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사진은 슬로우뉴스의 한 조각이다.(슬로우뉴스는 이메일로 뉴스를 받아보는데, 주요 기사를 잘 요약하여 전달해준다. 바쁜 사람들이나 온라인으로 뉴스를 보는 사람들이 겪는 혼란을 줄여주는 좋은 매체이다.) 2001년에는 지멘스 미국에서 당시 내 대학 연봉의 세배를, 그리고 2016년에는 중국의 대학에서 내 연봉의 다섯배를 제안 받은 적이 있다. 2001년에는 아직 한국에서 내가 기여할 일이 많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2016년에는 퇴직 후에 가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퇴직의 기쁨을 포기할 수 없어 23년에 가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왜 중국으로 갈까? 이 질문에 대해 윤석열의 연구비 삭감만으로 퉁치면 본질에서 벗어나도 너무 벗어난다. 시작은 IMF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IMF가 터지자 정부가 세출을 줄이기 위해 국가연구소들을 통폐합하고 연구원들을 해고했다. 한국에서 법대 선호현상은 매우 오래된 일이지만, 의대 선호현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해고된 연구원들이 대학에 시간 강사로 유입되면서 자신의 자녀는 해고가 없는 의대로 보내기 위해 힘쓰기 시작했다. 기업의 연구원들도 마찬가지였다. 90년대까지만 해도 기업과 대학 사이에 교류가 활발했는데, 주로 연구원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실용연구를 대학에 와서 강의해주는 방식이었다. 이들 역시 기업에서 해고했다. 이유는 대학에 가서 자리잡으면 되지? 였다. 그렇게 70-80년대에 공학, 과학으로 몰려 갔던 인재들은 자녀들만은 의대로 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당연히 의사가 되는 목적도 해고되지 않는 직업이라는 것이었다.

이걸 또 한쪽에서는 의사가 돈을 잘 벌어서 그렇다고 주장한다. 모든 부를 소수의 자본가에게 몰아주자는 말밖에 안된다. 마치 정규직노동자의 소득이 많다고 공격하면서 정작 비정규직을 늘리는 자들의 말과 같다. 연구자들을 천대해서 빚어진 일을 해결하기 위해 의사를 천대하자는게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이공계기피현상은 연구비를 늘려서 해결해야 맞다. 이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연구자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대학이 이공계 연구자를 담고 있는 댐이 되어 나라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윤석열이 카르텔이라며 공격하던 연구비는 사실 많아서 문제가 아니라 적어서 문제였다. 우리 사회가 이공계 기피현상으로 몰락해가는 것을 막을 유일한 수단이 국가 연구비였는데, 그걸 더 줄이겠다고 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을 만약 내가 들은 것만 공개해도세계적인 망신이 될 것이다. 이미 하바드대학과 칭화대학의 1년 예산이 서울대의 열배나 되는데 더 줄이겠다면 어쩌자는 건가?

관점이 어떻든 한국의 의료시스템이 망가졌다는 것을 부인하는 의사는 없다. 그리고 지금 개업의로 돈을 잘 벌고 있어서 그냥 이대로 은퇴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소위 내 또래 부자 의사들도 자신이 늙어서도 현재와 같은 신속하고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지 걱정한다. 적어도 내가 알고 지내는 십여 명 의사들은 모두 그렇게 말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은 단순하다. 그렇다고 해결도 단순한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시스템과 자본주의시스템
이분도 지적했지만(아래 링크), 공공의료시스템의 부재가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영국과 캐나다는 의료를 공공시스템으로 만들었다. 의사는 국가가 고용한 공무원이다. 당연히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노동자로서 모든 권리를 누린다. 근무시간이나 근무조건 등에서 한국의사들은 그곳이 천국이라고 말한다. 정작 그 나라 의사들은 대우에 불만을 가지고 같은 영어권인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한국이나, 인도, 파키스탄, 아프리카의 의사들이 메우고 있다.  사회주의의 모순이다.

미국은 의료에도 자본주의가 적용된다. 정상분만일 경우 출산비용은 2만 달러(한화 약 2800만 원) 정도이다. 그래서 빈곤층의 의료비용을 국가가 세금으로 메꾸고 있어 국민 1인당 의료비 지출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병원에 못 가보고 죽는 사람이 매우 많다. 변호사 역시 많아서 의료분쟁이 붙으면 엄청난 손해배상 소송에 시달린다. 그래서 모든 의료행위에 돈이 붙는다. 예를 들어 환자를 옆 병원으로 이송하고자 할 때 환자가 걸어가도 충분할 때조차 앰뷸런스를 배치한다. 물론 우리 돈으로 100만원 이상의 비용을 환자가 부담해야 한다. 만약 그냥 보냈다가 환자 보호에 소홀했다는 소송에 휘말리면 한마디로 주머니 털리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이다.

한국은 어떤가? 오바마 대통령이 칭찬했던, 국민건강보험은 전형적인 사회주의 시스템이다. 이시스템은 모든 국민이 소득(자산)에 비례하여 보험료를 납부하고 만들어진 보험료 풀에서 모든 국민에게 동일한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글쓴이가 착각한 부분인데, 그래서 한국 역시 제도상으로 모든 의료는 공공의료이다. 공공병원이어야만 공공의료인 것이 아니다.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용의 구조가 공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이론상) 예산을 전혀 투입하지 않고도 공공의료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심지어 저소득층에게는 특별지원이 있어서 거의 돈을 내지 않고 치료받고 있다. 그래서 공공의대건립을 주장하는 자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정치적인 목적으로 국민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공공병원이 부족하다는 주장도 시스템 차이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다.

한국의 좋은 제도가 완전히 망가지고 있다
의료비용을 사회주의시스템으로 해결하는 좋은 제도가 또 다른 방식으로 낭비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는 감기 증상으로 병원을 간다. 게다가 주말이나 저녁에는 응급실로 달려간다. 사회주의 시스템을 운영하는 캐나다에서  응급실을 이용하려면 자기 부담금이 크게 늘어난다. 우리는 별로 높아지지 않는다. 이게 응급실 사태의 또 다른 원인이다. 응급실 의료진의 혹사는 당연히 진짜 응급환자의 치료기회를 박탈할 뿐 아니라 의료사고 증가의 원인이 된다. 게다가 캐나다에서, 예를 들어 간초음파를 보려면 6개월이 걸린다. 실제로 필자는 밴쿠버에서 조카 부부가 모두 의사인데도 간초음파를 보려면 6개월이 걸린다고 해 포기하고 한국에 돌아와 진료받은 적이 있다. 만약 일찍 서비스를 받으려면 응급실로 가야 하고 비용을 자기가 부담해야 한다.

한국인이 얼마나 병원을 무작정 이용하는지는 2021년의 다음 통계가 보여준다. 고령화사회를 우리보다 훨씬 일찍 겪은 일본의 경우에도 국민 1인당 진료 횟수가 11회에 불과한데, 한국은 16회에 달한다. 세계적으로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이 통계만으로도 의사 증원의 이유로 고령화사회를 제시한 정부나 시민단체, 언론의 주장은 거짓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 공공의료시스템을 운영하는 나라는 의료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국가가 책임진다. 병원을 세우는 것도, 의사를 교육시키는 것도, 의사에게 월급을 주는 것도, 의료분쟁을 해결하는 것도 국가 책임이다. 한국은 사회주의시스템을 운영하면서도 모든 투자와 책임은 민간에, 특히 의사에게 떠넘기고 있다. 단 하나도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 없다. 아니 국민건강보험공단이나 관련조직을 통해 국민이 낸 보험료를 비효율적으로 사용하기까지 한다. 여기서 비효율이란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는 일에 비효율적이라는 뜻이다. 이번 의료대란으로 많이 듣게 된 필수의료 경시와 같은 것 말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실제 발생한 의료비용의 85%에도 미치지 못하는 보험수가이다. 병원이 환자를 치료하면 할수록 적자가 커진다. 당연히 적자를 메우려면 비급여항목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 감기환자가 오면 의학적으로 전혀 쓸모없는 링거액을 맞게 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비급여는 일반적으로 의학적으로 필요 없는 과잉진료에 해당한다. 이걸 조장하는 것이 대형병원을 운영하는 보험사를 가진 재벌들이 만든 실손보험이다. 그래서 개원의 소득이 높다. 정부는 OECD에 개원의 소득을 보고해서 의사 소득이 세계적으로 높다고 말한다. 그러면 다시 정부는 과잉진료를 엄벌하겠다고 나선다.

의료를 돈벌이로 만들려는 집단의 폭거
한국의 공공의료시스템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민간보험회사들이다. 자본으로 의료를 장악하는데 최대 장애요인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보험의 의료비 보장수가가 낮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비보험 의료비용을 보상해 주는, 실손보험이라는 이름의 불평등한 의료시스템을 도입했다. 이게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열심히 영업해서 많은 가입자를 확보하면, 비용 걱정이 없는 실손 가입자들이 더 좋은 병원으로 몰려가 점점 소위 탑 5 병원이라는 것이 등장하고 그들만 돈을 벌어들였다. 지방대학병원들은 적자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 양대 보험회사를 거느린 두 재벌그룹이 국내 최대 병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전공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지금은 법으로 주당 노동시간을 80시간으로 줄였지만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법정노동시간이 100시간을 훌쩍 넘었다. 당연히 임금은 최저임금 수준이다. 그동안 우리를 치료하던 전공의가 편의점 알바생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 노동착취를 통해 우리네 병원들이 적자를 면하고 있었다. 얼마전 서울의대 교수 셋이 성명을 내 언론 등의 찬사를 받았다. 악랄한 인간들이다. 교수가 되면 전공의 도움 없이 환자를 볼 수가 없다. 시간이 부족해서이다. 하루 12시간을 일하지 않으면 대학병원이 돌아갈 수가 없다. 의사를 제외한 병원인력은 철저히 노동법 기준을 적용받지만 의사들은 예외이다. 이번 의대정원사태는 실손보험으로 환자를 싹쓸이하던 서울의 대형병원들이 더 많은 환자를 빨아들이려고 수도권에 6,600 병상을 늘리는 과정에서 전공의가 아니면 돈벌이가 불가능하니 의대정원을 늘려야만 했다는 주장이 있다.

2025년 의대입시 중단 없이 의료문제 해결 어렵다
2025년 의대입시를 중단해야 하는 이유는 산수 문제이다. 현재 의대교육시스템은 약 3000명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를 갑자기 1500명 증원했다. 게다가 재학생이 모두 휴학해 버렸다. 2025년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사람들이 자꾸 4500명을 교육시킨다고 오해하는데 사실은 3000+ 3000+ 1500=7500명 (100이하는 무시)을 교육시켜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의학교육은 국어수업이 아니다. 이 정도 상황이라면 교육은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하다. 교육은 여건이 안되면 무조건 부실해지고 의대교육이 부실해지면 엉터리 의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노조의 파업은 찬양하면서 왜 이들의 현장이탈을 욕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정치권의 책임
호시탐탐 의료민영화를 추진하던 정당에서 갑자기 필수의료 강화나 지방에 의사를 공급하겠다며 추진한 증원이 사실은 영리 병원을 위한 포석인 셈이다. 물론 명분은 반대쪽 정당이 주장하던 공공의대 설립 논리를 차용한다. 지금도 전남에서는 의대신설을 추진하고 있다. 그래서 지지정당과 상관없이 많은 국민이 지지한다. 그것이 바로 국민 자신들에게 족쇄가 된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이런 모든 사태의 배후에는 정치권이 있다. 어느 당에서는 의료민영화로 의료를 재벌의 돈벌이로 만들어 주기 위해 공공의료를 파괴하려 하고, 또 다른 정당에서는 의사를 괴롭히는 정책으로 국민의 인기를 얻는다. 그들이 지금 한국의 의료시스템을 파괴하고 있고, 나의 노후 건강에 칼을 들이대는 주범들이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health/1167682.html

한국에서 이런 근본적인 이슈들을 토론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사회는 학살과 집단사망사고가 이어지는 곳이라 무관심한지, 아니면 내가 무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큰 어려움 없이 세 아이를 낳고 길렀기 때문에 남의 일처럼 느낀 탓도 있을 것이고요.

그러나 좀 더 넓게 보면, 생명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슈여서 무심하게 스쳐지나갈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침 폴리티코에 실린 이 기사를 차분히 읽었습니다.

미국의 기독교입양단체가 운영하는 프로그램인 “Snowflake babies”  입니다. 체외수정(이 기사를 이해하려고 찾아보니 난자와 정자를 따로 체취하여 수정시킨 후 초기 세포분열이 진행된 며칠 뒤 여성의 자궁에 이식하는 것이랍니다)을 하게 되면 여러 개의 수정된 배아가 만들어지는데, 실제 자궁에 이식되는 것은 한 개 뿐이므로 나머지 배아는 사용되지 않아 냉동보관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관된 냉동배아가 미국에만도 수백만개가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들은 결국 버려질 운명입니다. 보수적인 생명윤리관으로는 살인이지요.

이 프로그램은 이런 냉동배아를 마치 어린이입양처럼 입양하는 캠페인입니다. 자신의 자궁에 이식하여 자신의 아이로 키우는 것이지요. 비록 유전자는 상관없지만, 한국식으로 표현한다면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 되는 것이지요.

생명에 대해 보수기독교와 페미니스트 그룹 사이에 논쟁이 오랜 지속되는 미국사회에 새로운 절충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배아 단계부터 생명성을 인정하는 보수기독교 입장에서는 생명의 유지이고, 진보진영에게는 자유로운 형태의 임신을 보장하는 방법입니다. 물론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많습니다. 차별금지법를 동성애권장법이라고 우기는 한국 교회의 부모가 미국기독교이니… 일단 미국침례교는 이 단체를 반대하고 있다 합니다.

