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다시보기 (출애굽기 20:1~17)

 

2. 하나님과 사람사이 1: 다른 신들은 누구인가?(20:3)

 

1계명부터 제3계명까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알려준다. 그 첫 계명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개역개정) You shall have no other gods before me(NIV)”이다. 여기에서 영어 단어 ‘before’NIV에 따르면 ‘~에게 적대적인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하나님께 적대적인 신을 갖지 말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 적대적인 신들은 누구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가나안을 들어갈 때 주신 명령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34:15) 너는 삼가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하게 섬기며 그들의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제물을 먹을까 함이며

(18:21)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8:33) 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이켜 바알들을 음란하게 위하고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출애굽에서 가나안시대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신이 셋 등장한다. 하나는 아세라(혹은 아스다롯)인데, 이를 섬기는 자들은 음란하게 섬긴다고 했다. 학자들은 종교의식 자체가 매춘이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몰렉(혹은 몰록)인데, 몰렉은 장자를 제물로 드려서 태워 죽이는 방법으로 종교의식을 가졌다. 세 번째가 바알이다. 바알은 다산과 풍요의 신으로 역시 음란하게 섬기는 신이었다. 특히 유다왕 아합이 바알의 제사장 딸인 이세벨과 결혼한 뒤에 벌어지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왕상 12)을 통해 돈을 위해 권력자가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종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이런 신들의 노예가 되면 음란하게 되고, 자식에게 잔인한 짓을 하며, 돈을 위해 생명을 빼앗는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 적대적이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삶이 아니다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은 이처럼 자유인의 삶에 대한 지침이 될 수도 있다


노예의 해방자였던 하나님은, 다른 신들처럼,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협박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왜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했는지를 살펴보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미신을 섬기는 자들처럼 겁에 질려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그것은 노예를 해방시키신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태도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설국열차 읽기: 기술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세계관

이 영화는, 보는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기술적 세계관과 그 뒤에 숨은 맘몬주의를 슬쩍 드러내면서 무언가 다른 세계관(감독은 이를 드러내지 않는다)에 기초한 유토피아의 시작 혹은 기술문명의 실종의 표지로서 아담과 하와의 탄생을 보여준다. 나는 이 영화가 중간에 이르기 전에 지금 쓰는 이 글의 중요한 화두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보았다. 내가 기억력이 많이 부족한 터라 구체적인 장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영화를 이미 본 분들이라면 스스로 기억을 되살리면서 읽어 주시길 부탁드린다.







이 영화를 단순 무식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빙하기로 표현되는 생명체 종말의 위기에 완벽하게 통제되는 기차가 만들어지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거기에 걸 맞는 정치사회체제가 만들어진다. 이 체제는 교묘한 균형과 질서를 통해 유지되는데 이런 통제는 설계자인 최고 권력자의 손에서 나온다. 또 그에게는 정치인, 관료, 군인 등과 같이 그 체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일을 대신 하는 수하들이 있다. 이 체제는, 교육을 통해, (완벽한 기술을 상징하는) 엔진을 숭상하도록 함으로써 유지되는데 최고 권력자는 동시에 엔진교의 교주이다. 그리고 이 체제에 불만을 가진 한 그룹의 사람들(기층 민중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관람자의 자유이지만 어쩌면 99%라고 회자되는 집단일 수도 있다)이 그 체제에 도전한다. 그런데 그들의 도전 역시 목표는 엔진이 있는 곳까지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 칸의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끝 칸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엔진은 모두의 신이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술적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고, 그런 의미에서 전작이라 할 수 있는 <괴물>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면 이 영화가 이처럼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 이유를 반만 이해할 수 있다.

