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25 적음)
정년을 앞두고,

1.계속 사무실의 짐을 버리고 있다. 원서들을 버리는 것이 한편으로는 아깝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랜 시간 나를 억누르던 짐을 벗는 것 같아 시원하기도 하다. 쓸데 없이 연구해보고 싶은 주제가 많았던 탓에 폭넓은 분야의 책을 사두었으나 결국 비싼 쓰레기로 버려지고 있다.(환경오염범)

1-2.서랍에서 오래 전 제자들이 보낸 손편지들이 한묶음 나왔다. 지금은 대부분 이름도 기억 못하지만 가슴 따뜻해지는 편지들을 다시 하나씩 읽어보면서 파쇄기에 집어넣었다. 추억은 그 자체로 이미 내 삶의 자양분이었으니 남겨둘 필요는 없다.

2.지난 10년 이상을 한중 민간교류가 동아시아 평화 유지에 핵심이라고 믿고 추진하던 학생교류, 오는 1월에도 한다. 정년을 이제 두 달 앞두고 있지만 이번에도 거의 모든 준비를 혼자하고 있다. 내가 정년한 후에는 오랫동안 공을 들여온 프로그램들이 그대로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회사 꼴이 나라꼴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쉽지만 과로하며 살아온 시간들과 단절하는 것이 행복하다.

2-2.박그네 때 교수 하나가 친위대 성명에 가담하고 지금 교무처장 하는 것을 보니 부러웠나? 이번에도 윤서결 친위대 성명에 한 사람이 가담했다. 몇 년 뒤, 교무처장 감이다.(?) 나는 상관 없는 시간이니 그것도 담담하다.

3.연금으로 살아가려면 그동안 후원하던 것들을 줄여야 할텐데 이것이 가장 큰 마음의 짐이다.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청지기로 살기가 녹록하지 않다.

4.정년 후 시간에 대해 아무 것도 정하지 않았다. 교수가 부족해 대학원 강의를 반드시 해줘야 한다는 학과장 요청 때문에 갈등이다. 해방을 만끽하고 싶고, 그나마 남은 자들이 만장일치로 요청하는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마 자립마을 프로젝트(여러 나라 가난한 마을의 자립기반을 만들어주는 일)에 내 재능을 발휘할 수 있을 듯 하다.

5. 2024년, 나에게는 가장 끔찍했던 해로 기억될 것이다. 그 악몽의 끝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계엄사태였다. 4월과 10월, 그리고 12월. 강한 멘탈로 버텼다. 그 모든 죽음 앞에 망각만이 나를 구원하리라 여기며 버티고 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속히 오시옵소서.

5-2.고등학생 나이 때부터 친구였던 이들의 단톡방에서 조용히 나왔는데, 몇 주가 지난 뒤 누군가 내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는지 다시 초대해서 불려들어갔다. 오랫 동안 친구로 지내왔지만, 차별금지법을 넘어서지 못하는 기독교인들과 더 이상 친구로 지낼 자신이 없다.

6.죽은 자들이 죽은 자의 장사를 지내게 하고 나는 산 자들 속에서 삶을 세우며 살아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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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을쓰을쓰르르르
쓰을쓰을쓰을쓰르르르르
낮엔 너무 더우니 새벽에 놀겠다고 쓰르라미
시간을 무시하고 운다

뽀로롱 뽀롱
부지런한 새가 벌레를 잡는 법이라고
이름 모를 새는 겁을 준다

어슬렁거리는 이웃 개를 위협하며
굵은 목소리로 으르렁 거리는 둥이
슬금슬금 달아나니
아차차
금새 목소리를 바꾸어 부드럽게 불러보지만
이웃집 개는 돌아오지 않는다

구구 구구
산비둘기 한 마리
뒷북을 친다.

2023.7.30.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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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이영석교수님의 부고를 들었다. 2010년대 중반 내가 몰입했던 주제는 제4차산업혁명이었다. 그리고 이교수님은 영국사, 특히 산업혁명기 역사에 두분의 대표학자 중 한분이다. 이교수님은 역사학자, 그리고 다른 한분은 경제사 학자이다. 이 당시 나는 이교수님의 연구를 많이 참조했고, 기회가 되면 만나뵙고 혜안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동료교수들과 조금 다른 관점에서 책(AI시대와 영화, 그리고 시)을 내고 이어서 바로 벌어진 지엠군산공장 철수 사태 때문에 이 주제는 한쪽으로 제켜둘 수 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이교수님의 부고를 듣게 된 것이다. 더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이교수님의 부인이 알고 보니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 부터 알았던,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몇차례 잠시 스쳐가며 인사를 했을 뿐, 제대로 인사를 나눌 기회가 없었던 선배였다. 어쩌면 그렇게 스쳐가며 인사할 때 이교수님도 뵈었을텐데... 이제는 그분의 축적된 혜안을 듣지 못한다는 게 우울하다.
그러고 보니 기억나는 또 한분 손용엽교수. 2000년대 중반 자동차산업에서 완성차와 부품의 관계에 고민을 할 때였다. 어느 학회에서 내가 주제발표를 한 후에 손교수님이 내 테이블에 오셨다. 그리고 의기투합해서 한국 자동차부품산업에 대한 대형 연구과제를 만들어보기로 했었다. 그래서 함께 초안을 만들었으나, 이후 소식이 없었다. 나중에 연구재단에 제출했으나 떨어졌다는 답을 들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서인가 뵐 수도 없고 소식도 잘 오지 않았다. 무심코 시간을 보냈다. (나는 찾아오는 사람은 누구나 환영하지만, 내성적이어서 내가 먼저 연락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2010년대 중반 손교수님이 재직중인 학교에 갈 일이 있어서 연락을 드렸다. 반갑게 함께 점심식사를 했는데, 식사중 본인이 암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1년이 지나지 않아 고인이 되셨다. 그분과 삶의 궤적이 겹치는 데가 없어서, 장례식장을 찾아 갔을 때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아니 최근까지도 대통령후보군으로 언론에 오르내리다가 은퇴해서 뉴스가 사라진 정치인이 와있었고 대부분 그분 주변에 몰려 있어서 내가 아는 얼굴이 있는지 찾아보기가 민망해서 바로 나왔던 기억이 난다. 살아계셨으면, 좋은 선배가 되어주셨을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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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우리나라에서 마음으로 존경하는 세 여성이 있다. 물론 젊어서는 나보다 선배들을 존경했는데, 요즘은 내가 늙어서 나보다 젊은 분들을 존경하게 된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후생가외.

임영신, 이라크 전쟁에 인간방패로 참가하셨고, 이후로도 이매진피스를 통해 평화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유가일(유은하), 임영신님과 함께 이라크 전쟁에 인간방패로 참가하셨고, 이후에도 제주강정기지 반대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문제는 그 후유증을 심각하게 겪었고 최근에는 노동을 하면서 많이 회복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평화활동을 위해 뒤늦은 유학을 준비중이다.(이글을 처음 쓴 때로부터 4달이 지나 비자 문제로 중단되었다)
임은정, 우리 시대 진정한 검사이시다. 검새가 아닌… 온갖 핍박 속에서도 검찰의 바른 자리매김을 위해 묵묵히 싸우고 있다.

이분들 덕분에 내가 사는 세상이 조금 밝아지고 있다.
(20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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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콩국수

내가 중학생이 된 뒤로 아버지의 직장이 순천의 OO여자중고등학교로 옮겨지고 나는 전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 여름방학을 맞아 부모님께 갔었는데, 아버지는 점심을 먹자며 나를 동네의 작은 국수집으로 데려가셨다.

아버지는 콩국수를 먹자고 하셨는데, 원래 국수를 좋아하셔서 어렸을 적에는 아버지가 손수 끓여주신 국수를 종종 먹었다. 지금도 당시에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기준으로 국수를 삶는다. 문제는 처음 먹어보는 콩국수가 너무 비려서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그후 대학원생일 때 지도교수님이 문득 콩국수를 먹자며 성균관대 근처 혜화동의 한 콩국수집에 데리고 가셨다. 나는 과거의 경험 때문에 먹기 싫었지만, 내색도 못하고 먹게 되었는데… 이럴수가? 너무 맛있었다. 내가 드디어 청소년에서 성인이 된 것인가?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콩물을 만드는 방법이 달라졌다고 한다. 내가 순천에서 먹었던 콩물은 진짜 두유수준이었고 요즘은 좀 더 고소하게 만든다고 한다.(그저 풍월로 들은 것이니 진실 여부는 모르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매주 함께 식사하던 것이 이제 어머니 한분만 모시고 나가야 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국수를 먹는 횟수가 줄었고, 요즘에는 여름이면 아내는 로컬푸드 매장에서 콩물을 사다가 직접 콩국수를 끓여준다. 한대접 콩물까지 다 먹고 나면 여름의 점심은 포만감과 함께 끝난다.