반대라도 좋으니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결정은 듣는 우리가 하면 되니까요.

https://www.politico.com/news/magazine/2024/10/06/adopting-discarded-embryos-ivf-crisis-00169174?fbclid=IwZXh0bgNhZW0CMTEAAR0EDrIX-0iEMOakahL9Gx4yTeDJ1NmFWGuDYGbCSUsf8C62ygh4M2gMnqI_aem_mgNKXynvmNfWD8ZX3LS8tg

How ‘Snowflake Babies’ Could Change IVF Politics

“Snowflake” babies helped people on the left become parents and helped people on the right make peace with thorny ethical issues with IVF.

www.politico.com

신문을 읽다가 마음이 아픈 기사를 읽었습니다. 요즘, 단어에 대해 그 의미를 살펴 정정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아마 그런 일의 하나로 유모차를 유아차로 변경하고 있나봅니다.

1. 단어의 문자적 의미로나 또 역사적인 경험으로나 유모차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에 와서 단어를 그런 문자적의미로 사용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유모차라고 해서 크게 문제를 일으키거나 오해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꼭 바꿔야 하느냐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그런 단어가 한두개가 아닐 것입니다. 인정합니다.

2. 그러나 기사의 사진 속에서 발견한 글은 충격적입니다. 유아차는 중국에서 쓰는 말이라며 비아냥 대는 글 말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 단어 중에 (구체적으로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순 우리말은 30%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중국은 유아차라고 제대로 된 단어를 쓰는데 중국이 싫어서 우리는 유모차를 고집해야 할까요?

3. 저 댓글을 단 사람이 살아가면서 중국산을 다 빼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장담하는데 한달 안에 굶어죽거나 겨울이라면 얼어 죽을겁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자기들의 빈부격차가 폭동으로 이어지는게 두려워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값싼 노동력을 갖거나 환경오염에 무지한 나라에서 싸게 조달한 물건을 자국민에게 공급해왔습니다. 어느 한 나라의 영향을 줄일 수는 있어도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는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미국이 앞으로는 중국봉쇄를 외치면서 뒤로는 살살 달래고 있는 이유입니다.

4. 줄이는 방법은 언제나 폭력적이었습니다. 1980년대 초 프라자합의를 통해 일본을 30년 이상 불황에 빠지게 했고, 1990년대 말에는 한국을 외환위기로 망가트렸지요. 2010년대 중반부터 중국을 봉쇄하려는 시도를 노골화했습니다. 다만 이를 위해 인도를 대안으로 선택했지만, 인도가 내부 사정으로 중국을 이어받지 못하자 베트남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인도와 베트남은 모두 중국과 인접국으로 중국과 부분적인 국경분쟁이 있는 나라들입니다. 아무튼 인도에 진출했던 미국의 자동차기업들은 모두 인도를 떠났습니다.

5. 우리가 경제적이득을 위해 미국의 이런 전략적 선택에 편승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 경제의 또 다른 축인 중국에 대해 적대적이라면, 한국의 미래는 없습니다.

미국의 역사에서 남북전쟁이 끝난 후, 1800년대 후반은 산업혁명이 절정에 이르러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낳았다. 카네기 같은 입지전적인 부자가 탄생한 시절이기도 하다. 이들이 기업 합병이나 담합을 통해 사회적으로 끼친 죄악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기업합병과정에 전투가 벌어지는가 하면, 노조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기도 하지만, 사법처리 대상은 오직 노동자들뿐이기도 했다. 인종 카스트가 부활하고, 링컨이 주장했던 노예 해방은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휴가나 쉬는 시간이 없이 이루어지는 장시간 노동에 임금은 낮았고, 노동환경은 끔찍했다.

1890년에만 2,451명의 철도 노동자가 근무중에 목숨을 잃었고 다친 사람은 22,000명이 넘었다고 한다.(<세상에서 가장 짧은 미국사>, 폴 S.보이어 지음, 김종원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1) 그래도 이 시기에 미국이 잘한 일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1890년에 바로 셔먼법이라고 하는 독점금지법을 제정한 일이었다. 그러나 자본가의 친구들이 되어 버린 보수 사법부는 이 법을 1894이 되어서야 비로소 적용하였는데, 그 첫 사례가 가소롭게도 미국철도노조에 대한 것이었다. 노조를 독점집단이라고 본 것이다.

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도 미국의 독점금지법처럼 그 취지가 기업의 독과점에 따른 폐해를 막고 기업들의 담합행위를 막기 위한 조직이다. 그런 공정거래위원회가 건설노조에 대해 공정거래법을 적용하여 벌금을 부과하였다고 한다. 그동안 특수고용노동자를 사업자로 보는 한국과 달리 이미 국제사회에서는 이들을 노동자로 보는 추세이다. 심지어 가장 자본친화적인 미국조차도 자영업자와 노동자를 구분하는 판단 지침을 가지고 있어 플랫폼 노동자나 특수고용직의 노동자성을 인정한다. 그래서 고용노동부도 노조설립을 인가해주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불법행위는 노조법을 바탕에 두고 형사법에 의해 처벌해야 한다. 경쟁법(공정거래를 보장하기 위한 법)을 노조에 적용하는 것은 130년 전의 미국의 불법시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정위 직원이 뇌물 수수를 했는데, 이를 경쟁법 위반으로 보고 공정위를 해산시키겠다는 심판과 다를 게 없다. 노조의 불법을 기업의 불법을 다루는 법으로 처벌하겠다는 것은 불법을 처벌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노조를 탄압하겠다는 공공연한 선언이다. (기사는 아래 링크 참조)

https://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1073581.html

노조를 ‘사업자단체’ 잣대로 제재…공정위, 도넘은 노동탄압

특수고용 노동조합에 공정위 최초 제재 사례1인 자영자에 ‘경쟁법 적용’ 않는 게 국제 기준

www.hani.co.kr

성경의 창세기에는 최초의 인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에덴이라는 곳에 하나님과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뱀의 꾀임에 빠져 선과 악을 구별할 능력을 주는 선악과를 먹어서 에덴에서 좆겨났다는 이야기. 여기까지는 상식처럼 알려진 신화이다. 모든 신화가 그렇듯이 이 기록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가치관이 탐구의 대상이어야 한다.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게 되자, 가인은 스스로 선과 악을 구별하여 질투심에 눈이 멀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죄를 짓는다. 그러나 판결은 하나님의 몫으로, 가인은 세상을 유리하는 자가 되게 하는 벌을 주고 그러나 도중에 만나는 자들이 가인을 추가로 체벌하지 못하도록 표를 주고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가인과 같은 자가 또 나타난다. 라멕이라는 자이다. 그는 가인처럼 살인죄를 짓는다. 그러나 처벌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 보호하는 판결(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라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도 스스로 한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것으로는 최초로 부인이 둘이었던 자로 아마 당시에 가장 힘이 있는 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힘이 있는 자여서 죄를 짓고서 죄를 정하는 것도 본인이고 그 죄를 처벌하거나 보호조치를 취하는 것도 본인이다. 요즘 김학의 사건을 처리하는 소위 사법고시 출신들의 하는 짓이 딱 그거다. 공소시효를 넘기도록 시간을 끌고, 누구나 확인 가능한 영상을 보고도 확정할 수 없다고 판결하더니 급기야는 해외출국금지조치가 불법이었다고 당시 수사담당자들을 수사에 착수한 그들 말이다. 큰 범죄가 작은 범죄를 단죄하는 이 풍경이야말로 창세기적 관점에서 보면, 선악과를 따먹은 죄의 결과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그 어떤 권력도 독점하도록 허용하면 안된다.

고성군의 의사부족이 의사수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세뇌방송이 계속된다. 안타깝다.

전북 김제시에 등록된 2018년 신생아 수는 450명이다. 이들 중 일부는 지역거주자에게 혜택을 주는 입시제도와 복지혜택을 노리고 등록한 사람들도 있다는 소문도 있지만, 전원 김제시에서 태어났다고 가정해보자. 이들의 출산을 도와줄 산부인과는 1일 8시간 3교대 근무를 해야만 한다. 아기가 알아서 주간에만 태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사와 간호사 등등의 인력이 3교대 근무하는 병원의 운영에는 연간 인건비만 5억이상, 최소한 10억이 든다.

이를 450명의 신생아수로 나누면 한 아이당 출산비용은 최소 2000만원이 든다. 실제로 내가 20년전 마국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미국에서 병원 출산비는 정상분만일 때 2만 달러였다. 하물며 고성군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정말 이런 국가를 꿈꾸는가?

의사 수가 부족해서 고성군에 의사가 없는게 아니다. 당연히 공공의료인 보건소를 통한 초기 대응 후 인근 도시의 큰 병원으로 이송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문제는 보건소 조차도 일부는 도심에 있다. 지금 정말 의료사각지대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당장 도심에 깔아놓은 보건소를 면 단위 이하 지역에 인력과 시설 추가에 사용하라고 외쳐야 한다. 병원이 넘쳐나는 도시에 공공의료시설을 추가해놓은 이유가 뭘까? 불가사의이다.

다만 공중보건의 자원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의학전문대학원을 도입하면서 군복무를 마치고 입학한 학생이 늘었던 때문이고, 이제 다시 대부분의 대학이 의과대학으로 편제를 바꾸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금방 해소된다. 물론 전문대학원을 도입한 것도 의대의 결정이 아니라 정부가 강제로 그렇게 했던 일이다. 당시에도 의대들은 모두 반대했다. 반대이유 중에 가장 큰 것 하나가 바로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을 우려해서였다. 어린 학생들은 나름대로 숭고한 뜻을 가지고 진학하는 학생들이 있어서 나름대로 다양한 의사를 길러낼 수 있는데 직장생활을 하다가 오는 학생들은 기본적인 출발점이 안정적인 직업만이 목표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이걸 밀어붙인 사람들이 누구였는가?

왜 정부가 국민에게 솔직하게 설명하고 대책을 논의해야 할 일을 정치인들의 표 획득을 위한 엉터리 정책을 내걸고 국민을 세뇌시키는가? 실제로 3주전 한 도시가 발전전략을 토론하는 자리에 토론자로 초대받아 참여했는데, 발표 내용과 아무 상관없는 공공의대 유치가 화두가 되었었다.

오늘 전교조를 법외노조라고 한 정부의 조치가 불법이라는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나왔다. 반가운 일이다. 모든 노동자는 노조를 만들고 노동권을 누릴 권리가 있다. 1980년대에는 일반 노동자들이 이를 자각했고, 1990년대에는 교사들이 이를 자각했었다. 2020년대에는 각종 전문직들이 이를 자각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전공의들이 스스로 노동자성을 자각하기 시작했고, 교수들이 노조를 준비중이다. 이렇게 한국 사회가 진보해 가고 있다.

코로나 상황에서 정부는 의료개혁 4대정책을 발표했고, 의사들, 특히 전공의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의협회장의 돌출성까지 더해져서 의사들은 순식간에 온 국민에게 ‘공공의 적’이 되었다. 정치적 수사까지 더해져서 이 상황은 정치적선전만 난무하고 이성적인 토론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의료를 생명을 다루는 공공서비스라는 주장은 넘쳐나지만, 공공서비스의 기본 요건조차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다. 애당초 의사집단과 협의없이 코로나를 틈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 보건복지부의 시도는 적어도 겉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파업이 장기화되면 결국 피해는 국민에 돌아온다. 지금이라도 늦지않았다. 근본을 살펴야 한다.

어느 국가나 모든 지출을 국가의 재정으로 하는 공무원이 있다. 이들은 단 1원도 스스로 투자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면서 하는 일은 국가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일이기 때문에 중단했을 때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커서 파업권리를 제약한다. 특히 군인과 소방관에게 이런 제한이 강조된다. 국공립학교의 교원들은 모두 공무원이다. 국공립학교는 아무도 투자한 사람이 없다. 전액 세금으로 지어지고 유지된다. 급여도 세금으로 지급한다. 그래서 교사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았었다. 전교조가 이 노동권을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고초를 겪어야 했던가? 그러나 지금은 정부가 ILO협약에 따른 핵심쟁점사항에 관해 법률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교사뿐 아니라 공무원의 노동권을 인정하는 것도 핵심쟁점사항이다.

반대편에 민간서비스가 있다. 민간서비스는 사업자가 모든 투자를 한다. 자신이 투자하고 시장의 원리에 따라 고객을 유치한다. 정부 가이드라인이 있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서비스의 댓가는 서비스 제공자가 정한다. 서비스의 품질에 따라 고객이 많으면 올리고 적으면 내리는게 일반적이지만, 사업자에 따라서는 사업의 목표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학원이나 과외교사는 자신이 투자하여 세운 학원에서 경쟁력에 따라 한 달에 수백만원을 하는 과외부터 불과 수만원짜리 학원 강좌를 운영한다. 이런 구조 때문에 아무리 교육이 중요해도 사교육을 공공서비스라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공공서비스가 있다. 공무원이 직접수행하지 않지만 국가가 제공해야할 중요한 서비스를 민간이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서비스제공기관을 설립하는 것도 세금으로 하고 인건비를 포함한 운영비도 전적으로 국가가 책임진다. 원래 이런 서비스들은 국가가 제공하던 것이 아니고 민간에서 먼저 수요를 발견하고 민간서비스로 제공하던 것을 나중에 여러가지 이유로 국가가책임지게 된 것이다. 정부도 아닌데 공무를 수행하는 복지기관을 포함하여 산하기관들이 그런 것들이다. 사립학교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사립학교들은 설립자가 투자하여 학교건물을 짓고 등록금을 공립학교와 달리 비싸게 받으며 교육서비스를 제공했다.

