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2026년에 호주가 투발루 주민 280명을 호주에 전적으로 정착시키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투발루에는 약 10,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그중 4,000명 정도가 응모했다고 합니다. 추첨으로 선발된 사람은 호주에 도착 즉시 영주권이 부여되고 노동, 의료서비스, 교육받을 권리를 갖게 됩니다.

이 기사를 읽으며 꿈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전라북도가 이런 프로그램을 시행하면 좋겠다.’ 마침 이재명 정부이기도 하니 기회는 좋습니다. 지구온난화로 삶의 터전이 물에 잠기고 있어 더 이상 살기 어려운 그 땅의 사람들을 이전시켜 생존을 돕는 일이야말로 인권을 넘어 생명의 일입니다.

물론 따뜻한 바다에서 살던 사람들을 새로운 환경에 정착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그들에게 또 다른 폭력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다에 서서히 잠겨 몰살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유태인들이 저지르는 팔레스타인 인종청소를 지켜보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물론 엄청난 수고와 비용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꿈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2018년부터 유학생의 한국 정착프로그램 도입을 주장했고, 비록 허접한 상태이지만 그런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마냥 꿈만은 아닌 듯합니다.

2025년 4월 15일 국민일보 속보에 중국이 보잉여객기 인도중단 명령을 내렸다는 소식이 떴다. 물론 기자는 그 의미를 생각도 안해보고 쓴듯하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경제 이슈로 갈등이 생기면, 중국이 미국을 달래는 수단은 거의 항상 보잉사의 여객기를 구매하는 것이었다. 보잉사는 만년 적자에 시달리지만, 미국의 군수산업에서 중요한 기업 준 하나이기 때문에 망하면 절대로 안되는 기업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국이 보잉여객기를 구매하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으로 미국을 달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보잉여객기를 구입함으로써 미국이 유일하게 압도적인 세계 1위인 군사력을 유지시켜주는 지원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정책의 배경으로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중국이 스스로 미국보다 더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군사적으로 미국을 자극할 생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는 중국이 자주 대외적으로 선언하는 평화굴기, 즉 평화롭게 강대국이 되겠다는 것의 상징으로 미국의 군수업체인 보잉사를 유지시키는데 도움을 준다는 점이다. 자국의 영토문제(대만, 홍콩 등)가 아니라면 간섭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미국 달래기이다.

그러나 관세전쟁이 생각보다 일찍 중국이 미국의 핵심 아킬레스건에 칼을 대게 만들었다. 미중 관세전쟁은 결국 미국의 몰락과 중국의 상승을 확실하게 만들고 그 시계의 회전속도까지 빠르게 만들 수 있다.

아무튼 다음 대통령이 누가되든 한국의 핵심 이익은 미중 사이에서 적절히 균형을 잡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대부분의 언론이 서방의 관점만를 반영해 트럼프 대 시진핑의 대결로 다루고 있지만, 이는 중국을 너무 모르는 관점이다.

중국은 개방 이후 집단지도체제를 해체한 적이 없다. 시진핑의 장기집권은 다른 나라들(특히 미국)의 절대권력과는 성격이 다르다. 지금 트럼프는 윤석열처럼 본인이 나서서 망나니짓을 하고 있고 보좌진(장관 포함)을 똑 같은 자들로 구성해서 함께 칼춤을 춘다. 누구도 막지 못할 뿐 아니라 두 나라의 공권력은 헌법이고 뭐고 없이 대통령이 시킨 짓을 수행한다.

반대로 시진핑은 절대권력을 확보하고 있지만 국가운영은 집단지도체제(당은 물론이고 학자들을 포함하는)로 이루어진다. 아마 대부분 이상하게 느끼지 못하겠지만, 중국의 핵심 정책을 시진핑이 발표하는 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모두 해당 부처에서 발표한다. 시진핑이 정책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은 주로 전인민대회에서 비전을 발표할 때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 발표문은 해당 분야 학회에서 제안하고 전문위원회가 검토한 후 다시 상무위원회의 승인을 거친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내가 관심을 갖는 산업정책은 매우 전략적이고 합리적이다. 정책이 발표되면, 이는 이미 다양한 문제들을 모두 검토했고, 그래서 비록 중국도 피해를 입지만 상대방에게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중국을 바라볼 때 장기집권이라는 겉만 보고 집단지도체제의 속을 파악하지 않으면 칼의 손잡이를 잡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날을 쥐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국민일보 속보 제목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가짜인 것으로 보인다. 관세전쟁으로 보잉 여객기 가격이 거의 2.5배 인상되어 구태여 구매 중단을 명령하지 않아도 중국 항공사들은 에어버스를 구매할 수밖에 없다.

[속보] “中, 자국 항공사에 美보잉 항공기 인도 중단 명령”
https://v.daum.net/v/20250415174209490

#미국의_민주당_공화당

오늘 용산의 멧돼지 한마리가 사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꽥꽥거리는데, 기자라는 자들은 꿀먹은 벙어리요, 언론은 알아들을 수 없는 멧돼지 소리를 중간중간 속보라고 전하기 바쁘다. 그건 그거고…

미국의 대선 결과를 놓고 해리스와 바이든 vs 트럼프 구도가 아닌 민주당 vs 공화당 구도로 접근한 분들이 보인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좀 낫고, 공화당은 나쁘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그러나 두 당의 출발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아는 것과 반대라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민주당은 남부지방에서 노예제도를 사수하던 집단이다. 북부에서 산업화를 추진하던 기업가, 자본가들은 남부의 노예들을 북부의 공장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이를 위해 링컨의 공화당은 노예해방과 남북전쟁을 진행한다. 당연히 링컨이 원했던 것은 노예해방이 아니다. 나중에 흑인노예들이 남북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해방을 압박하자 끌려가듯 노예해방을 선언했다.(링컨을 존경하는 사람들에겐 충격이겠다)

19세기 후반 노동운동이 강화되고 노조가 결성된다. 민주당은 농민(토지소유주)의 이익에만 치중하여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고, 19세기 후반은 록펠러나 카네기 같은 악마기업가들이 정치인(양대 정당 모두의)들의 비호아래 노조원들을 학살하던, 자본에 의한 노동의 암흑시대였다. 탄압이 아니라 실제 기관총으로 사살했다.

노예제도가 불법인 된 20세기에 와서도 아주 오랫동안 민주당기반의 남부는 흑인차별법을 이용하여 변형된 노예제도를 유지했다. 2차대전을 거치면서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산업자본의 후원을 받는 공화당이 전쟁을 벌이면서 민주당과 공화당이 현재와 같은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바이든의 민주당 정부는 부시의 공화당 정부와 전혀 구별되지 않는 전쟁광 정부였다. 어쩌면 자신도 관리하지 못할 정도의 노인인 바이든이 당선된 것은 다루기 쉽다는 판단을 한 군산복합체들의 영향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미국의 양대 정당을 비교하는 것은 도토리 키재기이고, 그렇게 거대 제국이 몰락하고 있는 것일 게다.

빌바오, 지금은 전혀 다른 일을 하지만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던 아들이 종종 비정형성 건축의 상징이라고 말하던 빌바오구겐하임미술관이 있는 곳이다.(사진1 +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 나무위키 (namu.wiki) 참고) 이곳에 전시된 미술품보다 건물이 워낙 유명해서 내부 작품 관람에 큰 공을 들이지 않았다.(미술 까막눈이기도 하다^^). 미술관 건물을 안팎으로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입장료 값어치를 한다. 여행을 할 때는 가능한 그곳을 기억할 만한 기념품을 구입한다. 물론 그 나라의 명품 비슷한 것에는 눈도 돌리지 않아 큰 돈을 쓰는 것은 아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비싸게 주고 산(38유로) 미술관 전경을 담은 액자(사진2)가 내 책장의 한 칸을 차지했다. 

사진1: 빌바오구겐하임미술관 외관
사진2: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건진...

 
포드 모델A
호텔에 들어서니 로비에 1929년산 포드(Ford) 모델A 한 대가 전시되어 있다. 많은 분들이 잘 알고 있듯이 포드는 제조업(특히 자동차산업)에서 전설적인 인물이다. 20세기 들어와 유럽과 미국에는 많은 자동차 벤처기업이 우후죽순으로 설립되었는데, 특히 미국에 더욱 많은 자동차회사들이 생겨났다. 어떤 학자는 미국에 자동차회사가 1,500개쯤 세워졌다고 하고 또 다른 학자는 1,200개쯤 되었다고 했다. 내가 일일이 이름을 확인하면서(즉 기록이 남아있는) 조사한 자동차회사는 840여개쯤 된다. 물론 이 시기의 자동차회사는 전부 수공업생산방식으로 자동차를 만들었고, 그래서 1년에 수십대 이상 생산하는 회사는 없었다. 그러던 중 1910년경 테일러방식을 도입하여 대량생산을 시도하는 기업들이 생겨났고, 이를 위해 부품의 표준화를 고민하는 기업들도 나타났다.
포드는 1913년에 이런 움직임의 완결판을 제시했다. 당시에 넘쳐나는 이민자들을 저임금노동자로 활용할 수 있는 테일러방식에 컨베이어를 결합시켜 최초로 대량생산방식이라는 것을 창안했던 것이다.  이게 얼마나 혁명적이었는가 하면, 이렇게 탄생한 모델T의 가격은 $950로 기존 자동차의 평균가격 $2,129에 비해 현저히 낮아서 눈부시게 팔려나갔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노동자임금을 획기적으로 높여주었다. 또 그 고임금 일자리를 소외된 계층(이민자, 여성, 전과자 등)에 제공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포드의  모델T를 20세기 최고의 제조품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포드는 자신이 개발한 자동차에 모델A부터 차례대로 알파벳을 붙여나갔다. 그러니까 모델T는 20번째 개발한 모델인 셈이다.
문제는 워낙 인기가 있어서 모델T만 생산(단품종대량생산)한데서 발생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구매했고, 길에 굴러다니는 자동차는 거의 모두 모델T 한가지였다. 포드에 짓눌려 제대로 기를 펴지 못했던 많은 자동차회사들이 똘똘 뭉친게 바로 지엠(GM)의 시작이었다. 지엠은 슬론이라는 경영의 천재를 영입해서 다품종대량생산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들고 나왔다. 갑자기 소비자들은 선택의 폭이 넓어졌고, 소비자들은 포드를 버리고 지엠으로 몰려갔다.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포드는 1927년 모델T를 단종하고 첫번째 모델이었던 모델A를 새롭게 설계해서 대량생산에 나서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뒤였다.

