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
7권을 선정하는 것이 정말 어렵네요. 고민...^^

산업(경제학)을 연구하는 것과 신앙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은 재수생 시절에 읽은 구약성경 때문에 생긴 오랜 과제였습니다. 그리고 군산형일자리를 주도하면서 늘 잊지않는 초심은 바로 희년정신에 있습니다.

제가 재수생 시절 읽은 구약성경에서 진짜 강조하는 것은 안식일-안식년-희년의 사회경제체계입니다. 믿음과 구원은 이 체계를 지지하는 버팀목입니다.

그리고 이 작은 책자는 바로 그 것을 잘 정리해서 전달하고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30분이면 읽을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경제정의(이사야서 36-37장)


히스기야 왕은, 열왕기하 18장 3절을 보면, 다윗 왕처럼 하나님의 눈에 정직하게 행동한 왕이었다. 이 히스기야 왕 시절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 중에는 최근에도 묵상한 적이 있는 이사야 36-37장에 있는 히스기야 왕과 산헤립의 대결이 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제정의에 관하여 깊이 생각해 볼거리를 제공한다. 경제정의는 지난 대선 당시 거의 모든 후보가 모두 공약으로 내세웠을 만큼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이기도 하다.


간단히 당시 배경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솔로몬 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뉘어 북쪽은 이스라엘, 남쪽은 유다라는 분단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새로이 중동지역의 패자로 등장한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먼저 북 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 다시 산헤립 왕이 남 왕국 유다를 치러 왔다(열왕기하 18장). 그리고 당시의 유다 왕이 바로 히스기야였다. 이 전쟁을 기록한 것이 이사야 36-37장의 내용이다.


먼저 36장은 앗수르의 장수 랍사게의 도전적인 연설을 두 차례 기록하고 있다. 먼저 랍사게는 5-7절에서 세 가지를 선언한다. 1) 히스기야왕은 싸울 능력이 없다. 2) 이집트(애굽)는 너를 돕는 힘이 아니라 오히려 네게 해가 될 것이다. 3) 여호와 하나님에 관하여는, 히스기야가 그 산당과 제단을 없애버렸지 않느냐? 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두 가지 내용은 객관적인 사실로 보인다. 당시 유다는 앗수르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그 이유는 랍사게의 두 번째 연설에서 짐작할 수 있으니 뒤로 미루자. 이집트에 도움을 청하는 일이 결국 유다가 지팡이에 손이 찔리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말도 역시 사실이었다. 왜적의 침입으로 중국에 손을 벌렸던 우리 역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 왜적에게 피해를 입은 것이나 왜란이 끝난 후 우리가 중국에 당한 비굴한 역사나 별로 차이가 없다. 아니 국제관계는 언제나 그래왔다.


