에 들기 위해 지출을 크게 줄여 국가경제에 짐을 지우고 있는가?

 

소로스는 금융자본은 특권적 위치를 즐기고 있다. ... (그러나) 금융시장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고 탄식한다. 결국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신뢰할 수 없는 도구가 선장의 자리에 앉아 실물경제를 좌지우지하여 결국 세계의 미래를 더욱 분별할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HOPE IN TROUBLED TIMES, Bob Goudswaard 지음, Baker Academic 출판)

환경-이 시대의 문제와 해법의 모순3


환경파괴에 대한 대책들은 거의 대부분 시장 세력들에게 의존하는 방식이다. 이산화탄소 배출거래제, 오염할당제와 같은 제도들은 동부와 남부 국가들에게 자기들의 환경을 다른 나라들에 팔라는 것이며, 새로운 환경기술을 개발하고 도입하라는 내용들이다. 이런 대책들은 기껏해야 임시방편일 뿐이며, 단지 이 딜레마를 풀어야 할 시점을 늦출 뿐이다


이런 대책들은 동시에 대량소비가 무한히 증가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에너지 및 환경의 집중도를 높이는 대량소비는 부유한 북반구뿐 아니라 인도와 중국과 같은 신흥국에서도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환경보호는 마치 먼저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고 넘치는 물을 빼려는 것과 같다. 언젠가는 만병통치약처럼 보였던 해법들이 우리에게 등을 돌린다. 1989년 지구상에서 하루에 한 종자씩 사라졌으나, 생물다양성협약에도 불구하고 2002년에는 한 시간에 한 종자씩 사라지고 있다.

(HOPE IN TROUBLED TIMES, Bob Goudswaard 지음, Baker Academic 출판)

 구약성서의 많은 내용은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갑자기 웬 성서 이야기냐고요? 그들의 역사 속에서 지금 우리의 상황을 돌아보게 만드는 기록이 있어서 함께 생각해 보자는 게지요.


이스라엘이 우리처럼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던 시기에 북쪽의 이스라엘에는 아합이라는 왕이 있었답니다. 그는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왕비로 맞이했는데, 이 여자는 바알이라는 신을 섬기는 선지자이자 한 부족의 왕이었던 엣바알의 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합은 이스라엘의 신이었던 여호와를 배반하고 바알신을 섬기게 되지요. 그들이 어떤 종교를 가졌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요? 그렇지요. 상관은 없습니다만 한 상징적인 사건을 통해 그 속에 담긴 뜻을 살피면 이게 결코 남의 일 같지가 않을게니 조금 더 참고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합왕의 궁전 근처에 포도밭이 하나 있었는데, 나봇이라는 사람의 것이었지요. 아합은 그 포도밭을 자기 채소밭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봇에게 그 포도밭을 다른 좋은 포도밭이나 또는 돈과 바꾸자고 제안합니다. 이 요구에 나봇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조상의 유업을 왕에게 넘기는 것을 금하실 것입니다.”


참고로 말하면, 여호와는 조상이 물려준 땅은 그 주인이 빚 때문에 팔았을 때조차 가장 가까운 친척부터 시작해서 친척들이 그 땅을 되무를 수 있도록 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50년 간격으로 찾아오는 희년)에는 무조건 그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정해놓았답니다. 그래서 아합은 자신의 욕심을 채울 수 없었고 근심으로 끼니를 거르기까지 했다지요. 이 때 왕비 이세벨이 이렇게 핀잔을 줍니다.

왕이 그러고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모름지기 왕이라면 힘없는 백성의 것을 마음대로 빼앗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세벨은 나봇이 사는 성의 귀족들에게 연락해서 나봇을 모함하여 죽이도록 하고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았습니다. 이세벨은 아합에게 이스라엘의 신이었던 여호와와 달리 가진 자와 힘 있는 자들의 폭력적 특권을 보장하는 바알신을 섬기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를 가르쳐 준 셈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힘 있는 자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이세벨의 폭력 앞에 굴복하여 어쩔 수 없이 바알을 섬겼지만 점점 가진 자의 특권의 맛에 길들여진 것입니다.


이 때가 바로 기독교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갈멜산에서 엘리야라는 여호와의 선지자하고 바알의 선지자 450명 사이에 대결이 벌어질 무렵입니다. 대결과정은 생략하고 아무튼 엘리야는 바알신의 선지자들을 도륙해 버립니다. 그러나 기세등등한 이세벨과 돈과 권력 맛에 길들여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엘리야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고, 실제로 많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한답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엘리야는 여호와께

저들이 다 죽이고 나만 남았다

고 말합니다. 이 때 여호와가 대답하기를

이스라엘에 아직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 칠천 명을 남겨두었다

고 말합니다. 이게 오늘 제가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게냐 구요?

최근 정치판 돌아가는 꼴과 각 언론사가 발표하는 대선 후보 지지율 한번 보십시오. 그리고 그 후보들의 면면을 살펴보십시오. 그것들을 염두에 두고 이글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오. 2002년 가을 그리고 겨울의 한국정치는 바알을 섬기는 자들과의 싸움 같지 않으십니까? 어떻습니까? 우리는 남은 칠천 명입니까?                                 (2002.1.14)

우리는, 시편뿐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하여,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이 좋은 것이며, 기념할 만한 일이고, 고대하며, 동경했던 일임을 스스로 기억해야만 한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쁨으로 소리치고, 진실로 밭의 나무들이 손뼉치게 만든다. 구조적인 불의, 윽박지름, 폭력, 오만과 압제의 세상에서, 이곳이 악한 자들을 그들의 장소에 확고하게 밀어넣고 가난한자들과 약한자들에게는 마땅한 몫이 지불되는 다가올 날(하나님의 심판의 날, 역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최상의 소식이다. 모반의 세상, 착취와 사악함으로 가득찬 세상과 대면해 볼 때, 선한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어야만 한다.(N.T.Wright)
   

‘we need to remind ourselves that throughout the Bible, not least in the Psalms, God’s coming judgment is a good thing, something to be celebrated, longed for, yearned over. It causes people to shout for joy, and indeed the trees of the field to clap their hands. In a world of systematic injustice, bullying, violence, arrogance and oppression, the thought that here might be a coming day when the wicked are firmly put in their place and the poor and weak are given their due is the best news there can be. Faced with a world in rebellion, a world full of exploitation and wickedness, a good God must be a God of judgement.’  



N.T. Wright


(사진은 지난 4월 말 BC주의 수도인 Victoria의 관광객이 가장 많이 다니는 해변 도로를 걷다가 발견한 구호입니다. 캐나다 원주민 여성 한분이 길바닥의 돌을 긁어서 글씨를 쓴 뒤 물감을 넣어 글씨를 보이게 했습니다. "No Justice on Stolen Land(빼앗긴 땅에 정의는 없다)")


지난 5월 6일 윌러비교회 부교역자인 마크 그란빌(Mark Granville) 목사의 설교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영어가 짦은데다가 이분이 호주분이라 발음도 익숙하지 않아서 조금 밖에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어느 할머니에게 했더니 그분은 웃으시면서 너 캐나다에 언제왔느냐고 합니다. 그래서 3개월 되었다고 하자 자기는 30

년 되었는데도 못알아 듣는다고 하십니다.^^ 이분의 블로그에서 그날 설교 내용을 다시 글로 쓴게 있어서 링크를 걸어둡니다. 


http://markrglanville.wordpress.com/2012/05/10/gods-judgement-an-exclusivist-outrage-or-the-end-of-oppression/

 

아내가 오늘 저녁 산책 도중에 오늘이 며칠이지? 하고 묻는데 대답을 하려고 따져보다가 오늘이 518임을 깨달았습니다. 518은 분노와 부끄러움이 겹쳐지는 날입니다. 분노는 모든 분들이 같으리라 생각됩니다. 부끄러움이란 강동경찰서 유치장에서 풀려난 뒤 광주 소식에 겁에 질린 나는 춘천과 운봉 등지로 숨어다닌 기억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늘 이 설교를 소개하는 이유는 정말 한국 교회와 다른 게 있기 때문입니다. 전문 번역을 하기는 그렇고, 그렇다고 영어 그대로 소개하면 많은 사람이 읽지않을 것 같아 간단히 요약합니다.