사진3: 빌바오의 호텔 로비에서 발견한 포드 모델A 1929년 모델

 
바스크민족주의
빌바오에서 반드시 기억해야할 일의 하나는 바로 바스크민족주의 문제이다. 바스크지방은 프랑스나 스페인과 완전히 다른 언어와 문화를 지닌 독립된 지역이다. 19세기부터 독립된 국가를 만들고 싶어했지만, 위 아래에서 강대국이 압박하고 있는 모양새여서 바스크의 독립은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19세기는 물론 20세기 전반까지도 제국주의(식민주의)가 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을 위한 행동에 나선다. 이런 독립운동이 유럽의 관심을 받게된 것은 1959년 ETA(바스크민족해방운동)가 결성되어 군사투쟁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스페인 정부 인사들을 암살하기 시작했다. 이 전쟁은 1978년 스페인정부가 바스크를 자치주로 인정하면서 시들해졌다가, 2011년 ETA가 무장투쟁 종식을 선언하면서 끝났다. 자치주를 인정하는 것은 마오쩌둥의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바스크를 식민지로 가진 프랑스(북부 일부)와 스페인(대부분지역)은 물론이고, 아일랜드에서 유사한 학살 전쟁을 벌이던 영국과 중동에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을 지원하던 미국이 나서서 ETA를 테러단체로 규정하고 바스크를 압박했다. 이렇듯 1960~1970년대는 약자들이 세계에서 다양한 테러를 벌였다. 일본의 적군파까지 테러리즘의 시대였다. 이런 테러의 근본 원인은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살던 곳을 식민지로 만들고 저항하면 무자비하게 학살했던데 있다. 1980년대 이후 이런 테러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 세상이 평화를 갈구하는 고상한 인문학적 성찰 때문이 아니고 군사력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만들어진 때문이다.
아무튼 이 전쟁은 스페인 내전, 국제사회와 정치적이념(좌우, 민족주의, 파시즘, 프랑코주의 등등) 등이 총동원되어 벌어진 군사적 정치적 충돌로, 단순히 테러라고 규정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많은 전쟁 현장이나 테러 현장, 그리고 학살 현장에서 힘을 장악한 자들은 압박받고 학살당한 자들을 단순하게 한가지 개념으로 규정하곤 한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오직 승자의 바램만을 반영한 것일 뿐 진실과는 거리가 있음을 발견할 때가 많다. 제주 43사태가 그렇고, 노근리 학살이 그러했다. 가깝게는 광주항쟁을 그렇게 규정하기도 했었다.

(사족: 사진4 ) 이런 발칙한(^^?) 무지개색 건물… 멋지다! 다양성의 압살은 바로 창의성의 압살이기도 하다.

사진4: 빌바오 시내의 한 건물. 창문이 무지개색이다.

'Free World! > 스포모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페인에서의 첫날밤-윤석열차?  (0) 2023.07.09
정치하는 사람과 정치인 1  (0) 2023.07.01

한일장신대 차정식교수가 이끄는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여행에 신청해서 함께 하기로 했다. 일정이 너무 빡세서 여러번 고민했지만, 나름 의미 있는 여행이 될 것 같았다. 인천을 출발해서 두바이를 거쳐 마드리드에 도착한 후, 다시 긴 시간을 육로로 이동해 빌바오에 도착했다. 첫날 부터 이번 여행이 얼마나 힘든 여정이 될지 암시하는 듯 했다.
도착 후 저녁식사 장소는 우리식으로 하면 기사식당 비슷한 곳이었다. 대륙을 운행하는 대형트럭들의 정비소가 밀집되어 있고 운전기사들이 잠을 자는 동네로 보였다. 우리네 기사식당이 그러듯이 지친 몸에도 식사는 맛있었다.
식당 내부에는 벽화가 가득 그려져 있었고, 흥미를 느낀 내가 벽화를 사진 찍자,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마당을 둘러 싼 담장에도 벽화가 가득 그려져 있었는데, 부천시만화진흥원이 공모했던 만화대회에서 1등을 했던 '윤석열차' 사건을 알고있는지 보여준 벽화는 바로 열차그림이었다. 물론 상징하는 내용은 달랐지만...
이렇게 시작부터 흥미진진하다.

윤석열차?
식당입구
실내 벽화;

극동아시아에서 시작하는 육지는 계속 서쪽으로 이어져 이곳 ‘까보 다 로카’에서 드디어 대서양을 만나면서 끝난다. 포르투갈에 있는 땅끝마을이다. 성서 속의 이야기, 요나가 야훼의 명을 거부하고 도망치려던 곳 다시스가 이곳이 아닐까? 잠시 막연한 추측을 해본다. 이곳에는 십자가를 위에 얹은 돌탑이 서있다. 거친 바다바람이 날리는 모래가 종아리를 때려 따끔거린다. 사진을 찍고 싶어 폰을 꺼내지만 바람에 몸을 가누기 어려워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뜻을 세우고 살아가지만,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모진 바람과 시련을 이기면서 나아가지 않으면 방향을 잃게 마련이다. 끊임없이 내가 가는 길이 내 욕심이 아닌지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정치인이 되는 것과 정치하는 삶은 일치하지 않을 수가 있다. 김문수나 이재오가 이미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대는 왜 같은 길을 가는가? 정치인은 내가 잘나서 가는 길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길로 가도록 선택해주기 때문에 가는 길이다. 사람들이 선택해주지 않으면 언제나 중단하고 정치하며 살아가야 한다. 최소한 자신의 과거 기여보다 더 큰 상처를 사람들에게 남겨주는 악마는 되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정치인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만이 아니다. 시의원도 지자체장도 모두 정치인들이다. 심지어 선거로 선택받는 조합장들도 정치인들이다. 반대로 우리 모두는 정치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사회복지든 교육자든 무슨 일을 하든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거나 기여하는 일을 하며 살면 그게 바로 정치하는 것이다. 자기 밥벌이만 하면 정치인도 정치하는 사람이 아니다. 정치자영업자일뿐.

요즘 미국을 중심으로 틱톡이 무슨 핵무기나 되는 것처럼 난리다. 이런 일은 미의회 청문회를 계기로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나 정작 청문회에서 드러난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제노포비아. 중국과 연관되면 모두 악마라고, 제재해야 한다고 외칠 뿐이다. 오랫동안 이슬람에게 하던 행동의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내게는 틱톡이나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심지어 카카오톡도 본질적으로 전혀 다르지 않다. 몇달 전까지 사용하던 페이스북 마저 탈퇴했다. 나의 인생이 그곳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정보가 다른 나라로 이전되는 것에 동의해야 사용할 수 있다. 아예 드러내놓고 정보수집용으로 활용하겠다며 동의하라고 압박한다.
이 모든 메신저들이 돈벌이를 위해 내 정보를 기업들에 팔아넘기는 것을 비즈니스모델이라고 부르며 칭찬한다. 아무리 정보이관을 거부해도, 그렇게 정보를 사가는 기업 중에는 정보기관의 페이포 컴퍼니가 있을 개연성이 있다.
나는 현재 카카오톡만을 사용하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국내기반 기업이어서 항의할 수단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항의도 못하는 서비스를 어느 나라 기업이 만들었는가를 기준으로 좋다, 나쁘다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편리하면 그냥 사용하면 될 일이다. 불만이면 사용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림에서 빨간색 국가는 틱톡을 전면 통제하는 나라, 검은색은 정부 및 공공부문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나라)

나이팅게일 선서식 격려사

 

안녕하십니까?

 

먼저 오늘 선서식을 하는 학생 여러분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 제자들을 가르쳐 이 자리에 이르게 하신 교수님들의 노고에도 감사와 함께 축하드립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나이팅게일을 존경하는 이유가 그녀는 그녀가 특별해서가 아니고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내면의 소리를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녀가 19세기 중반 아직 간호학이나 위생체계가 확실하지 않던 시절에 간호체계를 수립했다는 점은 전문 간호사가 될 여러분에게 의미 있는 역사적 사실이겠지요. 그러나 일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녀가 전쟁이라는 극한의 전쟁터에 자원하여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간호사로 일했다는 점이 의미 있는 점일 것입니다. 그녀는 생명의 가치를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기고 고난과 싸웠습니다. 당연히 다른 동료들이나 관계자들의 질투와 핍박, 그리고 괴롭힘이 없지 않았지요.

 

우리는 요 며칠 동안 한 농부의 죽음과 관련된 슬픈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저는 그 분이 어떤 일을 겪었고 왜 그래야 했는지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또는 이 시대의 문제나 잘잘못을 따지려는 것도 아닙니다. 마지막 숨진 이후에 벌어진 일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한 대학병원의 담당교수가 발행한 사망진단서 말입니다. 나는 의료인이 아니어서 전문적인 지식은 없습니다만, 누가 봐도 상식적인 판단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의료인들이 발표하거나 대답한 내용을 볼 때 내 상식이 틀린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망진단서 작성을 지시한 의사는 다른 말을 합니다. 지금 우리는 지식이나 기술보다 양심과 책임감이 더 부족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학생여러분, 여러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다루는 일에 종사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생명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갖는 기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의료인들이 사적인 이해관계에서 해방되어 오직 생명존중과 양심, 그리고 전문지식에 따라 공평하게 모든 환자를 대해줄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여러분은 (그 교수와 달리)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은 나이팅게일 선언문을 낭독하게 됩니다. 이 선서가 형식적으로 간호인이 되는 길을 시작하는 요식행위가 아니라 진정으로 생명존중의 정신을 마음속에 기리고 평생 그런 간호인으로 살아가겠다는 각오를 하는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여기 계시는 교수님들이나 제가 훗날 여러분이 훌륭한 간호인으로 성장한 모습을 보거나 듣게 되었을 때 행복해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의 대학생활이 보람도고 유익한 시간이 되고 또 앞날에 큰 발전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2016.10.6.

우리 대학 간호학과 2학년 학생들의 나이팅게일 선서식에서 했던 축사입니다. 내 마음을 담은 글입니다.



- 나이팅게일 선서식 축사 -

 
안녕하십니까?
 
먼저 오늘 선서식을 통해 전문 간호사의 길을 시작하는 학생 여러분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 제자들을 이 자리에 서게 하면서, 교육자로서 가슴 벅차할 교수님들께도 축하와 감사를 드립니다.
 
며칠 전에 읽은 우울한 기사를 하나 소개하면서 축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 5년 동안 우리나라의 자살자수는 약 7만 4천명으로, 이는 자살률 기준으로 세계 최고수준일 뿐 아니라, 최근에 발생한 주요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수보다 더 많다는 기사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급한 것이 현대화된 병원이나 고급의 의료기술 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미 우리나라의 의료 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에 비추어 부끄럽지 않을 만한 수준에 올랐습니다.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수명이 연장된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됩니다.
 
그럼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하여 이렇게 우울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나는 그 이유 중의 하나로, 한국 경제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불가피하게 만들어진 낙오자에 대한 무관심, 혹은 한번 낙오자가 되며 생존이 어렵게 만드는 가슴 없는 사회는 발달한 의술이나 현대화된 병원으로는 고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기억하는 일은, 지난 초여름 우리나라를 강타했던 메르스 사태입니다. 이 사건은 가장 뛰어난 의료진과 시설을 갖춘 병원조차도 기본적인 절차를 무시하거나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전염병 앞에 속수무책이라는 점을 잘 드러냈습니다.
 
학생여러분, 나는 오늘 이 자리에 오기 전 나이팅게일 선서문을 읽어보았습니다. 그 선서문을 읽으면서 앞에 이야기한 일들을 함께 생각했고, 여러분에게 두 가지 부탁의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축사를 대신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여러분은 부디 환자의 마음을 만져주는 의료인이 되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치유할 수는 없지만 여러분에게 맡겨진 환자와 그 가족에게만은 위로와 희망을 주는 간호사가 되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둘째는 지금 여러분이 선서를 하는 그 처음 마음을 가능한 오래 유지하시라는 것입니다. 환자 하나하나를 대할 때, 그들을 내 업무의 대상으로만이 아니라 생명을 다루는 전문가로서 기본에 충실한 의료인이 되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 선서식은 여러분이 간호사가 되는 긴 여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출발점입니다. 여러분이 정식 간호사가 되고 다시 오랜 시간이 흘러 은퇴하는 날까지 여러분의 마음의 그릇이 더욱 커져 가는 삶이되길 기원하면서 축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2015. 10. 12. 군산대학교 자연과학대학 학장

Pharisees asked a miraculous sign, but Jesus refused it. Why?

