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기독교인 지도자라면
나는 요즘 다시 한 번 성경 속의 인물인 느헤미야를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왜냐 하면 요즘 우리나라의 현실과 지금으로부터 약 2450년 전의 이스라엘의 상황이 좋은 대조가 되기 때문입니다.
B.C. 440년경의 이스라엘은 정말 암담했습니다. 남(유다)과 북(이스라엘)으로 분단되었던 이스라엘은 결국 모두 망했고 몇 나라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페르시아가 이 지역을 식민지로 통치하면서 모든 식민지 백성들에게 자기 종교를 섬기도록 허용합니다. 이때 느헤미야라는 유다사람이 페르시아 왕의 신임을 얻어 유다사람들을 데리고 유다의 상징이었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을 재건하도록 허락 받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던 중 문제가 생깁니다. 성경의 느헤미야서 5장이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사람들이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동원되다 보니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해 먹을 곡식이 없었습니다. 식량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논밭과 집을 팔았습니다.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부자들에게 고리대금으로 돈을 꾸었으나 그 빚을 갚지 못해 자기 자녀들을 돈 대신 넘겨 주어야했고, 이들은 다시 이웃나라 사람들에게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물론 부자들은 귀족들과 관리들이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우리와 비슷합니다. 세계적인 불경기와 외환위기로 빚어진 국가위기와 멸망한 이스라엘의 처지가 비슷하고, 이를 재건하기 위해 애쓰는 국가적인 운동이 비슷합니다. 그 과정에서 빚어진 부익부 빈익빈도 어쩜 그리 비슷한지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 후가 전혀 다릅니다.
느헤미야는 매우 화가 나서 백성들을 모아 놓고 고리대금으로 번 돈을 즉각 반환하고 노예로 팔려간 동족들을 되사오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자신과 자기 수하들도 돈과 곡식을 빌려주는 일을 했다고 자백합니다. 그리고 즉각 고리대금업을 중단하라고 명령합니다. 자기 백성에게 샀던 집, 논과 밭을 모두 돌려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두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식민지에서 돌아와 아무런 힘도 없던 그들이 예루살렘 성 재건이라는 큰일을 짧은 시간 동안에 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기독교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이 정부도 화를 내기는 마찬가지입니다만 모두가 과거에 이룩한 일들을 부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위기가 가난한자들을 얼마나 더 힘들게 만들고 중산층이 어떻게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 기회에 부자들에게 더욱 많은 부를 보장해주기 위해서만 머리를 쓰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위기를 극복할 수도 없고, 설령 극복한다 해도 그 후의 한국사회는 지금보다 더욱 암울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08/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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