그의 설교는 우리나라에서도 만들어진 신이라고 번역되었던 도킨스가 쓴 "The God delusion"에서 인용한 다음 내용이 중요한 도전으로 제시됩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를 원한다면, 왜 그냥 용서하지 않고 스스로 고통을 받고 댓가를 지불했는가?" 자유주의 신학에서도, J.A.T.Robinson처럼, 사랑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노는 서로 공통부분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서구 사람들의 인식과 고난받아온 사람들의 인식은 충격적이리 만큼 서로 다릅니다. 편안하게 살아온 서구사람들에게는 모든 폭력을 공격적으로 느끼고, 하나님의 심판 선언에 대해서도 그렇게 반응합니다. 그러나 폭력과 압제 속에서 신음해온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수용 가능할 뿐 아니라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핵심 요소입니다. 멕시코의 신학자 호세 미란다(Jose Miranda)는 슬픔에 잠긴 세상에서 압제가 끝나는 정의의 날과 정의가 세워지는 것을 고대합니다. 압제자가 여전히 압제하고 있는 한 하나님의 샬롬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개입은 압제자에 대한 심판을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이사야 28:21 말씀처럼 '기이하고 비상한 사역'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인류가 심판으로 종말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며, 인내하시며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베드로후서 3:9)


그러나 무한히 참으심은 무한한 고통을 의미하기 때문에고통을 끝내는 것은 오직 심판밖에 없습니다. 압제자를 제거하는 것만이 샬롬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성경의 심판은 부유한 압제자들과 우상숭배자들에게는 나쁜 소식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고대하던 바이며, 축하할 일입니다. 성경의 심판은 단연코 좋은 소식입니다.


마크는 특히 서구인들을 향해 우리는 거의 모두 부유한 압제자들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불의를 참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에 다시 한번 매달리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심판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게되는 핵심이라고 합니다.


60-70년대 한국 교회는 군사독재 하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유신체제에서 내 기억에 의하면, 긴급조치 1호 최초 연행사건은 전주의 한 교회에서 설교를 위해 미가서 2장을 낭독한 직후 난입한 형사들에 의해 끌려간 모 목사님이었습니다. 말씀 선포도 하기 전에 오직 성경을 낭독한 것 만으로 형무소 신세를 진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아니 그 오래 전부터 한국 교회에서 구약성경은 십일조를 내라고 강요할 때나 인용되는 말씀으로 전락했습니다. 어느새 한국교회의 성도들도 서구사람들처럼 부유한 압제자가 되어 심판을 거북해 하는 존재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이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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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묵상은 마가복음 14장 후반부였습니다.

 

14:55-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

 

천안함도 그렇고 광우병도 그렇고 말의 앞뒤가,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은 진실이 다른 데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암시입니다.


우희종교수가 페이스북에 올린 짧은 글입니다. 정부의 광우병 발표문에서 느낀 생각을 읽다가 오늘 묵상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어제 미국산 소 내장 수입에 대한 농림부 설명서를 보았다. 
앞뒤가 다른 설명이 붙어있어 급조했거나 아니면 전문지식 부족으로 인한 혼란스런 모습이 엿보인다. 정부 스스로 99% 감소되어 안전하다고 선전한 광우병 발생. 
그렇다면 그렇게 99%의 감소를 가져와 과학적으로 유효하다는 것이 실증된 EU의 기준과 정책은 왜 그렇게 따르지 않고 안전 논란이 있는 미국 기준이 안전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것저것 찾아내지 못해 안달인 한국 정부. 
이번 농림부 설명서에 있는 정부측 입장의 모든 것을 다 양보해서 받아준다해도 99% 광우병통제를 이룬 EU기준으로 볼 때 그 위험한 SRM이 수입되어 국민들이 먹고 있다. 정부, 너무 무책임하다.


(원문보기) 

http://www.facebook.com/lifeWoo/posts/3068657315968



안전-이 시대의 문제와 해법의 모순2


선제적인 전쟁, 추가적인 공격을 막기 위한 시민의 자유제한, 더욱 개선된 기술의 적용과 군비지출에 바탕을 둔 무기 수준의 향상, 그리고 전술적 목적을 위한 군사적 파괴력의 증강과 같은 대책들은 테러리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2004년에 전 세계가 지출한 군사비는 1조달러를 넘었지만 미국정부 집계를 기준으로 2003175건이었던 테러 건수가 2004년에는 655건으로 3배 증가했다. 전쟁에 승리한다는 것은 평화 달성을 점점 더 믿지 못하게 만드는 장해물이 되고 있다.

(HOPE IN TROUBLED TIMES, Bob Goudswaard지음, Baker Academic 출판)

세계의 부와 가난의 분포

-이 시대의 문제와 해법의 모순(1)-


1969년 세계 상위 20%는 하위 20%보다 30배 더 많은 소득을 누리고 있었다. 1990년 이 차이는 60배로 늘어났다. 그리고 지금(이 책은 2007년에 쓰였다), 이 차이는 83배이다. 유엔의 한 연구보고에 따르면, 아프리카 인구의 반 이상이 절대 빈곤 상태에 있으며, 지난 20년 동안 세계가 더욱 부유해졌지만 이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어떻게 1970년대를 뒤 따르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그 때는 세계의 지도자들이 세계의 가난을 종식시키겠다던 때 아닌가?

 

이 시대의 핵심은 더 많은 돈과 기술을 남반부로 이전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해법은 충격적인 부메랑이 되었다. 여전히 북반부의 돈이 개발원조(DA)나 해외직접투자(DFI)라는 이름으로 남반부로 흘러가고 있지만, 1982년 이래로 매년 남반부에서 북반부로 분할상환이나 이자로 지급하는 돈이 훨씬 많다. 2000년 부자나라들이 그들의 GDP2.5%만을 해외직접투자에 사용하지만, 가난한 나라들로부터 받는 채무수익은 GDP6.3%에 달한다. 20056G8재무장관회의에서 어렵게 부채탕감계획에 합의했지만 이는 전체 부채의 2%에 불과해 상황을 바꾸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HOPE IN TROUBLED TIMES(Goudswaard의 저서에서 인용)

지난 주일(5월 6일)은 내가 이 곳에 온 후로 가장 바빴던 하루였습니다. 오전에는 이곳에서 출석하고 있는 윌로비교회(전에 한번 쓴 적 있는 크리스쳔 리폼드 처치)에서 예배드리고 예배 후엔 커피를 마시면 이곳 교인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함께 대화를 나누던 분이 써리의 한 기독교학교의 교장선생님이셨는데, 전에도 한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학교가 한국의 전주신흥고등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어서 전주에 두번 다녀온 적이 있으시다더군요. 암튼 그분이 한참 대화하다가 그날 저녁 5시에 자기 집에 오라고 합니다. 14-15년 동안 매월 모이는 소그룹 모임이 있는데 그날이 그 모임 날이라면서 우리 가족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권하더군요.


아내가 언어 스트레스 없이 예배를 드리도록 매주 오후에 드리는 한 작은 한인교회를 출석하고 있는데, 그 교회에서 어린이 주일을 지킨다고 해서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 행사가 3시 반이 넘어 시작하는데 5시까지 차로 40분쯤 가야 하는 그 교장선생님 댁으로 가야했던 것입니다. 암튼 어렵게 바쁘게 움직여 그 집에 갔습니다.


그분은 시골에 우리식으로 말하면 전원주택에 사셨는데, 거의 농가 수준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식재료를 자급자족하고 있더군요. 소도 6마리나 키우고 있었습니다. 광우병을 의식하는 듯 1-2년 된 소를 잡는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과일과 채소를 마당에서 재배하고 있었는데 그런 면적이 전체 마당의 20%쯤 밖에 안될 정도로 넓은 집이었습니다. 


이집 마당에서 생물수업에서나 들었던 벌새(Humming Birds)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벌새는 멕시코에서 겨울을 나고 거의 2500키로미터를 날아서 캐나다로 온다고 하더군요. 날개짓이 얼마나 빠른지 감탄했습니다. 카메라를 가지고 있지 않아 사진을 찍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시작한 글은 아닙니다. 잠시 후 모임에 참석할 부부들이 속속 도착하는데 대략 7-8쌍 정도가 모였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교사들이라고 합니다. 부인이 교사인 일반 직장인 남자 한명과 원로목사(사모도 교사출신)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교사라고 하더군요. 이들이 지난 15년 정도를 매월 모임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이들은 모여서 두어 사람이 자신이 읽던 책 가운데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대목을 낭독합니다. 그날 주일 설교(참고로 이교회는 지금 담임교역자가 공석입니다. 원로목사가 설교자를 물색하여 초빙하기 때문에 매주 설교자가 바뀌고 있습니다. 그날은 이 교회의 젊은 부교역자가 설교했습니다)에 대해 대화를 나눕니다. 약간의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고, 나는 원로목사와 같은 의견이었는데, 마무리가 좋았다는 의견 등이 오갑니다. (이날 설교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쓸 생각입니다)  또 교회 소식을 나누기도 합니다.


