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경제정의(이사야서 36-37장)


히스기야 왕은, 열왕기하 18장 3절을 보면, 다윗 왕처럼 하나님의 눈에 정직하게 행동한 왕이었다. 이 히스기야 왕 시절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 중에는 최근에도 묵상한 적이 있는 이사야 36-37장에 있는 히스기야 왕과 산헤립의 대결이 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제정의에 관하여 깊이 생각해 볼거리를 제공한다. 경제정의는 지난 대선 당시 거의 모든 후보가 모두 공약으로 내세웠을 만큼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이기도 하다.


간단히 당시 배경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솔로몬 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뉘어 북쪽은 이스라엘, 남쪽은 유다라는 분단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새로이 중동지역의 패자로 등장한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먼저 북 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 다시 산헤립 왕이 남 왕국 유다를 치러 왔다(열왕기하 18장). 그리고 당시의 유다 왕이 바로 히스기야였다. 이 전쟁을 기록한 것이 이사야 36-37장의 내용이다.


먼저 36장은 앗수르의 장수 랍사게의 도전적인 연설을 두 차례 기록하고 있다. 먼저 랍사게는 5-7절에서 세 가지를 선언한다. 1) 히스기야왕은 싸울 능력이 없다. 2) 이집트(애굽)는 너를 돕는 힘이 아니라 오히려 네게 해가 될 것이다. 3) 여호와 하나님에 관하여는, 히스기야가 그 산당과 제단을 없애버렸지 않느냐? 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두 가지 내용은 객관적인 사실로 보인다. 당시 유다는 앗수르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그 이유는 랍사게의 두 번째 연설에서 짐작할 수 있으니 뒤로 미루자. 이집트에 도움을 청하는 일이 결국 유다가 지팡이에 손이 찔리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말도 역시 사실이었다. 왜적의 침입으로 중국에 손을 벌렸던 우리 역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 왜적에게 피해를 입은 것이나 왜란이 끝난 후 우리가 중국에 당한 비굴한 역사나 별로 차이가 없다. 아니 국제관계는 언제나 그래왔다.


세 번째 주장은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히스기야는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적 타락을 개혁한 왕으로 유명하다(역대하 29-31장). 그중 대표적인 일이 산당과 제단을 헐어버린 일이다. 원래 산 위의 사당과 제단은 중동 지방의 대표적인 이방신이었던 바알을 숭배하는 곳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로 그 곳에서 마치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는 듯 바알에게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예레미야 19:5). 그래서 산당이나 제단은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이 '너희가 입으로는 여호와를 섬긴다 하면서 실제로는 바알을 섬긴다.'고 질책하던 바로 그 행위의 상징이다. 바로 그런 산당과 제단을 헐어버린 개혁을 랍사게는 하나님을 자기 산당이 헐리는 수모를 당한 신으로 오해한다. 그래서 그 신은 힘이 없다고 단정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토록 바알을 경계하셨는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문명이 만나는 무역과 전쟁의 고속도로였던 가나안 사람들은 더욱 더 번영하고 싶은 욕망으로 좋으신 하나님(엘)을 대체하기 위해 신의 아들인 바알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탄생한 바알은 농사와 다산, 성장,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적당한 비를 관장하는 신이다. 바알을 섬기는 것은 그 목적이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합왕이 바알 신정통치자(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하여 저지른 일 가운데 하나가 탐나는 이웃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주인을 죽였던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다(열왕기상 21장). 이 사건은 권력도 돈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희년의 법에서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드러난다. 레위기 25장은 안식년과 희년에 관한 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8-55절은 희년의 법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먼저 희년은 7년마다 반복되는 안식년이 7번 반복된 다음 해이다. 즉 7x7=49이므로 49년째가 되는 안식년의 다음해인 50년째의 해가 희년이된다. 희년이 되면 모든 사람들이 원래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던(여호수아 11:23, 13-19장) 각자의 토지(기업)로 돌아간다. 즉 중간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다른 사람에게 팔거나 저당 잡혔던 땅을 대가없이 되돌려 받는다. 따라서 토지의 거래 가격은 희년까지 남은 해의 수로 정하였다. 노예도 해방한다. 물론 안식년과 희년에는 경작을 금하였기 때문에 49년, 50년째 되는 2년간은 휴경하게 되고 51년째부터 다시 경작을 시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48년째 해의 소출로 3년간 먹을 수 있는 양을 주시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는 모든 토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전제가 있다. 희년이 될 때까지는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통해 사유재산의 확대가 가능하지만 부는 물론이고 종의 신분도 대물림되는 것은 방지하는 제도이다. 하나님의 성품인 공평과 정의, 그리고 사랑이 경제제도를 통해서도 실현되는 법이다.