의무교육을 도입하려고 보니 사립학교가 제공하는 민간서비스를 공공서비스화 해야만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교원의 월급과 기타 서비스제공에 필요한 교과비용을 국가가 전적으로 지급했다. 여기에 비례해서 사립학교 등록금도 없애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육시설(건물 포함)이 노후화 되자 이제는 이런 시설비용도 국가가 지급한다. 그렇지만 처음 설립할 때의 투자를 인정해서, 비록 논란은 있지만, 아직도 인사권을 포함한 모든 경영권을 학교재단 이사회가 행사한다. 이렇게 우리사회는 민간서비스를 공공서비스로 바꿔온 경험이 풍부하다.

지금의 의료는 어떤가? 많은 뜻있는 사람들의 희망과 전혀 다르게 개인병원들은 100% 민간서비스이다. 자기가 투자해서 병원을 열고 환자가 오지 않으면 망한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민간서비스이다. 투자하고 자기가 책임지는 딱 거기까지만이다. 인기가 있어서 아무리 환자가 많이와도 진료비를 올릴 수 없으니 죽으나 사나 오는 환자를 다 진료해야 한다. 환자가 적어지길 바라는 의사들이 의외로 많다. 그들도 인생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것은 국민건강보험 때문이다. 우리 보험제도는 정부에게만 세계에서 가장 좋은 제도이다. 사실 미국과 캐나다가 양 극단의 의료시스템을 가지고 있고, 우리나라는 그 사이에 위치한 합리적인 제도이다.

이 좋은 제도가 정부만 좋고 국민의 원성을 사는 이유는 진료에 대한 댓가가 원가에 크게 못 미치기 때문이다. 개인병원의 의사들은 많은 환자를 진료해야만 소득이 유지된다. 그래서 환자는 언제나 의사를 만나서 진료를 받을 수 있지만 오랫동안 이야기할 시간이 없다. 대학병원은 전공의를 노예로 만든다. 주당 80시간노동에 인수인계 시간은 아예 노동시간에 잡히지도 않는다. 인수인계는 앞서 근무한 자가 다음 근무자에게 환자의 상세를 설명하는 일로 의료수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들이 버티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총 15년 이상 걸리는 이 과정을 빨리 끝내고 개업해서 돈이나 벌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정책에 앞서 해야할 일은 의료수가의 현실화이다.

지금 이 사태. 정부가 의사들을 협박하고 의사들은 파업하는 사태는 결국 국민들만 골병들게 만든다. 언론사들은 진료공백으로 응급환자가 사망했다고, 수술이 지연되고 있다고 아우성이지만 정부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모두가 일을 벌인 정부가 아니라 의사를 원망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면 정말 극단적인 사태가 빚어질 수도 있다. 왜 그 좋은 경험, 민간서비스를 공공서비스화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다지도 무식하게 싸움만 하고 있는 걸까?

공공서비스화 하는 과정은 매우 단순하다. 정말 지방에 의사가 부족하다면 지방에 공공병원을 지으면 된다. 병원의 설립부터 운영까지 모든 책임을 국가가 지면 된다. 정부가 이렇게 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실제로 공공병원은 일산에만 지었다. 왜 그럴까? 지방에 공공병원을 지으면 세금먹는 하마가 된다는 것을 가장 잘아는게 보건복지부이고 아마 이 문제가 기관평가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래서 공공의료는 절대로 지방에 혜택이 가지 않을 것이다. 또 다시 수도권을 위한 정책일 뿐이다. 홍준표 전 경남지사가 진주의료원을 폐쇄했을 때 다들 비난만 했지 왜 폐쇄했는지에 대해서 대책을 논의하지 않았는데, 진주시 정도의 규모로도 공공병원을 유지할 만큼 인구가 안되는게 현재 한국의 의료전달체계이다. 그러나 공공서비스라는 것은 원래 세금으로 하는 것이다. 사실 진보는 원래 소수이다. 왜냐하면 공공서비스를 높이려면 국민이 싫어하는 세금 인상을 주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절대 다수당이 된 민주당이 세금을 올려야 하는 정책을 주장할 수 있을까?

공공병원 다음 단계는 민간병원의 의료인 급여를 포함해서 운영비를 국가가 책임지고 대신 진료비 보험화를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이다. 모든 진료의 보험화는 문재인케어의 정신이다. 보험화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제도가 주치의 제도이다. 모든 국민은 가까운 개인병원을 주치의로 등록하고 환자는 응급이 아닐 경우 주치의에게 진료를 받게 하고 만약 더 큰 병원에 진료를 받아야 할 것으로 판단되면, 진료소견서를 써주고 스케쥴을 잡아준 병원으로 가서 진료받게 하는 제도이다. 의료전달체계라는 말로 표현하는 주장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이게 안되는 이유는 소위 서울의 거대병원들 때문이다. 지방에서 수술을 받지 못하는 것도 의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 거대병원들 때문이다. 전국에서 돈되는 환자를 싹쓸이 해서 돈을 벌고 있는데, 만약 주치의를 거쳐서 전문가의 판단을 거쳐서 대형병원으로 가야한다면 지방대학병원들이 정상화될 것이고 이는 곧바로 이들의 수입저하로 나타난다. 이를 허용하겠는가? 지방대학병원에도 수술할 의사가 일할 수 있으려면 충분한 비용을 지급하고 주치의를 통해 구태여 서울로 갈 필요가 없는 환자들이 지방에서 치료받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인구가 적어도 병원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캐나다처럼 월급제로 하거나 혹은 미국처럼 완전히 시장경제에 맡기면 국민이 불만을 가지는 1시간 기다려서 5분 진료받는다는 문제는 바로 해소된다. 하루에 20명 이상을 받지 못하고 한 환자당 30분을 진료하는 의료천국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월급을 주는 대신 진료환자수를 제한하거나 돈을 받고 싶은대로 받게해서 몇명만 진료해도 돈벌이가 충분하거나.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이것은 보건복지부의 공무원들이나 정말 지 밥그릇밖에 모르는 국회의 정치인들에게 맡길 일이 아니다. 진짜 생명이 중요하고 의료가 중요하다면, 의료를 공공서비스로 만들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치킨게임의 피해자는 국민이다.

요즘 빅 데이터(Big Data)라는 말이 유행이다. 사람들은 이 말에서 돈 냄새를 맡기도 하고 새로운 세상의 냄새를 맡기도 하나보다. 여기저기서 요녀석이 누군지 궁금해 한다. 좀 긴 안목으로 정리해 본다면 요 녀석이 누구인지 이해하는데 조금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약간 거칠지만 긴 시간 동안의 흐름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미리 밝혀 둘 것은 컴퓨터가 탄생하던 그 시작 시기부터 컴퓨터과학은 통계학과 뗄 수없는 샴쌍둥이였다. 비록 두 영역이 서로 다른 영역을 널리 개척해 왔고 그래서 또 서로 다른 듯 발전해 왔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 둘이 결합된 샴쌍둥이를 나는 편의상 데이터과학(이미 존재하는 용어이다, Data Science)이라고 부르겠다. 또 한 가지, 이곳에 나열한 년대를 정확한 시기 구분으로 읽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70년대에 데이터과학의 최대 관심사는 로봇이었다. 이때의 로봇은 인조인간, 즉 범용성을 갖는 존재였다. 로봇을 만드는 데는 하드웨어 기술과 함께 그 로봇을 작동시키는 두뇌인 소프트웨어 기술도 필요했는데, 당연히 데이터과학은 소프트웨어 기술을 담당하였다. 샛길로 잠시 빠져 나가보면, 그 때 만들어진 개념이 객체지향(OOP)언어이다. 요즘 이 개념을 구현하지 않은 언어는 프로그래밍 언어 취급도 못 받는다. 그런데 이런 범용성 로봇을 구현하는 것이 환상이라는 점을 금 새 깨닫게 된다. 생물학적 메모리 소자로 이루어진 인간의 두뇌가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때문이다. 평균적인 사람의 두뇌가 저장하고 있는 정보와 같은 양의 정보를 저장하려면 어마어마한 크기의 메모리 장치가 필요하다. 그래서 한 때 생물학적 메모리소자 개발이 주요 연구주제였던 시기가 있었다.

 

범용성 로봇이 환상이라고 깨달은 과학자들은 80년대에 들어와 관심을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나 전문가시스템(expert system)이라고 하는 소프트웨어 기술로 돌린다. 전문가시스템은 특정한 한 가지 업무를 마치 그 분야의 전문가가 수행하는 것처럼 대신 수행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이다. 이 기술을 구현하는 데는 역시 방대한 양의 지식을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 기술과 여기에 덧붙여 소프트웨어가 사람처럼 추론을 하는 기능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추론기술이 발달하게 된다. 당시에 단순한 기능만을 사람대신 수행할 수 있는 시스템들이 만들어지고 실용화 되었으나 보편적으로 응용될 수 있을 만큼 기술이 발전하지는 못했다. 당시에 전문가시스템을 구현할 수있도록 도와주는 툴들이 개발되었고 이를 계기로 전문가시스템이 획기적으로 확산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툴만이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한차례 바람몰이로 그쳤다.

 

이 두가지 영역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데이터과학자들의 새롭게 개척하여 우리 주변에 실물로 등장한 것이 특정 영역의 업무를 인간 대신 수행하는 단순기능 로봇들이다. 우리가 흔히 보거나 듣는 것들로는 공장에서 사용하는 자동화기기, 청소로봇, 암살 및 정보 수집용 무인기 드론, 일본에서 연구하고 있는 간호사 로봇 등이 있다. 대략 2000년대의 일이다.

 

그런데 90년대에 데이터과학자들에게 그 동안의 연구결과를 적용해 보고 싶은 새로운 현상이 나타난다. 인터넷의 등장과 메모리 가격의 하락, 각종 센서의 확산 그리고 컴퓨팅 속도가 눈부시게 빨라져 그 동안 전혀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알아도 감히 손대보지 못했던 데이터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신용카드 회사들은 카드 소지 고객들이 카드를 사용한 지역정보를 이용해 사용 장소를 지도 위에 표시해 보면 카드 사용빈도가 높은 곳을 보여주는 카드사용지도가 만들어진다. 인터넷 접속 데이터를 분석해 어느 중계링크가 악성 공격포스트인지 찾는 것과 같은 일들이다. 이런 종류의 데이터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 양이 너무 방대해서 과거에 통계적 방법들로 다루던 표본 데이터와 달리 손 안에 잡히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업무 상, 혹은 전혀 다른 목적으로 자동으로 생성되던 데이터들이다.

 

이 시기에 중요하게 등장한 기술들이 통계 그래픽스와 데이터마이닝(이는 포괄적인 용어로 이 범주로 묶을 수 있는 기법들은 매우 다양하다)이다. 데이터 자체가 분석을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데이터들 속에서 어떤 의미 있는 분석결과를 찾는 것 역시 의도적으로 수행 할 수있는 데이터들이 아니다. 통계 그래픽스 기술은 수치만으로는 전혀 데이터 속에 숨긴 정보를 식별해 낼 수 없기 때문에 시각화하여 한눈에 데이터가 담고 있는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 적용되었다. 데이터마이닝 기술은 데이터가 가진 숨은 정보를 금광 캐듯이 찾아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특히 고객들이 게시판에 올린 글들을 분석하는 텍스트마이닝(text mining) 기술도 널리 사용되었다.

 

전통적인 통계학 기법들은 이론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데이터에 맞는 모델을 일정한 형식으로 한정하고 그 한정된 모형의 범위 내에서 최적 모형을 찾는 방법이라고 단순화할 수 있다. 따라서 이론적인 관계를 특정화할 수 있으면 통계적인 기법들은 언제나 적용 가능한 범용성을 갖는다. 이에 비해 데이터마이닝 기법들은 범용성을 갖지만 실제로 분석에 적용하려면 사례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프로젝트가 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애초에 분석 대상이 되는 데이터들이 이론적인 관계를 정립하고 추론할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통계적인 기법들이 작동하는 것은 도저히 접근할 수없는 모집단과 그 모집단에서 구한 소규모 집단으로서의 표본의 관계를 바탕을 한다. 그러나 데이터마이닝은 실제로 발생한 데이터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모집단을 직접 분석하는 기법이라는 성격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게다가 데이터마이닝의 대상이 되는 데이터의 속성이나 접근 방법들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개별 프로젝트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인터넷의 발달로 데이터가 자동 생성되는 현상이 비즈니스 영역에서 사회영역으로 확장된 것이 SNS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영역에서 발생한 또 다른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있다. 그래서 이 데이터에서 무언가를 분석해내는 것은 기존의 데이터마이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이미 만들어진 텍스트마이닝 기술이 있다. 다만 비즈니스 영역의 데이터처럼 자동생산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자신의 목적에 따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성격이 약간 다르다. 이를 과장해서 새로 용어를 만들어내 시장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 빅 데이터라고 할 수 있다. 즉 좀 심하게 말한다면 분석기법 관점에서 바라보던 데이터마이닝을 데이터 관점에서 빅 데이터라고 바꾼 정도라고 할까 여전히 데이터과학의 범주 안에 있다.

 

그런데도 이게 요즘 대세가 된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한 SNS로 부터 정보를 얻는다는 점 때문이다. 과거에는 소비자조사와 같은 방법을 통해 한정적인 표본으로부터 얻었던 정보를 스스로 고백(?)한 내용으로부터 추출한다. 게다가 이는 정치사회적인 이슈에 대해서도 같은 분석을 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다. 물론 독감의 확산에 관한 예측 연구와 같이 그 적용대상이 획기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 점이다.