그동안 이들은 많은 책을 같이 읽었고, 무엇보다 크리스쳔 교사로서의 정체성,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교육을 함께 고민하고 격려해 왔다고 합니다. 그런 모임을 무려 15년 동안, 물론 많은 사람이 같은 교회를 다니면서, 함께 해왔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부러우면서 나는 한국에 있을 때 도대체 무얼 했는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진의 책은 이 모임에서 읽었던 책이라며 내게 소개해준 책입니다. 바로 아마존에 주문했는데 아직 받지 못해서 그분이 빌려 주었습니다. 먼저 읽다가 내 책을 받으면 돌려 달라고...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향을 받은 네덜란드의 경제학자이자, 네덜란드 국회의원을 지낸 적이 있고 지금은 화란자유대학의 석좌교수인 Goudswaard라는 분의 책입니다. 문제투성이인 현대의 3대 문제, 세계적인 빈곤, 환경파괴, 테러리즘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도덕적인 우주를 창조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정의와 불의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진짜 신념을 말하고 있었다. 불의한 정권은 부인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부인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항상 망한다. 귀중한 하나님의 세상에서 불의, 압제, 인종주의, 미움, 그리고 인간성말살은 최종적인 세상을 차지할 방법이 없다! 마지막 날에, 즉 바울 사도의 멋진 말을 이용한다면, “때가 이르면하나님의 높은 법이 충만할 것이다. 금상첨화인 것은 전 세계의 수많은 기도자들이 우리를 놓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실패할 수 있었겠는가? - 문제투성이 시대의 희망(밥 구즈와드 지음)의 서문에 쓴 투투주교의 글

 

I was expressing my real conviction that God has created a moral universe, that God cares deeply about justice and unjustice. Unjust regimes ultimately always fall because they seek to deny something that can not be denied. In God’s precious world, there is no way that injustice, oppression, racism, hatred, and dehumanization can have the final world! At the end of the day, “in the fullness of time”(to use the apostle Paul’s marvelous phrase), God’s higher laws would prevail. To top it off, the prayers of so many people around the world unheld us. How could we fail? - Foreword written by Tutu in HOPE IN TROUBLED TIMES(Bob Goudswaard etc) 

A People’s History of Christianity

:The other side of the story

Diana Butler Bass, 2009, HarperOne


 


이 책의 저자 Diana Butler Bass(이하 DBB)는 듀크대학에서 교회사로 박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대학교(U.C. Santa Barbara), Rhodes 대학버지니아 신학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그리고 지금은 워싱턴 국립대성당의 Cathedral College의 선임연구원(Senior Fellow)으로 일하고 있다그녀는 침례교 가정에서 자랐으나 당시의 미국 침례교는 인종차별에 동참했다. 10대 소녀일 때는 보수적인 무종파주의 교회에 다녔으며지금은 북미성공회(Episcopalian Church)의 신도이다.

 

DBB는 자신이 친구에게 들었던 이야기로부터 이 책을 집필하는 동기를 얻었다고 한다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말로 바꿀 수 있다.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에 개입하시는가사실 예수를 따른다는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에 대해 냉담하게 만들었다압제이단심판분파캐토릭교회의 종교재판마녀사냥학살종교전쟁 등 인간적인 야망과 잔혹함의 역사 때문이다그래서 기독교 이야기 속에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 하나님은 무심하거나 악한 존재이고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관심가질 게 없다

 

DBB의 말에 따르면자유신학자들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상대로 사는데 실패했고역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범한 실수에 대한 장황한 기록이라고 한다따라서 미래에는 나아질 것이라는 전통적인 믿음을 부인한다보수신학자들은 하나님이 거룩한 손길로 배우와 행동을 직접 조정함으로써 역사를 주관하신다고 한다또 자연적인간적 악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역사는 도덕적 교훈이나 학습이라고 한다. 그러나 DBB는 예수 이후의 기독교인들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 이야기의 다른 측면을 발견할 수 있고 기독교인들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영을 분별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이 책을 서론을 읽으면서 읽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한 용어는 다름 아닌 오늘날 주류 기독교를 Big-C 기독교라고 정의해 놓은 저자의 시각 때문이다. Big-C 기독교는 예수 (Christ), 콘스탄틴황제 (Constantine), 기독교국가 (Christendom), 캘빈(Calvin), 그리고 기독교국가로서의 미국(Christian America)으로 상징된다이는 호전적 기독교(militant christianity)이다캘빈의 종교개혁으로 청교도(Puritan)들이 탄생했으며 이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가 미국이라는 기독교국가를 건설했다보수주의자이건 자유주의자이건 모두 하나님의 뜻을 땅위에 건설한다는 의로운 목적을 위해라는 수사적 표현과 함께 공격적이고 호전적으로 행동해 왔다. DBB는 이런 전승이 처음 Cotton Mather(1702)가 쓴 <Magnalia Christi America (미국에서 행한 그리스도의 위대한 역사)>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교회 역사의 일정한 형식이면서 동시에 미국문화를 형성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기독교는 어떤 모습일까?

 

이 책은서구 기독교의 승리이야기가 펼쳐지는 Big-C 이야기는 현 시대의 요구를 이야기하는 데 실패했다고 말한다그러나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예수가 말한 대로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옳은 일을 하며 살기 위해 발버둥친 사람들의 전혀 호전적이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는 모두에 대한 겸손한 봉사로 세상을 변혁하고 인간사회에 은혜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그리스도를 따른다그래서 이를 Big-C기독교와 구별하여 위대한 명령 기독교(Great Command Christianity)’라고 부른다이는 누가복음 10:25-37에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가서 너희도 이같이 행하라(Go and do likewise)”를 따르는 기독교라고 한다.

 

이 책의 제목은 Howard Zinn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에서 따온 제목이다. Zinn은 미국의 역사를 여성과 소외자들 그리고 노동자들의 관점에서 말함으로써 사회적 행동주의의 틀로 기술한다이 책은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예언자로서의 예수의 삶을 흉내 냈던 사람들에게 초점을 둔다즉 정통성이 아닌 하나님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던 예수의 부름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진짜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했던 순간들에 초점을 맞춘다만약 기독교가 영적인 통찰력을 제공한다면 사람들은 교회사 속에서 예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자신의 연구를 바탕으로로마시대의 기독교가 현 시대의 기독교와 완전히 다르지만초기 기독교의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신앙에 대한 초기 기록들을 관통하고 있는 놀라운 개념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즉 기독교는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었기 때문에 계승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초기 500년 동안 사람들은 기독교를 교리체계가 아닌 삶의 방식으로 이해했고 따라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 길을 따르는 사람들(the People of the Way)’이라고 불렸다 한다. 변화력을 지닌 그 길 때문에 당시 로마의 기독교 비평자들은 기독교 교리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기독교인들의 헌신적 사랑의 실천이 급진적이며 사회분열적이라고 비난했다.

 

Justin Matyr(?100-?165, 캐토릭과 정교회에서 성자로 추앙하는 기독교 변론가) 과거에는 무엇보다 부의 획득과 소유에 가치를 두었던 우리들이 지금은 모든 소유를 공동으로 돌리고 필요한 모든 사람과 나눈다서로 미워하고 파괴하며 사는 방법이 다르다고 서로 다른 종족과는 함께 살지 않으려 하던 우리가 지금은 그리스도의 오심 때문에 그들과 다정하게 살며 우리의 적을 위해 기도한다.’라고 적었다고 한다예수 안에서 새 길이 열린 것이며기독교는 분열적인 것이 아닌다양한 사람들을 하나 안에 품는 종교였다.

 

DBB는 바로 그 길이 마가복음 12:28-34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에 기초한 것이라고 이해한다한 서기관이 주께 모든 계명 중 첫째 되는 계명을 묻자 예수가 대답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던 명령 말이다그래서 위대한 명령이다누가는 여기에 덧 붙여 주님이 이것을 행하라그리하면 살리라(누가 10:28)’라고 했다고 적었다이 길이 바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이다초기 기독교인의 지침서인 The Didache(12사도의 가르침)도 같은 취지로 말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교회사를 통 털어 마로 이런 삶의 기독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실천하며 살았던 기독교의 흔적을 유명한 저자들의 글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추적하고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추적의 기록이다.

 

<사족>

 

그러나 Big-C 기독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313,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하면서 기독교인들은 국가로부터 많은 부조를 받았다. 교회는 물론 목사나 사제도 부자가 되었다. 그러자 교회는 너희는 소유를 팔아 가난한자들을 위해 주라는 것과 같은 말씀들을 비유와 상징으로 읽는 원칙을 세웠다.