 

자 이제 다시 이사야서로 돌아가 보자. 36장 12절부터는 랍사게의 두 번째 연설이 나온다. 특히 눈여겨 볼 대목은 16, 17절이다. 랍사게는 유다 백성에게 ‘너희가 항복하면 자기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게 될 것이며, 포도원이 있는 땅에 이주시켜 주겠다.’고 한다. 공산주의자들의 선언이 있기 수천 년 전에 이미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이렇게 음식과 땅을 미끼로 유다의 항복을 유인했던 것이다. 이 말은 뒤집어 보면 당시 유다의 백성들의 다수는 극심한 가난으로 먹을 게 부족했고, 토지도 부자들에게 다 넘겨준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외적의 침입에 대항하여 싸워 지켜야 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히스기야 왕이 산헤립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던 이유였을 것이고 산헤립은 심리적 항복을 유도한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매우 간결한 히스기야 왕의 승리였다. 아니 하나님의 승리이다. 37장은 바로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37장 30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 왕에게 와서 말한 하나님의 징조이다. ‘2년간은 스스로 난 것을 먹고 3년째에는 경작하여 그 열매를 먹는다.’는 것이다. 바로 희년이다(성경적 경제의 기초원리, 대천덕, CUP, 1989). 희년이 바로 하나님이 보여주실 구원의 징조라는 것이다. 그리고 36절은 어느 날 아침 앗수르 진중의 18만 5천 병사가 몰살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산헤립은 얼굴에 열이 나 돌아갔지만 결국 자식들에게 살해된다(역대하 32:21). 이로써 하나님은 희년을 지키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을 입증해 보이셨다.

 

이 기록은 우리에게 경제정의에 관한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사람들 사이에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절대 빈곤층이 늘어나며 부와 가난이 세습되면, 언제나 균등 분배를 미끼로 이들을 미혹하는 세력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미혹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부와 가난의 세습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것이 진짜 문제이다. 하나님은 이를 죄 없다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고 잔혹한 고통의 시대를 맞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 번째는 이를 피하는 길이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는 희년의 정신뿐이라는 점이다. 우리 주님이 바로 그 희년을 선포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은 이사야 61장의 예언과 이를 인용한 누가복음 4장 18-19절에도 밝혀 놓으셨다.

 

신정국가 시대의 제도를 그대로 도입할 수는 없겠지만, 희년의 정신이 반영된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스스로 희년의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애국이기도 하고 그것이야말로 진짜 반공이다.

성찬식에 합당하지 않은 자는 누구인가?

 

[오랫동안 이곳 교회 식구들과 함께 고린도전서를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선거가 제 마음을 편하게 놔두지 않아서 묵상내용을 나누는 일에 좀 게을렀습니다. 주의 은혜!]

 

오늘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말씀은 고린도전서 1117-34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동안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말씀은 성찬식에 참여해서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죄를 짓는 것이고 그래서 병들거나 심지어 죽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고전11:27-30]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나는 이 말씀을 항상 무의식적으로 개인적인 죄를 의미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떡과 잔을 앞에 두고 늘 회개의 기도를 했습니다. 회개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성찬식에 참여하는 게 잘못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이해는 방향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먼저 성찬식의 목적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즉 성찬식의 정신은 주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주의 재림 때까지 전하는 행위라는 가름침으로 보입니다. 바로 성찬을 함께 나눔이 주님을 전하는 행위라는 것이지요. 이 성찬은 사실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한 만찬이 기원입니다.