소바 혹은 메밀국수

광화문에서 재수를 하던 시절, 같은 반의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러 학원 밖으로 나온 적이 있다. 늘 학원 식당에서 라면만 먹었는데, 한 친구가 바람을 넣었고 여러명에 끼어 그렇게 나섰다. 광교 어디쯤이었을텐데, 메뉴판을 보니 가격이 나는 오면 안될 곳이었다.

가장 싼 메뉴가 소바였다. 그것이 무언지도 모르고 주문했다. 문제는 종업원이 소바는 두짝이 1인분인데 메뉴에는 한 짝의 가격을 적은 것이라고 했다. 곱하기 2의 가격을 보고 속으로 떨었지만 어떠겠는가? 자존심 때문에 주문을 했고, 비싼 돈을 지불했지만 그 나이의 나에게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양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은퇴 후의 아버지는 소바를 좋아하셨다. 그래서 여름이면 거의 매주 한번씩 소바집에 모시고 갔었다. 지금도 여름이면 외식할 때 제일 먼저 떠 올리는 메뉴 중에 하나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노블레스오블리주이며, 김문수나 진중권, 정성구 등 처럼 어느날 갑자기 돌변하여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한 자기 점검이기도 하다.

1. 자신이 논문이나 책을 저술했거나 혹은 연구과제를 수행해본 주제에 대해서만 외부 강연을 한다. 이것은 학습으로 지식을 습득한게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해 통찰력(insight)이 생겼다고 판단되는 주제만 발표한다는 뜻이다.
2. 자신의 생각을 글쓰기나 강연 등으로 소신껏 밝히고 살려면 적어도 자신이 주장하는 가치관에 부합한 일을 한두가지라도 실제로 실천하면서 살아야한다. 머리로 상상하는 것은 쉽지만 동시에 바뀌기도 쉽다. 특히 그런 일에 자신의 노동으로 번 돈이나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의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했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있을지 모르겠지만, 가능한 오래 이렇게 살면 좋겠다.

바쁘게 살다보면 정말 중요한 것들이 푸대접을 받게된다. 보통 그런 일들은 소위 데드라인 (종료일)이 정해져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낮에 산소 (산돌학교 소식)을 받았을때가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오랫만에 산소를 받았다고 느끼면서 봉투를 열어보니 이런 편지가 끼워져있었다.

산돌학교는 발달장애우들을 위한 대안학교로, 내가 군산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두가지 중요시설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역시 발달장애우들의 생활공동체인 나눔마을이다.

그들이 어렵게 만들었을게 분명한 소식지를 난 늘 습관적으로 열어서 쭈욱 훝어보곤 바로 폐지수집함에 던지고 했는데 이 장애학생의 사과문을 읽는 순간 죄지은 사람처럼 부끄러웠다.



오세아니아지역의 원주민이 쓴 책에서 읽은 내용 가운데 노인들의 영혼이 먼 바다를 살피고 와서 폭풍우가 몰려올 것을 미리 알려주었다는 이야기 있었다. 그말을 다시 곰곰이 씹어보면 결국 그들이 영혼이라고 부르던 것이 지혜가 아닌가 싶다. 나는 여름철에 소나기가 오는리라는 것을 바람결에 실려오는 냄새로 알아내는 재주가 있다. 사실 재주랄 것도 없이 어려서 부터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경험한 지혜일 뿐이다.


인디언 중의 한 부족은 빠르게 말을 달릴 때는 어느 정도 달린 후에 멈춰서서 자신이 달려온 길을 바라보곤 했다는 글을 읽은 적도 있다. 너무 빨리 달려 쫒아오지 못한 자신의 영혼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 두 이야기를 이어보면 바쁘게 행동하며 사는 사람에겐 지혜가 깃들 시간이 없다는 뜻을 읽어낼 수 있다. 


무슨 심각한 이야기를 쓰려는 게 아니다. 내가 집에서 사무실까지 가려면 자동차를 40분여를 운전해야 한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요즘 너무 많은 일을 하다보니 몸이 지쳐있어서 보는 사람마다 내 눈에 피로가 가득하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이 시간을 운전하면서도 중간에 졸음을 이기지 못해 길가에 차를 세우고 쉬는 일이 잦다. 5분만 쉬어야지 하면서 차를 세우고 있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시계를 보면 30분이 잠들어 있었음을 발견한다.


이렇게 살다보니 주말에 집에서 책을 보려고 집어 들어도 금새 졸고있다. 인디언의 지혜로운 말이 생각나는 이유이다. 너무 바쁘게 살면 책을 읽으며 성찰할 시간을 빼앗겨서 지혜조차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   

성공해서 찾아뵙겠습니다.

 

어젯밤에 받은 전화 한 통이 날 기쁘게 한다. 아니 어쩌면 내가 선생이어서 행복한 순간들의 하나일 것이다. “교수님 오늘부터 출근 시작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성공해서 찾아뵙겠습니다.” 물론 마지막 말, 즉 성공해서 찾아뵙겠다는 말 때문은 아니다.

 

2월에 졸업하는 한 학생이 있다. 약간 어눌한 느낌을 주는 학생이었는데, 1학년 때부터 무언가 도전해보고 싶어 했다. 그런데 말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실제 행동은 전혀 따라주지 않더니, 어느 날 휴학하겠다고 했다. 그때도 이러저러한 이유를 말했지만, 건강에 약간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 것 외에는 그리 깊이 있게 알 수 없었다.

 

복학 후 다시 내 연구실에 들어와 생활했는데, 웬걸 휴학하기 전과 별 다를 게 없었다.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집중적으로 캐묻자 비로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드러났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후 알콜중독자가 되었고 가정 폭력이 있었다. 견디다 못해 어머니는 가출하여 아들들하고만 연락하고 지내고 있었다. 가출한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을 하며 적은 수입으로 살아가고 계셨는데, 아버지가 이혼에 합의해주지 않아 이 학생은 국가장학금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수입이 문제가 된 것이다.

 

후배 교수가 연구조원으로 활용하여 연구비의 인건비를 챙겨주었지만, 아버지는 툭하면 사고를 내서 그 돈이 그쪽으로 흘러들어가야만 했다. 자신을 배려해 준 교수들에게 미안해서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고 피하고 싶게 만들었다. 폭력과 경제적 어려움이 이 아이를 어눌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지난 해 여름 이 학생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나는 서둘러 상속포기처리를 하도록 했고, 아버지라는 짐을 벗어던진 후 학생은 전보다 많이 밝아졌다. 취업 인터뷰를 대비해서 매주 TV토론 프로그램을 시청한 후 나를 찾아와 같은 내용으로 토론을 했다. 갈수록 말을 잘하고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해서 발표했다.

 

1학년 때 나를 찾아와서 했던 말이 컴퓨팅 분야를 하고 싶다고 했었다. 그러나 4학년 2학기라는 짧은 기간 동안 공부를 시키기 위해 아예 전문적인 분야를 집중적으로 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을 소개 받아서 서울로 보냈다. 그리고 지난 해 12, 서울의 한 컴퓨팅회사에서 지인으로부터 추천해줄 학생이 있냐고 묻는 전화가 왔다. 나는 이 학생을 보냈다. 현재보다 미래를 보고 뽑아보면 어떻겠냐고 했는데 면접 후 채용을 확정했다. 그리고 어제(15) 첫 근무를 마치고 전화를 한 것이다.

 

나는 그 학생이 성공해서 찾아오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성공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잘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어쩌다 들려오는 풍문으로나마 아무개가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만이다. 그게 선생이란 직업이니까.

요즘 많은 분들이 단식을 하고 있다. 세월호 특별법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만들려는 노력이다. 그런데 금식하는 분들을 보니 그저 쓸데없는 옛날 일들이 생각나 횡설수설 글을 적게 된다.


대학생 시절 이야기이다. 넉넉지 않은 생활을 해야 했다.(그렇다고 내가 불쌍했다는 주장을 하려는게 아니다. 그 시절 우리 또래의 대부분은 대학을 가지 못하고 바로 산업전선에 뛰어들어 돈을 벌어야 했으니 난 정말 혜택받은 사람이다.) 책을 읽고 싶은데 돈이 없었던 내가 택하였던 방법은 점심을 굶는거였다. 용돈수준이 점심 때 라면 하나를 사먹을 정도였는데, 이 정도 비용이면 당시에 문고본이라고 불리던 작은 크기의 책을 한권 사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점심을 건너뛰고 그 돈으로 책을 사 읽었다. 10여분 거리의 집으로 자취방을 이사할 때 책무게를 감당 못해 리어카라고 불리던 손수레아저씨를 불렀었다. 그 아저씨가 자취생이라고 해서 가볍게 갈줄 알았는데 책짐이 한 리어카라고 웃으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미 돌아가셨을 나이지만.