 

콘스탄틴은 옛 비잔틴을 콘스탄티노플로 화려하게 재건하였다. 콘스탄틴 이후의 황제들도 계속 이 도시에 보물을 쏟아 부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자들이 넘쳐 나는 영향력 있고 무한한 권력을 가진 기독교 로마제국의 수도로 만들었다. 별로 놀랄 것도 없이 이런 환경 속에서 교회도 변하였다. 교회의 자선행동의 비용이 국고 대체되어 기독교인들의 윤리나 실천은 느슨해졌다. 이때 실제로 목사나 사제들이 자신의 화려한 생활을 위해 구호물자나 헌물을 훔치는 성물매매가 있었다.

또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종교가 되는 길을 열어주자 당시 기독교인들은 콘스탄틴 황제를 13번째 제자라고 칭송했다. 콘스탄틴의 대대적인 기독교진흥사업과 조치들로 박해는 그쳤고 순교는 기억에만 남아있게 되었다. 심지어 5세기에는 로마군인은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는 자격조건이 생겼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이 세상의 일시적인 체류자가 아니라 로마와 하늘나라 두 곳의 시민권을 가진 이중국적자가 되었다. 또 많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로마는 바로 지상에 임한 하나님나라였다. 그리스도인의 모순은 사라졌다.

 

그러나 410년 영원할 줄 알았던 기독교회의 요람 로마가 고트족에게 침범 당하자, 라틴어 성경을 번역했던 제롬(Jerome)영원한 도시 로마가 무너지면 세상에 무엇이 안전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탄식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두 도시의 시민임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476년 로마는 멸망하고 피난민들이 히포로 몰려오자 어거스틴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며 설교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꾐에 빠져 자신의 진짜 시민의식을 망각했다는 것이다.

 

비록 로마가 한 동안 믿음의 울타리였지만, 이것 역시 사람의 도시이고 그 삶의 방식이 궁극적으로 이기심에 기초한 곳이었다. 하늘의 도시인 순례자 사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혜를 구하며 구제와 환대를 실천하는 곳이다. 현실에서 이 두 도시는 섞여 있다. 때때로 사람의 도시는 하늘의 도시를 존중하기도 하지만 또 때때로는 그렇지 않다. 로마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자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던 삶의 길로 돌아가자고 했다.

 

3월, 봄이 시작되자 이곳에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겨울에도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 봄이 되자 바람이 부는 것이지요. 그 바람은 한달쯤 불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바람이 거의 불지 않습니다. 

 

이곳에 이민온지 오래된 분과 함께 산책을 했는데 봄철에는 숲속을 걸을 때는 조심하라고 합니다. 높은 나무 위에서 썩은 나뭇가지가 떨어져서 매우 위험하다

 

고 합니다. 실제로 숲속 길 곳곳엔 통나무 덩어리 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습니다. 사진에는 작은가지만 보입니다만, 내가 카메라를 가지고 다시 갔을때는 이미 굵은 나무를 치운 뒤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장로님이 이런 현상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오랜 우기 동안 나무가 썩어서 매우 위험해지는데, 3월이 되면 바람이 불어 그런 약한 가지가 다 부러진답니다. 그리고 4월 부터는 다시 새순이 나온다는 것이지요. 즉 3월의 바람은 새순이 나올 준비를 시키면서 동시에 일년 동안 숲이 안전하게 만든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 붙이시더군요.

 

 "하나님이 그렇게 숲을 가꾸십니다"

프레이저 강가를 산책하는데 쉐퍼드종자로 보이는 개가 강가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합니다.

주인은 딴청인데...

알고보니 흑묻은 나무 조각을 물에 씻어서 다시 물고 나옵니다.

큰 개들은 아마 사람이나 다른 동물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항상 나무 조각을 물고 다니도록 훈련을 시킨 것 같습니다. 

나무를 입에 물고 주인과 산책하는 개를 자주 봅니다.

그런데 이개는 그 나무를 땅에 내려 놓은 뒤 흑이 묻자 물가로 가져다가 씻어서 물고 나오는 동작을 계속 반복하고 있더군요.

이것도 훈련의 결과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모습이 우스워서 한참을 바라보고 웃었습니다. ^^


4.19를 기념해야 할 때에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09년 교사들의 시국선언이 국가공무원법상 집단행동 금지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판결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유사한 사건에 대해 각 법원의 판결이 서로 달랐는데, 이번 판결은 앞으로 비슷한 사건을 판결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판결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뉴시스(Newsis)에 실린 관련 기사의 일부를 옮겨 보면 이렇습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용덕 대법관)19일 국가공무원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전지부장 이모(54)씨 등 3명에 대한 상고심에서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 등을 인정해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정치적·교육의 중립성이 요구되는 교원이 특정 세력에 대해 집단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현한 것은 교원의 정치적 중립성과 국민의 신뢰를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행위"라며 "공무원법상 금지하고 있는 '집단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반면 박일환·이인복·전수안·이상훈·박보영 대법관은 "표현의 자유 범위 내에서 특정 사안에 대한 정부 정책과 국정 운영에 반대 의사를 표현하면서 개선을 요구한 것은 공익에 반하는 목적의 행위가 아니"라며 무죄 취지로 반대 의견을 냈다.

 

이 기사를 읽다가 내가 동의할 수 없었던 점은 정치적·교육의 중립성이라는 말입니다. 우선 공무원 혹은 교원의 중립성이란 교육현장에서 혹은 업무 처리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고 행동하는 것은 헌법적 권리로 오히려 권장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공무원법으로 헌법적 권리를 포괄적으로 제한할 수 있다는 발상을 인정했다는 사실이 납득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상 중립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 이야기가 아니고 최근 캐나다 대법원이 내린 판결문의 일부입니다. 판결문의 일부를 해석해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공공영역에서 중립성의 달성 노력이 이 나라(캐나다)의 주요 과제가 되고 있다. ...... 우리는 또한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절대적 중립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받아들여야 한다.”

 

당연히 우리가 항상 중립적인 관점에서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할 수 있다면 최상입니다. 그러나 캐나다 대법원은 인간이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결한 것이었지요. 사실 우리는 언론도 절대로 공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TV와 신문을 볼 때마다 매일 아니 매순간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이 판결문이 나온 사건은 우리의 사건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사건입니다. 캐나다 퀘백주 정부는 강제로 종교다양성교육을 시키려 시도했습니다. 정부는 종교가 캐나다인들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를 공공영역이나 교육에서 배제할 수 없으므로 종교교육을 인정하는 대신 강제로 교육과정에 종교다양성교육을 포함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단체를 포함한 일부 종교단체들이 그 교육의 내용이 특정 종교에 편향적이거나 또는 모든 종교가 다 같은 것이라는 교육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캐나다 대법원은 이 선언과 함께 원고승소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절대적 중립성이란 존재할 수 없는 소설이며, 이는 언제나 더 큰 힘을 가진 자가 힘없는 자들에게 가하는 폭력의 근거일 뿐입니다. 크게 양보해서 말한다면, 중립이 반드시 요구되는 사람 혹은 집단에게는 정당에 대해 포괄적 반대나 지지를 금지할 수는 있어도, 정부나 정당의 정책이나 인물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이런 활동이 허용되어야 합니다. 또 중립이란 모두 다 똑 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체주의적 발상일 뿐입니다.

 

또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정부정책과 국정운영에 대해 반대하는 것을 특정세력에 대해 집단적으로 반대하는 것으로 해석했다는 점입니다. 나중에 이번 19대 총선결과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만, 이는 오히려 특정세력이라고 지칭된 그 집단이 철저하게 계급의식 속에서 행동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정책에 반대하면 자기 집단에 대한 반대 혹은 나아가서 도전으로 둔갑해 버리는 것이지요. 한국에서는 오히려 빼앗기고 차별 받는 사람들에게 계급의식이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사실이 우리나라의 야만성을 잉태하는 자궁이지요.

 

나는 두 나라의 대법원이 각각 내린 두 개의 판결을 보면서 아직도 우리 대법원이 얼마나 인간의 본성에 대한 몰이해 속에서 계급적인 판결하고 있는지 그 무식한 용감함에 경악합니다.

(2012.4.19.)