 

The Pharisees came and began to question Jesus. To test him, they asked him for a sign from heaven. He sighed deeply and said, "Why does this generation ask for a miraculous sign? I tell you the truth, no sign will be given to it." (Mark 8:11~12)

 

This phrases says that Pharisees asked Jesus a miraculous sign from heaven. Isn’t it odd? Jesus had shown various miracles so far. He healed all who were ill with various diseases, suffering severe pain, the demon-possessed, etc. He showed miracles routinely. If so, why did they ask a miracle and Jesus refuse it?

 

We can analogize it from the preceding part of the book. Mark wrote a miracle that Jesus fed 4,000 men with seven loaves of bread. It was happen when the Lord asked disciples to feed people who had followed him for 3 days. It is, absolutely, a miracle. Pharisees asked a miracle, even though Jesus already showed them a lot of miracles and, to my surprise, Jesus refused the request.

 

If Pharisees accepted the occurrence providing 4,000 men with seven loaves as a miracle, then the next story could not be formed. To the contrary, if the next story Pharisees asked Jesus a miracle, is accepted as a sincere request then the miracle can not be a miracle at all. Or Pharisees did not consider it as a miracle. What happened?

 

It might not be a miracle for the Pharisees who were powerful and rich that the poors could get food free of charge. No, it was not a miracle, it was a nightmare for them. The miracle they want might be a rebellion to the Roman Empire with heavenly army and getting back power. The miracle they possess the political and economic power exclusively! The miracle that the rent of their houses or land goes up several times! But the poor had enough food! Nonsense!

 

It could not be a miracle for them that there were seven basketfuls of pieces even though the poors got enough bread. So Pharisees still asked a miracle. And we are sure, our Lord Jesus refused that kind of miracle. And Jesus, I am sure, is refusing stubbornly to give a miracle of economic growth that making people unstable by mass producing temporary workers with low salary, because it is not a justice God want.


민꼬나잉이 한국에 왔군요. 다들 아시겠지만, 버마의 88년민주화운동세대 학생지도자로 장기수였지요. 얼마전 BBC인터뷰기사를 보고 드디어 감옥에서 나왔구나 했는데, 지난해 출옥했답니다. 2009년인가요, 광주평화인권상 수상자로 뽑혔으나 버마 정부가 감옥에 가두어 두고 있어서 오지 못했던 적이 있지요.


태국으로 탈출한 버마민주화운동가들을 2008년 설날 무렵에 만나서 식사하고 있을 때 마침 군사정부가 민주적이라고 위장된, 내용은 우리의 유신헌법 수준의, 헌법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잠깐 그 주제로 이야기했는데, 그들은 위장된 민주화라고 반발하더군요. 그래서 우리 역시 유신헌법을 거쳐 전두환체제를 거쳐 결국 민주화를 달성했다고 말하면서 자유투표는 아무튼 진보의 중요한 수단이라는 취지로 기회를 살리는 게 좋겠다고 했는데 그들은 부정적이었습니다.


그 후 다시 광주 국제평화포럼에 토론자로 참석해서 그들을 만난적이 있습니다. 그 때도 버마를 탈출한 망명자들은 다시 돌아가 선거투쟁에 임하는 것이 좋겠고, 유엔 조직 하에 버마 민주화지원운동단체들이 중복되지 않고 체계적으로 민주화를 지원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습니다. 귀국하는 것이 좋다는 제 말에 그들은 버마 현실을 모른다고 비난하더군요. 사실 그들을 마음 아프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섭섭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로 사과했습니다만, 어찌되었든 헌법 개정 이후 국회의원을 뽑는 직접 선거를 위해 감옥에 있던 자들이 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는 중국 이슈가 함께 있었습니다. 마치 미국은 버마의 민주화를 지원하는 나라이고 중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버마의 민주화를 방해하는 국가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이 인식이 꼭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었지요. 그러나 미국 역시 자국의 이익을 위해 형식적인 수준의 립 서비스만 하고 있었고, 특히 중국은 세계 지도자를 꿈꾸고 있는데, 언제까지나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안면몰수하고 독재를 지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후 국제사회에서 실제로 이런 변화들이 나타났지요. 


결국 우리가 6월항쟁으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일단 선거를 통한 민주화의 물꼬가 터지면 시간이 걸릴 뿐 이를 거스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지난 5-6년을 돌아볼 때 형식적 민주화가 얼마나 실체적 민주화에 접근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은 좀 다르게 접근해야 할 것 같지만 말입니다.  

일본이 절대로 세계의 리더가 될 수 없는 이유

독일의 특별기구가 이미 93세나 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경비원을 체포했다고 합니다. 전범은 끝까지 추적하여 처벌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독일이 유럽사회의 신뢰를 회복하는 힘이었고 여기에 경제력이 뒷받침되면서 다시 유럽의 지도자국가로 설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회개와 과거사 정리는 철저합니다.

일본은 과거사를 회개하고 정리하기는 커녕 오히려 미화하기에 바쁩니다. 그래서 그 돈이 아쉬운 주변국가들의 아양은 받을지 몰라도 존경을 받거나 지도력을 인정받지는 못하는 것이지요. 아니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으로 경계받을 뿐입니다. 물론 미국이 중국견제를 위해 극동아시아를 그렇게 만든 측면도 있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류열풍이라 떠들지만, 요즘 말로 한순간에 훅 가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세대라면 누구나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홍콩문화가 얼마나 쎈놈이었는지를... 그러나 한 순간에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화가 아니라 정신입니다.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정신. 베트남과의 관계는 그 시험대라고 생각합니다.

http://www.bbc.co.uk/news/world-europe-22427976

The reason why Japan can not get leadership from neighbor countries.


German authorities arrested former Auschwitz guard Hans Lipschis who is 93 years old. According to BBC news, he is the first person arrested as a result of a series of new investigations launched by the German authorities into some 50 former Auschwitz guards who are still alive.


Germans are so thoroughness on the repentance and compensation about their wicked doing. It made them trustworthy to neighbor Europeans. Based on it, the economic prosperous backup German to be a world leader.Japan can not be a world leader. Never! Japan has not repented their historical plunder and slaughter. Yes, they can buy flattery from neighbor countries for money without getting rid of war crimes. But because neighbor countries won't respect, Japan can not get leadership from these countries.


We should be careful too. Though we see fever of Korean culture all around the world, it can be disappeared at one moment. The key point is not an entertainment. It is a ethos(soul or mind) which can get respect from neighbors. One of the test beds is Vietnam, I believe. 


http://www.bbc.co.uk/news/world-europe-22427976

The Bible overturns my viewpoint completely

 

 

The Bible overturns what we take for granted or our common viewpoint boldly. For example:

It says that the poor are blessed not the rich.

[Luke 6:20] Looking at his disciples, he said: "Blessed are you who are poor, for yours is the kingdom of God.

 

If we give a banquet, it is better to invite people who are rich or have power for dealing something we want to get. Our Lord advises us, however, we’d better to invite people who cannot repay us.

[Luke 14:13~14] But when you give a banquet, invite the poor, the crippled, the lame, the blind, and you will be blessed. Although they cannot repay you, you will be repaid at the resurrection of the righteous.“

 

The Bible even says “Rejoice the sufferings.”

[1 Peter 4:13] But rejoice that you participate in the sufferings of Christ, so that you may be overjoyed when his glory is revealed.

 

These are so funny. There are also more curious stories in the Bible which can not be acknowledged if we don’t read with caution. These are found in teachings of our Lord. One of them is the story of Samaritan which was given as an answer to the question, “Who is my neighbor?”

[Luke 10:25~37] On one occasion an expert in the law stood up to test Jesus. "Teacher," he asked, "what must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What is written in the Law?" he replied. "How do you read it?" He answered: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a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You have answered correctly," Jesus replied. "Do this and you will live." But he wanted to justify himself, so he asked Jesus, "And who is my neighbor?" In reply Jesus said: "A man was going down from Jerusalem to Jericho, when he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They stripped him of his clothes, beat him and went away, leaving him half dead.

(31-35 abbreviated)

[36~37] "Which of these three do you think was a neighbor to the man who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The expert in the law replied, "The one who had mercy on him." Jesus told him, "Go and do likewise.“

 

It is a well known story. It is begun with question a law expert asked to our Lord, "What must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Both of them, the questioner and the respondent, knew the way to get eternal life well. It is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a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re was no inconsistency between their answers.

 

The law expert asked again to justify himself, “Who is my neighbor?” The answer our Lord gave was the story of Samaritan. After he told it, Jesus asked him, "Which of these three do you think was a neighbor to the man who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Did you find the turning over? The law expert asked “Who is my neighbor?” and the Lord answered “Who is a neighbor to the man in need?”

 

Well, there is a standpoint that 'I am greater than the man in need' when the law expert asked “Who is my neighbor?” In other words “OK, I will help my neighbor. So tell me whom should I help?” It seems to be the meaning of ‘wanted to justify himself’. However the answer is 'it is you being loved not the man in need.'

 

It is a radical reverse of viewpoint. It is not me who gives love but the man in need. It is critical because this story begins with ‘What must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flows to the way we get eternal life is ‘Love our God and love our neighbor’ The story goes on the neighbor is me because I can practice ‘Love our neighbor’ by the man in need. I can have eternal life through helping the man in need. I am loved in fact.

 

It is the paradox of God. So Paul said as follows.

[Romans 12:15] Rejoice with those who rejoice; mourn with those who mourn.

 

Can't you grip it yet? Then please read the passages in Matthew 25:31-46.

 

[Matthew 25:31-46] (31~33 abbreviated)

34 “Then the King will say to those on his right, ‘Come, you who are blessed by my Father; take your inheritance, the kingdom prepared for you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35 For I was hungry and you gave me something to eat, I was thirsty and you gave me something to drink, I was a stranger and you invited me in, 36 I needed clothes and you clothed me, I was sick and you looked after me, I was in prison and you came to visit me.’

 

37 “Then the righteous will answer him, ‘Lord, when did we see you hungry and feed you, or thirsty and give you something to drink? 38 When did we see you a stranger and invite you in, or needing clothes and clothe you? 39 When did we see you sick or in prison and go to visit you?’

 

40 “The King will reply, ‘Truly I tell you, whatever you did for one of the least of these brothers and sisters of mine, you did for me.’

41 “Then he will say to those on his left, ‘Depart from me, you who are cursed, into the eternal fire prepared for the devil and his angels.

(42~44 abbreviated)

44 “They also will answer, ‘Lord, when did we see you hungry or thirsty or a stranger or needing clothes or sick or in prison, and did not help you?’

45 “He will reply, ‘Truly I tell you, whatever you did not do for one of the least of these, you did not do for me.’

46 “Then they will go away to eternal punishment, but the righteous to eternal life.”