후배들을 몰고가서 분식집에서 한끼 식사를 하려면 일주일 동안 점심을 굶어야 했다. 덕분에 얼마나 날씬했던지 허리 사이즈가 26인치를 넘은 적이 없고 성인용 바지는 맞는게 없어서 늘 아동용 바지 중에서 큰 것을 골라 사야했다. 요즘 32인치를 넘나들어 아내에게 허리 뱃살 빼라는 지시를 받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비교된다.(가끔 내게 밥 얻어먹었던 후배들은 회개하라. 그거 다 내 뱃살이었다. ^^)


아버지가 서울에서 공부하는 아들을 보러 왔다가 바지 꼴을 보고 처음으로 기지바지(성인용 정식바지를 그렇게 불렀었다)를 사 주신 다음날 나는 그 바지를 입고 가두시위에 나섰다가 두둘겨 맞는 바람에 바지가 다 찢어졌다. 내 성인바지 시대는 그렇게 일일 천하로 끝났다.(90을 눈앞에 두고 계신 아버지께 지금이라도 고해성사를 해야 할까? ^^)


대학원에 다니면서 알바 수준의 직업을 가진적이 있다. 지금처럼 회원들의 후원을 받는 시민단체가 없었던 시절이어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던 후배들은 재정문제로 큰 압박을 받았다. 그 적은 월급을 받던 월급날이 되면 찾아와 후원을 받아가는 후배가 있었다. 결혼하고 큰 딸아이가 태어난 나는 생계가 너무 힘들어 한번은 그 후배에게 '일부 비용은 스스로 돈을 벌어서 보충하면서 운동을 하면 안되겠느냐'고 해서는 안될 말을 해버렸다. 그 후 그 후배는 연락을 끊었고 지난해 말 정말 오랜만에 다시 연락이 되기 시작했는데, 아직까지 그 때 일을 사과하지 못했다.(ㅠ.ㅠ)


그런데 머리가 멍청한 탓에 그렇게 읽어댔던 책들의 내용은 물론이고 책의 제목조차 기억이 가물거린다. '분명히 읽은 책인데'라거나 혹은 '이런 책도 읽었나?' 라며 머리를 갸우뚱 거리기만 한다. 참 쓸모없다. 아니 어쩌면 다 내 마음의 양식이 되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텐데, 문제는 요즘은 저작권이 어떻고 출처가 어떻고 등등등 사람을 쓸데 없이 갈구는 시대여서 쓸모없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려면 어떠리. 인생은 그곳에 갇혀있는게 아닌데.


진짜 문제는 지금의 내가 이미 밥 한끼 금식을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밥 시간이 조금만 늦어져도 아내에게 짜증이나 내는 졸장부가 되어버린지 오래라는 점이다. 우리 지역에서도 몇 분이 동조단식 중이라고 한다. 오늘 저녁엔 그곳에 가서 한 시간쯤 함께 앉아 있기라도 해야겠다. 

사람 목숨 귀한 줄 모르는...

1. 북한은 연일 말로 전쟁을 하고 있다. 무슨 전쟁을 애들 놀이쯤으로 생각하나보다. 근데, 생각해 보면 불쌍하다. 얼마나 힘이 없으면 바깥에다 전쟁할것 같은 말만 늘어놓을까? 자기 국민은 배곯고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많은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에 그런식으로 말하면 속된 말로 ㅁㅊㄴ이다.

2. 남한의 일부 지도자라는 사람들도 똑 같다. 벙커를 운운하거나 왜 우리가 특사를 보내야하느냐 반문하는 것을 보면 혹시 은근히 속으로는 전쟁 나기를 바라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대부분 본인은 물론이고 아들들도 군대에 보내지 않은 자들이다.
이들도 전쟁을 무슨 전자게임 정도로 여기는 것 같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나는 올해 2월 막내 아들을 캐나다에서 데려와 군대에 보냈기 때문이다. 나는 나쁜 아빠이다ㅠㅠ)


3. 아침에 출근하 는데 2차선으로 주행중 거울로 뒤를 보니 1차선에 119 구급차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달려오고 있는데 3대 정도의 차가 앞을 막고 주행중이다. 한참을 비켜주지 않아 할 수없이 2차선에 있던 내가 갓길로 나갔다. 그리고 구급차는 2차선으로 차선을 바꾸어 이들을 추월하며 나아간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 3대중 한대가 구급차를 앞질러 그 틈에 추월하여 더 먼저 달려가더니 또 한참을 그렇게 구급차를 막으며 주행한다.

4. 사람 목숨 귀한 줄 모르는 국민이 이 땅의 위 아래에 전쟁을 재미로 여기는 저런 괴물들을 만들어 놓았다면 내 지나친 억지일까?

1년여전 한국을 떠나면서 나는 두 가지를 아버님께 맡겼었다. 그 중 하나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식물인 '남천'이라는 나무 화분이다. 그 나무는 큰 형님 집 마당에서 옮겨 심은 것이고, 그것을 심어둔 화분도 100년 전쯤 일본에서 만들어진 도기화분이어서 골동품에 가까웠기 때문에 내가 늘 바라보는 보물(^^)이었다. 돌아와 보니 그게 없다. 아버님께 여쭤 봐도 도무지 기억을 못하신다.


다른 하나는 일년에 두어차례 정도 해외에 출장을 나가기 때문에 그 때마다 남은 달러나 엔화 혹은 위안화를 다시 원화로 환전하지 않고 다음에 사용하기 위해 따로 넣어둔 지갑이다. 어머님 말씀이 그 지갑을 누구 것인지 모르겠다며 해외에 나가는 사람에게 주겠다고 하시는 걸 누구 것인지 모르는데 가만 놔두면 주인이 와서 찾지 않겠냐며 억지로 말렸다고 하신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아마 그 화분도 누군가 달라는 사람이 있어서 주셨거나 무슨 이유로든 버리시곤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 같다.


그 화분을 잃어버려서 안타까운게 아니다. 내가 성인이 되어서는 한 때 아버님의 번영신학이 못 마땅해 언쟁을 벌였던 시절도 있지만, 내게는 '사랑'이라는 단어와 같은 뜻이었던 '아버지'가 그렇게 늙으신 모습으로 힘겹게 서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어젯 밤에는 딸아이와 전화하면서 가슴이 아팠다. 


사람들이 말하곤 한다. 우리 세대가 위로는 부모를, 아래로는 자녀를 동시에 생각해야 하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이라고. 정말 그런가? 두 가지 상념이 잠을 못 이루게 하여 만우절 아침, 농담이 전혀 즐겁지 않다. 

사이프레스 산에서 눈 덮인 산을 등산하고 내려오는 길에 바라본 노을입니다.


산에 내린 눈의 양을 짐작하실 수 있으세요? 도로에 내린 눈을 길가에 쌓아 놓아 절벽이 생겼습니다. 제가 서서 손을 뻗고도 한참을 더 위까지 눈이 쌓여있지요. 손위로 80Cm 쯤 위에 있는 흐릿한 회색선이 바로 맨 윗부분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습도가 높아서 밤 사이에 쌓인 눈 위나 나뭇가지 등에 눈꽃이 자라났다가 낮에 해가 나면 녹아 없어지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그늘에는 이 눈꽃이 녹지 않고 남아있는데 나뭇잎처럼 선명한 무늬가 아릅답군요.







내가 이곳에서 가장 부러운 것 중 하나는 아무하고나 이름을 부른다는 점이다. 우리는 유교적문화전통에 따라 감히 윗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무례한 일로 취급된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우리 사회를 왜곡시키고 있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존대말이 있기 때문에 이름을 직접 부르기도 힘들다.

한국의 학교에서 내가 아무리 학생들과 가까워지고 싶어도 종내는 교수와 학생의 관계로 회귀한다. 그들은 자신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어도 교수님 말씀이면 여지없이 묵살당한다. 물론 전공분야의 지식에 있어서는 그게 옳은 경우가 많겠지만, 인생이라는 넓은 수업에서는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이곳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세미나에서는 아무리 세계적인 석학이나 유명인사가 와서 발표해도 학생들이 아주 꼬치꼬치 따져 질문한다. 그렇다고 무례하게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 모습이 정말 부러웠다! (교수님 대신 아저씨 정도로 부르면 어떨까... 김아저씨, 제동이 아저씨 등등 ^^)


온라인 상에서 한국의 젊은이들과 대화하다보면 나는 정 반대의 감정을 느낀다. 오프라인에서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면, 말은 존대말을 사용하지만 내용은 그냥 비아냥거리는 말 일색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논리도, 가치관도 없다. 그냥 나와 다른 편이면 속된 말로 씹어댄다. 거기에는 아무런 예의도 없다. 그럴바에야 그런 존대말은 없는 게 낫다. 물론 존경심을 갖는 것과 내 생각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목사, 장로 등의 신분명칭에 존칭의 의미를 갖는 님자까지 붙이면 더욱 심각해진다. 겉으로는 예의 바른 제도이지만 사실 그 제도는 신분에 따른 계급의식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한 나무의 여러 가지일 뿐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제도로 나아간다. 지금 한국교회의 우스꽝스러운 모습 중 상당부분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계급제도에 원인이 있다. (내가 오랫동안 출석했던 교회의 목사보다 10개월도 안된 이곳 교회 목사와 더 편하게 대화하는 이 모순의 원인도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정치인이나 공무원들의 경우도 비슷하다. 이론적으로 이들은 국민의 심복이다. 심지어 국민의 투표로 뽑히기도 한다. 그런데 일단 손에 권력이 쥐어지면 안하무인으로 돌변한다. 소위 '완장차고 나선다'는 꼬락서니이다. 왜 그럴까? 만약 이명박대통령을 '헤이 명박이'라고 부르는 사회라면 국민이 멸시하고 저지하기 때문에 5년 내내 그런 야만적인 행패만 부리다 그만두는 일은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적어도 영화제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가 '부시씨, 챙피한줄 좀 아쇼! Shame on you, Mr. Bush, shame on you.'라고 말할 수있었던 사회는 되었을 게다.