 

그러나 여전히 데이터마이닝이 안고 있던 문제점으로부터 더욱 나아가 여러가지 결점을 안고 있다. 먼저 통계학적으로 보면 모집단이 특정화 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즉 SNS에 특정한 성향을 드러내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으로 한정되기 때문에 여전히 모집단이 아닌 표본의 성격을 가지는데, 그나마도 통계학적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표본이 아니라는 점이다. 게다가 이 공간이 잘 통제되고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정보가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정보와 구별하기 쉽지 않아서 선전활동을 객관적인 정보로 오해할 수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사적 정보를 사용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수반할 프라이버시(인권) 침해가 발생한다. 나는 이미 미국의 정보기관이 전 세계의 SNS사용자들의 개인정보를 축적하고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리고 거기에 사용되었던 기술들이 이제 민간 영역으로 전수되어 빅 데이터라는 말도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무튼 빅 데이터 역시 범용성을 갖는 어떤 분석도구를 만들어 누구나 자기 목적에 맞게 분석에 사용하기 보다는 프로젝트 베이스로 문제를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떤 트렌드를 찾아보는 목적으로 사용해야지 이를 의사결정의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오류 가능성이 너무 높다. 개인의 정보를 훔쳐 그 개인에 대한 판단을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그 활용성이 한정적일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빅 데이터 열풍도 소수의 성공사례들만 남은 채 또 다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시대의 유행에 그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범용성은 내가 어떤 기술이 폭넓게 확산될 수 있을 지 아니면 특수한 분야에서 응용되는데 그칠지를 예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하나의 관점이다)


(추가: 사실 빅 데이터에 관하여는 뉴욕타임즈에 지난 해 실렸던 글 속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나 개인정보로서의 인권이라는 관점을 강조하고 싶다) 

오래전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에는 아시아의 가정 문제에 대한 특집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최근 이 문제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증가하는 것 같아 요약해 보았습니다. 결혼과 가정, 중대한 변화를 맞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현실은 매우 다양한 의견과 생각들을 촉진할 것 같습니다. 어떤 의견이라도 생각을 댓글로 밝혀주시면이 내가 생각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http://www.economist.com/node/21526329


The flight from marriage

The Economist, 2011. Aug. 20

 

 

서구의 보수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아시아도 전통적인 가정이 사회의 근저임.

가정은 유교적 윤리관의 초점

 

리콴유(전 싱가포르 수상)

중국은 수 천 년 동안의 혼란 후에 가정은 중국문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기구였다. 배움과 학식, 근검, 노력, 그리고 미래를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함과 같은 가치관이 여기에 배어 있고, 이것이 오늘날 아시아가 경제발전을 이룬 동력이다. 가정의 붕괴가 만약 발생한다면 이는 싱가포르의 성공을 위협하는 주요 요인이 될 것이다.

 

가정의 비교

서구: 한 부모 가정, 동성애, 동거의 보편화

남아시아: 조기중매결혼, 남성우월주의, 대가족제도(가족관계의 확대)

동아시아: 남성우월주의이지만 핵가족화, 중매결혼이 점점 사라짐

동남아시아: 여성의 자율성이 다른 아시아 지역보다 강함.

 

아시아의 이런 현상은 서구에서는 1960년대에 닥친 충격으로 이미 사라졌음.

결혼:

남아시아와 중국: 98%의 남녀가 결혼할 정도로 보편적임.

서구는 30대의 1/4이 동거하거나 결혼하지 않음. 또 새로 결혼하는 부부의 반이 이혼함.

출생:

아시아: 아직 일반적으로 출산은 부부관계에서(2007년 일본 2%만 혼외출생)

유럽: 2008년 스웨덴 55%, 아이슬랜드 66%가 혼외출생

동거: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동거비율 매우 낮음.

일본: 1987-2002년의 사회조사 결과 1-7%만 동거(예외적으로 70년대 출생자의 20%가 동거중임.)

c.f. 미국 2002년 사회조사: 18-49세 여성의 반 이상이 결혼 전에 동거했음. 따라서 결혼연령이 실제보다 높게 나타나고, 이혼율도 과소 추정될 것임.


아시아가 변하고 있다.


아시아와 서구의 가정이 변화한 것은 부와 현대화가 가정생활에 가하는 혹독한 압력 때문이지만 그 반응은 서로 다름.

서양: 이혼과 혼외출산

동양: 만혼, 독신, 그리고 이혼의 증가

서양과 동양 모두 가정생활에서 여성의 역할 변화

 

첫 번째 변화: 만혼

부요 국가(일본, 한국, 대만, 홍콩)의 평균혼인연령: (31-33) (29-30)

c.f. 미국 남(28), (26) 사전 동거를 감안하며 나이 격차는 더욱 커짐.

 

(그림)

 

두 번째 변화: 독신

201030대에 진입하는 일본 여성의 1/3이 독신. 그리고 이중 반 이상이 평생 독신일 것으로 예상됨.

201030-34 대만 여성의 37%가 독신(35-39세는 21%)

c.f. 미국, 영국의 30대 말 여성의 13-15%만 독신

일반적으로 여성이 40대에 진입할 때 독신이면 거의 평생 독신이면서 출산하지 않음.

 

독신화가 충격적인 이유는 30년 전만 해도 아시아 대부분 국가들에서 독신비율은 2%였기 때문. 특히 일부 도시지역에서 더욱 심각(방콕의 40-44세 여성의 20% 가 독신, 홍콩의 30-34세 여성의 27%가 독신)

 

(그림)

 

세 번째 변화: 이혼 증가

이혼율: 15세 이상 인구 1000명당 이혼자 수

홍콩, 일본의 2000년대 중반 2.5, 아시아 전체로는 2.0(1980년대 1.0), 중국은 2000년대 들어 급증, 한국(3.5)

c.f. 미국(3.7), 영국(3.4), 프랑스(3.1), 독일(2.8)

 

 

변화의 배경

 

거의 모든 전통적 사회에서 결혼의 주요 기능은 자녀양육(로맨틱한 사랑이 아님) 따라서 결혼의 변화는 출산과도 깊은 관계

 

1) 출산기피

동아시아의 출산율: 5.3(1960년대) --> 1.6이하(현재)

그러나 전통적인 인식은 여전해서 혼인하면 바로 아이를 출산할 것으로 기대함. --> 출산을 늦추기 위해 혼인도 늦추는 현상 발생

 

2) 여성의 교육과 수입 증가

여성의 고등교육이 보편화되고 수입도 증가하지만 여성의 지위는 여기에 비례하여 증가하지 않음. 남아시아에서는 아직도 신부가 사춘기에 들어서면 바로 신랑 집으로 보내져 자유가 없음. 중국을 중심으로 여성은 재산 상속이나 제사 참여도 제한됨.

 

(교육과 직업) 그런데 두 가지 힘이 여성을 더욱 자율성을 갖게 함. 남아시아를 제외하면 교육 기간이나 능력에서 성차이가 없음. 한국에서는 석사학위 취득자의 반이 여성

) 타이: 40대 고졸여성의 1/8이 독신, 대졸여성은 1/5이 독신

2003년 베이징: 월소득 ¥5,000-15,000(대졸의 상징) 여성의 반이 결혼하지 않음. --> Gold Miss(한국)

c.f.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고등교육을 받을수록 혼인비율 높음.

 

교육이 보편화되면서 여성 독신비율이 높아진 이유:

1) 일반적으로 고학력자일수록 혼인기피 현상이 있음. 여성의 고등교육이 증가하여 고학력자 그룹에 여성이 증가함. 게다가 일반적으로 도시 인구의 독신비율이 높은데 교육을 많이 받은 여성일수록 농촌을 기피하고 도시 이주비율이 높음.

2) 고학력 여성의 잠재적인 남편 가능자수가 줄어듦. 대부분의 아시아국가에 상향결혼(marry up) 현상이 있음. 여성의 고학력화로 이런 남성 파트너 수가 줄어듦. ) 싱가포르 30-34세 대졸 여성의 1/3이 독신

상향결혼: 여성이 자신보다 더 낫거나 최소한 같은 수준의 학력을 가진 남성과 결혼하는 것

3) 고학력화는 여성의 취업을 증가시킴. 이는 그 동안 아시아 경제발전의 한 동력이었음. 동아시아에서 2/3, 동남아시아의 경우에는 59%의 여성이 직업을 가짐. 한국 20대 여성(59.2%) vs 20대 남성(58.5%). 이런 현상이 한국과 일본에서 종신고용제의 붕괴와 함께 찾아와 남성 혼자 일해서는 중산층 유지가 힘들어진 것과 관련 있음.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여성이 직업을 가지면 여성의 자율권이 증가한다. 여성은 취업과 결혼이라는 두 가지 옵션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여성들이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의 균형을 잡기 위해 싸운다.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혼인의 짐이 대부분 여성에게 부과된다.

 

결혼생활 만족도는 일본 여성이 미국 여성의 반 수준(2000년 조사)

이유: 미국은 사랑 없는 결혼생활은 즉각 중단할 수 있을 만큼 이혼이 보편화 되어 있기 때문에 결혼 생활이 유지되는 부부는 만족도가 높은 부부일 가능성도 높다. 반대로 일본의 직장남성은 장시간 근무에 밤과 주말로 이어지는 (필수적인)사회생활에 시달리는 동안 여성 혼자서 가정과 육아를 책임져야 한다.

결혼생활(남편)에 만족하지 못하는 여성이 더욱 직업을 선택하게 되는 악순환

 

아시아에서 공공의 태도나 기대는 여성의 삶이 변화하는 것을 전혀 따라가지 못함. (유교적 전통 때문) 이것이 여성으로 하여금 결혼과 직업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함. -> 고학력, 고임금 여성의 미혼 비율이 유난히 높은 이유임. 아시아의 전통적인 사회에서 여성은 자녀, 부모, 시부모를 보살필 책임을 전적으로 떠맡는다. 문제는 여성이 소득이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도 이런 기대가 계속된다는데 있다. 일본의 조사에 따르면 여성은 직장에서 돌아온 후에도 주당 30시간의 가사노동을 한다. 남성은 3시간에 불과 미국과 유럽에서 이런 차이는 60년대 이래 계속 좁혀져 왔다.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여기에 더하여 자녀들의 학업에서 높은 석차를 위해 살인적인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압박이 있다. 이런 압박은 대부분 어머니에게 가해지고 사교육비는 천문학적이다. 공립탁아소는 턱없이 부족해 서울에서만 324,000명의 아이들이 순번을 기다리고 있다. 주택가격이 비싸서 가저을 꾸리는 비용도 천문학적으로 든다. 이런 점들이 아시아가 서구와 달리 직업과 가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사라지는 신부들


아시아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한국은 이웃 나라들에 비해 독신 비율이나 만혼 정도도 심하지 않다. 현재까지는 중국과 인도가 가장 두드러지게 다르다. 중국에서는 아직 혼인이 일반화되어 있고, 인도에서는 여전히 중매결혼을 한다. 그러나 변화의 조짐은 이들 나라에서도 나타난다.

 

평균 혼인연령이 증가하고 젊은층의 이혼율도 증가, 인도에서 자유중매결혼(자유연애 후 결혼을 결정하면 중매결혼처럼 가족이 혼인을 추진)이 등장

중국에서는 시골의 젊은이들이 도시로 이주하면서 가정생활이 심각하게 변화:

1) 장기간 집을 떠났다가 돌아와 이혼하여 이혼율 증가

2) 부부가 같이 이동할 경우에는 아이 양육이 불가능(부모가 안하거나 호구제도 때문에 못하기도 함) -> 2008년 현재 전국에서 58백만명의 아이들이 부모와 수백키로씩 떨어진 고향마을에서 조부모에 의해 양육됨. 중국에서 육친은 더 이상 일반적인 양육의 주체가 아님.

 

두 나라의 더 큰 문제점은 자녀를 선택적으로 (딸만) 낙태하는 것에 있다. 2010년 중국의 출생성비는 118, 인도는 109.

2030년 중국의 25세 이상 남성의 8%는 여성이 없어서 결혼을 못할 것임.

2050년에는 이 비율이 10-15%로 증가

2030년 두 나라에서 20-50세 인구는 남성(66천만 명) 여성(597백만 명)으로 남성이 6천만명이나 초과. 이는 2030년 미국 전체 남성의 수정도

 

이 현상이 여성이 교육과 소득에서 자기보다 나은 남성과 결혼하는 관습과 맞물리면 두 그룹에서 독신이 증가하게 된다.

고학력 여성과 저학력 남성

) 한국의 여성은 시골 농부와 결혼을 기피 --> 해외 여성과의 결혼 증가 --> 여성의 모국에서 남성이 결혼 불가능

중국은 이런 여성(sheng-nu, 남은 여성), 남성(guang-gun, 마른 가지)

-> 사회문제 증가 가능성: 매춘, 여성(신부)의 상품화, 한 여성에게 여러 남성과 혼인을 강요, 남편의 부인 과보호(의처증)


국제결혼 증가의 문제


대만: 2002년 결혼의 27%가 국제결혼, 신생아 1/8이 다문화 가정 출생, 10대 문맹소녀들이 고령의 외국인 부자들에게 팔려감. 따라서 젊은 남성의 결혼이 어려워짐.

한국: 2005년 결혼의 1/7이 아시아 여성과의 국제결혼

(Kosians: Korean-Asian). 2009년 전남의 농부 중 44%가 이주여성과 결혼.

만약 중국과 인도가 이런 대열에 동참한다면 아시아 전역에서 성 재앙이 될 것임.

 

미국과 유럽: 역사적으로 경제가 위기일 때 혼인이 감소했다가 경기가 좋아지면 다시 증가하는 변동 보임.