세 번째 주장은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히스기야는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적 타락을 개혁한 왕으로 유명하다(역대하 29-31장). 그중 대표적인 일이 산당과 제단을 헐어버린 일이다. 원래 산 위의 사당과 제단은 중동 지방의 대표적인 이방신이었던 바알을 숭배하는 곳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로 그 곳에서 마치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는 듯 바알에게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예레미야 19:5). 그래서 산당이나 제단은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이 '너희가 입으로는 여호와를 섬긴다 하면서 실제로는 바알을 섬긴다.'고 질책하던 바로 그 행위의 상징이다. 바로 그런 산당과 제단을 헐어버린 개혁을 랍사게는 하나님을 자기 산당이 헐리는 수모를 당한 신으로 오해한다. 그래서 그 신은 힘이 없다고 단정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토록 바알을 경계하셨는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문명이 만나는 무역과 전쟁의 고속도로였던 가나안 사람들은 더욱 더 번영하고 싶은 욕망으로 좋으신 하나님(엘)을 대체하기 위해 신의 아들인 바알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탄생한 바알은 농사와 다산, 성장,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적당한 비를 관장하는 신이다. 바알을 섬기는 것은 그 목적이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합왕이 바알 신정통치자(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하여 저지른 일 가운데 하나가 탐나는 이웃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주인을 죽였던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다(열왕기상 21장). 이 사건은 권력도 돈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희년의 법에서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드러난다. 레위기 25장은 안식년과 희년에 관한 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8-55절은 희년의 법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먼저 희년은 7년마다 반복되는 안식년이 7번 반복된 다음 해이다. 즉 7x7=49이므로 49년째가 되는 안식년의 다음해인 50년째의 해가 희년이된다. 희년이 되면 모든 사람들이 원래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던(여호수아 11:23, 13-19장) 각자의 토지(기업)로 돌아간다. 즉 중간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다른 사람에게 팔거나 저당 잡혔던 땅을 대가없이 되돌려 받는다. 따라서 토지의 거래 가격은 희년까지 남은 해의 수로 정하였다. 노예도 해방한다. 물론 안식년과 희년에는 경작을 금하였기 때문에 49년, 50년째 되는 2년간은 휴경하게 되고 51년째부터 다시 경작을 시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48년째 해의 소출로 3년간 먹을 수 있는 양을 주시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는 모든 토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전제가 있다. 희년이 될 때까지는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통해 사유재산의 확대가 가능하지만 부는 물론이고 종의 신분도 대물림되는 것은 방지하는 제도이다. 하나님의 성품인 공평과 정의, 그리고 사랑이 경제제도를 통해서도 실현되는 법이다.

 

자 이제 다시 이사야서로 돌아가 보자. 36장 12절부터는 랍사게의 두 번째 연설이 나온다. 특히 눈여겨 볼 대목은 16, 17절이다. 랍사게는 유다 백성에게 ‘너희가 항복하면 자기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게 될 것이며, 포도원이 있는 땅에 이주시켜 주겠다.’고 한다. 공산주의자들의 선언이 있기 수천 년 전에 이미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이렇게 음식과 땅을 미끼로 유다의 항복을 유인했던 것이다. 이 말은 뒤집어 보면 당시 유다의 백성들의 다수는 극심한 가난으로 먹을 게 부족했고, 토지도 부자들에게 다 넘겨준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외적의 침입에 대항하여 싸워 지켜야 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히스기야 왕이 산헤립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던 이유였을 것이고 산헤립은 심리적 항복을 유도한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매우 간결한 히스기야 왕의 승리였다. 아니 하나님의 승리이다. 37장은 바로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37장 30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 왕에게 와서 말한 하나님의 징조이다. ‘2년간은 스스로 난 것을 먹고 3년째에는 경작하여 그 열매를 먹는다.’는 것이다. 바로 희년이다(성경적 경제의 기초원리, 대천덕, CUP, 1989). 희년이 바로 하나님이 보여주실 구원의 징조라는 것이다. 그리고 36절은 어느 날 아침 앗수르 진중의 18만 5천 병사가 몰살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산헤립은 얼굴에 열이 나 돌아갔지만 결국 자식들에게 살해된다(역대하 32:21). 이로써 하나님은 희년을 지키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을 입증해 보이셨다.

 

이 기록은 우리에게 경제정의에 관한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사람들 사이에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절대 빈곤층이 늘어나며 부와 가난이 세습되면, 언제나 균등 분배를 미끼로 이들을 미혹하는 세력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미혹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부와 가난의 세습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것이 진짜 문제이다. 하나님은 이를 죄 없다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고 잔혹한 고통의 시대를 맞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 번째는 이를 피하는 길이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는 희년의 정신뿐이라는 점이다. 우리 주님이 바로 그 희년을 선포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은 이사야 61장의 예언과 이를 인용한 누가복음 4장 18-19절에도 밝혀 놓으셨다.

 

신정국가 시대의 제도를 그대로 도입할 수는 없겠지만, 희년의 정신이 반영된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스스로 희년의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애국이기도 하고 그것이야말로 진짜 반공이다.