내가 지금까지 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취한 소극적인 대안은 정반대로 가능한 모든 사람에게 존대말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후배나, 학생 등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면 존대말을 사용해 왔다. 초기에는 학생들에게 언제나 그렇게 대하려고 했는데 그게 부작용도 있다는 지적이 있어서 사적인 자리에서는 반말을 한다. 그 부작용이란 오히려 더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아우성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우리 사회에 바로 이런 이상한 시스템이 정착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존대말은 형식적인 관계에 있을 때 사용하는 말이고 반말이 친근한 언어라는... 즉 존대말은 아직 거리감이 있는 혹은 동류의식을 갖지못할 때 사용하는 언어이고, 반말은 동류에 들어왔다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언어말이다. 문제는 동류의식에 같은 패거리에 들었다는 의미를 갖는 패거리주의가 작동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언어는 정말 오래 세월에 걸쳐 형성된 그 민족의 문화이다. 그 문화가 하루 아침에 바뀔리는 전무하다. 오죽하면 일제가 우리 말과 글을 말살하려 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칭문제만 생각하면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해답없는 아우성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많은 교회에서 많은 목사들을 만났다.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사람들 중에 대학 때 잠시 나가던 교회 청년부의 박영선목사(당시에는 강도사였다. 지금 남포교회에 계신 것으로 안다)가 있다. 그 분은 기독청년들에게 적절한 비유로 신선하게 말씀을 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다른 사람 하나. 그분 역시 강도사 신분으로 내가 청년부 부장을 맡고 있던 군산의 한 교회의 청년부를 지도했는데, 젊은 그분과 함께 청년부를 끌어갈 때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러나 깊은 관계를 만들기 전에 담임목사에게 속된 말로 찍혀서 하루 아침에 쫒겨났다. 나와 막 깊은 신앙의 대화를 시작하던 그가 내게조차 연락도 못하고 떠났다. 수요일 저녁예배 후 토요일까지 관사를 비우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암튼 나는 그가 떠난 다음날 예배시간 광고에 유학을 위해 사임했다는 말을 듣고서 모든 일의 전말을 눈치챌 수 있었다. 따라서 깊은 기억을 나누기에는 턱없이 교제의 기간이 짧았다.(지금은 이렇게 담담하게 말하지만 당시의 내 분노는 정말 컸다. 그렇다고 소란을 일으켰다는 말은 아니다. 조용히 부장직을 사임했다. 결국 그 교회는 사분오열되고 재판에 감옥가는 사람까지 생기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목사가 바로 이곳 윌러비교회의 Mark이다. 제목에는 성탄절 예배가 주는 감동이라고 해놓고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사실 오늘 성탄절 예배에 참석해서 그의 원맨쇼에 가까운(^^) 예배인도를 보고 나오면서부터 이글을 쓰고 싶었는데, 게을러서 이곳시간으로 성탄절 밤에 쓴다.
오늘은 성경을 낭독하는 방법도 달랐다. Mark와 청년 한 사람이 나와서 예수 출생 부분의 성경을 몸으로 제스쳐와 함께 교대로 낭독했다. 연기 능력이 없으면 목사도 못해먹을 것 같다(^^) 그런데 오늘 성탄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가보니 교회에 여러 장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William Kurelek(우크라이나 태생의 캐나다 화가이자 작가)의 그리스도 탄생 그림(Nativity)인데, 제목은 A Northern Nativity(유튜브로 보기)이다. "만약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이 이곳에서 일어난다면... 그때 일어났던 일이 만약 지금 일어난다면... 누가 기적을 볼 수있을 것인가? 누가 선물을 가지고 올 것인가? 누가 그들을 맞아들일 것인가?"하는 질문들이 그림에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이질문들이 바로 오늘 예배의 중심 주제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도시에는 주의 어머니가 묵을 곳이 없다. 쉴 곳 없는 그런 곳을 헤매는 마리아와 요셉, 그러나 그리스도는 언제나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로부터 환대를 받는다. 가난한자, 부랑자,외국인들에게 말이다. 그들이 바로 그 영광의 순간을 목격하는 복을 받는다.

Mark는 피아노 앞으로 가더니 클래식 캐롤은 사람을 평안하게 하는 음을 사용한다고 몇개의 음절을 치면서 들려준다. 그리고는 재즈나 블루스는 불편한 음을 사용한다고 다시 몇개의 재즈곡 음절을 들려준다. 그러면서 말한다. 미국의 흑인노예들은 슬픔에 차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음을 사용하여 캐롤을 불렀다고. 그러더니 재즈 캐롤을 멋지게 피아노로 연주한다. 나는 이제껏 이렇게 감동적인 재즈 연주를 들은 적이 없다. 흑인노예들은 그렇게 주님을 환영했다.
갈릴리는 또 어떤가? "어찌 갈릴리에서 귀한 것(정확한 표현은 요한복음 7:41-그리스도, 7:52-선지자)이 날 수 있느냐?"고 했다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을 기억하는가? 갈릴리는 사마리아보다도 더 북쪽지방이다.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성경을 읽으면서도 이 사실을 오늘에야 기억하게 되었을까? 언제나 북쪽지방은 외적의 침입으로 황폐해졌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먹고 살만한 게 있거나 힘이 있는 사람들은 다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래서 그곳에 남아 사는 사람들은 남쪽으로 내려가 굶어 죽으나 갈릴리에 남아서 외적에게 죽으나 다를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이방인들까지 득실거렸다. 오 주님... 그곳이 바로 우리 주님이 오신 땅이다.
동방박사들? 그들은 하나님이 금하셨던 점성술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라? 이상하지 않은가? 왜 우리 주님이 오신다는 징조가 별에 나타나고 또 율법으로 엄격히 정죄받던 점성술사들이 이를 발견하고 주님 탄생의 의미를 깨우치며, 첫 축하의 영광을 안게 되었는가? 그것도 외국인의 신분으로.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외국인인 로마사람과 접촉해야 한다고 해서 세리를 그리도 미워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주님 오신 메시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의 눈과 귀를 닫은채 다른 복음을 읽고 있었고 다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왜 누가가 이렇게 기록했는지를 애써 모른채 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눅 1:46-53]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크리스마스가 곧 다가옵니다. 북미에서의 크리스마스는 한국에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와는 또 다릅니다. 일단 크리스마스 장식의 차원이 다릅니다. 할로윈데이 때에도 몇몇 집이 장식을 했었지만 이는 아이들 장난 수준이었고 크리스마스 장식은 장식을 하는 집의 수 뿐 아니라 하나하나 장식의 규모면에서도 차원이 다르지요. 오래 전 미국에서 나그네 생활 할 때 어느 집은 너무 많이 꾸며 놓아서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고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호주머니 속 동전을 기부해 달라는 말과 함께 모금함을 놔둔 것을 본적도 있습니다.


사진은 산책 중에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창문 앞의 목마탄 인형은 목마가 움직이기까지 하는데, 동영상이 아니어서 보여줄 수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캐나다를 대표하는 방송 중 하나는 CBC라는 종합 방송이 있습니다. 이 방송의 라디오FM 중 한 채널은 내가 주로 음악을 듣기 위해 틀어놓곤 하는 방송인데, 이 채널은 추수감사절이 지난 11월 말부터 매일 24시간 크리스마스 캐롤을 틀고 있습니다. 사실 캐롤 만큼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게 해주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Sojourners(링크: 소저너스; 일시체류자, 나그네 정도의 뜻입니다.)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치라는 책으로 유명한 짐 윌리스라는 분이 발행하는데요. 그 잡지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 기사에 크리스마스 캐롤을 이야기하는 글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그 첫 곡이 우리 말로 "오 거룩한 밤"입니다. 나 역시 크리스마스가 되면 성가대에 참여해서 늘 감격으로 불렀던 곡입니다만, 어느 분이 이 곡을 무심코 따라 부르다 전율하며 가사를 다시 음미하며 묵상했다고 하더군요.