 

The Bible or the Christianity says 'It is not true' about what we think it is a matter of course. So if you expected that you would be blessed with materials or be rich then you got wrong address. You are a good Christian if you feel uncomfortable whenever you see the people in need around you instead.

(Every passages cited from NIV Bible)

Mark(Pastor of Willoughby Christian Reformed Church) introduced passages cited from a book, The 100: The Most influential persons in history(Michael H. Hart), several weeks ago.


Hart, the author of the book, ranked Jesus as third following Mohammed and Isaac Newton. And the reason he arranged so is follows,


‘I am neither a Muslim nor a Christian, but on my observation Mohammed has far more influence in the lives of Muslims than Jesus does in the lives of Christians. And if believers simply took more notice of the teachings of Jesus I would have absolutely no hesitation in placing him the most influential person in the history of the world.’

 

And he added,


‘This idea of Jesus that we are to love our enemies is surely among the most remarkable and original ethical ideas ever presented. If they were widely followed I would have no hesitation in placing Jesus the most influential person in history. But the truth is that these sayings of Jesus and this one in particular is not widely followed in fact it is not even generally accepted. Most Christians consider the injunction to love your enemy as at most an ideal which will be realized in some perfect world in the the future, but not as a reasonable guide to conduct in the actual world in which we live.’

 

This story reminded me the passages in [Luke 19:40]


"I tell you," he replied, "if they keep quiet, the stones will cry out."

But why does expanding the economic domain receive the highest priority in countries that are already rich? The message conveyed through many political speeches is that society needs economic expansion in order to battle the remnants of misery and poverty that still exist in wealthy countries. But that is hardly the primary motivation.

(HOPE IN TROUBLED TIMES, Bob Goudzwaard etc.(2007) 92p.)


It is true that almost all politicians have shouted economic growth for the poor, but the relative poverty of each OECD countries has been increased even though their economic growth rate was positive. Even worse thing is they increased investment to put fuel on economy instead of on social welfare for the same reason in many countries.


So, the quotation above is a good motivation for developing "Economics of Enough".


오늘 오후에는 UBC의 아시아연구소에서 개최한 한 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북한을 중심으로 동북아시아문제에 정통해온 국무부 관리 출신으로 이후 연구자겸 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Johns Hopkins 대학의 Joel Stephen Wit 교수의 주제발표와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사실 오늘 있었던 이야기들 중에서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주제발표 내용이나 토론 내용보다는 중간 중간 이야기 된 몇 가지 곁가지 이야기들이 오히려 내 귀를 자극하더군요. 그런 것 몇 가지를 정리해 봅니다. 내 영어 실력이 짧아서 혹시 잘못 이해한 내용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첫째는 미국에 북한 전문가가 사실상 전무하다는 점입니다. 위트의 말에 따르면 북한 이슈가 나올 때마다 북한 전문가로 나서는 사람들 가운데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북한에 체류해 보거나 심지어는 북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거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를 들어 이란 관련 이슈가 나올 때마다 이란에 체류한 적이 있거나 이란인을 종종 만나왔고 심지어는 이란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주 많다는 사실과 아주 대조적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미국의 관심이 동북아의 안정상태 유지에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북한에 대한 관심이 사실 거의 없다는 점을 반영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북한 쪽에서 미국에 대한 관심이 매우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은 위에서 말한 견지에서 남한의 입장 뒤에 서 있을 뿐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사실 다른 사실과 관련이 있는데, 북한은 불가피하게 경제적으로 중국에 과도하게 의존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수입의 80%가 중국으로부터 들어오고 있습니다. 또 시장에서 판매되는 상품의 90%가 중국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북한관리들은 지나친 중국의존성을 탈피하지 못하면 미래 전망이 암담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균형을 위해 삼각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싶어하고 이것이 미국에 접근하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김대중대통령의 햇볕정책이 좋은 정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정책이 계속되었다면, 북한은 더 이상 과도하게 중국의존적으로 발전하지 않고 남측의 도움으로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미국에 저토록 목매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한가지 꼭 언급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위에서 시장판매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혹시 아직도 "북한에 무슨 시장이 있느냐? 공산주의 국가인데..."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까 싶어 말입니다. 북한을 계속 방문하다보면 몇 달 사이에도 변화가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는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시장이라는 것이지요. 평양에는 수퍼마켓도 생겼고, 지방 소도시까지 이런 시장체제가 급속히 도입되고 있다는군요.


또 한가지 꼭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오늘 세미나에 참석하러 가면서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다국적 학생들이 참석해서 질문하였습니다. 나는 캐나다 학자들과 한국계 학생들이 주류를 이룰 것으로 예상했는데, 오히려 캐나디언과 중국계, 타이완, 베트남 등 동아시아 지역 출신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해 전문가로 길러지는 동아시아 학생들이 많다는 점은 한국의 미래와 관련하여 조금 오싹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만 할까 How Should We Then Live" 이 말은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가 쓴 유명한 책 제목입니다. 제가 며칠 전 쓴 글로벌경제가 우리를 원치 않는 죄인으로 만든다는 글에 내가 존경하는 한 목사님이  어느 분의 페이스북에 개인이 이를 속속들이 알 수가 없음을 한탄하는 댓글을 남긴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 말씀이 맞습니다. 도대체 내가 타고 있는 자동차의 철판이 브라질산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며, 브라질에서 생산되는 철강의 일부가 노예들이 생산한 숯으로 제련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개인이 알 수 있습니까?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나역시 같은 형편이고, 그래서 내가 늘 주장하는 말이 '소극적 세상바꾸기'입니다. 


나는 한국 교회가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런 관심에서 출발하여 몇 가지 작은 실천을 시작하자고 제안합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도 지금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할수만 있다면 공정무역상품을 구입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공정무역상품은 대표적으로 커피, 초콜렛, 설탕, 축구공 같은 공 등이 널리 거래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품들은 대부분 어린이 (노예) 노동으로 생산되어 왔고, 국제 NGO들이 여기에 뛰어 들어 어린이 노동이 배제되고 농가에 안정적인 적정 가격이 지불되는 시스템을 갖추고 생산하는 상품들입니다. 


또 단일 상품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어린이 노예노동 상품은 카펫트입니다. 주로 인도에서 생산되지요. 미국을 중심으로 카페트 소비가 많은 영국, 독일 등에 만들어진 단체가 GoodWeave이지요. 원래 미국에서 RUGMARK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이를 국제 단체로 확장한 것입니다. 


이들은 인도의 카펫트 공장을 심사하여 어린이 노동이 없이 생산된다는 것이 입증되면, 아래 사진과 같은 자기들의 인증마크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이 인증마크를 달고 판매된 카펫의 수익금 1%를 기금으로 징수하여 인도의 어린이들이 어린이답게 교육받고 성장하도록 지원합니다.





물론 이렇게 하려면 우리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가격이 비싸서 소비를 줄이거나 지출 금액을 늘려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선한 마음(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다면 그 마음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실천에 옮기는 것이지요. 우리 소비 전체를 갑자기 공정무역 상품으로 바꾸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두번째 교회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은 특정 국가들에서 생산된 저가품을 주일학교 선물이나 교회 기념품 등으로 사용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상품일수록 노예노동이 슬며시 끼어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품은 보통 품질이 낮아서 바로 고장나거나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고 버리게 되는데, 이는 환경파괴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횟수를 줄이는 대신 제대로 생산된 국산 상품을 사용하실 것을 제안합니다.


한국 교회가 이런 실천만 해도 그 파장은 매우 강력합니다. 위에서 소개한 GoodWeave가 출범할 당시인 1995년에는 남아시아의 카펫트 산업에 어린이 노동자가 100만명(이들중 상당수가 노예입니다)에 달했으나 지금은 25만명 정도로 줄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공정무역 상품 소비를 조금씩 늘려가면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는 없는 것 같아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런 상품의 가격도 점차 낮아지고 이는 또 다시 소비 증가로 이어져 결국 노예를 줄이는 효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늘 내가 너무 소극적이라는 사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극적이라도 행동하는 사람은 아예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결코 다다를 수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글에 사용된 일부 정보는 Bales등이 쓴 Slavery Today를 참고하였습니다)

Globalization of economy has several meanings. It is usually said that the globalizaton of markets: the most powerful company occupies some commodities’ market all over the world. It is also said that it improves benefit of consumers for this system is more efficient than the restricted small market system of one country.

 

But we(Christian) should look at the production side globalization instead of market side globalization. Because it sometimes makes us unintended sinners.

 

Globalization of economy is operated as follows 1) some cheap parts are produced in some countries whose production cost is low. 2) these parts are sent to assembly(or final product) plants neighboring markets. 3) it is sold just as it is labeled “Made in XXXXX” of the country it is finally assembled. It is the system that foreign electronic companies have been operating assembly plants in North America.

 

[Of corse, some products whose added value is low are produced wholly in low costed countries like China or India. Even in this case, we should consider the aspect of preoccupancy of potential markets at the same time. Production cost is not the only consideration of enterprises.]


What I want to say in this column is the stage of supplying the parts from all over the world. The system opens possibilities slave labor penetrate into. If the final production or production of major parts is done in sweat shops, NGOs can catch it and make an effort to boycott the products.(As we can find some cases in Slave Today, Bales and Cornell, Groundwoodbooks ,2008)
 

The shocking movie, “Blood Diamond” and Fair Trade Movement for coffee, sugar etc are related with it. The SRI movement pressing pensions and funds to invest to the socially responsible companies is also an well known example.

 

But if only the some portion of parts are made from the slave labor, we can not find it out easily. So we are exposed to the possibilities getting benefit of slave labor when we are buying some commodities such as cars, electronics, or clothes.

 

Globalization of economy make us sinners to get benefit of slave labor even though we don’t intend it.

경제가 글로벌화 된다는 말은 그것을 이해하는 방법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보통 우리가 듣는 이야기는 시장의 글로벌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경제성장이나 수익확대에 긍정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글로벌 경제의 진짜 의미는 시장 이전에 생산의 글로벌화에 있습니다. 그리고 생산의 글로벌화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그럴듯한 측면과 그 뒤에 숨어 우리를 알게 모르게 죄인으로 만드는 알맹이 현상이 있습니다.


