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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World!/스포모 여행

빌바오구겐하임미술관, 포드 모델A, 바스크민족주의

빌바오, 지금은 전혀 다른 일을 하지만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던 아들이 종종 비정형성 건축의 상징이라고 말하던 빌바오구겐하임미술관이 있는 곳이다.(사진1 +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 나무위키 (namu.wiki) 참고) 이곳에 전시된 미술품보다 건물이 워낙 유명해서 내부 작품 관람에 큰 공을 들이지 않았다.(미술 까막눈이기도 하다^^). 미술관 건물을 안팎으로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입장료 값어치를 한다. 여행을 할 때는 가능한 그곳을 기억할 만한 기념품을 구입한다. 물론 그 나라의 명품 비슷한 것에는 눈도 돌리지 않아 큰 돈을 쓰는 것은 아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비싸게 주고 산(38유로) 미술관 전경을 담은 액자(사진2)가 내 책장의 한 칸을 차지했다. 

사진1: 빌바오구겐하임미술관 외관
사진2: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건진...

 
포드 모델A
호텔에 들어서니 로비에 1929년산 포드(Ford) 모델A 한 대가 전시되어 있다. 많은 분들이 잘 알고 있듯이 포드는 제조업(특히 자동차산업)에서 전설적인 인물이다. 20세기 들어와 유럽과 미국에는 많은 자동차 벤처기업이 우후죽순으로 설립되었는데, 특히 미국에 더욱 많은 자동차회사들이 생겨났다. 어떤 학자는 미국에 자동차회사가 1,500개쯤 세워졌다고 하고 또 다른 학자는 1,200개쯤 되었다고 했다. 내가 일일이 이름을 확인하면서(즉 기록이 남아있는) 조사한 자동차회사는 840여개쯤 된다. 물론 이 시기의 자동차회사는 전부 수공업생산방식으로 자동차를 만들었고, 그래서 1년에 수십대 이상 생산하는 회사는 없었다. 그러던 중 1910년경 테일러방식을 도입하여 대량생산을 시도하는 기업들이 생겨났고, 이를 위해 부품의 표준화를 고민하는 기업들도 나타났다.
포드는 1913년에 이런 움직임의 완결판을 제시했다. 당시에 넘쳐나는 이민자들을 저임금노동자로 활용할 수 있는 테일러방식에 컨베이어를 결합시켜 최초로 대량생산방식이라는 것을 창안했던 것이다.  이게 얼마나 혁명적이었는가 하면, 이렇게 탄생한 모델T의 가격은 $950로 기존 자동차의 평균가격 $2,129에 비해 현저히 낮아서 눈부시게 팔려나갔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노동자임금을 획기적으로 높여주었다. 또 그 고임금 일자리를 소외된 계층(이민자, 여성, 전과자 등)에 제공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포드의  모델T를 20세기 최고의 제조품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포드는 자신이 개발한 자동차에 모델A부터 차례대로 알파벳을 붙여나갔다. 그러니까 모델T는 20번째 개발한 모델인 셈이다.
문제는 워낙 인기가 있어서 모델T만 생산(단품종대량생산)한데서 발생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구매했고, 길에 굴러다니는 자동차는 거의 모두 모델T 한가지였다. 포드에 짓눌려 제대로 기를 펴지 못했던 많은 자동차회사들이 똘똘 뭉친게 바로 지엠(GM)의 시작이었다. 지엠은 슬론이라는 경영의 천재를 영입해서 다품종대량생산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들고 나왔다. 갑자기 소비자들은 선택의 폭이 넓어졌고, 소비자들은 포드를 버리고 지엠으로 몰려갔다.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포드는 1927년 모델T를 단종하고 첫번째 모델이었던 모델A를 새롭게 설계해서 대량생산에 나서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뒤였다.

사진3: 빌바오의 호텔 로비에서 발견한 포드 모델A 1929년 모델

 
바스크민족주의
빌바오에서 반드시 기억해야할 일의 하나는 바로 바스크민족주의 문제이다. 바스크지방은 프랑스나 스페인과 완전히 다른 언어와 문화를 지닌 독립된 지역이다. 19세기부터 독립된 국가를 만들고 싶어했지만, 위 아래에서 강대국이 압박하고 있는 모양새여서 바스크의 독립은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19세기는 물론 20세기 전반까지도 제국주의(식민주의)가 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을 위한 행동에 나선다. 이런 독립운동이 유럽의 관심을 받게된 것은 1959년 ETA(바스크민족해방운동)가 결성되어 군사투쟁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스페인 정부 인사들을 암살하기 시작했다. 이 전쟁은 1978년 스페인정부가 바스크를 자치주로 인정하면서 시들해졌다가, 2011년 ETA가 무장투쟁 종식을 선언하면서 끝났다. 자치주를 인정하는 것은 마오쩌둥의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바스크를 식민지로 가진 프랑스(북부 일부)와 스페인(대부분지역)은 물론이고, 아일랜드에서 유사한 학살 전쟁을 벌이던 영국과 중동에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을 지원하던 미국이 나서서 ETA를 테러단체로 규정하고 바스크를 압박했다. 이렇듯 1960~1970년대는 약자들이 세계에서 다양한 테러를 벌였다. 일본의 적군파까지 테러리즘의 시대였다. 이런 테러의 근본 원인은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살던 곳을 식민지로 만들고 저항하면 무자비하게 학살했던데 있다. 1980년대 이후 이런 테러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 세상이 평화를 갈구하는 고상한 인문학적 성찰 때문이 아니고 군사력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만들어진 때문이다.
아무튼 이 전쟁은 스페인 내전, 국제사회와 정치적이념(좌우, 민족주의, 파시즘, 프랑코주의 등등) 등이 총동원되어 벌어진 군사적 정치적 충돌로, 단순히 테러라고 규정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많은 전쟁 현장이나 테러 현장, 그리고 학살 현장에서 힘을 장악한 자들은 압박받고 학살당한 자들을 단순하게 한가지 개념으로 규정하곤 한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오직 승자의 바램만을 반영한 것일 뿐 진실과는 거리가 있음을 발견할 때가 많다. 제주 43사태가 그렇고, 노근리 학살이 그러했다. 가깝게는 광주항쟁을 그렇게 규정하기도 했었다.

(사족: 사진4 ) 이런 발칙한(^^?) 무지개색 건물… 멋지다! 다양성의 압살은 바로 창의성의 압살이기도 하다.

사진4: 빌바오 시내의 한 건물. 창문이 무지개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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