아시아: 경제성장과 함께 혼인비율이 감소함. 그리고 점점 부요해지는 데도 전통적인 결혼방식은 쉽사리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차별금지법이 무엇이기에

 

차별금지법을 놓고 기독교 사회가 극단적인 분열양상을 보이고 있다. 저지하겠다는 사람들이나 관철시키겠다는 사람들이나 너무 으르렁거리는 것 같다는 걱정이 든다. 다시 한 번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카톡을 포함한 SNS를 통해서 공격적이면서 악의적인 글을 몇 번 받았다. 물론 대부분 보수기독교인들이다. 그런데, 그런 글을 읽다보면 종교적인 성찰은 없고 악의적인 이데올로기적 공격만 남아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런 글에 토론을 하다가 사탄이라는 공격도 받았다. 악의적이라는 말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되어 있는 이법이 입법예고 중인데도 예고 없이 밀실에서 제정했다고 공격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특정 정당에 대해 낙선운동이나 해산을 요구하고 있어 이데올로기적이다. 다른 차별에 잠잠했던 보수기독교계가 이일로 차별을 옹호하는 집단으로 비치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반대로 이런 주장을 비난하는 비교적 객관적인 것 같은 글을 읽어 봐도 내 생각에는 미진한 점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나는 10여 년 전 한 토론회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을 주장한 적이 있다. 당시 좌절되었던 내 생각과 지금 추진되고 있는 법안은 크게 보면 3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당시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성적지향 등이 추가되었고, 대신 내가 주장했던 유전정보에 따른 차별은 포함되지 않았다. 유전정보에 의한 차별이란 유전자 분석에 따라 지금 발생하지 아니하였으나 발생할 수도 있는 어떤 특성을 반영하여 보험 가입 등과 같은 일상 생활에서의 차별을 말한다. 이는 발생할 가능성만 있을 뿐이기 때문에 마치 교통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보험에 가입할 수 없다는 차별과 같은 종류의 차별이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는 이 법안이 예방을 주요 목적으로 제시(법 제1)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조항이 차별의 범위(법 제4)나 교육내용의 차별(법 제16)에 관한 조항에 몇 가지 항목이 추가된 이유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 내 생각을 정리해보는 것은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일이다.

 

법은 실체적 범죄의 처벌 규정을 통해 범죄를 예방하는 기능을 가지는 것인데, 이법은 법 자체가 예방을 위한 구제조치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법 과잉이다. 이법의 많은 내용은 범죄가 특정화 되면 처벌하거나 배상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법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예방이라는 측면에서 피해가 특정화되지 않아도 구제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게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이법의 45호 및 6호 때문이다. 5호의 조장하는 행위가 너무 포괄적이어서 보안법과 같이 자의적으로 확대 적용되어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자면 과거에 긴급조치법으로 설교를 위해 성경(미가서 2)을 낭독한 것만으로 연행이 가능했던 것처럼 하위법이 헌법적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반대로 자유롭게 자기의 사상과 믿음을 말할 권리가 박탈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적지향 등과 관련한 문제를 보자. 적어도 보수기독교에는 여전히 동성애에 대한 종교적 거부감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근거 없는 편견이 아니라 성경이라고 하는 경전의 몇 군데에서 실제로 이를 금지하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종교적 논의는 사절한다.) 그런데도 헌법적 권리인 종교의 자유와 하위법인 차별금지법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이 법안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런 예는 도덕적 기준이 변화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다양한 문제를 야기한다. 과거 도덕적 기준에 따르면 부도덕한 일이 세대가 바뀌면서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때 과거의 도덕적 기준을 주장하는 일이 전면적으로 범죄로 취급받는 상황이 발생한다. 혼인형태에 대한 차별금지가 45항과 결합되면 첩을 아무리 많이 두어도 도덕적 비난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런 극단적인 사례는 다른 법에서 처벌이 가능하다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이법을 오해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7조와 14조에는 다른 법을 수정하도록 의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46호를 통해 이런 적용 영역이 인터넷과 같은 가상공간까지 포괄하게 된다. 6호 역시 모호하게 규정하고 있어서 동호회 성격의 모임까지도 제한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 그룹의 홈페이지나 SNS동아리도 불법이 될 수 있다. 이는 인터넷 검열로 악명 높았던 MB정권의 코미디를 합법화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라도 이는 잘못이다. 그런데 하물며 분명하게 대립구도가 알려진 상태에서 이렇게 법안을 작성하는 것은 옳지 않다.


4(차별의 범위) 이 법에서 차별이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 또는 경우를 말한다.

1.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연령·장애·병력·피부색·용모 등 신체조건, 인종·언어·출신국가·출신민족·출신지역(출생지, 등록기준지, 성년이 되기 전의 주된 거주지 등을 말한다) 등 출생지, 기혼·미혼·별거·이혼·사별·재혼·사실혼 등 혼인상태, 출산형태 및 가족형태, 종교, 정치적 견해, 전과·성적평등·성적지향·성별정체성·학력·고용형태 등 사회적 신분(이하 성별·학력·지역 등이라 한다), 그 밖의 사유를 이유로 차별하는 행위

(2-4생략)

5. 성별·학력·지역·종교 등을 이유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분리·구별·제한·배제·거부 등 불리한 대우를 표시하거나 조장하는 행위

6. 1호에 해당하는 이유로 인터넷, 소셜 미디어 등 온라인에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분리·구별·제한·배제·거부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

 

내가 우려하는 또 한 가지는 교육에 적용하는 부분이다. 16조 역시 앞에서 지적한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그 한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약 친일파의 후손들이 친일을 정치적 견해라고 주장하면 이를 역사책이나 수업시간에 가르칠 수 없다. 역사교육에서 가치는 사라지고 오직 사실만 기술해야 한다. 성교육에서도 동성애자들을 위한 교육을 따로 하는 것 역시 불법적이다. 모든 학생에게 같은 내용을 교육해야 할 경우 모든 학생에게 동성애교육을 시키게 된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그뿐이 아니다. ‘내 지방 알아보기같은 사회교과목도 편성할 수 없게 된다. 아니 더 나아가 대안학교와 같이 국가의 간섭이나 일방적인 교육편제로부터 독립하여 학력이 낮거나 종교, 신념에 기초한 교육기관은 모두 불법이 된다.

 

16(교육내용의 차별금지) 교육기관의 장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1. 교육목표, 교육내용 및 생활지도 기준에 성별·학력·지역 등에 대한 차별적인 내용을 포함시키는 행위

2. 성별·학력·지역 등을 이유로 교육내용 및 교과과정 편성을 달리하는 행위

3. 성별·학력·지역 등을 이유로 특정 개인 또는 집단에 대한 혐오나 편견을 교육내용에 포함하거나 이를 교육하는 행위

 

법에는 인격이 없다. 그래서 한번 제정되면 좋은 목적에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고 나쁜 목적에도 똑 같이 봉사하게 된다. 그래서 국가파시즘적인 요소가 개입되지 않도록 최대한 절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이 실체적 범죄를 제한하기 위해 만들어져야 한다. 예방을 목적으로 입을 막는다는 생각은 아무리 좋은 목적이라도 국가파시즘적이다.

 

예고된 법안은 아래 사이트에서 차별금지법으로 검색 가능하다.

(http://pal.assembly.go.kr/main/mainView.do)

캐나다 정부는 2012년 6월 30일부터 난민들에게 제공하던 의료보험료지원을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내가 캐나다국민들이 살아있음을 알게된 두 가지 상징적인 사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토론토 general hospital 에서 개최된 한 행사에서 있었던 사건과 59센트로 캐나다를 바꾸자는시민운동 때문입니다.


이 병원에서 캐나다 정부의 자원부장관(Natural Resources Minister)이 의학적인 목적의 동위원소에 대한 연구기금을 출연한다는 선포를 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다른 병원의 한 의사와 토론토대학 의대의 의대생 한명이 난민의료보험료지원 중단을 성토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행사가 중단된 것입니다.


캐나다는 현 정부가 우리 정부처럼 신자유주의를 표방하고 있어 기득권층에 돌아가는 예산은 올리고 경제적인 이득만 된다면 무슨 일이라도 허용한다는 입장이고, 대신 복지지원은 삭감하고 있어 내가 전에 알던 트뤼도 수상 시절의 캐나다가 아닙니다. 이들은 이를 저지하려고 행사장에서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과 관련하여 소개하고 싶은 상징적인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캐나다 메노나이트대학(CMU)의 학생인 매튜 덕이 난민들의 의료보험료 지원을 위한 59센트운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새로운 법이 시행되기 불과 1주일 전에 시작된 이 운동은 CMU의 캐나다평화구축스쿨에서 일주일 과정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 중에서 소그룹과제로 시작한 것이 발전한 것입니다.


그들은 캐나다 정부가 주장하는 난민의료보험료 지원삭감으로 연간 총 2천만달러의 예산이 절감된다는 것에 착안하여 이를 캐나다국민수로 나눈 금액 59센트를 수상에게 우편으로 보내자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6월 22일 처음 학생들에게 이런 계획을 제안했고 이틀 뒤에는 유투브에 캠페인 동영상을 올리고 다시 홈페이지와 페이스북 그룹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세가지 수단으로 시작한 압력은 대단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59센트를 수상에게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캐나다 연방정부는 지원삭감정책의 일부를 수정했습니다. 또 마니토바 주는 지난 9월, 연방정부가 책임지지 않는 보조금을 주정부가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며 연방정부에 예산청구서를 보냈다고 합니다.

한국의 대학생들이 신자유주의의 노예로 전락하는 길에서 빠져 나와 이렇게 자기들이 살아갈 미래 세상을 스스로 만들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이은 방사능 오염식품 문제에 대해 너무 조용하다. 반핵 활동가들만 온라인 상에서 여기 저기 말하고 있을 뿐 정작 국민의 건강에 책임을 져야 할 정부는 물론이고 언론조차도 무관심의 공범자들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많은 나라들이 이문제에 대해 상당히 민감하다. 그게 식료품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식료품 문제는 많은 분들이 지적했고 또 사람들이 속고 먹는 것이지 적어도 일본산인 것을 알고 먹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자동차 이야기를 해보자. 후쿠시마는 도요타와 닛산의 주요 자동차부품 거점이다.

칠레에서 2011년 5월 일본산 자동차에서 방사능이 검출되었을 뿐 아니라 이 자동차의 이동경로를 따라 오염이 번져서 문제가 되었다. 닛산자동차는 타이완 공장에서 조립하는 일본산

자동차 부품에해 방사능 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해 말 일본에서 수입된 자동차가 방사능에 오염되어 세관을 통과한 이후 역시 이동경로를 오염시킨 사건으로 2012년 1월 처음 10일 동안 검사를 실시했는데 34건의 부품이 오염되어 있어 압수했다. 이후 계속 방사능 검사를 실시하고 있는데 최근에도 300대의 자동차가 압류 상태였다. 러시아는 일단 국경을 통과하면 여러 곳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통관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항만 노조의 요청으로 노동자 건강을 위해 일본에서 수입되는 모든 화물에 대해 방사능 검사를 의무적으로 실시하도록 하고 있다. 최근 나이지이라에서 온 소식에 따르면 일본이 처음에는 수출화물의 방사능 검사를 실시했으나 점점 이를 생략하고 있어 특히 아프리카에 수입된 일본 상품의 방사능 오염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한다.

(이상, NTD Television, Sahara Reporters, Reuters, Car Advice 등의 뉴스 인용)

식품은 물론이고 일본에서 들어오는 모든 화물에 대해 방사능 검사를 의무화해야만 대한민국 정부이다. 일본을 믿고서 오염된 상품이 우리나라로 수입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바보 천치이거나 다른 음흉한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곳에 와서 시귀게 된 교포 한분이 재미있는 사이트를 하나 알려주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위키피디아(wikipedia)에 비교될 수 있는데, 다양한 강연 내용을 동영상으로 공유하는 사이트입니다. 주제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강연의 길이는 아주 짧습니다. 테드(TED)라는 곳이지요.


저는 종종 이곳에 들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나 혹은 랜덤하게 다양한 주제의 강연을 듣습니다. 내 안목을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지요.


여러나라 말(물론 한국어도 포함됩니다)로 자막을 볼 수있으며, 아예 같은 화면에 원고를 함께 띄워놓고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언어문제로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처럼 슬금 슬금 컨닝하며(^^) 보셔도 되고 아예 한글로 읽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이곳에 미국의 한 대학의 수학교수가 수학보다 통계학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군요. 한국의 교육분야에 일하는 모든 분들이 한번은 꼭 듣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통계학자여서가 아니라 우리나라가 좀 더 잘 다듬어진 나라로 도약하는데 꼭 귀담아 들어야할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http://www.ted.com/talks/arthur_benjamin_s_formula_for_changing_math_education.html



북미에 한인이 많다보니 여러 가지 한국 신문이 시차를 두고 북미에서도 보통 무가지로 발행됩니다. 그런데 지난 주말 장을 보러가 무심코 중앙일보를 들고 왔다가 어이없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GS칼텍스가 조세 감면혜택을 받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자 국세청이 부과한 세금에 대해 대법원이 옳다고 최종 판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가 이를 다시 위헌이라고 판결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는데, 이 논란을 엉뚱하게도 대법원과 헌재의 자존심 싸움인 것처럼 기사를 쓴 것입니다.

 

GS칼텍스의 말바꾸기


사건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GS칼텍스는 1990년 주식을 증권시장에 상장하겠다고 약속하고 그 대가로 707억원을 감세 받았는데, 2003년 상장을 포기했습니다. 따라서 국세청은 약속을 파기 했으므로 감세혜택의 조건이 사라졌으니 다시 세금을 내라고 한 것이지요. 여기까지는 내 상식으로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돌연 이 회사가 세금을 내지 못하겠다고 소송을 한 것입니다. 즉 그동안 감세혜택을 주던 법이 폐기되었으므로 원인무효가 되어 세금도 낼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급심의 의견은 엇갈렸는데, 대법원은 비록 법이 사라졌다 해도 특정 사안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 있으므로 폐기된 법의 조항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옳다고 판결하였습니다.