알맹이 현상이란 부품조달의 글로벌화입니다. 세계 여기저기에서 생산된 부품을 조립하여 완성품을 만드는 생산체제가 바로 글로벌 경제의 숨은 뜻입니다. 글로벌 경제는 생산가가 저렴한 지역(모두는 아니지만 상당부분을)에서 부품을 조달하여 판매시장, 혹은 그 인근지역에서 조립한 다음 "Made in xxxxx"라고 붙여서 판매하는 방식으로 유지됩니다. 알맹이는 바로 부품조달에 있는데 보통은 뒷 단계만 강조되지요. 많은 자동차회사들이 미국에 조립공장을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물론 상대적으로 부가가치가 적고 단순한 상품은 중국이나 인도처럼 아예 생산비가 저렴한 곳을 최종 생산지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나라를 생산기지로 삼는 데는 미래시장의 선점이라는 측면도 있기 때문에 꼭 생산비 때문에 그곳에서 생산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생산체제는 언제나 노예노동이 슬그머니 끼어들 가능성을 열어놓게 됩니다. 최종 생산이나 주요 원자재가 노예노동에 준하는 노동착취공장(sweat shop)에서 이루어진다면 국제 NGO들이 이를 알아채서 보이콧(구매거부) 계몽을 할 수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사례는 다이아몬드로 언젠가 영화 "Blood Diamond"로 만들어지기도 했지요. 이외에도 커피, 설탕, 초콜렛 같은 상품들이 있고, 공정무역(Fair Trade) 운동가들이 이런 상품의 생산에 깊이 간여하게 된 것입니다. 또 연금이나 기금이 이런 기업들에는 투자하지 않도록 촉구하는 사회책임투자(SRI) 운동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부품이 그런 공장에서 생산된다면, 우리가 이를 알아채기 쉽지 않습니다. 이런 제품을 구입하는 우리는, 자신은 모르고 있지만, 노예로 부터 이익을 얻게 됩니다. 자동차, 전자, 의류 등 많은 상품들을 구입할 때마다 우리는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글로벌 경제가 원치 않는 우리를, 노예로 부터 이익을 얻는 파렴치한 죄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미국의 여러 극우파나 근본주의 단체들이 이 심볼을 사탄협회의 생각을 확산시킨다거나 혹은 공산주의자들의 표식이라고 저주하지만, 사실은 그 탄생에는 분명한 배경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심볼은 1958년 영국의 반핵 단체인 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가 런던에서 핵무기 공장이 있는(지금도) Aldermaston까지 평화행진을 계획하면서 만들어졌다는군요. 행진을 부활절에 맞추어서 진행했기 때문에 이 심볼의 색깔도 두 가지 색상 조합으로 만들었다는군요.


그리스도 수난절에 사용할 심볼은 흰색 바탕에 검정무늬로, 부활절에 사용할 심볼은 녹색바탕에 흰무늬로 만들었습니다. 이 심볼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디자인되었는데, 하나는 위 그림에서 보듯이 글자 N과 D를 나타내는 수신호를 결합한 것입니다. 핵무기 무장해제를 나타내는 이 단체의 이름 Nuclear Disarmament의 처음 두 글자이지요.


이를 디자인 했던 Gerald Holton에 따르면, 두번째 의미는 자신의 좌절감을 상징하기 위해 좌절한 사람이 손바닥을 앞으로 보이도록 늘어뜨린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합니다.


이후 구 소련의 탱크가 프라하를 침략했을 때라든가 베르린 장벽, 혹은 동티모르사태 때와 같이 전쟁, 침략, 인종청소가 벌어지는 여러 역사적 현장에서 사람들은 평화를 희망하는 마음을 담아 담벼락에 이 심볼을 그렸습니다. 


물론 저작권을 등록하지 않고 누구나 사용하도록 하였답니다. 덕분에 발빠른 의류업자들이 이 디자인을 옷에 그려 팔고 있지요. 미국이나 캐나다의 원주민들은 여기저기 장터에서 이를 새긴 여러 장신구들을 팔기도 합니다. 


밴쿠버에서 발행되는 잡지 Common Ground 7월호에는 이 심볼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 대한 글이 실려 있습니다. 원문은 이곳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Human Peace Sign event at UBC needs your body - Common Ground
https://commonground.ca/human-peace-sign-event-at-ubc-needs-your-body/


http://www.facebook.com/l.php?u=http%3A%2F%2F2010.haja.net%2Fnotice%2Fview%2Fcno%3A43668&h=DAQFcg673AQGJx5_vEsJOkXx9e6sKsE3Ym2nHIXdciOcEiw


4-5년 전 메솟에 머물며 가장 해보고 싶었던 일이 이것이었는데, 게으르고 추진력 없는 나는 그일에서 멀어지고 있는 동안 그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국의 포용성 성장 추구는 진정한 사회주의 시장경제로의 이행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 이후 가장 극적인 경제노선 변경을 천명하였다. 지난 30년 동안 추구해왔던 선부론(일부를 먼저 부요하게 만들어 이를 나머지에게 전파한다) 중심의 고속성장정책을 중단하고 내수와 민생 위주의 포용성 성장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는 진정한 사회주의 시장경제 모델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지난 10월 18일 폐막한 중국공산당 17기 중앙위원회 5차 전체회의(17기 5중전회)는 두 가지 중요한 결정을 했다. 하나는 시진핑을 차기 지도자로 선택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정책(12차 5개년계획)의 전환이다. 이날 5중전회 발표문에는 ‘국부에서 민부로, 성장에서 분배로, 세계의 공장에서 첨단산업 강국으로’ 나아간다는 미래전략이 강조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국내총생산(GDP)이 증가해도 국민의 소득은 증가하지 않는 것을 인구가 많아서 그렇다고 당연하게 여겼던 것에서 완전히 돌아선 것이다.

 

경제정책변화의 배경

이러한 극적인 변화에는 어떤 배경이 있는 것일까? 아마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미국의 압력 때문일 것이다. 미국은 오랫동안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세계 패권국가의 자리를 중국에 내줄지 모른다는 걱정을 해왔다. 그래서 군사적으로는 중국포위정책을 강화하고 있고, 경제적으로는 위안화 가치절상(환율인상)을 압박하고 있다.

미국은 환율압박을 통해 무역역조를 해결하고자 하지만 중국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자 과거 수 십 년 동안 반복적으로 사용해왔던 달러화 발권을 늘려 달러가치를 낮추는 정책까지 펼치고 있다. 이는 미국의 재정적자를 심화시키고 인플레를 가속화해 결국에는 달러화의 기축통화역할이 약화되는 자충수가 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과거에도 일본과 환율전쟁을 했지만 일본의 자리를 한국이 대신하면서 다시 한국과 환율전쟁을 해야 했고, 한국의 환율인상은 또 다시 한국의 자리를 중국이 대신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이번에도 중국이 환율을 미국이 원하는 만큼 인상하면 중국의 자리를 인도가 대신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과 한국이 그러했듯이 중국도 경제성장은 멈추고 빈부격차만 증가하여 미국이 통제할 수 있는 국가의 범주에 들어온다는 계산도 깔려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규모가 커서 중국은 환율인상이 서서히 이루어지면 일본이나 한국과 달리 위안화를 기축통화(국제결재나 금융거래의 기준이 되는 화폐로 지금은 미국의 달러화)로 만들 수도 있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불균형성장은 중국붕괴의 뇌관

그런데 중국에서 빈부격차의 증가는 한국, 일본과 다른 핵폭탄의 뇌관이다. 수많은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은 티벳사태와 같은 사건들이 보여주듯이 사회경제적 불만이 언제 국가체제의 붕괴로 이어질지 알 수 없다. 중국 스스로도 우선 돈 벌기에 급급했던 시장경제도입(선부론)이 중국붕괴를 앞당기고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위 10% 소득계층에 대한 상위 10%의 소득은 1988년 7.3배에서 2007년 23배로 급격히 벌어졌고 주로 빈곤층이 거주하는 주변부 소수민족지역에서 소요가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불균형성장은 다민족국가의 통일성을 유지시켜주던 사회주의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파괴할 수밖에 없어서 분배에 눈을 돌려야만 할 때가 되었는데, 때 마침 미국의 환율압박은 이를 실행에 옮기는 기폭제가 된 셈이다.

그런데 중국이 환율인상 압박에 대처하는 방법이 흥미롭다. 내가 눈여겨보는 것은 선언으로서의 경제정책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경제정책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쟁의의 증가와 임금인상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중국은 과거와 달리 노동쟁의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이에 따른 임금인상도 큰 폭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이미 수년전부터 세계의 공장이라는 정책이 변해왔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임금인상은 몇 가지 효과를 수반하게 된다.

 

노동쟁의의 증가와 임금인상의 효과

그동안 중국의 연안에 위치한 성들은 내륙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았기 때문에 바로 인접한 내륙의 성에서 많은 노동자(농민공)들이 연안지역으로 유입되었다. 이는 소득격차와 인구밀도 증가의 원인이었고 나아가서 각종 사회문제의 원인이었다. 중국정부는 그동안 서북공정이라는 이름의 정책으로 연안지역의 기업들이 내륙에 투자를 확대하도록 유도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노동쟁의의 증가와 임금인상은 자연히 상대적으로 저임금지역인 연안인접 내륙지방으로 투자를 이동시킬 것이고, 그동안 나타났던 여러 가지 문제들도 완화될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려면 위안화가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상태가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에 미국의 환율인상 요구에 소극적으로 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경제가 조금씩 내륙화 하는 효과와 더불어 정부는 주로 소수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내륙에 대한 분배를 늘려 국가붕괴의 위험을 줄이려 할 것이다. 게다가 외국의 투자기업들은 임금인상으로 인해 저임금에 기초한 저가상품만을 생산하는 투자전략에서 서서히 고부가가치 상품의 생산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첨단산업 강국의 목표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인구가 많아 전략적 선택이 가능해져

그런데 이런 모든 정책이 가능한 것은 바로 중국의 인구에 있다. 지금 중국에게 인구문제는 함정이 아니고 오히려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중국 자체의 인구가 많기 때문에 한 나라 안에서 첨단상품과 저가상품이 공존할 수 있으며, 비록 성장률은 크게 낮아지겠지만, 내수중심 성장정책이 수출정책을 대체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 개인의 소득이 증가하지 않는다면 이런 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 그래서 ‘국부에서 민부로’라는 구호가 등장한 것이다.

이제 중국은 비로소 분배를 표면에 내세우는 사회주의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있다. 성공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그러나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선부론의 핵심세력인 상하이방의 지지를 받고 있는 시진핑이 과연 후진타오의 이런 정책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유지할 것인가? 하는 점과 오래된 산아제한 정책으로 빠른 속도로 노령화하고 있는 인구가 장래에 함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중국공산당은 소수민족 자치정책으로 가장 말썽 없는 다민족국가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선부론 이후 소수민족 말살정책으로 의심되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는 이 상황을 반전시키고 중국이 세계지도국가의 자질을 갖출 수 있을까? 하는 점도 아직 자신할 수 없다.

분배로의 전환은 분명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나아가는 의미 있는 전환이다. 그러나 부에 대한 과도한 욕심에 물든 인민들을 얼마나 통제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지금, 중국은 새로운 국가 가치관을 시험하는 대장정의 길에 오른 셈이다. (2010. 10. 19.)

버마(미얀마)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한국에 돌아와서 캠페인 관련 업무를 마무리 한 후 보고회를 가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캠페인에 참여하셨고 그 분들께 결산보고를 하기 휘한 자리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짧은 기간 동안 가서 보고 들은 버마(미얀마) 문제를 설명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버마문제

오늘은 그날 정리해서 말했던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일종의 중간결산인 셈이지요. 아직 정리해볼 부분이 많이 남은 상태로 짧은 기간 동안 생각했던 것을 중간결론 삼아 미리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실태랄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점들을 정리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방문했던 메솟지역은 인구가 15-16만 명쯤 된다고 합니다. 이중 버마 이주노동자가 10만 명이나 됩니다. 즉 버마 이주노동자를 고용하여 산업이 형성된 도시라는 뜻이지요. 이들 이주노동자들은 태국의 법정 최저임금의 반도 안 되는 급여를 받고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버마(미얀마) 내부에서는 실질 임금이 메솟지역보다 더 적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합법, 비합법적 수단으로 국경을 넘어와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경제적인 문제라면 버마 내부가 더 심각하다는 것이지요.