2절 가사입니다. 두번째 문단을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억눌린자의 사슬이 끊기고 노예가 형제가 되는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일까요? 모든 압제를 끝내달라고 기도하는 크리스마스인가요? 그냥 우리끼리 기쁨에 겨워 흥청거리는 크리스마스는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Truly He taught us to love one another,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쳤네,   
His law is love and His gospel is peace.                그의 법은 사랑이고 그의 복음은 평화일세.
Chains shall he break, for the slave is our brother,  그가 사슬을 끊었고, 노예가 이제는 형제라네,
And in His name all oppression shall cease.           그리고 그의 이름 안에 모든 압제가 끝나리라.
Sweet hymns of joy in grateful chorus raise us,      합창의 달콤한 기쁨의 찬송이 우리를 일으키니.
With all our hearts we praise His holy name.          우리는 전심으로 그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네  
Christ is the Lord! Then ever, ever praise we,         그리스도 우리 주여, 당신을 영원히 찬양합니다.
His power and glory evermore proclaim!               그의 힘과 영광을 더욱 선포하리!
His power and glory evermore proclaim!               그의 힘과 영광을 더욱 선포하리!


저 앞이 주차장이고,


내 차는 그곳에 있는데...

.

.

.

그곳으로 가면 피 본다는데 어쩌지???

ㅋㅋㅋ




오늘 오후 빗 속에  장을 보러 나갔는데, 다시 주차장으로 나오자 서쪽 하늘의 구름이 터지면서 강렬한 햇빛이 황금빛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 하늘엔 쌍무지개가 걸쳐있었지요. 보통 양쪽 끝부분만 보이곤 하는데 오늘은 선명하게 반원이 완벽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얼른 핸드폰을 꺼내 찍었는데, 핸드폰이 요즘은 누구나 갖고 있다는 스마트폰이 아니어서 그저 맛(^^)만 보시라고 올려봅니다. ^^;; 하나님이 노아의 홍수 이후 무지개를 약속의 증표로 주신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습니다.





[2000년 스승의 날에 그 때도 외국에 있었기 때문에 멀리서 학생들에게 보냈던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꼰대 같은 소리한 번 해봅시다. 여러분은 전기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인터넷 없는 세상은 얼마나 답답할까요? 요즘 여러분이 즐기는 팝 음악이 없는 세상은 또 얼마나 삭막할까요? 우리는 이런 것들이 이미 우리 생활 가운데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세상을 얼마나 바꾸었는지에 대해 무감각하게 지나쳐 버리는 게 보통입니다만 분명히 지금 우리는 이런 것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것들을 처음 만들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이미 어려서부터 여러 차례 들었겠지만 다시 기억을 되살려봅시다.


에디슨, 그는 발전기와 전등 등 여러 가지 전기 장치들을 발명한 인류 최대의 발명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학교 교육을 적게 받았다고 말합니다만 그것은 사실 왜곡된 것입니다. 그가 자라던 시절에 미국 어린이들은 평균 2년 정도의 학교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그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불구의 몸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는 불구의 몸으로 기발한 상상력을 실천에 옮기는 괴짜였습니다. 그가 처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지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좌절하지 않았던 데 있습니다. 성실한 노력은 그가 괴짜로 끝나지 않았던 가장 중요한 원동력입니다.


오늘날 인터넷이 이렇게 보급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라우터라는 장비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장비는 다른 대학에 다니던 자기 애인과 통신을 하고 싶었던 한 대학생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즘 어른들 생각대로라면 그 학생은 "비싼 돈 들여 학교 보냈더니 연애에만 빠져있는 한심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애를 위해 새로운 장비를 개발하는데 정력을 쏟은 괴짜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연구와 노력이 그를 결국 정보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게 만든 셈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즐기는 팝 음악은 로큰롤(rock and roll)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까지는 오직 흑인들이 째즈 음악과 가스펠 송을 즐기고 있었고, 백인들은 그런 신나는 음악을 즐기지 못한 채 겨우 컨트리 뮤직이라고 하는 점잖은 음악에 매달려 있었지요. 이 때 등장한 가수가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입니다. 그는 백인이면서 흑인 음악을 과감하게 받아들였던 것이지요.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이런 엘비스가 "얼굴은 희멀건 녀석이 깜둥이 노래나 부르는 미친놈" 정도로 취급될 상황이었지만, 그는 그 괴짜의 길 걷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결국 오늘날 여러분이 즐기는 다양한 음악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모두다 괴짜였지요. 만약 이들이 학교에서 선생님이, 어른들이 가르쳐 준 데로 만 달달달 외우면서 살았다면 이런 혁명적인 일을 이루어 낼 수 있었을까요? 이들이 만약 그냥 자신의 생각을 한 번쯤 저질러 보고 "안되면 말지" 하는 생각으로 그 일에 나섰더라도 이런 일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자신만의 기발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을 뿐 아니라 그것을 이루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바로 성실한 노력이 뒷받침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감히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성실한 괴짜가 세상을 바꾼다"고.

밴쿠버의 서해안쪽 도시인 West Vancouver는 아름다운 해안으로 호화판은 아니지만 아기자기한 부자집들이 몰려 있다고 합니다. 그곳의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Horseshoe Bay 옆으로 아름다운 공원이 하나 있습니다. 화이트클리프(Whytecliff Park)라는 공원입니다. 크기는 작지만 바닷가로 발달한 암벽위에 자리잡고 있어서 경치도 좋고 넓은 태평양을 바라볼 수 있어 유명한 곳이랍니다.


어제, 그러니까 캐나다 시간으로 10월 27일(토요일) 오후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곳을 찾아갔습니다. 이곳에서는 거의 항상 물개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동물원이 아닌 자연 상태의 물개를 보는 기회를 마다할 수 없었지요. 게다가 그곳에 접근하는 도로가 해안선을 따라 정말 아름다운 드라이브 길이었습니다. 바다 물 위로  얼굴을 쏙 내밀고 헤엄치는 물개를 사진에 담았지만 일반 카메라여서 사진은 별로 신통치 않아 이곳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바로 앞 바다에 떠있는 작은 섬을 바라보니 갈매기들이 섬위에, 바닷가에, 그리고 바다 위에서 낮잠을 즐기듯 평화롭게 앉아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평화롭게 보여 사진을 찍었는데 그게 왼쪽 사진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무슨 일인지 우리는 아무런 조짐도 느끼지 못했는데, 갑자기 갈매기들이 무언가에 크게 놀라 일제히 날아 오르더니 육지쪽으로 모두 달아납니다. 그래서 내 앞으로 지나는 갈매기들을 찍은 사진이 오른쪽 사진입니다.


그리고 오늘(일요일) 아침 뉴스를 통해 어젯저녁 8시경, 이곳 서해안의 한 섬 근처에서 진도 7.7의 지진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뭐 심각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정말 동물들은 자연 재해를 미리 느끼는 것일까요? ^_____^ 



언젠가 이곳에서 말했듯이 올해는 내게 정말 중요한 해입니다. 통계학자로서 볼 때 이미 평균수명이 80이상으로 늘어나서 인생은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처음 30년은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신의 인생을 준비하는 기간이고, 다음 30년은 자신의 수고로 일하며, 자녀를 키우고 부모를 보살피는 기간입니다. 이 60년은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생물학적인 인간으로서 종족을 유지하는 삶을 사는 셈입니다.


그러나 수명이 길어지면서 우리에게는 또 다른 30년(혹은 20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50의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나는 그 30년을 생각하고 준비해야할 때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그리고 처한 환경마다 다 다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습니다. 올해는 바로 그 방향을 결정하고 싶어서 가진 계획적인 안식년입니다.


많은 자기계발 전문가들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만, 불행하게도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이 생각나곤 합니다. 누가복음 12:18~20절에 있는 말씀이지요. 어느 부자이야기입니다.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온통 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무엇을 가져야 하고 등등 온통 자신이 오랫동안 누릴 수 있으려면 무얼해야한다는 이야기 뿐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생물학적 본능에 충실한 내용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생물학적인 본능을 유지하는데 이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면 장수는 축복이 아니고 저주일지도 모릅니다. 갈수록 생물학적 능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생의 또 다른 3부를 주신 게 이것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곳에 와서 여러 책을 읽고 강연을 듣고, 특히 윌러비교회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내 머리 속에는 몇 가지 주제들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성경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자
  • 북한주민(다른 나라의 난민을 포함)을 살리는 일에 지금처럼 후원금만 보내는 역할에서 무언가 좀 더 구체적인 일을 시작해야 한다.
  •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사람들의 모임이 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 "Economics of Enough" 지금의 주류 경제학은 사람을 죽이는 경제학이다. "그만하면 되었다"를 이야기하는 경제학이 필요하다.