 

다시 상식적으로 이해되는 판결로 끝난 셈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헌재에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헌재는 대법원의 판결이 위헌이라고 판정했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3심제 법체계를 갖추고 있어 재판의 판결에 대한 헌법소원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재판 중에도 특정 법조항의 위헌성이 의심되면 소원을 제기할 수 있지만 판결결과에 대해서는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4심제가 되어버리는 모순이 생기기 때문이랍니다. 헌재의 심판 자체가 불법이라는 이야기도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중앙일보는 이 사건의 기사를 쓰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대법원과 헌재의 권력다툼으로 몰고 갔습니다.

 

중세도 아닌데, 면죄부를 사면된다?


이 사건을 보는 국민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적어도 나는 황당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우선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재벌가의 거짓말을 생각했습니다. 죄를 짓고서 사유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하면 처벌을 면하곤 하지요. 이것만으로도 문제입니다. 돈으로 죄를 사면 받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것마저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흔히 하는 말이 '그것을 조건으로 사면한 게 아니기 때문에 강제성은 없다'고 하면 그만이지요. 잠시 동안 국민의 이목을 속인 다음 잊을 만하면 없었던 일로 하는 것입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출연하기로 한 재산도 아직 분명한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의 핵심은 적당히 거짓으로 혜택을 받은 후 슬그머니 없었던 일로 만드는 재벌대기업들의 행동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대법원은 국민의 법 감정에 부합한 판단을 한 것입니다만, 어찌된 영문인지 헌재는 다른 소리를 낸 것입니다. 어떤 법도 영원히 존속하지 않는데, 만약 법이 폐기되어 사후 과세가 불법이라면 무조건 뭉개다 보면 혜택만 보고 끝나게 됩니다. 또 애당초 감세혜택을 준 조건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사건이 종료되지 않았고 따라서 법안의 폐기 여부와 관계없이 감세혜택은 원인무효가 되어 혜택을 주고 받은 것은 불법입니다. 헌재에는 이정도 상식도 없는 것일까요?

 

상식 위에서 핵심을 보도해야 언론


더 꼴사나운 것은 중앙일보의 보도 태도입니다. 이 기사는 법조계가 읽는 법조신문에 실린 것이 아니고 국민이 읽는 일간신문에 실린 기사입니다. 따라서 국민의 분노를 사는 재벌대기업의 뭉개기 행각에 대해 질책하고 더욱 강력한 제재를 요구해야 맞습니다만, 삼성도 비슷한 상황에 있기 때문일까요? 그저 두 권력기관의 다툼으로 둔갑되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헌재와 중앙일보가 만약 다른 어떤 기업이 같은 상황에 있다고 해도 이렇게 행동했을까요?

 

4.19를 기념해야 할 때에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09년 교사들의 시국선언이 국가공무원법상 집단행동 금지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판결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유사한 사건에 대해 각 법원의 판결이 서로 달랐는데, 이번 판결은 앞으로 비슷한 사건을 판결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판결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뉴시스(Newsis)에 실린 관련 기사의 일부를 옮겨 보면 이렇습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용덕 대법관)19일 국가공무원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전지부장 이모(54)씨 등 3명에 대한 상고심에서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 등을 인정해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정치적·교육의 중립성이 요구되는 교원이 특정 세력에 대해 집단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현한 것은 교원의 정치적 중립성과 국민의 신뢰를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행위"라며 "공무원법상 금지하고 있는 '집단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반면 박일환·이인복·전수안·이상훈·박보영 대법관은 "표현의 자유 범위 내에서 특정 사안에 대한 정부 정책과 국정 운영에 반대 의사를 표현하면서 개선을 요구한 것은 공익에 반하는 목적의 행위가 아니"라며 무죄 취지로 반대 의견을 냈다.

 

이 기사를 읽다가 내가 동의할 수 없었던 점은 정치적·교육의 중립성이라는 말입니다. 우선 공무원 혹은 교원의 중립성이란 교육현장에서 혹은 업무 처리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고 행동하는 것은 헌법적 권리로 오히려 권장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공무원법으로 헌법적 권리를 포괄적으로 제한할 수 있다는 발상을 인정했다는 사실이 납득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상 중립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 이야기가 아니고 최근 캐나다 대법원이 내린 판결문의 일부입니다. 판결문의 일부를 해석해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공공영역에서 중립성의 달성 노력이 이 나라(캐나다)의 주요 과제가 되고 있다. ...... 우리는 또한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절대적 중립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받아들여야 한다.”

 

당연히 우리가 항상 중립적인 관점에서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할 수 있다면 최상입니다. 그러나 캐나다 대법원은 인간이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결한 것이었지요. 사실 우리는 언론도 절대로 공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TV와 신문을 볼 때마다 매일 아니 매순간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이 판결문이 나온 사건은 우리의 사건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사건입니다. 캐나다 퀘백주 정부는 강제로 종교다양성교육을 시키려 시도했습니다. 정부는 종교가 캐나다인들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를 공공영역이나 교육에서 배제할 수 없으므로 종교교육을 인정하는 대신 강제로 교육과정에 종교다양성교육을 포함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단체를 포함한 일부 종교단체들이 그 교육의 내용이 특정 종교에 편향적이거나 또는 모든 종교가 다 같은 것이라는 교육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캐나다 대법원은 이 선언과 함께 원고승소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절대적 중립성이란 존재할 수 없는 소설이며, 이는 언제나 더 큰 힘을 가진 자가 힘없는 자들에게 가하는 폭력의 근거일 뿐입니다. 크게 양보해서 말한다면, 중립이 반드시 요구되는 사람 혹은 집단에게는 정당에 대해 포괄적 반대나 지지를 금지할 수는 있어도, 정부나 정당의 정책이나 인물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이런 활동이 허용되어야 합니다. 또 중립이란 모두 다 똑 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체주의적 발상일 뿐입니다.

 

또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정부정책과 국정운영에 대해 반대하는 것을 특정세력에 대해 집단적으로 반대하는 것으로 해석했다는 점입니다. 나중에 이번 19대 총선결과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만, 이는 오히려 특정세력이라고 지칭된 그 집단이 철저하게 계급의식 속에서 행동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정책에 반대하면 자기 집단에 대한 반대 혹은 나아가서 도전으로 둔갑해 버리는 것이지요. 한국에서는 오히려 빼앗기고 차별 받는 사람들에게 계급의식이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사실이 우리나라의 야만성을 잉태하는 자궁이지요.

 

나는 두 나라의 대법원이 각각 내린 두 개의 판결을 보면서 아직도 우리 대법원이 얼마나 인간의 본성에 대한 몰이해 속에서 계급적인 판결하고 있는지 그 무식한 용감함에 경악합니다.

(2012.4.19.)

지난 1월말부터 2월초까지 내가 뉴스를 접할 수단이 없었던 동안 나꼼수와 관련된 사건이 크게 뉴스가 되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페이스북을 통해 뒤늦게 파악한 이야기로는 나꼼수에서 정봉주 전의원에 대한 지지를 표시하기 위해 비키니시위를 하라는 멘트를 했고 여기에 호응한 한 여기자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남성의 마초근성을 드러낸 것이라는 비난과 함께 어느 분이 이일로 나꼼수에 대한 지지를 내려놓는다고 했다는 것, 그리고 많은 분들이 비슷한 의미의 글을 썼다는 사실 정도이다. 물론 나꼼수 측은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여 이런 비난을 증폭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 지지한다는 말은 간단하다. 가카헌정방송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대통령과 정부여당에 관한 여러 가지 의혹을 제기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며 즐거워했다. 이처럼 한 가지라도 생각이 같으면 지지할 수 있다. 그러나 지지를 내려놓는다는 말은 매우 신중한 것이어서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에서 생각이 전혀 다를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여전히 나꼼수를 지지한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 종교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비정규직으로 사람들의 삶을 불안하게 만들고 빈부격차를 가속화 하며 자본의 힘으로 다수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경제사회체제(즉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반대한다. 둘째 사람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모든 행위에 반대한다. 그래서 남북한에서 독재권력을 정당화하고 살인의 핑계로 삼아온 남북한 대치상황을 깨고, 평화로운 공존과 나아가 평화통일을 지향해야한다고 믿는다. 나는 이 두 가지에서 나와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이나 정당, 권력에 반대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에서 일치한다면 다른 부분에서 의견이 달라도 논쟁은 할지언정 그것 때문에 지지를 내려놓지는 않는다.

 

내가 고 노무현대통령이 후보였던 시절에 선거운동을 돕기 위해 노력했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 지지를 접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분은 취임초기에 남북관계를 고 김대중대통령시절 이전으로 돌려놓는 특검에 동의했다. 내게 절차적 정당성은 죄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형장의 이슬로 혹은 고문으로 죽게 만든 남북한 대치상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외환위기로 우리나라에 이미 이식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 체제를 더욱 확고하게 정착시키기 위한 한미FTA의 시작은 결정적으로 그분에 대한 지지를 접게 만들었다. 물론 그분이 돌아가신 후 교수들의 서명운동을 주도하였지만, 이는 그분의 다른 업적을 높게 평가했으며 이명박정권의 폭력성에 대한 항거였지 노대통령에 대한 지지선언은 아니었다.

 

나는 나꼼수 사건으로 지지를 내려놓았다는 분들도 이 같은 원칙과 신중한 판단 끝에 한 것이라고 믿는다. 내 생각과 다른 점이 발견되는 사람마다 지지를 내려놓는다면 결국 모든 의 기준이 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며, 내가 권력을 잡는다면 나도 박정희나 전두환 그리고 이명박처럼 될 것이다. 그래서 지지를 내려놓는다는 말은 자신의 원칙에 따라 신중하게 판단한 후에 비로소 할 수 있는 말이다. (2012/2/24)  



요즘 곽교육감이 세간의 도마 위에 있는 모양입니다. 나는 그분과 일면식도 없습니다. 그저 그동안 그분이 해온 일을 신문을 통해 알고 있을 뿐이지요. 특히 서울시 교육감이 되기 전과 이후에 하신 일들을 압니다. 그전에는 그런 분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니까요. 그런데 2억원 사건으로 다시 그분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박재동화백이 그랬던 것처럼 같이 돌맞을 생각으로 이글을 씁니다(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94937.html).

우선 그분은 법학자로서 문제가 될 일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변호사와는 다르지요. 많은 변호사들은 돈을 위해 법을 다루는 사람이지만 법학자는 법정신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해온 일들을 볼 때 그렇게 믿을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검찰과 일부 언론들이 자꾸 피의사실을 흘리고 확대 재생산하는 것을 보면 수구집단의 집단 이지메라는 의심이 듭니다. 검찰이 정말 자신 있다면 조용히 수사하고 처리한 후 발표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곽교육감과 관련하여 무상급식 문제로 오세훈시장이 물러나는 상황에 이르렀다면 돌다리도 두들겨 보며 나아가야 하는 게 정상적인 사고입니다.

내가 이글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며칠 전 한 시사평론가의 글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진보 교육감으로서 높은 도덕성을 거론하며 법적으로 문제 없어도 사퇴하라고 압박했습니다. 곽교육감의 해명대로라면 오히려 도덕적으로 칭친을 받아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내가 지금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는 성구를 인용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나마도 언제나 죄많은 보수인사를 비호하기 위해서만 사용된 경구여서 별로 고민해볼 가치도 없지만 말입니다.

나는 소위 자칭 진보라는 우리들의 결벽증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 결벽증이라는 게(나도 젊어서는 그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만) 종종 큰일을 그르칩니다.
 
노무현정부 초기 남북관계가 그러했지요. 김대중정부에서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과정에 들은 비용을 보수진영이 특검하자고 했을 때 남북관계의 개선이라는 큰 역사적 과업 앞에 그 비용을 특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거부했어야 할 노 대통령은 절차적 정당성을 주장하며 덥썩 수용하였지요. 그 결과는 자신이 임기말에 방북하며 관계를 정상화할 때까지 정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MB정부가 남북관계를 완전히 5공수준으로 회귀시킬 수 있었던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법성 여부보다 도덕성을 거론하며 압박하여 사퇴시키면 어떻게 될까요? 더 좋은 청렴한 새 교육감이 선출될까요? 아닙니다. 그 이전 교육감보다 더 황당한 교육파괴자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 이후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밝혀져도 되돌리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이미 MB정부 초기에 정연주 KBS 전 사장의 사건으로 뼈저리게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지금 KBS가 저 모양으로 박살난 직접적인 사건 아닙니까? 우리는 얼마나 더 짓밟히고 깨져야 이 허울 뿐인 결벽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수도승이 아닙니다.    
민나 도로보데스

‘모두가 도둑놈이다.’라는 뜻의 일본말입니다. 사실인지 여부는 확인해 보지 못했습니다만, 내가 1980년대 중반에 듣기로는 전두환 일가의 부정부패가 드러나자 일본의 한 신문에서 한국을 비하하면서 쓴 사설의 제목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자꾸 이 말이 생각납니다. 현대자동차 노조가 이번 노사협약에 장기근속 자녀의 입사시 가산점제도를 포함시키라고 요구했다는 소식 때문입니다.

얼마 전 외교통상부장관이 자기 딸을 외교부 공무원에 특별 채용하여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외교통상부는 각종 FTA협정에서 협정문조차 제대로 번역하지 못했던 매우 비전문적인 집단인데, 그들이 일은 뭣같이 하면서 먹을 거만 챙겼던 셈입니다. 그래서 온 국민의 분노를 샀습니다.

북한의 김정일 정권은 호시탐탐 3대 세습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직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긴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런 징후가 몇 번 포착되어 언론에 보도되곤 했습니다. 국민이 굶주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그 국민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내놓기라도 해야 할 텐데, 오히려 권력을 세습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은 파렴치한 일입니다.