버마 내부의 더 큰 문제라면, 메솟지역에 대규모 난민촌이 건설된 배경이기도 하지만, 소수민족에 대한 인종청소라고 합니다. 샨, 카레니, 몬, 칸, 아라칸 등 주요 소수민족들이 정글에서 강제 이주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IDP(internally displaced people, 국내 강제이주민)라고 부르는 데 짐작할 수 있듯이 강제 이주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들의 근거지를 습격하여 학살하는 인종청소 방식이어서 더욱 심각한 상태입니다. 다시 소개하지만 2008년 초쯤에 개봉되었던 <람보4>라는 영화에 이런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모든 종류의 문제가 다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착취문제, 이주노동자 자녀들과 난민촌의 교육 및 의료 문제, 내부에는 경제적 궁핍과 식량문제가 그리고 민주인사들에 대한 극도의 탄압이 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삶의 희망이라는 절실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내부의 소수민족들에겐 준 전쟁 상태에서의 생존이라는 처절한 문제가 있습니다.

민주화만이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길

사실 내가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돌아다니다가, 그리고 돌아와서 고민하면서 내린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민주화!> 민주화 되지 않고는 이 모든 문제의 해결 실마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아니 실마리를 찾겠다고 덤빌 엄두조차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피스라디오 2차 캠페인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주화의 길은 요원해 보입니다. 버마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 대부분이 국경관리가 허술한 나라들이어서 민주인사들이 쉽게 해외로 망명하거나 잠입할 수 있습니다. 버마 내부에 남아서 지속적으로 활동하지 않기 때문에 늘 새로운 사람들이 나와서 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조직적인 저항력이 키워지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밖에서 여러 가지 희망을 만들어가고 있지만 그들 대부분이 내부가 민주화 되면 금의환향할 생각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민주화 지원 외에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지금 당장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희망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민주화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 밖에는 없는 것일까요?

지금 할 수 있는 일들

몇 가지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주노동자, 난민들을 위한 교육을 지원하는 일입니다. 메솟지역에는 여러 개의 유치원과 학교들이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이 대부분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거리에 방치되어 폭력적인 문제아들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학교로 불러 모아 기본적인 교육을 시킴으로써 당장에는 스스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성인으로 기르고, 나아가서는 민주시민교육을 통해 바람직한 시민으로 성장하게 돕는 것입니다.

교육에는 몇 가지 다른 목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뛰어난 학생들을 발굴하여 한국어를 가르친 후 한국의 의과대학에서 교육시킨 뒤 다시 그곳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곳의 의료문제를 함께 해결 할 수 있습니다. 또 민주화된 버마에서 민주시민으로서 자유버마의 뿌리를 튼튼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자유버마감시자들(Free Burma Rangers)이 하는 일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인종청소의 희생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정글을 헤치고 다니면서 구조하고 치료 및 교육하는 그들의 활동에 필요한 물품이나 비용, 정글 사람들에게 필요한 약품이나 공책, 연필 등을 공급하는 일입니다. 이렇듯 이 모든 문제들의 근본적인 해결할 실마리인 민주화 이전에도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요나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버려져 큰 물고기 뱃속에 3일을 있었던 사람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의 사소한 부분이지만, 풍랑을 만나자 뱃사람들이 승객들에게 각자 자신의 신에게 기도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지금 버마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인지도 모릅니다. 종교가 무엇이든 이들의 구원을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작은 일이라도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피스라디오에 대한 반응
2월 10일 저녁 ~ 2월 11일 아침

사실 10일은 내 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달식이 끝난 후 함께 간 푸른소와 아렌지 등이 슬그머니 사라지더니 맥주와 과자를 몇 봉지 사들고 들어와 축하해주었습니다. 다른 단체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고 DPNS 소속 사람들만 남아 있었는데 이들도 함께 둘러 앉아 내 생일을 빙자한(^^) 소박한 파티가 열렸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내 평생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준 생일파티였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나는 또 한 번 가슴 벅찬 말을 들었습니다. 21살이라는 카렌족의 한 아가씨에게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묻자, “유학을 다녀와서 난민캠프에서 마더 테레사 수녀처럼 사는 것이 꿈이다.”고 대답합니다. 사실 난 참 어리석었습니다. 나는 속으로 이 아가씨에게 과연 희망이라는 게 있을까? 하는 의문과 이들은 문명세계가 돌봐 줘야할 대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아가씨는 나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성숙한 문명인이었습니다. 오직 돈과 권력만 설쳐대는 야만적인 세계에 갇히지 않고 가장 문명인다운 꿈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도 역시 피스라디오가 화제의 중심이었습니다. 이들은 어제(9일) 저녁에 있었던 버마군부의 발표가 우리들의 피스라디오 캠페인에 꽃을 피워준 꼴이었습니다. 군부가 5월 국민투표를 통해 합법적 영구집권을 꾀하는데 민주진영에서 라디오를 이용한 홍보전을 펼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더 많은 라디오를 시급하게 보내주길 희망한다고 입 모아 말합니다.

다음 날인 11일 아침에는 전날 밤의 모임 때문에 그만 늦잠을 잤습니다. 사실 늦도록 잠들지 못하다 새벽에 잠이 들었고 결국 늦잠을 잔 것이지요. 그래서 아침에 있었던 피스라디오 캠페인에 대한 라디오 방송을 하나(RFA) 밖에 듣지 못했습니다. 린의 말에 따르면 3개 방송(BBC, RFA, DVB)이 모두 방송했다고 합니다. 방송은 버마어로 진행되었고 린이 번역해준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었습니다.

“피스라디오 캠페인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DPNS, 이주노동자, 난민캠프, KNU, ABSDF 등이 참석했다. 이 라디오는 버마 사람들에게 특히 이주노동자들에게 매우 필요한 것이다. 라디오를 공급하는 이런 캠페인은 처음 있는 일이다. 캠페인을 한 사람들은 한국인들로 이들은 앞으로도 이런 캠페인을 계속할 예정이다.” 그리고 태국에서 이 캠페인의 파트너 역할을 했던 사람들 몇 명의 인터뷰가 나갔습니다. RFA는 이런 방송을 두 번 내보냈습니다.

사실 이곳에 와서 우리들은 피스라디오 캠페인이 매우 적절한 때에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은 캠페인이고 기존의 여러 자유버마 돕기 캠페인들과 차별되는 캠페인이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군부가 추진하는 국민투표 때문에 더욱 가치가 돋보였습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이들의 기대처럼 한 동안 계속 할 사업이라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한국이 점점 불경기의 늪으로 빠져들 조짐이고, 이번 캠페인을 위한 기부금을 모으는 것도 힘들었던 터라 이들의 기대가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시민행동이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문제로 후속 캠페인을 계속할 처지가 아니어서 우리가 귀국한 후에 캠페인을 정산하고 남은 자금을 2차로 보내주는데 그쳤습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다음 캠페인을 기약합니다.

내 생애 최대 인파(^^)가 몰린 생일모임


앞쪽이 이번 캠페인의 실무를 책임졌던 아렌지이고, 뒤가 바로 마더 테레사를 꿈꾸는 아가씨입니다.

(왼쪽 그림) New Era journal 이라는 자유버마 인터넷 신문에 실린 피스라디오 캠페인 관련 기사. 사진 속의 인터뷰하는 사람은 시민행동의 푸른소 (오른쪽 그림) Yoma3 News Service라는 역시 자유버마 인터넷신문에 실린 피스라디오 캠페인기사. 사진은 내가 HRDP의 간부에게 라디오를 전달하는 모습 (피스라디오캠페인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음)

피스라디오 전달식
2월 10일 저녁

영치우노동자연합을 방문을 급하게 마치고 5시 30분 우리 일행은 급하게 숙소를 겸하고 있는 DPNS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이날 저녁 6시부터 피스라디오 전달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비해 지나치게 더운 날씨에다 가는 곳마다 냉방이 되는 곳은 전혀 없기 때문에 더욱 지친 몸으로 DPNS 사무실에 돌아온 우리는 당황했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조촐하게 기념사진을 찍는 정도였습니다. 한국에서 모금에 참여하신 분들에게 결과를 알려드릴 최소한의 자료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모여들기 시작한 사람들은 대규모 행사임을 직감하게 했습니다.

이날 진행순서는 개회사에 이어 DPNS의 린 총무가 버마어로 경과보고를 하고 이어서 시민행동의 오 처장이 한국어로 경과보고를 했습니다. 물론 콩-예가 버마어로 통역을 했습니다. 이어서 버마의 각 조직을 대표해서 3사람이 연설을 했습니다.

첫 번째 강연에 나선 이는 카렌족을 대표한 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현재 정글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카렌족에 대한 군사정부의 학살을 증언했습니다. 군인들은 밀림 속 카렌족 마을을 습격해서 성인남성은 다 죽이고 오직 여자들과 아이들만 남겨둔 채 논과 마을을 불태워 없앤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폐허화한 마을 주변에 지뢰를 설치함으로써 마을 주민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막는 영민함까지 보인다고 합니다. 영상자료는 고문, 강간은 물론이고 인종청소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피난처에서 조차 어린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임시학교를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단체는 나중에 소개할 자유버마순찰대(Free Burma Rangers)라는 조직입니다. 그는 지금 자기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약품과 음식이며, 밀림 속 소수민족들이 희망을 유지하기 위해 라디오가 매우 요긴하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강연자는 빈민자녀를 위한 학교를 운영 중인 분이었는데, 그는 라디오를 보내준 한국 사람들이 너무 고맙다는 인사로 말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피스라디오 캠페인을 반긴다고 하면서 이 라디오를 통해 버마 사람들이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이렇게 정보를 얻은 사람의 입을 통해 이웃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강연자는 2007년 9월 민주화시위 이후 메솟으로 탈출해 정착한 아웅-웨이라는 분으로 유명한 시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1988년 시위에도 참여했고, 2007년 시위에도 참여했는데, 1988년 시위 때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라디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 1,000명의 시위대가 모였으나 이 사실이 라디오를 통해 알려지자 시위군중은 순식간에 10,000명으로 불었다고 합니다. 2007년 시위 때는 인터넷과 TV가 있었지만 모두 쇼 프로그램만 보여주고 있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버마를 탈출할 때 오직 사전 1권과 라디오만 들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라디오 배포에 참여할 각 단체에 라디오를 나누어 드렸습니다. 배포에 참여할 단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옆에 적힌 주소는 제가 확인 가능한 수준에서 기록한 그 단체의 공식 홈페이지 주소입니다. 워낙 부족이 많은 나라이다 보니 단체도 다양합니다.