  

오래전 대학생이었을 때 교수가 되기를 꿈꾸기 시작하면서 항상 하던 기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지도자가 될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좋은 지도자를 길러내는 밑거름이 될 수있도록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가능하면 무슨무슨 장, 대표 이런 이름을 내 앞에 수식어로 붙이지 않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원칙은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올해를 보내고 있는데, 오늘은 특별히 북한주민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윌러비 교회 예배를 드리는데 북한주민을 생각하니 찬양의 자유를 누리는 나의 복이 벅차서 계속 눈물이 납니다. 특히 오늘은 북한난민에 대해 발표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한국에 계시는 몇 분의 도움을 받아 슬라이드를 만들어 발표했습니다. 지난 번 글에도 이야기 했지만 이번 가을은 이들이 난민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예배기간입니다. 지난 주에는 아프리카의 한 나라에서 활동하고 돌아온 한 대학생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내게 북한난민문제를 다루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발표를 마치고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어떻게 발표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짧은 영어 실력에다 발음은 엉터리인데, 메모한 내용을 읽다가 즉흥적으로 생각나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배 후에 내게 감사 표시를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성령님께서 하실 말씀을 내 입술로 말씀하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내게 인사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캐나다에도 북한 난민이 100명 이상 있다. 그들을 기억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발표의 마지막에 이들에게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같은 요청을 하기 위해 여기에 적습니다.


*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이 힘든 시기에 지쳐 그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도록
*북한의 지도자들이 사람의 생명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기를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많이 북한주민돕기에 나설 수 있기를 - 남한의 국민소득이 아주 높지는 않지만 형제를 돕기에 충분히 부자이다.

*12월에 있을 남한의 대통령선거를 위해-가슴이 따뜻한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그래서 남한정부의 태도가 달라져야만 한다

*중국에 있는 북한 난민들과 그들의 협력자들을 위해 - 중국의 지도자들이 세계 초 강대국에 걸맞게 난민들에 대해 확고한 인도주의적 입장을 갖도록 








여름부터 3번 도전 끝에 가을을 만끽하며 걷고 온 숲 속의 작은 길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도대체 어떤 길인데 3번씩이나 도전을 했느냐고 의아해 하실 텐데요, 내용을 알게 되면 허탈하실 것 같습니다.^^


포트 랭리에서 프레이저강 쪽으로 작은 섬이 하나 있습니다. BRAE 라는 이름의 섬입니다. 이 섬을 강변 따라 걷는 숲길이 있습니다. 지난 여름에는 여름 숲의 아름다움을 상상하며 찾아 갔는데, 웬걸 모기 떼가 보통 극성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을에 찾아 가기로 하고 돌아서 나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말 이 숲길이 생각나서 다시 찾아갔는데 초입 부분쯤 도착했을 때부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그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중도하차하고 돌아와야 했지요.


그리고 오늘도 구름 잔뜩 낀 하늘은 내가 이곳을 찾아 온게 못 마땅한 듯 보였지만, 내가 숲길을 한바퀴 돌아 나오는 1시간 반 동안 얌전히 바람만 보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을 숲길의 정취를 글자 그대로 "만끽"하고 돌아 왔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숲길의 끝은 프레이저 강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프레이저 강은 가을 숲과는 달리 눈을 크게 열어주듯 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눈을 왼쪽으로 돌리자 강 건너편에는 지난 봄 매주 산책하던 산책로 너머에 있던 마을이 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입니다. 


그 마을 쪽 강변풍경이 프레이저 강물에 비쳐서 한폭의 수채화 같습니다. 날씨가 맑지않아 회색빛이 감돌지만, 어쩐지 그래서 더 평화로운 정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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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록키는 여행을 좋아하는 미국사람들도 꼭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랍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자연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곳에는 습지부터 빙하까지 광범위한 기후대에 걸쳐서 나타나는 자연환경을 하나의 공원 안에서 모두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록키는 계절마다 다른 모양을 갖고 있어서 마치 북측에 있는 금강산이 계절마다 다른 이름을 갖는 것처럼 록키 역시 계절마다 다른 수식어를 갖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 가을의 록키를 골든 록키(Golden Rockies)라고 합니다.


침엽수림이 주요 산림인 이곳에 활엽수는 많지 않기 때문에 여름에는 잘 드러나지 않다가 가을이 되어 노랗게 단풍이 들면 비로소 갑자기 황금으로 치장한 듯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특히 이곳의 산에 수목한계선이 분명이 드러나고 그 선 위의 산은 아무런 식물도 살지 않는 거대한 기암괴석이나 모래 자갈 뿐이기 때문에 이런 황량한 모습과 대조되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침엽수가 울창한 숲을 이루는 상대적으로 저지대에는 또 다른 특징을 드러냅니다. 숲을 자연상태로 유지하는 이곳의 산림 관리원칙에 따라 빽빽하게 들어 찬 나무들이 서로 햋빛을 차지하기 위해 위로 솟아 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빛을 받지 못하는 부분은 말라죽은 가지들로 뒤덮여 있고 심지어는 경쟁에 살아남지 못한 나무들이 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나는 아름다운 가을의 골든 록키를 바라보며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말라죽는 나무들을 보며 잠시 한국의 과열 경쟁사회를 생각했습니다. 이 나무들처럼 오직 '적자생존'이니 혹은 '강한자만 살아남는다' 등의 말로 학생들을 다그치며 공부하게 만드는 과열 경쟁사회는 결국 이 숲처럼 다수를 죽이는 어리석은 사회입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경쟁을 마치 최고의 선인양 믿고 살아가는 우울한 사회일 뿐 아니라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살아남은 강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자연보다 더 악랄한 경쟁사회입니다. 이 숲은 결국 살아남은 다수가 균형을 이루고 살아가지만, 인간 세상의 경쟁은 승자가 경쟁을 차단시킨채 독식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낮에 잠시 Surrey에 있는 크리스쳔 스쿨의 세컨더리 캠퍼스(한국의 고등학교에 해당)에 다녀 왔습니다. 이곳에 와서 비교적 초기부터 그곳의 교장선생님과 친구가 되었는데, 참 존경스런 분입니다. 그분과 만날 약속이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이분과의 만남이 내 교육자 생활을 다시 한번 점검하게 만들었습니다. 군산 회현중학교의 이항근 전 교장선생님도 존경스러운 분입니다(이분 이야기도 한번 쓰고 싶은데...). 그런데 나라와 그 환경이 달라서 그런지 이분은 또 다른 측면에서 존경스럽습니다.


아들이 그 학교의 ESL과목의 보조교사로 자원봉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아직 영어가 자유롭지는 않지만, 까다롭기로 유명한 이곳의 한 대학에서 ESL과정을 마치고 이번 학기에는 정규 수업을 듣기 시작한 아들이 시간이 많이 남아서 할 일을 찾은 것입니다. 다행히 이 학교에 한국에서 이민오거나 유학온 학생이 제법 많은데, 초기에는 영어가 거의 안되기 때문에 영어선생님이 고생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어를 하는 자원봉사자가 온다니까 그 선생님도 좋아 한다는군요. 아무튼 그런 일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사진: 이 학교를 주차장에서 바라보며 찍은 사진입니다. 오른쪽에 살짝 보이는 검은 벽이 체육관이고 정면이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선생님은 잠시 자원봉사 일에 대해 사무적인 일을 이야기 하신 후 바로 학교 소개를 시작합니다. 학교를 돌아보며, 특히 수업 중인 교실들을 돌아보며 많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1969년에 첫 졸업생을 배출했던 이 학교는 어느새 50년이 된 학교랍니다. 이 학교의 외국인 학생 중 거의 대부분은 대만, 한국, 중국 학생들이라는군요. 