지금은 이곳 시간으로 2012년 마지막 밤입니다. 이미 한국은 새해 첫날의 오후가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가족이 함께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가진 뒤, 1년을 돌아보고 2013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기도로 가족의 신앙나눔을 마쳤습니다.


오늘 나눈 말씀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에서 시편 1편으로 정했습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세상에서 말하는 복있는 사람과 성경이 말하는 복있는 사람은 그 근본이 전혀 다릅니다. 우선 끝에 있는 6절에서 거꾸로 시작해 봅시다. 세상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합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그리고 그 길의 끝은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심판과 연결됩니다. 의인의 길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다고 합니다. 이말은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 혹은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시편 37:18, 121:5) 그러나 악인의 길은 망한다고 심판이 예정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지요.


특히 시편 145:20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라고 말하십니다. NIV는 여기서 보호한다는 말에 앞의 '인정하신다'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번역하고 있습니다. 또 의인이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 심판이 없다면 박탈당하는 자의 아픔을 위로할 방법이 없습니다. 흑자를 내고 있으면서도 주주의 이익을 최대화 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직원을 모두 해고하고 필리핀으로 도주하려는 한진중공업의 경우를 이야기 했습니다.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노동자들이 나타나게 하는 그 경영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세상의 위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무심한 분이 아닙니다. 이집트 땅에서 외치는 이스라엘 노예들의 비탄의 소리를 들으시고 해방의 역사를 시작하셨던 분입니다.(출애굽기 2:23)


이제 다시 앞으로 가봅시다. 그렇다면 의인, 즉 복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율법이란 모세 5경, 특히 율법이 주로 기록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이 말씀을 모호하게 성경이라고 이해하면 다시 두 가지 문제를 안게 됩니다. 하나는 사실이당시의 율법은 이 책들이었음을 간과하게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사상에 적당히 물타기를 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두번째는 그 율법에 나타나는 사상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율법서를 읽으면 종교적 의제, 의식에 대한 내용을 빼고 보면 매우 분명하게 부각되는 하나의 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안식일-안식년-희년이라는 축입니다. 예를 들어서 십계명의 처음 몇개의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의제입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사회적인 윤리입니다. 이둘을 연결하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즉 안식일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명령에 이어 그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고, 안식일을 지키는 그 신앙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생활윤리를 나열하는 구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자는 안식일-안식년-희년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자라고 좁혀서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렵게 해석해서 이해해야할 그 어떤 다른 뜻도 없습니다. 그대로 직설적입니다. 안식일에는 너와 네 종이나 육축이나 네 집에 거하는 그 누구도 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안식이지요. 왜? 그것은 하나님도 창조하실 때에 엿새 일하고 하루 쉬셨기 때문입니다. 생명 있는 것들의 안식의 근거를 절대자인 하나님에게 둔 것입니다.

그말을 하기 위해 그 앞에 다른 계명이 필요합니다. 다른 신(우상)을 두지 말라(바알처럼 돈과 권력을 위해 다른 생명의 안식을 빼앗는 거짓 신이나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이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을 이렇게 좁은 의미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지만 이점은 분명합니다.


안식년은 여기에 추가하여 토지의 안식과 종족 중의 노예된 자의 해방을 명령합니다. 희년은 아예 모든 노예의 해방과 더불어 원래 자기 땅이었던 곳의 회복을 명령합니다. 부자나 가난의 대물림을 규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50년 동안은 자기 노력에 의해 더 부자가 될 수도 있지만 자기 노력이 아닌 부나 가난의 대물림은 안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이런 정신을 제도속에 녹여 넣어여 하고, 동시에 개인은 나눔을 통해 이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편 1편은 바로 그 율법을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율법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자는 그 말씀을 지켜 행하게 됨은 당연합니다. 그런 사람이 악인의 길이나 죄인의 길에서 떠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한 일은 그런 사람이 진짜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3절).


오늘 우리 가족은 이 말씀을 통해 2012년을 돌아보고 2013년을 생각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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