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와 미신/21세기의 기독교인

엘리야 대 바알, 그리고 2002년 후반의 한국

 구약성서의 많은 내용은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갑자기 웬 성서 이야기냐고요? 그들의 역사 속에서 지금 우리의 상황을 돌아보게 만드는 기록이 있어서 함께 생각해 보자는 게지요.


이스라엘이 우리처럼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던 시기에 북쪽의 이스라엘에는 아합이라는 왕이 있었답니다. 그는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왕비로 맞이했는데, 이 여자는 바알이라는 신을 섬기는 선지자이자 한 부족의 왕이었던 엣바알의 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합은 이스라엘의 신이었던 여호와를 배반하고 바알신을 섬기게 되지요. 그들이 어떤 종교를 가졌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요? 그렇지요. 상관은 없습니다만 한 상징적인 사건을 통해 그 속에 담긴 뜻을 살피면 이게 결코 남의 일 같지가 않을게니 조금 더 참고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합왕의 궁전 근처에 포도밭이 하나 있었는데, 나봇이라는 사람의 것이었지요. 아합은 그 포도밭을 자기 채소밭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봇에게 그 포도밭을 다른 좋은 포도밭이나 또는 돈과 바꾸자고 제안합니다. 이 요구에 나봇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조상의 유업을 왕에게 넘기는 것을 금하실 것입니다.”


참고로 말하면, 여호와는 조상이 물려준 땅은 그 주인이 빚 때문에 팔았을 때조차 가장 가까운 친척부터 시작해서 친척들이 그 땅을 되무를 수 있도록 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50년 간격으로 찾아오는 희년)에는 무조건 그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정해놓았답니다. 그래서 아합은 자신의 욕심을 채울 수 없었고 근심으로 끼니를 거르기까지 했다지요. 이 때 왕비 이세벨이 이렇게 핀잔을 줍니다.

왕이 그러고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모름지기 왕이라면 힘없는 백성의 것을 마음대로 빼앗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세벨은 나봇이 사는 성의 귀족들에게 연락해서 나봇을 모함하여 죽이도록 하고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았습니다. 이세벨은 아합에게 이스라엘의 신이었던 여호와와 달리 가진 자와 힘 있는 자들의 폭력적 특권을 보장하는 바알신을 섬기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를 가르쳐 준 셈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힘 있는 자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이세벨의 폭력 앞에 굴복하여 어쩔 수 없이 바알을 섬겼지만 점점 가진 자의 특권의 맛에 길들여진 것입니다.


이 때가 바로 기독교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갈멜산에서 엘리야라는 여호와의 선지자하고 바알의 선지자 450명 사이에 대결이 벌어질 무렵입니다. 대결과정은 생략하고 아무튼 엘리야는 바알신의 선지자들을 도륙해 버립니다. 그러나 기세등등한 이세벨과 돈과 권력 맛에 길들여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엘리야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고, 실제로 많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한답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엘리야는 여호와께

저들이 다 죽이고 나만 남았다

고 말합니다. 이 때 여호와가 대답하기를

이스라엘에 아직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 칠천 명을 남겨두었다

고 말합니다. 이게 오늘 제가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게냐 구요?

최근 정치판 돌아가는 꼴과 각 언론사가 발표하는 대선 후보 지지율 한번 보십시오. 그리고 그 후보들의 면면을 살펴보십시오. 그것들을 염두에 두고 이글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오. 2002년 가을 그리고 겨울의 한국정치는 바알을 섬기는 자들과의 싸움 같지 않으십니까? 어떻습니까? 우리는 남은 칠천 명입니까?                                 (2002.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