MB정부는 어떻습니까? 이건 국민 목숨이 그저 소모품일 뿐입니다. 국민과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인 한나라당이 차기 대권을 거머쥔다 해도 계속될 가능성 별로 높지 않은 4대강 사업을 임기 내에 해치우려고 속도전에 나섰고, 이 와중에 산재사고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세입자 강제철거로 많은 생명을 앗아갔던 용산재개발사업, 핵발전소사고로 온 세계가 떠들썩할 때도 외국의 핵발전소 기공식에 가는 등 도대체 밀어붙이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게 무엇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지금 현대자동차노조가 그렇습니다. 가산점제도는, 이미 군복무자 가산점제도 논란에서 보았듯이, 지금처럼 극단적인 취업경쟁구도 아래에서는 아무리 작은 점수라도 당락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정말 이런 혜택을 누릴 만큼 일을 잘해서 현대차가 돈을 많이 벌고 있는 것일까요? 현대차가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비정규직과 하청업체 노동자의 낮은 임금 덕분입니다. 본인들은 높은 임금으로 자신들의 몫을 다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뜻있는 이들이 이런 노사협상안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지만 기아자동차나 GM도 하고 있는 일이라고 강변하면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더 우스운 일은 정작 MB정부는 비록 표를 얻기 위해 시작했을 것으로 의심받고 있고 그나마도 흐지부지되고 있지만, 동반성장을 주장하며 하청기업을 배려하는 정책을 도입할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결국 노동자들은 더욱더 하청업체 노동자를 착취하고 보수정부가 오히려 하청업체를 도와주려는 정책을 펼치는 형세가 된 것이지요.

진보는 언제나 보수에 비해 도덕적 우월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게 무너지면 진보가 지향하는 목표가 보수의 주장에 비해 더 나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정규직 해소와 현대차의 이익 중 일정부분을 현대차노조가 직접 하청업체 노동자들에게 배분해주는 문제를 가지고 협상을 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해서 사측이 강력한 공권력을 동원하여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을 노조 스스로 정당화해주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나는 사실은 현대차노조가 이런 목표를 가지고, 다른 문제로 시끄럽게 만들어 시선을 빼앗은 뒤 진짜 목표를 달성하려는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 우려가 쓸데없는 시간낭비이기를 바랍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정말 이 나라는 ‘민나 도로보데스’이기 때문입니다.
(2011.4.25)

세 가지 세습이야기: 야만과 혁명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일이 자기 아들 김정은에게 권력을 세습하기 위한 조치를 시작해 한 동안 말이 많았습니다. 나는 이 일을 보며 세 가지 세습을 생각했습니다. 이 사건들은 불행하게도 이 민족이 얼마나 야만적인가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빙산의 일각이자 피를 부르는 소리로 들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김정운의 세습

한겨레는 지난 9월 29일 밤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셋째 아들 김정은이 28일 열린 제3차 노동당 대표자회와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됐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9일 보도했다. ...... 김정은은 인민군을 지휘하고 군사정책을 총괄하는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올라 중앙군사위 위원장인 아버지에 이은 군사 분야 2인자의 위상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직은 이번에 신설됐다. 김정은은 앞으로 이를 기반으로 김 위원장의 후원과 친위 세력의 지원 아래 군권을 장악하고 후계 체제를 확립해 나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 ”

 

이재용의 세습

삼성가의 재벌 세습도 말이 많습니다. 삼성의 창업자 고 이병철회장은 아들 이건희에게 물려 주었고 이는 다시 3대로 이어져 이재용에게 상속의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 불법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만, 세습은 거침없이 이루어집니다. 김용철변호사는 저서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거대한 비자금을 조성하고, ......(이를) 각 분야에 던져주어 부패시킴으로써 공적 기능을 무력화하고 ...... 자신들의 영속불변의 부당한 권력체계를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경영권 불법 세습 및 이 과정에서 저지른 법정 증거 조작’이 가능했다고 보지만 국가기관은 오히려 검증 절차를 통해 이런 주장들이 근거없다고 결론’ 내렸다는 취지입니다.

 

고급공무원의 세습

그런가 하면 외교통상부가 유명환 장관의 딸을 외교부에 ‘특채’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글자 그대로 특(혜를 주어)채(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 장관은 뒤늦게 사과하고 딸의 응모를 취소하겠다고 했지만 외교부는 채용 절차에는 흠이 없는데 오해를 받았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1차 모집 때 응시자 전원을 불합격 처리한 것은 유효기간이 지난 영어인증시험 성적을 제출한 유 장관 딸을 뽑기 위한 것이었을 개연성이 충분합니다. 시작부터 조직적이고 집요하게 일을 도모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교육청에서도 비슷한 특혜채용이 있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데도 정부는 5급 공무원 특채 비율을 50%까지 늘리겠다는 행정고시 개편안을 내놓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보입니다. 모두 법률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검증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김정운에게 세습하는 것은 북한 체제 상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재용에게 세습하는 것도 국가기관이 문제없다고 해주었습니다. 유장관의 딸을 특혜 채용한 것도 제도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5급공무원 특채를 늘리겠다고 합니다. 특채 확대는 필연적으로 상류층 자녀가 상류사회를 상속받는 통로로 사용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김정일도 비난받을 게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야만은 더 큰 야만을 부릅니다. 합법을 가장한 힘의 세습은 언제나 있었고 그 모순이 극대화되면 시민 혁명이 따르곤 했습니다. 근대사회의 시작이 바로 그것이었지요. 공산주의 혁명은 어떤 의미에서 현대사회의 시작이었습니다. 반대로 세습체제를 조금이라도 연장하고자 하던 자들이 늘 택했던 방법은 국민의 눈과 귀를 막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방송통신위원회가 그 일을 앞장서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진 못합니다. 나는 오늘도 이 세상에서 부디 피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5월 중순 대전에서 열렸던 화물연대 시위현장에 노조원들이 깃발을 들고 행진에 나섰다가 깃발을 걸었던 대나무 깃대로 경찰에 맞서서 휘두르게 되었답니다. 이일에 대해 대통령이 "수많은 시위대가 죽창을 휘두르는 장면이 전 세계에 보도돼 한국 이미지에 손상을 입혔다. 이런 후진성을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논란에서 과연 우리들은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언론은 죽창이라고 쓰기가 조심스러워서 죽봉이라고 쓰려고 했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흥분했을 때 손에 무언가가 쥐어 있으면 그것이 무엇이던 휘두르게 됩니다. 그래서 시위대는 손에 아무것도 쥐지 않는 것이 좋고, 경찰은 시위대가 무엇인가를 쥐고 있다면 자극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번에도 만장을 들고 가는 시위대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흥분한 시위대가 만장을 달았던 대나무를 휘둘렀던 것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갑자기 ‘죽창’이라고 말하면서 다시 시끄러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창이라는 표현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대통령이 이를 ‘한국 이미지의 손상’으로 이해하고 있고 나아가 극복해야 할 ‘후진성’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자유선진국이라면 국민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의사표시를 합니다. 그리고 그 의사표시가 강제로 차단되거나 무시되고 있다고 느낄 때는 과격한 방법으로 의사표시를 시도하게 됩니다.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에서 노동자나 학생들의 과격 시위는 종종 있는 일이며 이는 의사가 반영되지 않을 때 택하는 일상적인 방법입니다. 게다가, 최근 태국이나 중국에서 본 것처럼, 선진국에 비해 의사표시의 자유가 훨씬 제한되는 개발도상국들이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 있음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현상이 바로 과격 시위입니다.

따라서 과격 시위 자체가 그 국가의 이미지에 손상을 입히는 것도 아니고 후진성을 보여주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과격한 시위가 발생할 정도로 의사표시의 길이 막혀있거나 국민의 의견이 묵살되고 있는 후진국이라는 점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국가 이미지의 손상이며, 극복해야할 후진성입니다.

기독교방송(CBS)과 인터뷰에서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스스로 가지지 못하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에 대해 전전긍긍하는 우리 사회의 구시대적인 인물의 모습을 그대로 잘 드러낸 심리는 아닐까. … 그때의 심리상태는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지 못하고 남의 눈을 통해 자기를 볼 수밖에 없는 전근대적이고 식민지적인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지적을 많이 하거든요. … 일차적으로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보는가의 문제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지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2009.05.20.)

어떤 이유로도 학살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나는 지난 한달 간을 계속 글을 써야 하는지 참담한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새해 들어 계속 들려오는 여러 종류의 학살 소식 때문입니다. 아마 세상 소식을 들으며 사는 분이라면 중동의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이스라엘군의 민간인 학살이라든가, 용산의 재개발 지구의 학살 소식, 그리고 강모라는 사람이 저지른 연쇄살인 이야기를 잘 알 것입니다.

학살피해자에서 학살을 즐기는 흉악범으로 변한 유태인들

올 초 이스라엘군은 모든 외국 언론을 통제한 상태에서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공격의 대상이 군사시설이나 군인이라고 하지만 많은 목격자들과 증거들은 민간인 학살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시장을 폭격하고, 의약품과 식량을 보관하던 유엔 구호시설과 피해자들을 치료해야 할 주요 병원들을 모두 폭격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틈만 나면 독일의 나찌 치하에서 수많은 동족을 잃었다고 울면서 세계의 동정을 유도하던 그들이 사실은 더 잔인하고 치밀한 방법으로 학살을 자행하고 심지어는 이를 구경하며 즐기는 미치광이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용산 민간인 학살

재개발 사업이 얼마나 큰 이권이 걸린 일인지는 수시로 들려오는 재개발 비리사건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곳에서 밀려나는 세입자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일궈온 삶의 터전과 생계수단에 대해 최소한 보장도 받지 못합니다. 오직 이익이라는 거대한 마귀 앞에 할퀴고 희생될 뿐입니다. 그래서 공정성이 생명인 경찰 혹은 공권력이란 사회적 합의에 의해 문제가 풀릴 수 있도록 안전을 보장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과적으로 어느 한쪽만의 이익을 보호하게 되는 작전 때문에 벌어진 이 사건은 ‘용산참사’가 아닙니다. ‘용산 민간인 학살입니다. 죽은 경찰관 역시 상관의 지시 때문에 죽음의 자리에 뛰어든 것 아닙니까?

강모라는 연쇄살인범과 다를 게 없어

우리가 보고 있는 이런 집단은 겉보기엔 별 문제 없는 이웃이지만 뒤에서는 흉악한 살인마였던 강모라는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겐 나찌의 희생자로 동정을 받지만 자신은 학살을 일삼는 것. 시민을 보호해야 할 경찰에게 용역회사까지 앞세우고 대규모 사상자가 날게 뻔히 보이는 작전을 지시하는 것. 사상자와 가족들에게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주는 발언을 하는 것. 모두 다 연쇄살인과 다를 게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철학이나 이념, 종교와 사상도 사람 죽이는 것을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악마의 발광일 뿐입니다.

 

오늘(7월 3일 오전 11시) 전북지역 대학교수들이 촛불집회로 시작된 이명박 정부가 안고 있는 여러 정책적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적절한 대응책을 강구하기 위한 모임을 결성하고 첫 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성명서를 옮겨 적습니다.


쇠고기 재협상 및 민의의 수용을 촉구한다

쇠고기 협상 문제로 촉발된 국민들의 대정부 저항이 다수 시민들의 희생과 더불어 국가적인 소모전의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이에 우리 전북지역 교수들은 교수사회 고유의 전문성과 절제된 참여 의식에 바탕한 한시적인 연대체로서 ‘지역교수대책회의’를 결성하였으며, 앞으로 도내 교수들의 뜻과 지혜를 모아 이번 사태의 조기 수습을 위한 미래지향적인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돌이켜보면 현 정부는 출범 이전에 이미 ‘잃어버린 10년’을 공공연하게 역설하는가 하면 출범 직후에는 심지어 임기가 보장된 공공기관장들에 대해서마저 사퇴를 강제함으로써, 정부 스스로 국가의 정체성과 국가정책의 연속성을 현저하게 훼손하였다. 그런 가운데 인사, 외교, 교육, 언론, 의료, 복지, 종교 등 여러 부문에 있어 상식 밖의 오만과 독선과 편향성을 드러냈고, 특히 초․중등교육에 있어서는 마치 정부 스스로 청소년들의 창의성을 말살하고 숨통을 조이려는 듯한 기형적인 교육정책들을 쏟아냈다.

이렇게 볼 때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고, 문제의 쇠고기 협상이 절차상의 졸속과 외교상의 굴욕으로 얼룩지게 된 것도 위와 같은 오만과 독선과 편향성에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촛불시위로 대변되는 근래의 범국민적 저항은, 그것이 쇠고기 협상을 계기로 촉발되고 가시화되었을 뿐, 현 정부의 기본 노선과 주요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으로 이해된다. 이와 더불어 대다수 국민들에게 현 정부에 대한 총체적인 불신감과 대통령에 대한 심각한 수준의 부정적인 정서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인식 아래 우리는 우선 온 국민에게 이른바 ‘진보’와 ‘보수’ 또는 ‘우파’와 ‘좌파’라는 막연한 대립을 넘어서서 상생과 평화의 공동체 의식을 공유하고 또 실천할 것을 온 국민에게 간곡히 호소한다. 그리고 현 정부에게 촛불시위로 드러난 민의를 왜곡하거나 억압할 것이 아니라 대폭적으로 수용하는 가운데 그에 상응하는 정책 전환을 조기에 실행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1 . 졸속으로 이루어진 굴욕적인 대미 쇠고기 협상을 원점에서 재개하라.

1. 지난 정부에서 임명된 공공기관장들의 법률상의 임기를 보장하라.