 

[고전11:23-26]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래서 초대교회는 오늘날과 같은 성찬식이 아니라 사랑의 만찬(love feast)이라고 하는 실제 만찬을 실시했습니다. 그게 바울이 이 말씀을 편지에 쓴 원인이 된 것입니다. 문제가 있었습니다. 글자그대로 (자기 기쁨을 위해)먹고 마시는 일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 식사하지 않고 자기들(파당 지어)끼리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먹고 취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이 사랑의 만찬에 참여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17-22)

 

즉 바울이 죽음까지 거론하며 무섭게 질책하는 일은 가난한 사람들을 배제하는 우리만의 만찬이었던 것입니다. 개인의 경건이나 종교적 신비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적 죄(communal sin)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살펴야 하는 방법도 판단 받는 것을 피하는 방법도 공동체적입니다. 형제들을 기다려서 함께 만찬 하는 것 말입니다.

 

[고전11:31-34]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세상과 함께 정죄 받는다는 말은 영원한 형벌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바로 공동체적인 만찬을 함께 하지 않는 세상을 말합니다. 이는 마치 구약시대에 야훼 하나님의 가치관인 안식일-안식년-희년으로 이어지는 신앙이 아닌 풍요를 비는 바알을 섬기는 세상이 심판받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실천하지 않는 교회는 야훼를 섬긴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바알을 섬겼던 그래서 망했던 이스라엘과 같은 모습입니다.

 

성만찬은 나의 시장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가난한 자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아니 내가 먹는 밥 한 끼 한 끼가 성만찬입니다. 내 이웃을 돌아보지 않고 먹는 식사가 바로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는 성찬입니다. 두려움이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2012. 12. 13)


(14일 추가) 사실 이 말씀과 그 앞부분인 11장 전반부는 열흘 이상을 묵상해야 했던 말씀입니다.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였습니다. 전반부는 다음에 올릴 생각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일에 탐욕을 부리는 것은 나쁘다고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다른 많은 종교나 철학에서도 지적합니다. 심지어는 의학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경고하는 부분이지요. 고도 비만이나 잦은 음주가 건강에 가장 무서운 적이라고요. 방송을 통해 의학강좌를 몇 번 들어보니 온갖 성인병의 1차적인 원인은 비만과 과음이라고 하더군요. 사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생각도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데, 내가 음식을 독점하는 행동을 하나님이 기뻐 하실리가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눔은 남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나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레닌은 맑스의 자본주의 내부혁명을 실현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으며, 필요하다면 불법도 서슴치 않았다. 사상의 자유를 누리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인권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를 이데올로기로 변질시켜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실현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인권, 나아가서 생명을 파괴하는 것은 엄격하게 제한 받아야 한다.


진화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과학적 탐구 자체가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를 이데올로기로 발전시키거나 변질 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최대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들과 그 기업을 위해 종사하는 일부 과학자들은 진화과학을 이데올로기로 바꾸어 버린다.


진화과학을 돈벌이에 쓰기 위해 혹은 전쟁에 쓰기 위해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한다. 그래서 채식동물인 소에게 소의 내장 등을 갈아만든 사료를 먹이는 야만을 서슴치 않는다. 채식동물인 소를 강제로 육식이 가능한 동물로 진화시킬 수도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더 큰 돈벌이가 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정면으로 대적한 결과는 광우병이라는 참담한 저주를 인간 세상에 가져다 주었을 뿐이다.   

적의 가장 근본적인 힘은, 우리가 (이책에서) 드러내려고 하듯이, 인간의 마음 속의 완악함에 있다.


The enemy's deepest power, as we try to demonstrate, lies in the stubbornness of the human heart. 