내가 지금 1달째 출석하고 있는 교회는 60여년 전 네덜란드 사람들이 이민 와서 세운 화란개혁교회 소속의 한 교회입니다. 단일민족교회에서 벗어나 캐나다교회가 되기 위해 다문화환경을 수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내가 지금까지 본 유색인종은 다른 한국인 가정 하나(이민온지 12년 된)와 흑인 학생 한명 그리고 우리 가족이 전부입니다. 영어가 딸리는 나로서는 정말 힘든 결정을 한 것입니다. 한인교회가 여러 곳 있어서 그곳으로 가면 편하다는 것을 잘 알지만, 내게 두 종류의 교회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두가지 교회란 화란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와 메노나이트교회(Mennonite Church)입니다. 19세기말 네덜란드를  대표하던 신학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분은 네덜란드의 수상이 되어 기독교 정신을 국가운영에 대대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카이퍼는 칼빈주의의 정통신학자라는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학생 때 그분이 쓴 칼빈주의에 관한 책을 읽었지만 사실 지금은 그 내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무튼 화란개혁교회는 카이퍼를 통해 기독교정신의 국가적 구현에 대한 성공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내 직업 때문에 잘 알고 있는 사실 한 가지를 소개한다면 네덜란드는 모든 대학 교육을 국가 세금으로 실시하는 전통을 이미 19세기 말에 세웠습니다. 


또 메노나이트교회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기독교와 평화라고 하는 내 오래된 관심 때문입니다. 메노나이트들은 원래 유럽에서 종교개혁시기부터 종교적박해를 피해 여러번 이주를 반복해왔는데, 대부분 최후에는 미국에 정착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사는 동네에서 동쪽으로 가면 많은 메노나이트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독일사람들로 자기 조국이 1,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기독교인들이 전쟁을 일삼는 나라에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캐나다로 이민온 사람들입니다.


다른 민족교회에서 느끼는 점을 가끔 글로 써보고 싶습니다. 긴 이야기가 아닌 한국교회에서 보지 못했던 사소한 차이들을 소개하는 정도로 말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오늘 교회에서 실시한 유아세례식입니다. 유아세례를 주는데 목사님이 어린 아이들에게 나와서 함께 하자고 하니까 3-5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 나갑니다. 미리 약속하거나 정해놓은 아이들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호기심에 나가서 함께 하는데 목사님은 아이들에게 세례수에 손을 담궈보라고 하고 물이 시원하냐고 묻는 등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잠시 노닥거리다가 세례를 줍니다. 아이들은 그 광경을 둘러서서 구경하고요.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아이들이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셨지만, 아이들이 교회의 친구로 자란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예식은 늘 심각하고 무겁습니다.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청소년이 되어 세상의 가벼움을 배우게 되면 자신을 억누른다고 생각하는 교회를 기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교회의 거룩함이 외형적 형식적 무거움이 아닌 친근하고 호기심 자극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럴까요? 이들의 예배시간은 교인들이 많이 참여합니다. 성경봉독도 일반 교인이 하고, 대표기도하는 사람이 광고를 함께 합니다. 즉 교회 소식을 전한 후에 대표 기도하는 것이지요. 물론 이들은 장로, 권사, 안수집사와 같은 특정 직분자가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유아세례식에 앞에 나와서 함께 참여하며 자란 이들은 교회 안에서 자유로운 거룩함을 배웠기에 자기 차례가 되면 주저 없이 나와서 교회 소식을 전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잘할 필요도 없고 형식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교회 소식을 전할 때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채 마치 친구들 모임에 나와서  '누구누구에게 이런 일이 있대. 관심갖고 기도하자.'라고 말하는 태도입니다. 


심지어 오늘 대표 기도하던 사람은 써가지고 나온 기도문을 읽다가 그만 읽던 곳을 놓쳐서 잠시 머뭇거리며 계속 읽을 곳을 찾았는데, 그 사이에 Sorry라고 말합니다. 누구에게 미안한 것일까요? 물론 교인들에게 한 말일수도 있습니다만, 내게는 그 말이 하나님께 하는 말로 들렸습니다. '하나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써왔는데 그만 읽던 곳을 놓쳤습니다. 그러니 미안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실래요?'


또 다른 이야기도 하고 싶은 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사진은 바로 아이들이 둘러 선 유아세례 장면입니다. 가지고 있던 핸드폰으로 찍어 화질이 형편 없습니다.


  


지난 1월 발간된 자동차경제 2012년 1월호에 실렸던 졸고입니다. 당시에 반응이 뜨거웠는데, 이제야 올립니다.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에서 작성한 PDF형식의 파일을 첨부하여 올리는 방식으로 밖에 올리지 못함을 양해바랍니다. 관심있는 독자의 의견을 기대합니다.

(사진은 서울모터쇼에 출품되었던 한국의 전기자동차)


도요타친환경아키텍처(Jan2012).pdf

  

초기 기독교회 저작물 영어번역본을 읽고 싶으신 분은

 http://www.earlychristianwritings.com 

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포트랭리 (Fort Langley)는 캐나다에서 서해안(태평양쪽)으로 유럽사람들이 처음 들어온 곳입니다. 제가 잠시 살고 있는  랭리의 한쪽 귀퉁이이자, 모체가 된 곳입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 포트랭리로 넘어가면서 바로 더비공원이 시작하여 포트랭리 다운타운까지 프레이저강을 따라서 계속 공원과 산책로가 이어져 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날씨만 좋으면 일주일에도 두세번씩 산책을 하러 갑니다.

그런데 이곳을 산책하면서 흥미로운 나무의자를 발견했습니다. 사진에 있는 것처럼 그냥 평범한 공원의자인데, 자세히 보면 조그만 명패처럼 생긴 글귀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기념하는 글귀이지요. 2000년에 돌아가신분인 모양인데, 그분이 물을 좋아하셨나 봅니다. 그래서 가까운 분들이 의자를 공원에 만들어 기증하고 고인에게 그 의자에서 물을 즐기라고 써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자가 있는 자리가 아주 좋은 명당자리입니다. 멀리 산이 보
이는 아름다운 경치 사진은 바로 그 의자에 앉아서 정면을 찍은 것입니다.  떠나 보낸 사람들이 이렇게 좋은 자리에 의자를 두어 지나는 사람들에게, 가신 분이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 의자에 앉아서 경치를 즐길 기회를 주는 것이지요.

우리 문화는 기념할 만한 일이 있으면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을 모아서 잔치를 합니다. 생각의 범위가 나로부터 동심원이 그려지지요. 그래서 가까운 순서대로 사람을 모아서 먹고 마시는데 돈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지요. 가끔 부자들이 죄를 지어놓고선 마치 선심쓰듯 몇푼 기부하고는 은근슬쩍 죄를 탕감받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기부문화는 아직도 갈길이 먼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활 속에서 기부하는 문화가 만들어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 부모, 형제, 자녀의 기쁨을 공적인 기부로 기념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 작은 변화를 지금 나와 우리로부터 만들어 간다면 좋겠습니다. 혹시 자신은 기부도 안하면서 남들이 공적인 기부로 기념하면, 자랑질한다고 뒤에서 손가락질이나 하는 질투쟁이는 없으시겠지요?




답답하고 우울한 날씨 때문에 이곳 생활이 정말 힘들다. 그런데 영어가 나를 가끔 웃긴다.
1) 캐나다 사람들이 얼마나 한국 상표 LG를 좋아하는지, 옷을 사러 나가보면 옷에 하나도 아니고 아예 한줄로 L/G라고 써놓았다.ㅋㅋㅋ  
2) 이 사람들이 또 순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이스크림 조차도 순대에 넣어서 파나보다. ICE CREAM SUNDAE !!! ㅎㅎㅎ 
* 혹시 무슨 의미인지 모르시면 사전을 찾아보세요 ^^;;; 

 

지난 1월말부터 2월초까지 내가 뉴스를 접할 수단이 없었던 동안 나꼼수와 관련된 사건이 크게 뉴스가 되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페이스북을 통해 뒤늦게 파악한 이야기로는 나꼼수에서 정봉주 전의원에 대한 지지를 표시하기 위해 비키니시위를 하라는 멘트를 했고 여기에 호응한 한 여기자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남성의 마초근성을 드러낸 것이라는 비난과 함께 어느 분이 이일로 나꼼수에 대한 지지를 내려놓는다고 했다는 것, 그리고 많은 분들이 비슷한 의미의 글을 썼다는 사실 정도이다. 물론 나꼼수 측은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여 이런 비난을 증폭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 지지한다는 말은 간단하다. 가카헌정방송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대통령과 정부여당에 관한 여러 가지 의혹을 제기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며 즐거워했다. 이처럼 한 가지라도 생각이 같으면 지지할 수 있다. 그러나 지지를 내려놓는다는 말은 매우 신중한 것이어서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에서 생각이 전혀 다를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여전히 나꼼수를 지지한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 종교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비정규직으로 사람들의 삶을 불안하게 만들고 빈부격차를 가속화 하며 자본의 힘으로 다수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경제사회체제(즉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반대한다. 둘째 사람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모든 행위에 반대한다. 그래서 남북한에서 독재권력을 정당화하고 살인의 핑계로 삼아온 남북한 대치상황을 깨고, 평화로운 공존과 나아가 평화통일을 지향해야한다고 믿는다. 나는 이 두 가지에서 나와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이나 정당, 권력에 반대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에서 일치한다면 다른 부분에서 의견이 달라도 논쟁은 할지언정 그것 때문에 지지를 내려놓지는 않는다.