1. Karen Youth  Organization (KYO): http://www.akyp.org.au/kyo.html
2. All Kachin Students and Youth Union(AKSYU): http://www.aksyu.com/
3. All Arakan Students' and Youths' Congress (AASYC)
4. Kayan New Generation Youth (KNGY)
5. Mon Youth Progressive Organization (MYPO): http://mypo31.blogspot.com/
6. Zomi Students and Youth Organization (ZSYO)
7. Palaung Youth Network Group(PYNG)
8. Tavoyan Youth Organization (TYO)
9. Democratic Party for a New Society  (DPNS): http://www.dpns.org/
10. All Burma Student's Democratic Front (ABSDF): http://absdf8888.org/
11.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Liberated Area, Youth)(NLD_LA, Youth)
12. BLSO(Burma Labour Solidarity Organization): http://www.burmasolidarity.org/
13. YCOWO(Yaung Chi Oo Workers Organization)
14. JACBA(Joint Action Committee for Burma Affairs)
15. HRDP(Human Resourse Development Program)

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HRDP소속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한 젊은 여성에게 라디오 상자를 건네줄 때였습니다. 저는 너무 가슴 아파 잠시 망연했습니다. 그곳에 자리한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음식을 충분히 먹지 못하고 자란 탓인지 체구도 작고 매우 마른 몸매였는데, 이 여성은 제가 한 손으로 가볍게 들 수 있는 라디오 상자를 두 손으로 받고도 제대로 들지 못해 제가 계속 함께 들고 있어야 했습니다.

이후 우리는 우리가 시민행동이 한국에서 제작하여 가지고 간 영상을 모면서 버마 음식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8시 30분이 되자 모두들 서둘러 돌아갔습니다. 이들의 설명에 의하면 이들이 밤늦게 돌아다니다가 태국 경찰에 붙잡히면 200Baht의 벌금을 내야 한답니다. 불법체류이기 때문에 무조건 체포해서 과거에는 버마로 추방했으나, 요즘은 국제사회가 정치적 망명에 준하는 보호를 요구하기 때문에 대신 벌금을 받고 풀어준답니다. 그러다 보니 태국 경찰에게 이들은 좋은 사냥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날 저녁 전달식 풍경은 시민행동의 피스라디오 공식 홈페이지에서 자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 www.peaceradio.kr

영치우노동자연합
2월 10일 오후

늦은 점심식사를 마친 후 오후 4시쯤 되어 영치우노동자연합(Yaung Chi Oo Worker's Association, YCOWA) 사무실을 방문했습니다. ‘영치우’라는 말은 버마말로 ‘새벽’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영치우노동자연합은 모쉐(Moe Swe)의 주도로 학생운동가들과 이주노동자들이 함께 1999년에 설립한 버마노동자단체로 10개 공장의 7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회원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메솟의 버마 이주노동자들의 인권보호, 권리교육, 보건증진 활동과 노동자들의 여러 가지 사회활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물론 국제적인 연대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었습니다.

태국 내의 버마 노동자 200만 명 중에 반 정도가 메솟과 인근지역에 있으며 메솟에만 10만 명 정도가 있으나, 1999년까지 메솟의 운동가들은 오직 독재정권과 싸우는 데만 열중했기 때문에 이들의 실정에는 무관심했다지요. 그러는 동안에 버마 노동자들은 고용주로부터 성폭행과 착취를 당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 살해되기 까지 했답니다. 또 공장이 폐쇄되면 오갈 데 없는 이주노동자들이 노숙을 하다가 성폭행을 당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공식통계로도 2002년 한 해 동안 메솟이 속한 탁지방에서 30명의 버마 노동자들이 살해되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YCOWA의 요청으로 그 단체의 주요 활동가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래서 YCOWA는 먼저 피난시설을 만들고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윤락여성으로 팔려간 이주노동자들을 구조하여 교육시킨 뒤 취업을 하도록 하거나 임신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여성 노동자, 그리고 노동착취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을 보호하면서 교육하고 이들을 위한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또 2002년 9월부터는 의사 1명과 간호사 2명으로 조직된 무료병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노동현실은 매우 암담합니다. 태국의 법이 정한 최저임금은 1일 147바트이지만 메솟지역의 버마 이주노동자들은 1일 60바트 정도 밖에 받지 못합니다. 일부 악덕업주들은 그나마도 체불하고 있다가 노동자들이 항의하면 적당한 시점에 불법체류 노동자로 신고하여 버마로 보내버린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다른 업체에도 취업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답니다.

그래서 YCOWA는 노동자 권리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급한 상황에 대해서는 태국의 변호사를 고용하여 법률구조활동을 벌이는데, 지난 6년 동안 1,716건의 소송에서 승리하여 총 1,054만 바트를 배상받았다고 합니다. 또 보호 중인 노동자들이 블랙리스트 때문에 취업이 곤란할 경우 재교육을 통해 다른 업종으로 이직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활동에는 태국법률가회의(The Lawyer Council of Thailand)나 태국의 NGO인 MAP재단과 같은 단체들과의 국제연대가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살펴보면, 2003년 5월 편직물공장에 다니던 한 소녀가 태국 국경수비대경찰관에게 성폭행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음에 국경을 소개할 때 자세한 배경을 쓰겠습니다만 이런 일은 종종 있다고 합니다. 이 소녀는 YCOWA의 도움을 얻어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이 경찰관은 공개적으로 사실을 시인하고 50,000바트를 배상해 주었습니다.

40대 초반인 YCOWA의 대표인 모쉐(Moe Swe)는 랭군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전버마학생민주전선(ABSDF)소속이었다가 영치우노동자연합을 설립한 후 2000년에 ABSDF를 탈퇴했습니다. 그는 88운동 이후 89년 국경지대로 이동하여 카렌족과 함께 정글에서 생활하다가 96년부터 메솟 근처에서 동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거점을 구축한 것이 계기가 되어 처음 이주노동자들을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을 찾은 노동자들이 외친 ‘우리도 버마사람들이다’라는 말에 자극 받아 이런 활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의 이런 활동을 태국의 공장주들이 가만 둘리 없겠지요. 공공연하게 ‘모쉐는 죽어야만 한다’고 말하던 그들은 결국 2003년 12월 그의 목에 10만 바트(당시 환율로 2,500달러)의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그후 수차례 습격을 받게 됩니다. 특히 그를 도와 함께 활동하던 미국 워싱턴 소재 노동인권단체의 덴마크인 벤트 게르트는 복부에 칼을 맞았고, 다른 활동가들도 공개적으로 테러를 당했습니다. 그는 결국 치앙마이로 피신하여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이런 사실 때문에 국제사회가 공장주들을 비난하게 되었고, 국제기구들의 압박을 받은 태국정부가 태국인권위원회를 통해 태국경찰의 안전보장을 약속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홍콩의 어느 노조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이 모쉐의 도피생활을 직접 와서 보고 지학순 정의평화상 시상위원회에 추천하여 YCOWA는 2004년 12월 제8회 지학순정의평화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YCOWA는 2004년 지학순정의평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이상은 한국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크게 기여했던 고 지학순주교를 기념하여 제정한 상으로 자기 나라에서 평화와 인권에 크게 기여한 공로가 있는 사람이나 단체에 주는 상입니다.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피스라디오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최대 걱정꺼리가 라디오를 버마로 보내는 수단을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는데, 우리는 이곳에서 아주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의 노동자 10만여 명 중에 약 반은 매년 4월의 명절(이들의 달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때)에 고향을 방문하기 위해 국경을 넘는다고 합니다. 이들 편에 보내면 아주 자연스럽게 버마 내부로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끝으로 우리는 모쉐에게 그의 꿈을 물었습니다. 그는 ‘버마로 돌아가 자유 버마에서 모든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노조를 건설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연락처

전화: (66 89) 5659 899, (66 55) 542 622

이메일: zawwinlwin88@yahoo.com 혹은 yaungchioo_info@yahoo.com

주소: YCOWA, PO. Box 37, Mae Sot, Tak 63110, Thailand

모조신문사 (MoeJoe News Press)
2월 10일 오후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오전 일정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태국식 중국식당이었지만 콩 예가 우리 입맛에 맞는 메뉴들을 골라주어 맛있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식당 마당엔 이름 모를 열대 식물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식당 내부(윗쪽)와 마당에 핀 이름 모를 꽃(아래쪽). 진분홍색 꽃잎 속에 하얀색 작은 꽃이 솟아나 진분홍 꽃잎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식사 후 3시경이 되어 방문한 곳은 1999년 1월에 설립된 모조신문사였습니다. 현재 버마사람들이 발행하는 신문은 4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가장 큰 신문은 이라와디(Irrawaddy)로 태국의 치앙마이에 근거지를 두고 있습니다. 치앙마이에는 이 외에도 미지마(Mizzima)라는 신문이 있습니다. 미지마는 인도에서도 발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방콕에는 새시대(The New Era)라는 신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오늘 우리가 방문한 메솟의 모조신문사입니다.

모조는 버마 말로 번개라는 뜻인데, 모조신문사가 하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월간 신문을 발행하여 국경지대 노동자들과 버마 내부에 보급합니다.

2) 웹페이지를 통해 뉴스를 전합니다.(http://www.binamojo.org) 이 사이트는 버마어로 된 뉴스만 제공합니다.

3) 비디오도 모아서 매월 영상뉴스를 발행하는데, 이들은 주로 메솟 상황을 촬영하고 버마 내부에서 촬영한 영상물을 받아 발행하기도 합니다.

4) 기록문서 도서관을 운영합니다.

우리가 방문했을 당시에 기록문서는 총 2,000권 정도라고 했습니다. 주요 보관 자료들은 버마 상황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각종 책들로 책을 출판하기 위해 마마지출판사(Momagyi Press)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마마지라는 버마 말은 원래 나이 많은 언니라는 뜻으로 부모가 없으면 부모를 대신하는 맏이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 신문은 1999~2002년 까지는 해외자금이 지원되어 매월 5,000부를 발행하였으나 2002년 이후 재정지원이 줄어 해외에 거주하는 친구들의 지원에 의존하게 되면서 발행부수를 1,000부로 줄였다고 합니다. 이중 200부 정도를 버마 내부로 보내고 있습니다. 메솟에서는 직접 인편으로 배포하지만 버마 내부로 보내는 것은 비밀장소에 감추어 두면 내부 사람이 가져다가 나누어 보는 방법으로 배포중이라고 합니다.

버마 내부의 언론 상황에 대해 묻자 우리나라의 5공 시절이 생각나는 말들이 쏟아집니다. 버마 내의 모든 언론사는 군사정부인 SPDC의 선전물만을 출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를 통제하는 방법은 직접통제 방식으로 검열관이 언론사에 상주하고 있으면서 검열하여 승인한 내용만 출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부 사람들은 자신들이 직접 보도할 수 없는 뉴스를 작성하여 외부로 보내준답니다. 내부에서 이를 출판하였다가는 중형(7년형)에 처해진다니 정말 살벌한 상황이지요. 게다가 외부에서 언론 활동을 하다가 귀국하여 붙잡히면 무려 20년형에 처해진다고 합니다.

 


(윗쪽사진) 우리 일행이 모조신문사 사람들과 대화중입니다. (아래쪽사진) 가는 곳 어디서나 아웅산 수치여사의 사진을 볼 수 있고, 여전히 감옥에 있는 학생운동지도자 민코나잉의 사진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위 사진 속의 포스터에는 노벨상 수상자인 수치여사의 가택연금해제를 위해 당장 행동에 나서자는 구호가 적혀 있습니다.

 


(윗쪽사진) 모조신문의 1면 모습 (오른쪽사진) 발렌타인데이 기사의 각 문장 앞 글자로 탕쉐를 비난했던 기사를 소개하고 있는 모조신문

 

우리가 방문했을 때 최근에 발행한 신문을 보여주었는데 버마어로 되어 있어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곳 기자의 설명으로 한 기사를 보았습니다(사진참조). 버마 내부의 한 신문이 발렌타인데이에 대한 기사를 실었는데 그 기사의 각 문장 첫 글자만 모아서 읽으면 독재자 탕쉐를 비난하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사전 검열에는 통과되었으나 그 기사가 신문에 실리고 난 후에 비로소 눈치를 챈 군사정부에 의해 글쓴이는 구속되었습니다. 사진은 모조신문이 이를 옮겨 실은 것입니다.