- Hope in troubled times, p.30, Goudzwaard 외 지음 


1주일쯤 전 이 대목을 읽는데, 유명한 출애굽기의 10가지 재앙 사건이 생각났습니다. 결국 이집트사람들을 고통 가운데 빠트리고, 자신도 큰 아들을 잃었을 뿐 아니라 결국 뒤쫒다가 군대마저 잃게 된 원인은 바로왕 자신의 완악함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무엇이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는가 하는 점에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기자의 그런 표현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의미보다는 그렇게 내버려 두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로왕의 마음이 완악해진 이유가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보니, 너무나 쉬운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은 노예를 포기하지 않는, 노예를 통해 자신은 일하지 않고도 경제적인 부를 누릴 수 있는 그 삶을 포기하지 않고자 하는 탐욕이었습니다.

사람들이나 사회가 번영이나 건강, 문화나 단체의 일체감, 안전과 같은 목표에 마음을 두는 것은 전적으로 합법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루겠다는 상태에 빠져들면 절망의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 상태가 지나면 우리의 목적을 위한 수단들이 우상이요 신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에게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데려다 주는 개발권력이라는 왕관을 씌워주게 준다.

 

그런데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이나 사회들은 번영이나 건강, 안전과 같은 것들에 몰입하면 자기 손으로 만든 상징물을 신앙으로 믿게 된다고 한다. 신들은 그것을 만든 사람들을 결코 가만 놔두지 않는다. 사람이 만든 물건과 힘이 그것을 만든 사람들을 통제하여 결국 그들을 다스리는 지배권력이 된다. 우리는 물질적 풍요라는 목표에 사로잡혀 우리의 책임, 우리 사회의 다양한 힘이나 수단들, 그리고 권력들을, 신이 되어 우리에게 그의 뜻을 강요할 신들 앞에 내려놓은 것이다.

 

예를 들어, 경제성장을 지속해야 국민경제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이 더욱 효율적이 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공장을 제3세계로 옮겨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국내고용은 줄어든다


(HOPE IN TROUBLED TIMES, Bob Goudzwaard 지음, Baker Academic 출판)


[우리가 그토록 사모하고 섬기는 경제성장이 결국 우리의 직업을 빼앗고 있다!!!]

발전의 그늘


지금까지 명백한 해법이라 믿었던 더 많은 돈, 기술, 과학, 그리고 시장의 힘은 기대와 달리 종종 글로벌 빈곤, 글로벌 불안, 환경파괴, 그리고 금융시장의 횡포와 같은 더 큰 파괴의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발전의 그늘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데도 오늘날 지도자들은 다른 대안(There is no alternative, TINA)이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분명히 성장과 발전의 권력이 이를 추진하는 국가나 사람들의 힘보다 더 강력하다.

 

오늘날의 문제들은 발전의 도구나 수단들로는 점점 더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그 수단과 도구들이 우리에게 점점 더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바로 그 발전을 위해 그 수단과 도구들을 불가피한 것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전 자체가 우리에게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주고 있다. Karl Lӧwith발전은 스스로 발전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를 멈추게 하거나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일까?”라고 말했다. 또는 우리가 다소간에 발전의 권력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 권력은 다시 우리를 무력하고 얼게 만들어 아무런 행동을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HOPE IN TROUBLED TIMES, Bob Goudswaard 지음, Baker Academic 출판)

금융시장-이 시대의 문제와 해법의 모순4


원래 금융은 실물경제를 뒷받침하여 안정적인 경제운용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금융자본이 실물경제를 장악하고서 단기 수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경제를 더욱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글로벌 자본들의 위협은 국가들을 잠 못 들게 하고 있다. 새로운 빅브라더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왜 국가들과 세계 전체가 현대의 글로벌 금융시장의 자율에 그토록 의존하게 되었는가? 무엇이 정부들로 하여금 오직 감시의 눈을 늦추지 않는 빅브라더의 눈에 들기 위해 지출을 크게 줄여 국가경제에 짐을 지우고 있는가?