 

내가 고 노무현대통령이 후보였던 시절에 선거운동을 돕기 위해 노력했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 지지를 접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분은 취임초기에 남북관계를 고 김대중대통령시절 이전으로 돌려놓는 특검에 동의했다. 내게 절차적 정당성은 죄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형장의 이슬로 혹은 고문으로 죽게 만든 남북한 대치상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외환위기로 우리나라에 이미 이식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 체제를 더욱 확고하게 정착시키기 위한 한미FTA의 시작은 결정적으로 그분에 대한 지지를 접게 만들었다. 물론 그분이 돌아가신 후 교수들의 서명운동을 주도하였지만, 이는 그분의 다른 업적을 높게 평가했으며 이명박정권의 폭력성에 대한 항거였지 노대통령에 대한 지지선언은 아니었다.

 

나는 나꼼수 사건으로 지지를 내려놓았다는 분들도 이 같은 원칙과 신중한 판단 끝에 한 것이라고 믿는다. 내 생각과 다른 점이 발견되는 사람마다 지지를 내려놓는다면 결국 모든 의 기준이 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며, 내가 권력을 잡는다면 나도 박정희나 전두환 그리고 이명박처럼 될 것이다. 그래서 지지를 내려놓는다는 말은 자신의 원칙에 따라 신중하게 판단한 후에 비로소 할 수 있는 말이다. (2012/2/24)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나는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던 말씀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적어도 오늘 아침 마가복음의 말씀을 묵상하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네 복음서에는 모두 빛과 소금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조금씩 다릅니다. 먼저, 요한복음(8:12)의 말씀은 주께서 세상의 빛이고 주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5:13-14)에는 소금과 빛의 이야기가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소금에 대한 이야기는 그 짠 맛을 잃으면 더 이상 쓸모없게 된다는 말씀이고, 빛에 관한 이야기는 선행을 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14:34)에는 소금에 대한 이야기를 마태복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고 빛에 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문제는 마가복음입니다.

마가복음 9:50
[NIV] "Salt is good, but if i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you make it salty again? Have salt in yourselves, and be at peace with each other."
[개역한글]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나는 오늘 아침 이 말씀이 있는 부분을 묵상하다가 내가 정말 몰랐던 것, 오해하고 있었던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곳에서 발간되고 있는 복음주의 잡지인, <Faith Today> 1-2월호를 읽으면서 한 독자가 쓴, 지난 호에 실린 글에 대한 반박의견을 읽었는데 그 제목이 ‘Salt and Light’였습니다. 원래 글은 캐나다교회들이 1) 다문화사회 속에서 정치적으로 옳은 태도를 가져야 하며 2) 예배에서도 신학적으로 옳은 태도를 가져야 할 책임이 있다는 취지의 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반박의견을 보낸 분은 소금과 빛이 되라는 위대한 의무에 대해 반문하면서 자기를 둘러싼 문화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된 나라들이 많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분의 주장처럼 주님이 말씀하신 빛과 소금이라는 역할에 대해 나는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역할(이분처럼 복음전파이든, 아니면 세상의 타락을 막는 소금의 역할이든)을 가르친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이 말씀은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소금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밖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소금을 두고 우리가 부패하지 않게 하라는 것이지요. 부패하지 않고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청정한 상태로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면, 세상의 타락을 막는 것이 아니라, 서로 화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역할을 위해 필요한 것이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우리가, 교회가 해야할 일은 스스로에게 소금을 쳐서 먼저 정결하고 스스로 정결하게 살아서 세상 사람이 보고 같이 정결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세상의 소금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이해하니까 마태가 기록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과 뜻이 일치하게 되는군요.

새롭게 깨달은 이 말씀이 한동안 내 묵상의 제목이 될 것 같습니다.
(2012.02.20.작성, 2.22 수정)



Part

The Way

Early Christianity

100-500

그 길: 초기(주후 100-500) 기독교

 

ONE. Christianity as a Way of Life

(삶의 방식으로서의 기독교)

 

(원문의 way는 길과 방식 두 가지로 번역했다.)

 

미래를 위한 과거/진짜 로마는 일어나 주실래요?

 

1910년 알버트 슈바이처(우리가 의사로 알고 있는 적도의 성자슈바이처는 사실 신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했다)의 저서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역사적 예수 탐구)’의 영어판이 출간된 후 개신교회에서는 예수의 실체와 예수가 가르쳤던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가 활발했다. 슈바이처는 후기의 해석 그리고 예수의 원래 메시지에 덧붙여진 역사적 오염들을 제거해야만 실제 예수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북미의 주류 개신교에 소개했다고 한다. DBB(이 책의 저자 Diana Butler Bass)는 이런 예수와 초대교회에 대한 관심을 초기 500년 동안의 기독교로 넓혀 보자고 한다.

 

많은 서구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가 더 이상 천부적 권리가 아닌 많은 종교중 하나인 후기 기독교사회(post-Christian society)를 살고 있다. 이는 마치 이교도 국가였던 로마에서 외부인(outsiders)이었던 신앙의 선배들의 삶과 같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에게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순수했던 시대를 복원하기만 하면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믿는 역사적 낭만주의(Romanticism)를 경계해야 한다. 왜냐 하면 로마는 야만적인 군대의 강제력으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공동체들을 정치적으로 통합한 극심한 양극화 사회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초기 기독교는 단일한 형태가 아니었다. 500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광범위한 지역과 다양한 문화 속에서 형성되고 성장하였기 때문에 뒤죽박죽이었다.

 

길로서의 기독교

 

DBB는 자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로마시대의 기독교가 현 시대의 기독교와 완전히 다르지만, 초기 기독교의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신앙에 대한 초기 기록들을 관통하고 있는 놀라운 개념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기독교는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었기 때문에 계승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초기 500년 동안 사람들은 기독교를 교리체계가 아닌 삶의 방식으로 이해했고 따라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 길을 따르는 사람들(the People of the Way)’이라고 불렸다 한다. 변화력을 지닌 그 길 때문에 당시 로마의 기독교 비평자들은 기독교 교리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헌신적 사랑의 실천이 급진적이며 사회분열적이라고 비난했다.

Justin Matyr(?100-?165, 캐토릭과 정교회에서 성자로 추앙하는 기독교 변론가)과거에는 무엇보다 부의 획득과 소유에 가치를 두었던 우리들이 지금은 모든 소유를 공동으로 돌리고 필요한 모든 사람과 나눈다. 서로 미워하고 파괴하며 사는 방법이 다르다고 서로 다른 종족과는 함께 살지 않으려 하던 우리가 지금은 그리스도의 오심 때문에 그들과 다정하게 살며 우리의 적을 위해 기도한다.’라고 적었다고 한다. 예수 안에서 새길이 열린 것이며, 기독교는 분열적인 것이 아닌,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 안에 품는 종교였다.

DBB는 바로 그 길이 마가복음 12:28-34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에 기초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한 서기관이 주께 모든 계명 중 첫째 되는 계명을 묻자 예수가 대답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던 명령 말이다. 그래서 위대한 명령이다. 누가는 여기에 덧 붙여 주님이 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누가 10:28)’라고 했다고 적었다. 이 길이 바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의 지침서인 The Didache(12사도의 가르침)도 같은 취지로 말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제자화를 의미하고 이는 수년이 소요되는 삶을 배우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이란 두 가지 사랑으로 구성된 급진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배웠으며, 이 사랑을 자신의 영혼 안에서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수행하려고 노력했다.

DBB가 초기 기독교공동체들에서 발견한 공통의 기반은 위대한 명령이었다. 그들 중 다수는 우리처럼 서로 싸우고 의심하고 또 그 길을 걷는데 실패했을 것이다.


 

나는 지난 해 초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포스트 도요타를 말해왔다. 영원히 한 산업을 이끌어가는 기업은 없다.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도요타도 미래의 어느 날, 지엠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1위 자리를 넘겨주게 될 것이다. 지금 포스트 도요타를 생각한다면 VW, 혼다, 현대-기아차그룹 정도가 가능하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포스트 도요타 논의의 초점은 누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점이 아니고 그 자리에 오를 기업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품질의 대명사였던 도요타가 최근에 겪은 경영위기의 본질은 오랫동안 1위 자리를 지켰던 지엠이 누적된 문제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부진한 틈에 갑자기 1위로 올라서는 과정에 내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도요타 자신은 오랜 세월 도요타시스템을 구축하며 준비해왔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지엠이 몰락하고 도요타가 이 자리를 대체하는 과정이 지나치게 빨리 이루어지면서 신중함이라는 도요타 특유의 정신이 사라졌다. 물론 현대-기아차 그룹이 중국에서 빠르게 성장하여 위기의식을 자극한 점도 신중함을 포기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일본 내 종업원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점, 또 도요타생산방식이 급성장과정에 변질되고, 무리하게 해외에 이식하면서 현장피로감이 증폭된 점 등도 문제의 원인일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후지모토교수는 복잡성의 문제라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글로벌경영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즉 누구든 도요타 이후 자동차산업의 리더가 되려면 다양한 차원에서 글로벌경영의 문제를 연구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연구주제들 중 몇 가지를 살펴보자.