1. 각종 언론을 통제, 탄압, 장악하려는 일체의 기도를 즉각 중지하라.

1. 초․중등교육의 제도적인 공공성과 내용상의 창의성을 제고하라.

1. 모든 정책의 수립 및 집행에 있어 지역, 계층, 종교 편향성을 배제하라.

1. 촛불 민의의 조기 대폭 수용이 국민과 국가를 위한 선택임을 명심하라.

 

2008년 7월 3일

쇠고기재협상 및 민의수용을 촉구하는 전북지역대학교수 일동

울입니다. 이 겨울, 추위를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따뜻한 운동을 하면 열이 납니다.

번 대통령선거에 대해 말들이 많습니다. 첫째는 다시 확연하게 지역구도를 보여주었다는 의견입니다. 노대통령이 호남사람이 아닌데도 이런 말이 나올 만하게 구도가 만들어진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둘째는 노무현정부 심판론입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의견입니다. 지역에는 노무현을 심판하는데 왜 정동영이 당해야 하느냐며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참여정부의 잘잘못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분이기는 아예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경제문제가 일찍부터 대선의 쟁점이 된 탓에 선거다운 선거를 하지도 않은 채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소수지만 교묘하게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삼성비자금사건, 총기탈취사건, 태안반도 기름유출사고 등이 대선 자체를 재미없는 사건으로 전락시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는 이런 의견들이 옳고 그른지를 평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것은 소위 개혁세력이 민주화 이후의 역사를 개척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민주화 과정은 투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얻은 값진 것이었지요. 그러나 역사는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민주화라는 열매는 단맛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여는 밑거름이어야 했던 것이지요. 이미 오랫동안 많은 민주화 세력이 현실 정치에 참여했다가 실패했던 원인과 같은 바로 그것 말입니다.

여정부를 만들었던 시민운동세력의 운동방향은 따뜻한 운동이어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냉철한 정신과 뜨거운 가슴으로 몸부림치는 게 민주화 운동이었다면, 민주화 이후에는 민주화를 완성하기 위한 정치운동 뿐 아니라 외환위기로 어려워진 이웃의 아픔을 감싸 안으며 위로하고 사랑을 나누는 운동을 해야 했지 않은가 돌아보게 됩니다. 민주화운동이 권력을 쟁취하여 남을 공격하고 과실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행동으로 삶으로 보여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론 참여정부에 참여했던 개혁세력에게 더 큰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만 우리에게도 변화를 주도하지 못한 책임이 있습니다. 게다가 은근히 힘을 즐기려하는 마음이 우리에게는 없었는지 반성할 일입니다. 그리고 추운 겨울이 시작되는 지금 따뜻한 운동으로 몸을 덥혀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글은 제가 편집을 책임지고 있는 시민의 도시 2008년 1월호에도 실립니다.)

명문고교가 필요한 이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 하다 보면 자녀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관심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다 보면 대부분의 경우 자녀교육 문제가 등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녀의 학업신장을 위해 어떻게 공부시켜야 하는가? 하는 현실적인 고민을 꺼내 놓습니다. 혹은 자기의 경험담이나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상담을 해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군산의 고등학교 수준이 너무 낮다든가 상위권 학생들이 타 도시로 빠져 나가 심각한 문제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사 가는 사람들도 종종 보입니다. 이런 주장에 편승하여 끊임없이 나오는 말이 군산에 특목고가 필요하다든가 고교평준화를 폐지하여 명문고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다행히 전북외고가 군산에 위치하게 되는 성과도 있었습니다.

이런 주장을 듣다보면 나는 그분들이 부럽기도 합니다. 자녀들이 공부를 잘해서 고교입시를 부활시켰을 때 소위 명문고에 합격할 수 있는 자녀를 둔 부모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명문고를 다니면 무엇이 좋은 것일까요? 대학입시에 유리한가요? 아니면 인생을 잘 사는데 유리한 것일까요? 그분들에게 명문고는 대학입시에 유리한 입시명문이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즘 교육정책이 고교내신을 강화하는 것임을 보면 명문고나 특목고를 다니는 것이 대학진학에 꼭 유리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에게 유리해지도록 대학입시제도를 흔들면서 까지 이렇게 특목고나 명문고에 대한 요구가 끊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패거리주의 때문 아닐까요? 명문고가 필요한 이유는 다른 표면적인 것들 뒤에 숨은 다른 뜻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이지요. 사실 명문고라는 게 있고 거기를 졸업하면 명문대학을 나오는 것보다 더 신바람 나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힘이 있다는 직업을 가진 친구를 많이 두게 된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이들이 서로 상부상조하면 이 나라에서 못 할 일이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명문고란 집단화하여 권력을 독점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필요한 것 아니냔 의심 말입니다.

그런데 돈 벌고 출세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전부인가요? 혹시 사람답게 사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한 교육 아닌가요? 자기보다 못한 부분을 가진 사람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참 교육 아닌가 말입니다. 성경에도 있지요? 99마리 양 가진 사람이 한 마리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는다는... 그런 것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은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명문고를 인류와 사회 혹은 약자를 위해 기여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배출했느냐로 평가한다고 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명문고 타령을 할까요?

(2007.7.24)

서울대가 2008학년도 정시모집에 공인어학시험(토익, 토플, 텝스 등) 성적을 반영하겠다고 해서 소란스럽습니다. 물론 여러 교육단체들의 항의를 받고 철회했지만 이 사건의 뒤에 숨긴 의미를 한번쯤 다시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서울대는 이들 시험성적을 반영하겠다는 계획의 취지가 “공교육정상화를 위해 비교과영역을 반영한다”는 것이었는데 학부모와 수험생의 우려 때문에 철회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실을 특종 보도한 한겨레신문 기사를 살펴보면 이 우려란 사교육을 부채질한다는 것입니다. 2005년 한 해 동안 토익 응시자 수는 185만 6천여 명이었고 이 중 5만 8천여 명이 초, 중, 고생이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옳은 지적입니다.

사교육 부채질하는 공인어학시험성적 반영

그러나 저는 사교육조장의 문제 외에도 반드시 한번 생각하고 넘어가야할 더 큰 문제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한미 FTA협상에서 미국측 수석대표가 했던 “한국의 공교육시장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SAT(이는 미국의 수능시험입니다)와 인터넷교육시장에는 관심이 있다”는 발언과 관계가 있습니다.

한국은 그 동안 공교육정상화를 위해 시험성적에만 의존하던 입시제도를 다양한 평가방법 도입이라는 방향으로 계속 수정해왔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수능성적도 등급만 공개하게 됩니다. 선진국처럼 대학 스스로 다양한 선발방법을 개발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미국은 이런 한국에서 SAT를 실시하여 점수를 제공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상위권 대학들은 대부분 미국의 SAT 성적을 제출하라고 할 것이고 우리 대학입시를 미국기관이 좌지우지하게 됩니다. 공교육시장을 개방시키지 않아도 사실상 우리 공교육을 지배하는 것이지요.

이런 마당에 서울대가 공인외국어시험성적을 반영하겠다는 것은 미국의 교육시장 개방전략을 도와주는 꼴입니다. 물론 서울대는 공인시험목록에 자신들이 개발한 텝스를 끼워 동반이익을 추구하는 영민함까지 보여주었습니다. 어쩐지 구한말 매국노들의 사익추구 행태와 비슷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한미FTA를 통한 미국의 우리 대학입시 개입을 인정하는 꼴

두 번째로 고민해볼 문제는 미국 최고 명문대학들의 집합소라는 아이비리그의 대학들이 최근 SAT가 교육평등권을 위협한다 하여 SAT 반영을 기피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부유층일수록 사교육을 통해 SAT 대비 집중훈련을 하기 때문에 SAT로 학생을 선발하면 오히려 다양한 인재를 뽑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대학들이 늘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대학들이 수능과 같이 숫자로 제시된 성적에 의존하려는 태도에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교육을 기득권층의 기득권 유지수단으로 변질시키고 있다는 점과 우리 대학들이 얼마나 창의성이 빈곤한가를 보여준다는 것이지요.

시험은 오히려 다양한 인재발굴 기회를 가로막을 수 있어

세 번째 문제는 앞의 두 문제의 원인일지도 모르는 사실인데, 우리나라 교수들의 다양성 부족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상위권 대학 교수가 되려면 거의 무조건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와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미국 편중현상은 교수들의 연구주제가 미국에 편중되게 만들고 따라서 암묵적으로 미국의 제도를 좋은 것으로 전제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국 유학파 교수가 절대 다수인 것도 바람직하지 않아

교육단체 대표들이 서울대를 방문했을 때 공개토론회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울대가 오히려 토론회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이는 공인어학시험성적 반영계획이 얼마나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소신과 철학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가 잘 갖추어졌다면 떳떳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정부의 가장 큰 고질병이기도 합니다만, 파급이 큰 제도를 도입할 때일수록 정보를 사전에 공개하여 다양한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볼 기회를 갖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어쩌다가 서울대가 한미FTA를 오직 자기들의 서랍 속에서만 결정하려는 데서 드러난 이 정부의 폭력성을 따라 하려했는지 안타깝습니다.
우리사회의 신비한 힘, 국방의 의무

우리에게는 정말 신비한 힘이 하나 있다. 그 힘은 인간의 가장 존엄한 권리라는 ‘양심의 자유’를 능가한다. 그래서 보통은 그냥 부르지 못하고 ‘신성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만 한다. 그 것은 가끔 이상한 곳에서도 힘을 발휘해 나는 종종 ‘위대한 지도자 수령 동지’라는 말과 구분하지 못해 애를 먹기도 한다. 덕분에 어떤 사람은 두 번씩이나 다된 밥에 재를 뿌린 적도 있다. 자신의 것도 아닌 아들의 것 때문에 말이다. 이름 하여 ‘국방의 의무’.

양심의 자유는 불가능한 것일까?

전쟁과 살인을 반대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것이 죄라고 가르치며 무조건 감옥에 가두는 나라가 있다. 어느 통계를 보니 세계에서 병역기피로 인한 수감자 수가 가장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한다. 그럼 가장 비양심적인 국가가 되나? 혼란스럽다. 왜 우리에겐 양심의 자유에 따라 총을 들지 않을 권리가 박탈된 것일까?

우리 사회의 거대 잠수함, 대체복무제

최근 한 판사가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면서 세상이 시끄럽다. 이번 기회에 대체복무제를 입법화하겠다는 사람들로부터 이 땅이 금방이라도 공산화 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까지 그야말로 수구에서 진보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반응이 보도되고 있다.
그런데 정말 대체복무제가 도입되면 모두들 군대가기를 기피할까? 여기에는 암묵적인 전제가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동안 자기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은 사람들은 대게 부자나 권력자들이었다. 그래서 대체복무제는 당연히 그들을 위한 특혜 수단이 될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양심에 따라 대체복무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군복무기간보다 더 긴 시간을 소방관으로 근무하게 한다면 어떨까? 양심에 따라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라고 말이다. 물론 소록도에 가서 생색내기 몇 달 한 뒤에 대통령 낙선했다고 슬그머니 발 빼는 그런 짓 안 통하게 말이다.

아직도 소총수가 가장 중요한 군사력이라구요?

그런데 이런 논쟁에서 가장 골 때리는 이야기는 모두 군 입대를 기피하여 군인 자원이 부족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먼저 그분들께 큰 절을 올리며 감사드린다. 우리 사회가 그렇게 전쟁과 살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인정해 주는데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군대는 이미 비정상적으로 비대하다. 하루 빨리 군인의 수를 줄이고 현대전에 맞는 전투력으로 변신해야만 한다. 미군이 막강한 것은 군사력 때문이 아니라 현대화된 장비 때문이다.
지난 번 일본의 미치광이들이 독도 상륙을 시도한다고 했을 때 나는 아찔했다. 혹시라도 그들이 현대화된 구축함을 앞세우고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면 어찌될까? 아무리 많은 군함과 수병을 가지고 있더라도, 잠시 해상시위 정도는 하겠지만, 전투 시작과 더불어 금새 우리는 항복할 수밖에 없다. 전투력은 군인의 수에서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가뜩이나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힘의 우위가 곧 진실이다’라는 주장이 세를 얻는 마당에 일본마저 ‘그깐 짓...’ 하고 저질러 버리면 어찌할 것이냔 말이다?

군인에게는 인권도 없냐?

군인 수만 많이 만들어 놓으니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풍경이 한둘이 아니다. 우선 국방예산의 많은 부분을 군인들을 먹이고 입히는 데 사용한다. 그러면서도 ‘막강한 국방력’이란다. 머리 속엔 오직 소총수들로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 북한만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일본과 중국, 러시아 등은 생각하지 못하는가? 아무래도 자신이 너무 똑똑하게 외교를 하기 때문에 그들은 다 알아서 기어줄 줄 아나보다.
게다가 더 기막힌 것은 재해만 나면 군인들을 풀어서 노동을 시킨다는 점이다. 물론 군이 보유하고 있는 좋은 기술, 장비, 인력을 사용하는 것이라면 국민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때도 역시 막강한 군사력(이때는 노동력이 맞나?)만 주로 동원된다. 월급은 겨우 몇 만원 주면서 말이다.

제발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을 한번 둘러보시죠?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애써 보지 않은 자는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도 싸우지 않는다. 전쟁을 반대하고 살인을 거부하는 자들을 억지로 군대에 보내면 그들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훌륭한 전투요원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감옥에 넣었다가 수년 후에 내 보내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게 하면 우리 사회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싸울 수 있는 건강한 사회가 될까? 도대체 모두다 군대에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처벌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걸까?

양심을 지키겠다는 자 지키게 하라. 그러나 반드시 국방의 의무를 초과하는 양심과 생명의 일을 그들에게 부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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