학교를 둘러보며 각 시설이나 방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을 소개해주더군요. 처음 들어간 곳은 음악교실로 기악실습 중이었는데, 선생님이 한국계 이민자더군요. 어려서 부모를 따라 이민온 분인데, 장애가 있어서 한국에서는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부모가 캐나다 이민을 결정했던 것입니다. 한국에서 자랐다면 멸시와 천대를 받거나, 적어도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끌어가기 쉽지 않았을 그가 이곳에서는 캐나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된 것입니다. 조금 다른 경우이지만  이곳에 와서 새로 사귄 거의 유일한 한국인 이민자 가정이 있는데 그분들도 작은아들의 건강 문제로 이민오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 음악선생님을 보니 그 아이도 이렇게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하리라는 기대도 생기고, 또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이들의 교육 시설 중에는 Learning Assistant Room이 있는데, 아까 그 음악선생님처럼 장애가 있거나 혹은 학습장애가 있는 학생들을 위해 별도로 마련된 학습실이었습니다. 사실 나는 대학에 있기 때문에 이런 교육시설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이 없었습니다만, 북미의 교육철학에서 배울게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래전 미국의 플로리다주에서 경험했던 것인데, 그들은 일반 학교에서 장애 학생을 받으면 3명당 한 학급운영비에 해당하는 예산을 추가로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학교들이 장애학생을 서로 많이 받으려고 하더군요. 이를 통해 장애학생들이 일반학생들과 함께 교육받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연스럽게 동화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발견한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점심식사를 주로 해결하는 장소인 카페의 운영을 학생들이 자율로 하는데, 개학 초기라 운영하는 학생들이 어느 학부형으로부터 커피 내리는 법과 같이 실제 운영기술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교육방침이 자율을 존중하고 자유로운 인간으로 성장하는데 관심이 있기 때문에 구석구석에서 바로 그것을 연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학교는 교사들 입장에서는 기독교 세계관을 교육에서 실천하는 신앙의 장이기도 합니다. 모두 기독교 정신으로 교육하는 대학에서 공부하여서 그 기반이 만들어진 분들이 교사로 온다고 하는군요. 오늘 이분은 제게 여러 권의 책을 주셨습니다. 틈틈히 읽어 나의 교육 현장에서 적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의 가까운 교인들 중 교사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는 소그룹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나는 내가 얼마나 형편 없는 인간인지 잘안다. 

어느 순간 문득, 나도 내가 비판하는 그 사람들과 별로 다를 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 소름 끼치도록 놀란다. 틈만 나면 내 안의 욕망들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 나를 삼킨다.


그래서 나는 매일 성경을 읽으며 내 안의 하이드를 다스려야만 한다.

내 힘만으로 하이드를 통제할 힘이 없기 때문에, 지킬박사의 모습으로 살기 위해서는 끊임 없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 6시경 비행기로 여행길에 오르는 친구가족을 4시 30분쯤 일어나 보이시 공항에 태워다 주고 돌아와 주인 없는 집에서 늦잠을 자고 뒤늦게 친구집을 나서서 아이다호 주에서 볼만한 곳으로 이미 검색해 둔 트윈폴스(Twin Falls)와 크레이터스 오브 더 문(Craters of the Moon National Monument)를 목적지로 삼아 출발 했습니다.


여전히 프레어리 지역이어서 산은 황량한 모래산이고 분지에는 물과 나무가 있습니다. 트윈폴스는 스네이크강(Snake River)을 따라서 형성된 협곡(Canyon)에 있는 두 개의 폭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도시의 이름입니다. 다음 날 알게 된 것이지만, 이 강은 옐로우스톤 아래에 붙어 있는 그랜드 티튼공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곳의 하류인 셈이지요. 협곡 아래에는 그야말로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카약을 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또 이 협곡의 아래에는 사진을 올리지는 않습니다만 골프장이 있습니다. 이런 곳조차 골프장을 만들고 골프를 치는 것을 보니 이곳이 사막이 맞긴 맞나 봅니다. 4계절 물을 댈 수 있는 곳은 이곳 뿐일테니까요.



이 협곡을 건너는 다리가 유명한데, 이 도시의 초기 정착민으로 사막에 불과했던 이곳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 계기가 된 페린(Perrine)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 페린 브릿지(Perrine Bridge)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다리 난간에서 점프하여 페러글라이딩을 즐긴다고 합니다. 물론 미리 신청을 해야하지만. 사진은 페린의 동상과 페린 브릿지 전경입니다. 아들이 동상과 함께 손잡고 서있군요.^^




다리에서 한참을 구경하다가 근처의 쇼핑몰에서 베트남 음식으로 점심을 먹고 쇼숀폭포(Shoshone Falls)로 이동하였습니다. 이 도시가 트윈폴스라는 이름을 얻게 만든 첫번째 폭포입니다. 이 폭포는 용암이 흘러내리다 벽처럼 웅장하게 서 있는 협곡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작은 나이아가라 폭포쯤 되 보이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곳을 서부의 나이아가라라고 한답니다. 


전망이 좋은 장소로 이동하는데 중간에 이렇게 암반이 구멍이 나서 천연의 다리가 만들어진 곳이 있습니다.(아래 사진 오른쪽) 폭포의 윗단에 작은 폭포는 자연 폭포가 아니고 발전을 위해 물을 채취하기 위한 수로입니다. 오른쪽 사진 중앙 윗 쪽부분에 하얀 색으로 갈퀴처럼 생긴 게 수력발전을 하고 난 물이 나오는 배수구입니다.



이곳에서 너무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며 즐기는 바람에 크레이터스오브더문을 향한 출발이 늦어졌습니다. 나중에 후회했지만, 좀 더 일찍 적어도 두 시간은 더 빨리 움직였어야 그곳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닥에 새겨 둔 이 글귀는 읽지않고 지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나누지 않는 소유에는 즐거움이 없다."




크레이터스오브더문은 오래 되지 않은 분화구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분출한 지 얼마 안되는 검은 용암석들과 화산재들이 잔뜩 쌓여 있고 용암석들과 화산으로 죽은 나무들이 갖가지 기묘한 형상을 하고 여기 저기 널려 있습니다. 크레이터오브더문이 가까워지자 주변이 검은 용암석만 가득한 삭막한 그렇지만 신비로운 땅으로 바뀝니다. 저세히 살펴보니 화산이 덮치자 그대로 용암과 함께 바위덩어리로 변한 듯한 거대한 고목이 그대로 땅위에 드러나 있습니다.(아래 사진 오른쪽)


 

크레이터오브더문에 들어서자 이미 사무실은 문을 닫는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공원은 캠핑장이 있어서 문을 닫지 않지만, 입장료를 지불하고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가능한 빨리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공원에 들어서자 기묘하게 뒤틀린 나무들과 용암이 흘러내리다 굳어서 생긴 암반이 여기저기 갈려 용트림 하듯 널려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느 곳엔 화산재가 쌓여 생긴 봉우리들이 모여 있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작은 분화구들이 여기 저기 몰려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같은 종류의 자연현상이 가까이 모여 있다는 점입니다. 왜 그런지는 공부해야 알 것 같습니다. 이번 여행길은 자연, 지질학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낯선 지형들을 계속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그러나, 생명이 살아있음을 발견합니다. 나중에 찾아봐야 이 식물의 정체를 알겠지만, 이런 황량한 화산잿더미 위에도 작은 식물이 온통 덮고 있습니다.(사진 오른쪽)  그리고 식물이 조금 넓게 자리 잡고 있는 곳에는 어김 없이 다람쥐가 왕 노릇합니다.(사진 왼쪽)



너무 늦었던 터라 이곳에서 긴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아쉽지만 숙소를 잡아놓은 아이다호폴스(Idahofalls)라는 곳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예약한 숙소에는 밤 9시가 넘어서 겨우 도착했습니다. 숙소 근처의 알버슨(Albertson, 미국의 식료잡화점 체인)에서 먹을거리를 사다가 가져간 한국음식과 함께 저녁식사를 마쳤습니다.  

자정을 2시간이나 넘긴 후에 겨우 친구집에 도착해서는 반겨주는 친구와 맥주를 한 잔 마시면서 반가운 마음을 나누고 나니 어느덧 4시가 되어버렸습니다. 뒤 늦게 잠자리에 드니 아침 10시가 되어 겨우 일어났습니다. 결국 아침을 친구 가족이 먹는 특별 건강식으로 간단히 먹고 다시 수다를 떨다가 오후 3시쯤 중국음식 뷔페를 먹으며 또 밀린 이야기들을 나누니 5시가 되어 갑니다.


친구는 우리가 오면 꼭 하겠다고 준비한 게 있다며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보이시를 관통하며 흐르는, 아니 보이시강 때문에 보이시가 만들어진 것이겠지만, 보이시강에서 래프팅을 하자고 합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갔던 터라 반바지에 운동화를 신은 채로 래프팅에 도전했습니다. 그 친구에겐 아들만 하나 있고, 나 역시 막내 아들만 데리고 온지라 남자 넷이서 낄낄 거리기도 하고 환호성도 지르면서 1시간 반 동안 고무 보트 위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엉뚱한 네명의 남자들은 누가 봐도 래프팅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이 나선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는데, 일가족으로 보이는 부부와 3명의 아이들과 탄 옆의 보트에서 30대 중반 쯤 되어보이는 백인 여성이 'Hey boys, watch out!'하고 소리를 칩니다. 우리는 강가의 바위에 부딪히기도 하고 물위로 낮게 드리운 나무가지와 전쟁을 하기도 하면서 계속 낄낄 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나 봅니다. 


아무튼 두 남자는 아들들 덕분에 'boys'에 포함된 게 또 한번 신나서 더욱 낄낄 거리며 장난을 멈추지 않습니다. 물론 늘씬한 미녀들이 비키니 차림으로 래프팅하는 보트들이 여기 저기 눈에 보입니다.