 

글로벌경영의 문제를 다른 각도로 말한다면 생산대수 600만대의 장벽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엠과 도요타, 포드가 모두 생산대수 기준으로 600~700만대의 장벽을 넘으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 대규모 합병으로 600만대의 벽을 넘었거나 넘기려 했던 르노-닛산, 다임러-크라이슬러 등도 2008년 미국발 부동산버블붕괴로 시작된 경제위기 때 500만대에 못 미치는 기업들에 비해 더 큰 위기를 맞았다. 생산규모가 커진다는 것은 글로벌경영을 한다는 것과 동의어이고 모두 글로벌경영에서 위기를 맞은 것이다. 따라서 생산대수 규모 600~700만대의 장벽이 과연 존재하는지 또 존재한다면 그 원인을 밝혀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인지를 연구해야만 할 것이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기술지배력의 문제이다. 도요타는 90년경까지 모든 자동차기업들이 연구에 매달리던 전기자동차의 실용성에 의문을 품고 하이브리드에 주력하여 이 부분에서 기술지배력을 분명하게 확보했다. 그렇다면 현대-기아차그룹은 어떤 종류의 차세대자동차에서 기술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일본과 유럽이 선도하는 하이브리드나 클린디젤에서는 추격자로서 제품의 품질로 경쟁하면 되지만 선도기업이 되려면 자신이 지배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기술지배력은 정확한 예측과 막대한 연구개발 투자를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생각 할 문제는 선진국시장의 정체 원인 규명이다. 일반적으로 선진국시장은 포화상태여서 정체상태에 있고, 이를 예측할 수 있는 적절한 모형을 개발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최근에 이것이 양극화경제성장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양극화경제성장의 추이를 살펴서 선진국시장의 수요를 적절히 예측하면 좀 더 합리적인 시장관리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 두 나라의 자동차기업들은 모두 양극화경제성장의 쇼크를 겪었으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내수시장의 예측과 관리에도 이는 중요한 요소이다.

 

또 다른 시장의 문제로 중국시장을 연구하는 일이 있다. 이미 시장 주도권은 미국과 일본 중심에서 중국 중심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중국 역시 다른 선진국처럼 U자형 성장을 할 것인지, 아니면 사회주의가 가미되어 다른 성장궤도를 따를 것인지를 연구하며 준비해야 한다. VW은 모두가 중국에 들어가길 두려워할 때 과감하게 뛰어 들어 아직도 중국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중국시장처럼 앞으로 중요한 시장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는 곳이 또 없을까? 이런 관심은 현대-기아차의 시장 포지셔닝에도 중요한 해결방안이 될 것이다. 아마 여기에 노동문제와 도요타 리콜사태의 원인과 해결과정을 연구하여 미리 대비하는 것 정도를 더하면 포스트 도요타를 위한 준비의 대부분이 될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우리나라의 기업이 포스트 도요타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우 다양한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연구는 그 기업이 스스로 모두 다 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 이 나라의 많은 연구자들이 함께 이런 문제들을 연구하고 준비해야 한다.


(자동차경제 2010.7월호)
(사진: Toyota Lexus는 2009년 Saylor 일가족 사망사고의 어두운 기억을 씻고 다시 공격적인 마케팅을 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효율화가 중요한 화두가 되자 많은 우리 기업들이 인건비 절감을 위해 중국으로 몰려가는 것이 유행이었다. 다행이 성공한 케이스들도 많지만 실패했다는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인건비가 싸다는 장점만을 믿고 깊은 분석과 전략 없이 뛰어든 결과이다. 숙련된 인력의 부족과 부품소재산업의 낙후를 극복할 전략을 명확하게 수립하지 않으면 오히려 거대한 블랙홀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런 일은 중국을 시장이 아닌 생산기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다.

흔히 우리 산업은 샌드위치 신세라고 한다. 고급제품은 일본이나 독일 등 선진국이, 중저가품은 중국이 차지해 가운데 낀 신세라는 것이다. 이 우려할 만한 상황을 해피엔딩으로 끝내려면 중고급시장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 아무리 중국으로 옮겨가도 여전히 우리 기업은 중국기업에 비해 고비용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고, 반대로 중국에서 고급제품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을 갖춘다면 그 조건은 경쟁기업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세계 승용차시장은 그 동안 2대 시장이 이끌어 왔다. 북미승용차시장은 미국만으로 픽업을 제외하고 연간 800만대 수준에 이르는 거대시장이며, 서유럽은 1,500만대 내외이다. 일본이 단일 국가로는 미국 다음인 연간 450만대 수준이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시장이 크지 않아 아시아시장은 상대적으로 소홀이 다루어졌다. 그러나 사정이 달라졌다. 중국의 2006년 승용차 판매대수가 515만대에 달하면서 극동아시아시장은 세계 3대 자동차시장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지난다는 판매의 귀재 도요타의 태도에서도 이런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아주 오랫동안 중국과의 합작사업은 오직 기술지도로 일관했고, 합작투자를 결정하고도 시간을 끌던 도요타가 합작생산을 개시하기 무섭게 하이브리드를 투입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폭스바겐, 지엠 등이 시장을 선점하였으며, 혼다는 기술의 혼다라는 이미지를 확고하게 구축한 상태에서 중국시장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적절한 전략이다. 환경과 기술을 결합한 이미지를 통해 중국 시장을 잠식하고자 하는 계산된 행동이다.

1년 전 만났던 상해시자동차행업협회 서기장 Tang앞으로 도시소비자용 자가용차를 농촌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농촌형모델 개발에 적극 나서겠다.”고 했다. 이는 저가차 시장을 형성해 나가겠다는 말로 바야흐로 저가차부터 최고급차에 이르기 까지 매우 다양한 자동차시장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곧 미국보다 더 완벽한 자동차시장이 될 것이다.

중국 시장에서 한국 자동차는 투입 초기부터 호조를 유지하며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필자가 시장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러 가지 자동차 마케팅 이미지 중 중국소비자들에게 한국차가 경쟁차에 비해 더 어필하는 것은 스타일과 광고였다. 이 속성들은 소비자가 그 제품을 직접 구매하지 않아도 획득할 수 있는 외생적 속성이어서 소비집단의 형성과 확산에 유리하다. 이 사실은 한국자동차가 투입 초기부터 호조를 보이는 이유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초기의 호조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품질, A/S, 고객만족 등과 같은 내생적 속성들에서 만족도를 높여 같은 가격대의 모델 가운데 고급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딜러 CI 작업을 통해 점포이미지를 구축하는 것도 고급화 전략의 하나로 고려해볼만하다.

여기에 더하여 저가차 시장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중국정부가 압박하는 독자브랜드 혹은 독자모델 개발 요구를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기존의 모델 개발과 전혀 다른 중국식 모듈형 오픈아키텍처 방식을 부분적으로 실험해 보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자동차경제 2007.5월호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현대자동차)

(사진은 베이징현대 공장전경)





(사진은 종일 내리던 비가 그치고 저녁 노을과 함게 하늘이 열리는 모습)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나라들에 가면 가장 돋보이는 것 중 하나가 잘 만들어진 공공도서관과 그 시스템이다. 우리나라도 요즘 잘 만들어지고 있지만, 이곳도 좋은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선진국에 올 때면 늘 공공도서관부터 찾아서 등록을 하는게 좋다.

이곳의 도사관은 미국의 공공도서관에 비해 규모가 많이 열악했지만, 대신 브리티시 콜롬비아 주 내의 모든 공공도서관의 책을 대출할 수 있어서 그런 단점을 보완하고 있었다. 물론 미국과 마찬가지로 운전면허증 만으로 간단히 대출증을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한번 둘러보러 갔다가 그 자리에서 바로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하여 대출증을 만들고 대출해서 집으로 가져왔다.