과거 역사 속에서 민주화운동이나 인권운동의 뒤에는 언제나 언론이 있었습니다. 언론이 혹은 기자들이 자신을 희생하며 진실을 전할 때 비로소 국민이 바로 알고 의로운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이들의 피나는 노력이 하루 빨리 결실을 맺게 되기를 빌어 봅니다.

버마 민주의 소리 방송국 (Democratic Voice of Burma, DVB)
2월 10일 낮

버마정치범수감자지원연합 방문 일정이 예정된 시간을 훨씬 넘겨 끝났기 때문에 12시 경이 되어 비로소 두 번째 방문지인 버마 민주의 소리(DVB, Democratic Voice of Burma) 방송국을 찾았습니다. 이곳은 방송 기능이 없었기 때문에 녹음용 PC와 헤드셋 등을 갖춘 간이녹음실로 우리나라의 일반 가정 수준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DVB는 노르웨이와 일본의 지원금으로 세워졌으며, 노르웨이에 본부를 두고 인도, 태국 치앙마이, 그리고 태국 메솟에 거점을 두고 있는 비영리 방송매체입니다. 우리가 방문한 메솟DVB는 전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All Burma Students Democratic Front) 소속인 한 부부가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라디오실과 비디오실을 갖추고 리포터들을 통해 뉴스를 제작하고 있었습니다. 메솟의 리포터들은 주로 메솟지역의 버마 어린이들의 처지, 특별한 이슈가 생겼을 때 그 주제에 관한 인터뷰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메솟이 버마를 탈출하는 사람들이나 태국 체류 노동자들이 태국으로 들어오는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양한 사람들이 일정한 요일마다 방송국에 들려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녹음해 두면 방송용으로 제작한다고 합니다.

제작된 방송은 치앙마이를 거쳐 노르웨이 본부로 전달되며 실제 방송 송출은 노르웨이 본부에서 이루어집니다. 메솟DVB는 주로 메솟지역의 버마인들에 관한 소식을 다루지만 치앙마이DVB는 메솟과 달리 버마 내부 소식을 전합니다. 버마 내부 소식은 리포터들이 전화로 버마 내부의 정보 제공자들과 통화하여 얻는답니다.

방송은 아침저녁 각 1시간씩인데, 스포츠뉴스 10분, 보건뉴스 7분, 정치뉴스 40분, 메솟지역에 새로 도착한 버마 양심수들 인터뷰 3분 정도로 구성됩니다. 이들은 버마인의 약 25% 정도가 DVB를 포함한 여러 민주적 방송을 청취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버마 내부로 방송을 송출하는 버마어 라디오 방송은 모두 같은 입장에서 방송하는 것은 아니지만 몇 개가 더 있습니다. Radio Free Asia, 영국의 BBC, 미국의 대외 선전방송인 Voice of America(VOA) 등이 그것입니다. 특히 중국은 버마 군부를 지지해주고 대신 자원수탈을 위해 국경지대에서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을 자행하는데 비해 미국은 버마의 민주화에 가장 적극적인 지원을 하고 있어, 버마의 민주화 운동가들은 대부분 VOA에 대해 높은 신뢰를 보내며 심지어는 친미적 성향을 보여 70년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과 비슷한 양상을 보입니다.

이들에게 들은 이야기들 중 일부는 현실적으로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조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버마 사람들이 가난하지만 그래도 라디오 정도는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건전지가 없어서 듣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특히 최근 물가가 더욱 가파르게 상승하여 건전지 가격이 너무 많이 올라 라디오를 들을 엄두도 못 낸다고 합니다. 전기도 밤 8시에서 10시까지만 공급될 정도라고 하니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또 라디오를 구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감시자들이 많아서 정치뉴스를 들으면 처벌 받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집 내부에서 비밀리에 청취할 뿐이랍니다. 그렇지만 방송이 있다는 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버마 내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방송이 있다는 것을 알고 듣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궁금한 것을 물었습니다. ‘도대체 그 많은 인구를 어떤 식으로 감시할 수 있는가?’ 그런데 그 대답은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버마인구의 반 가까이가 무직자들인데 이들 중 일부에게 하루 3달러를 주고 이웃 감시를 시킨답니다. 만약 이웃사람이 민주방송을 청취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여 고발하면 건당 1달러를 보너스로 지급받는다는 것이지요. 버마에서는 노동자들이 일당을 받아 차비와 세금을 빼면 실소득이 1달러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런 유혹을 이겨내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직자의 10% 정도는 감시원이란 말도 있습니다. 사실 버마는 엄청난 천연가스를 수출하여 돈을 벌어들이고 있고, 그 돈을 모두 군부가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할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라디오실에서 운영자가 작업 중입니다. 우리나라의 가정에서 컴퓨터를 사용하는 수준의 설비입니다.

DVB는 다음과 같은 사명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Mission Statement 우리의 사명

- 버마 국민들에게 정확하고 편견 없는 뉴스를 제공한다.
- 버마의 다양한 부족, 종교간 이해와 협력을 증진한다.
- 독립적인 여론을 지지하여 사회적, 정치적 토론을 가능하게 한다.
- 버마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와 인권의 이상을 전파한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이들의 비디오방송을 인터넷을 통해 시청할 수 있습니다.

버마어방송: http://www.youtube.com/dvbTelevision ;유튜브의 UCC 방식입니다.
http://www.dvb.no/
;이곳이 노르웨이 본부의 웹사이트입니다.
영어방송:
http://english.dvb.no/

버마 정치범수감자지원연합
2월 9일 밤 그리고 2월 10일 오전

9일 밤 9시 40분경이 되어서 비로소 우리 일행은 긴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DPNS사무실 2층의 게스트하우스로 올라갔습니다. 비록 푸른소와 나는 남자이기 때문에 마루에서 잠을 청했지만 매우 청결해서 방콕의 호텔보다 오히려 심리적 안정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렌지와 초희양은 방에서 묵을 수 있었습니다. 손님맞이를 위해 특별히 청소를 했겠지만, 사무실 한쪽 벽에 붙은 다음 표어는 이들의 정신상태를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영어로 쓰인 그 말은 “이곳의 청결상태는 당신의 정신상태를 보여준다.”였습니다. 그러나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자지 못하는 나는 그 긴 하루를 마치고도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게다가 아직 이곳 음식에 적응을 못 한 듯 여러 차례 화장실을 들락거리기까지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현간 앞 간이 소파에 앉아 아침 햇살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린이 나와서 몇 가지 자료를 읽어보라며 던져줍니다. 반갑게 읽으려고 자료를 집어 들었으나 순간 멍해집니다. 피로가 쌓인 탓인지 노안이 갑자기 심해져 글을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몇 년 전부터 책을 읽을 때는 평소에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야 했지만, 이날 아침엔 안경을 벗어도 글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깜짝 놀라며 순간 지나온 인생을 후회하게 됩니다. 좀 더 젊어서 건강한 몸을 가졌을 때 이런 일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오늘의 첫 방문지는 AAPP(Assistance Association for Political Prisoners, 버마정치범수감자지원연합)입니다. AAPP는 글자 그대로 버마 내의 감옥에 수감된 민주화운동가들(국제사회는 이들을 정치범이라는 포괄적 용어로 부릅니다)을 돕는 단체입니다. 이들은 1996년 12월의 학생운동 이후 태국-버마 국경지대에 모인 활동가들 중 수감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모여 만든 조직에 외국에 망명 중이던 다른 수감자들의 합류로 확대되어 2000년에 정식 발족한 단체입니다.

이곳에서 우리 일행을 맞아 안내와 설명을 해준 이는 한눈에도 오랜 수감 생활로 건강이 엉망이 되어 버린 것을 알아 볼 수 있는, 청년시기가 넘어가고 있는 이였습니다. 그는 88년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후 1991년 체포되어 변호인조차 없는 약식재판으로 12년 형을 선고받았다고 했습니다. 수감 중 7년으로 감형되었으나 1999년 다시 7년 형이 추가되어 2005년 출소 하였습니다. 7년형이 추가된 것은 유엔고등판무관이 버마를 방문하였을 때 감옥상황을 고발하는 문서가 전달되었는데 여기에 서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일 덕분에 버마의 감옥 안에서 비록 검열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독서와 편지쓰기가 허용되었다고 합니다. 그 전에는 감방을 벗어 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하루 한번 20분 샤워시간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가장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인 인세인(INSEIN) 감옥에도 7년 동안 있었답니다.

 

위사진: 안내자와 함께 사망자 사진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
아래사진: 윗변의 두 모서리에 있는 구멍에는 두 발을, 아래 모서리에 있는 구멍에는 두 팔을 끼운 채 24시간을 서 있게 하는 고문도구

AAPP는 발족하면서 바로 감옥에 수감된 정치범들을 사진이나 이력과 함께 목록으로 작성했습니다. 이들이 주로 하는 일은 1. 정치범들에 대한 정보나 감옥내부의 실태에 대한 정보 수집, 2. 정치범들을 돕는 일 등을 합니다. 그 결과 1400명 이상의 수감 정치범들, 감옥에서 숨진 80명 이상의 정치범들, 감옥에 대한 정보들을 축적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접촉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감옥 안에서 응급상황에 있는 정치범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 석방된 정치범들에게 의료지원을 하고 다양한 언론 매체에 버마의 정치범관련 실정을 알리는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마련해 놓은 전시장을 둘러보았습니다. 전시장에는 그 동안 여러 가지 형태로 희생된 사람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모형 감옥과 감옥에서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징벌도구, 징벌 모습을 그린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런 활동을 통해 수감된 정치범들의 인권과 정의에 대한 정보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AAPP가 하는 일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AAPP가 하는 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1. 수감된 정치범의 가족들이 사랑하는 가족을 방문하도록 돕는 일

2. 수감자들에게 음식이나 의약품을 공급하는 일

3. 감옥 안의 실태 감시

4. 체포된 사람들을 공개하고 수감된 운동가들이나 예술인들의 상황을 널리 알림

5. 국제기구들과 연대하여 수감자들의 변론활동. 국제앰네스티, 국제적십자사, Human Rights Watch 등에 정보제공

6. 정치범으로 수감생활을 하면서 고문과 격리로 인해 생긴 정신적, 신체적 상처 치유

1. AAPP의 일을 돕기 위한 기부

2. 자신의 나라에서 버마군부와 거래하는 기업들에 버마와 관계를 끊도록 압력행사하기

3. 버마 관광이나 버마 상품 보이콧 하기

4.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버마의 고문희생자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국제앰네스티나 AAPP를 돕도록 요청하기

5. 모든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하기

6. 임의 체포와 모든 형태의 고문을 비난하기

더 자세한 정보나 이들과의 접촉을 원하시는 분은 다음 정보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주소: AAPP, P.O. Box 93, Mae Sot, Tak Province 63110 THAILAND
e-mail: aappb@cscoms.com
website: http://www.aappb.or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