이 래프팅 코스는 사실 우리가 영화나 TV에서 보는 것 같은 난이도 높은 곳은 아니고 그저 고무 보트 타고 느긋하게 흘러 내려가는 강물에 몸을 의지하고 있다가 이따끔씩 나타나는 약간의 급류나 단차가 있는 암반지역을 통과하는 수준입니다. 


코스는 보이시강을 끼고 있는 Barber Park에서 시작해서 역시 보이시강가의 Ann Morrison Park에 이르는 7-8마일쯤 되는 구간입니다.  Ann Morrison Park은 보이시대학과 보이시 다운타운 인근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막(초원이라는 의미의 prairie) 가운데 있는 도시여서 숨막히게 더웠으나(당일의 기온은 확인하지 못했고 그 전날 오후 4시 기온이 41도였습니다) 강물을 따라서 내려가는 우리는 시원했을 뿐 아니라 강물은 발을 담그고 가기 힘들 정도로 차가웠습니다. 강물의 기원이 록키산맥의 눈과 얼음이 녹아서 흘러온 물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지요.


이렇게 친구와 즐거운 해후를 즐긴 하루는 저녁식사를 인근 공원에서 삽겹살 파티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 했습니다. 미국의 공원에는 바비큐 시설 뿐 아니라 전기까지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바비큐파티에는 그만이지요.


사진은 Ann Morrison Park에서 아내가 핸드폰의 카메라로 찍은 우리 일행 사진입니다.




미국의 중서부 지방을 자동차로 여행중 이메일을 체크해 보니 한국의 S 신용카드에서 긴급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사실 전날 밤 휘발유가 거의 떨어져서 주유하려고 주유소에 들렸는데 카드사용이 거부되어 거의 경고등이 들어오기 직전에 불안하게 친구집에 도착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내가 마지막 주유했던 곳에서 같은 신용카드를 사용했었는데 이것이 해외에서의 부정사용의혹이 있어서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사용정지시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전화해서 내가 사용한 것이 맞다고 확인하고 사용정지를 해제했지요.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독자들도 나와 같은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글을 덧 붙입니다. 카드회사에서 날아온 메일에는 주유금액이 실제 금액인 $37.78가 아닌 $126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부분에 대해 전화와 이메일로 정정해달고 요구했습니다. 그랬더니 담당자는 금액오류를 비자카드 측에 이의 신청을 해두겠다며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아직까지 2주 이상이 지났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주유했던 주유소의 폴이 미국의 C정유회사였기에 그 회사 고객센터에 이메일로 알렸습니다. 물론 구글맵의 정보를 통해 그 주유소의 이름, 주소, 주유소 고유코드까지 확인해서 통보했지요. 주말이 지나고 바로 답장이 왔습니다. 아주 친절하고 자세한 내용이었는데, 카드회사는 주유를 하면 일단 신용으로 무조건 $126를 잡아두고 사후에 실제 주유금액으로 정산한다는군요. 그래서 내가 인터넷으로 사용금액을 확인해보니 실제 청구금액이 주유금액과 맞습니다. 

결국 카드회사는 자기들의 시스템에 의해 과다금액을 잡아두어놓고 내가 금액이 다르다고 문의하자 오류가 있다고 자기들이 호들갑을 떨어 날 불안하게 만들어 놓았으면서 결과도 안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신용이 생명인 금융회사가 정유회사의 시스템 만도 못한 것입니다. 화를 내야할 지 아니면 한국인이어서 한국기업들과 거래하는 죄로 겪는 불편이라고 자포자기 하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올 한해 내가 가장 해보고 싶었던 일은 사실 성경을 읽으면서 조용히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산다는 것이 늘 그렇게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쉰다고 하는 여행이 사실 육체적으로는 더욱 피곤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북미에 살 기회가 생긴다면 해봐야 한다고 추천할 수 있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자동차여행입니다. 물론 여러가지 측면에서 보면 여행사를 통한 패키지 여행이 가지는 장점이 많습니다만, 내가 스스로 여행계획을 세우고 템포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동차여행은 또 다른 장점을 가집니다. 


내가 올해 밴쿠버에서 살게 되면서 해보고 싶었던 자동차여행 코스는 캐나디안 록키였습니다만, 한국에서 아이들이 오면 같이 하기로 약속한 터라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아이다호주의 보이시에 사는 친구와 의기투합이 되어 미국의 서부에서 중서부를 지나는 긴 여행을 해보려고 계획 세웠습니다. 그러나 비용과 시간을 감당할 수 없어서 친구 가족은 여행사 패키지 여행을 떠나고 우리는 옐로우스톤만을 목적지로 삼아 6박 7일의 긴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아들이 학교에서 볼일이 끝난 뒤에 출발했기 때문에 보이시까지 1000킬로가 넘는 길을 하루에 갈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친구가족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보이시에 도착해야 반가운 얼굴들을 볼 수있기 때문에 무리해서 하루만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보통 하루에 운전하기 적당한 거리는 800킬로쯤 된다고 합니다.


캐나다에서 미국 서해안 시애틀 쪽으로 고속도로 I-5를 타고 달리면 국경가까운 벨링햄을 벗어날 때 잠시 산과 숲을 보고는 계속 평지를 달리게 됩니다. 시애틀 북쪽의 에버릿에서 시애틀을 우회하는 I-405로 갈아탄 뒤 다시 미국의 서부와 동부를 잇는 I-90으로 옮겨 타면 계속 동쪽을 향해 끊없는 고속도로가 이어집니다. 


이길을 타고 잠시 달리니까 갑자기 눈앞에 웅장한 산이 숲과 기암괴석을 함께 보여주며 나타납니다.(윗 사진) 너무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내가 사는 랭리(Langley)나 써리(Surrey)에서도 보이는 베이커산(mount Baker)이나 시애틀의 명물 레이니어산(Mount Rainier)를 한쪽 귀퉁이에 품고 있는 캐스케이드 레인지(Cascade Range) 입니다. 



산길을 잠시 달리고 나니  정상(summit)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옵니다.(윗 사진) 그리고 이 정상을 넘어 가자 눈에 나타난 풍경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이곳의 정식 명칭은 프레어리(prairie)이지만 사실 약간의 덤불(bush)만 자라고 있는 사막입니다. 어렸을 적에 서부극에서 종종 보았던 그런 사막의 모습이었습니다.(아래 사진)





사막을 달리면서 두 가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다음 사진에서 보듯이 산은 완전히 사막인데, 그 산을 넘으면 다시 분지가 나오고 그 분지에는 호수나 강이 흐르고 있어서 나무와 함께 작은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호수는 오아시스쯤 될텐데, 강물이 흐른다는 것은 좀 이외였습니다. 강물은 조금 전 지나온 캐스케이드에 내린 빗물이나 멀리 미국 록키에 쌓인 눈이 녹아 내린 물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자연은 늘 경외롭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노력에 대한 감탄입니다만, 사막을 통과하는 내내 곳곳에서 풍차를 볼 수 있었습니다. 사막의 특성상 바람이 많이 불고 그 바람을 이용하여 전기를 생산하고 있었지요. 이런 노력들이 모여서 지구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겠지요?



I-90을 달리다 엘렌스버그(Ellensburg)를 지나 I-82로 갈아탄 뒤 다시 I-84를 만나고 이 고속도로는 펜들턴(Pendleton)을 지나 곧장 보이시로 들어갑니다. 이 여정은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에서 출발하여 미국의 워싱턴주, 오레건주를 지나 아이다호주에 도착합니다.


이런 사막길을 여행하는 데는 자동차의 에어콘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내가 사는 밴쿠버는 여름에도 에어콘이 거의 필요없는 곳이라 용량이 작아 에어콘을 켜면 처음 20분 정도는 찬바람이 나오다가 시간이 지나면 더운 바람을 휙휙 내뿜습니다. 결국 내내 창문을 열고 사막을 달렸지요. 코가 건조해지면서 코가 막혀 여러 차례 코를 청소해야 했습니다(^^). 


동영상은 셀라 절벽(Selah Cliff)에서 바람에 날리는 부시를 찍은 것입니다. 어릴적에 보았던 서부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나서(^^). 아들이 서부영화의 장면처럼 덤불 뒤에 숨는 장난을 칩니다.(아래 사진)





1008킬로를 하룻 동안 그것도 거의 정오에 출발해서 가는 길이라 밤 늦도록 계속 운전했습니다. 물론 이제 다 자란 막내 아들이 주로 운전한 덕분에 어렵지 않은 길이었지요. 그런데 사막 길을 밤에 운전하는 것은 생각보다 좋았습니다. 우선 에어콘이 없이도 덥지 않았고, 무엇보다 밤 하늘에 쏟아질 듯 가득한 별 덕분이었습니다. 우리는 별을 벗 삼아 달려 결국 자정을 두 시간이나 넘긴 뒤에 비로소 보이시의 친구집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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