 

소로스는 금융자본은 특권적 위치를 즐기고 있다. ... (그러나) 금융시장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고 탄식한다. 결국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신뢰할 수 없는 도구가 선장의 자리에 앉아 실물경제를 좌지우지하여 결국 세계의 미래를 더욱 분별할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HOPE IN TROUBLED TIMES, Bob Goudswaard 지음, Baker Academic 출판)

환경-이 시대의 문제와 해법의 모순3


환경파괴에 대한 대책들은 거의 대부분 시장 세력들에게 의존하는 방식이다. 이산화탄소 배출거래제, 오염할당제와 같은 제도들은 동부와 남부 국가들에게 자기들의 환경을 다른 나라들에 팔라는 것이며, 새로운 환경기술을 개발하고 도입하라는 내용들이다. 이런 대책들은 기껏해야 임시방편일 뿐이며, 단지 이 딜레마를 풀어야 할 시점을 늦출 뿐이다


이런 대책들은 동시에 대량소비가 무한히 증가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에너지 및 환경의 집중도를 높이는 대량소비는 부유한 북반구뿐 아니라 인도와 중국과 같은 신흥국에서도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환경보호는 마치 먼저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고 넘치는 물을 빼려는 것과 같다. 언젠가는 만병통치약처럼 보였던 해법들이 우리에게 등을 돌린다. 1989년 지구상에서 하루에 한 종자씩 사라졌으나, 생물다양성협약에도 불구하고 2002년에는 한 시간에 한 종자씩 사라지고 있다.

(HOPE IN TROUBLED TIMES, Bob Goudswaard 지음, Baker Academic 출판)

안전-이 시대의 문제와 해법의 모순2


선제적인 전쟁, 추가적인 공격을 막기 위한 시민의 자유제한, 더욱 개선된 기술의 적용과 군비지출에 바탕을 둔 무기 수준의 향상, 그리고 전술적 목적을 위한 군사적 파괴력의 증강과 같은 대책들은 테러리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2004년에 전 세계가 지출한 군사비는 1조달러를 넘었지만 미국정부 집계를 기준으로 2003175건이었던 테러 건수가 2004년에는 655건으로 3배 증가했다. 전쟁에 승리한다는 것은 평화 달성을 점점 더 믿지 못하게 만드는 장해물이 되고 있다.

(HOPE IN TROUBLED TIMES, Bob Goudswaard지음, Baker Academic 출판)

세계의 부와 가난의 분포

-이 시대의 문제와 해법의 모순(1)-


1969년 세계 상위 20%는 하위 20%보다 30배 더 많은 소득을 누리고 있었다. 1990년 이 차이는 60배로 늘어났다. 그리고 지금(이 책은 2007년에 쓰였다), 이 차이는 83배이다. 유엔의 한 연구보고에 따르면, 아프리카 인구의 반 이상이 절대 빈곤 상태에 있으며, 지난 20년 동안 세계가 더욱 부유해졌지만 이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어떻게 1970년대를 뒤 따르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그 때는 세계의 지도자들이 세계의 가난을 종식시키겠다던 때 아닌가?

 

이 시대의 핵심은 더 많은 돈과 기술을 남반부로 이전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해법은 충격적인 부메랑이 되었다. 여전히 북반부의 돈이 개발원조(DA)나 해외직접투자(DFI)라는 이름으로 남반부로 흘러가고 있지만, 1982년 이래로 매년 남반부에서 북반부로 분할상환이나 이자로 지급하는 돈이 훨씬 많다. 2000년 부자나라들이 그들의 GDP2.5%만을 해외직접투자에 사용하지만, 가난한 나라들로부터 받는 채무수익은 GDP6.3%에 달한다. 20056G8재무장관회의에서 어렵게 부채탕감계획에 합의했지만 이는 전체 부채의 2%에 불과해 상황을 바꾸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HOPE IN TROUBLED TIMES(Goudswaard의 저서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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