이곳 도서관이 잠시 나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대출 제한수량(책, CD 등) 60개라는 점이다. 도대체 한번에 3주간 빌려주는 데 60개씩이나 빌려가서 다 읽을 수 있을까? 아내가 우리 아이들을 키울 때 시립도서관에서 일주일에 10권씩 책을 빌려다 읽혔는데, 그것은 세아이의 읽을 꺼리를 동시에 빌리느라 그랬고, 사실 대출 제한 때문에 아이들 모두의 대출증을 만들어 4사람의 대출증으로 빌려야 했다. 물론 대출기간도 1주에 불과했고... 그러나 암튼 3주 동안에 60개까지 대출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빌리는 사람이나 빌려주는 도서관이나 둘 다 정말 대단하다.

두번째는 내게 대출증능 만들어주고, 대출해 준 여성이 한쪽 손이 오그라든 장애우였다는 점이다. 사실 그런 몸으로는 책을 나르는데 불편할 텐데, 북카트 등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업무를 처리할 수 있었다. 물론 이곳 사람들의 여유있는 태도 때문에 더욱 가능할 것이다. 편견이 없고 또 말 없이 기다리는 여유가 이런 현실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A People’s History of Christianity

-민중의 기독교사-

:The other side of the story

 

Diana Butler Bass, 2009, HarperOne

 

이 책의 저자 Diana Butler Bass(이하 DBB)는 듀크대학에서 교회사로 박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대학교(U.C. Santa Barbara), Rhodes 대학, 버지니아 신학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리고 지금은 워싱턴 국립대성당의 Cathedral College의 선임연구원(Senior Fellow)으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침례교 가정에서 자랐으나 당시의 미국 침례교는 인종차별에 동참했다. 10대 소녀일 때는 보수적인 무종파주의 교회에 다녔으며, 지금은 영국 성공회신도(Episcopalian)이다.

 

Introduction: After Jesus

 

DBB는 자신이 친구에게 들었던 이야기로부터 이 책을 집필하는 동기를 얻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말로 바꿀 수 있다.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에 개입하시는가? 사실 예수를 따른다는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에 대해 냉담하게 만들었다. 압제, 이단심판, 분파, 캐토릭교회의 종교재판, 마녀사냥, 학살, 종교전쟁 등 인간적인 야망과 잔혹함의 역사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 이야기 속에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 하나님은 무심하거나 악한 존재이고,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관심가질 게 없다’.

DBB의 말에 따르면, 자유신학자들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상대로 사는데 실패했고, 역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범한 실수에 대한 장황한 기록이라고 한다. 따라서 미래에는 나아질 것이라는 전통적인 믿음을 부인한다. 보수신학자들은 하나님이 거룩한 손길로 배우와 행동을 직접 조정함으로써 역사를 주관하신다고 한다. 또 자연적, 인간적 악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역사는 도덕적 교훈이나 학습이라고 한다.

그러나 DBB는 예수 이후의 기독교인들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 이야기의 다른 측면을 발견할 수 있고 기독교인들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영을 분별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흔히 듣는 이야기

 

내가 이 책을 서론을 읽으면서 읽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한 용어는 다름 아닌 오늘날 주류 기독교를 Big-C 기독교라고 정의해 놓은 저자의 시각 때문이다. Big-C 기독교는 예수(Christ), 콘스탄틴황제(Constantine), 기독교국가(Christendom), 캘빈(Calvin), 그리고 기독교국가로서의 미국(Christian America)으로 상징된다. 이는 호전적 기독교(militant christianity)이다. 캘빈의 종교개혁으로 청교도(Puritan)들이 탄생했으며 이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가 미국이라는 기독교국가를 건설했다. 보수주의자이건 자유주의자이건 모두 하나님의 뜻을 땅위에 건설한다는 의로운 목적을 위해라는 수사적 표현과 함께 공격적이고 호전적으로 행동해 왔다. DBB는 이런 전승이 처음 Cotton Mather(1702)가 쓴 <Magnalia Christi America (미국에서 행한 그리스도의 위대한 역사)>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교회 역사의 일정한 형식이면서 동시에 미국문화를 형성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기독교는 어떤 모습일까?

 

영적인 기억상실증/기억과 공동체

 

현재라는 역사적 시점에 서구기독교(Western Christianity)는 영적인 기억상실증의 나쁜 케이스이다. 이 기억상실증은 1800년경 계몽시대에 시작되었다. 아니 유럽의 기독교는 마법과 미신, 그리고 압제하는 전통 등 때문에 이성과 과학에 의해 계몽되어야 했던 망각하고 싶은 기억이다. 서구기독교는 과거가 너무 고통스럽고 압제적이었으며, 너무 폭력적이었기 때문에 관용과 평등의 시대가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그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러나 모든 공동체는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이는 그들이 과거부터 한 공동체였음을 가르쳐준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기억과 역사 그리고 옛이야기를 포함해야만 한다. 그런 기억에는 1) 사랑의 헌신, 2) 사회정의가 있다. 한 기독교 공동체(자유주의)는 사랑의 헌신에 대한 기억을 망각했고, 다른 한 공동체(보수주의)는 도덕적인 삶의 기억을 잃어 버렸다.

 

별로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

 

이 책은, 서구 기독교의 승리이야기가 펼쳐지는 Big-C 이야기는 현 시대의 요구를 이야기하는 데 실패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가 말한 대로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옳은 일을 하며 살기 위해 발버둥친 사람들의 전혀 호전적이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는 모두에 대한 겸손한 봉사로 세상을 변혁하고 인간사회에 은혜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그리스도를 따른다. 그래서 이를 Big-C기독교와 구별하여 위대한 명령 기독교(Great Command Christianity)’라고 부른다. 이는 누가복음 10:25-37에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가서 너희도 이같이 행하라(Go and do likewise)”를 따르는 기독교라고 한다. 특히 저자는 이를 생성적기독교(generative Christianity, generative는 원래 언어학에서 한정된 개수의 단어가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되어 많은 문장을 생성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도 부른다.

이 책은 두 가지 입장을 가지고 있다. 1) 생성적 기독교는 기독교인들이 이 위대한 명령을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실천했던 것을 기억하는 것으로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다. 2) 수십 년 동안의 분투 끝에 중도파 및 자유주의 기독교가 북미에서 소생을 경험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진보적기독교 혹은 신흥기독교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실은 이들이 새로 나타난 것이 아니고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전통은 희망의 생명줄이다. 이것이 없으면 진보적기독교는 쉽게 다른 정치적 혹은 사회적 아젠다(세속적 세계관이 종교적 언어로 치장한 것)로 빠질 우려가 있다.

생성적기독교에서 예수는 지혜를 가르치고 하나님나라를 가르침으로써 세상의 지배체제에 저항한 종교적혁명가였다. 그러나 군사적 승리가 아닌 겸손과 친절 그리고 사랑의 승리였다. 신흥기독교에서는 전사로서의 예수 대신 예언자로서의 예수를 강조한다. 그런데 예수 이후에는 어떠했는가? 우리는 그가 세운 공동체를 통해 이런 예수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그가 자신의 몸이라고 했던 교회의 역사 속에서 예수를 찾고자 한다.

이 책의 제목은 Howard Zinn“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에서 따온 제목이다. Zinn은 미국의 역사를 여성과 소외자들 그리고 노동자들의 관점에서 말함으로써 사회적 행동주의의 틀로 기술한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예언자로서의 예수의 삶을 흉내 냈던 사람들에게 초점을 둔다. 즉 정통성이 아닌 하나님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던 예수의 부름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진짜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했던 순간들에 초점을 맞춘다. 만약 기독교가 영적인 통찰력을 제공한다면 사람들은 교회사 속에서 예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로마 캐톨릭 신학에는 사실 이런 일반적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 ‘sensus fidelium(성령이 충만하여 정의, 진리 그리고 선에 대한 천부적인 지혜를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 있다고 한다. 물론 저자가 강조했듯이 어느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인간은 죄인이면서도 동시에 거룩한 존재이다.


이 책은 HarperOne에서 출판한 Diana Butler Bass의 2009년 저서입니다. 이곳에 와서 초기에 한 일 중 하나는 공공도서관을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선진국의 특징 중 하나는 공공도서관이 잘 갖추어졌다는 점입니다. 처음 공공도서관을 방문하고서 서가를 훝어보다가 이 책을 발견했습니다. 앉아서 서문을 읽다가 흥미를 느껴 바로 대출하여 집으로 가져와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작권 문제도 있고 해서 가능한 본문을 직역하지 않고 내말로 바꾸어 첨삭한체 앞 부분을 요약할 생각입니다. 만약 내 요약이 이해하기 어렵거나 관심이 생기신 분은 원서를 구해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아마존 닷 컴에 들어가 보니 몇 년전 발간서라 책값이 저렴했습니다. 궁금한 점은 댓글로 남기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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