이 영화가 프롤로그에서 하는 이야기는 기술문명이 가져온 온난화와 다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살포한 CW-7이 가져온 빙하기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기술유토피아를 신봉하는 자들이 제시하는 환상에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인류는 환경오염이라는 괴물과 맞닥트렸다. 기술적 세계관은 태연히 그 환경오염을 극복하는 새로운 기술을 희망으로 제시하지만 이는 더 큰 재앙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잠시 석유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대기오염과 핵발전을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기술자들을 떠올려도 좋겠다.) 인류는 ‘멈추면 죽는다’고 외치며 욕망을 자극하는 기술적 세계관의 순환고리 속에 들어간 것이다. 결국 기술적 세계관이 욕망의 충족과 함께 가져다준 죽음의 덫을 피하기 위해 다시 기술적 세계관에 의존해야만 하는, 폭주하는 기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사람의 모든 가치 판단을 지배하거나 혹은 강요한다는 점에서 기술은 우상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체제의 문제를 건드린다. 계급 사이의 이동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으며(예를 들면 바이올리니스트 한 사람이 계층 이동을 하는데 아내도 버리고 혼자 이동해야만 했다), 앞 칸에 사는 자들의 호화판 생활에 비해 끝 칸의 삶은 비참한데 특히 이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운명적으로 결정된 사람들이다. 주기적으로 인구조절을 위해 부추겨진 저항(전쟁)이 일어나고 무참한 학살이 벌어진다. 정치인이나 관료, 군인 등은 최고 권력자의 이런 의도에 따라 이유 없이 사람을 경멸하고 차별하며, 학살하는 개일 뿐이다. 특히 죽었던 것으로 보였던 관료의 부활을 통해 이들이 사람만 바뀔 뿐 사라지지는 않음을 강조한다. 그래서 이들을 편의상 중간 칸이라고 부르면, 전쟁은 오직 끝 칸에서 이 중간 칸까지의 사람들에게만 벌어진다. 앞 쪽에서는 전쟁과 무관하게 고상한 문화를 즐기는 듯 보인다. 그러나 앞으로 더욱 나아갈수록 사람들은 식탐을 시작으로 퇴폐적 쾌락을 탐닉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두 짐승이다.

이 체제(기차) 안에서 밖을 보는 소수의 사람들이 이 체제를 멈추게 한다. 이 체제 밖에도 삶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열차의 문을 여는, 체제를 멈추게 하는 혁명적 변화를 시도하게 한다. 그래서 기차(기술적 세계관)의 파괴는 새로운 체제의 시작을 의미한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탄생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기술적 세계관이 제시하는, ‘멈추면 죽는 욕망의 순환열차’에 올라타면 시간이 지날수록, 기술이 더욱 발전할수록 다수의 사람은 소수의 부를 위해 봉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새로운 스마트폰이 나올 때마다 불과 1-2년 사용한 옛 폰을 내버리고 아우성치듯 몰려드는 소비자들은, 눈에 잘 안 보이지만, 환경오염을 촉진하여 자기의 소득 중 상당부분을 에어콘이나 공기청정기, 전기료, 심지어는 덜 파괴된 자연을 찾아가는 휴가비용과 같이 파괴된 환경 속에서 생존하는데 투입하게 된다. 따라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기술발전을 통해 실제로 돈을 버는 사람은 소수이며 이들은 부를 더욱 더 차별적으로 축적하기 때문에 갈수록 더욱 소수가 된다. (이쯤에서 FTA가 바로 이렇게 더욱 소수의 글로벌 부자를 만드는 수단이라는 점을 깨닫는다면 당신은 뛰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기술적 세계관은 결국 체제의 몰락을 가져오는데, 이는 기술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경제학의 문제이다. “유한한 자원과 무한한 욕구의 충족”이라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달성하려면 무한한 욕구를 가진, 사람의 수를 줄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서 경제학이 가장 발달한 미국이 건국이래 지금까지 전쟁을 그친 적이 별로 없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기독교인의 눈은 여기에서 빛을 발하여야 한다. “유한한 자원으로 유한한 욕구만을 충족”시키는 체제,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을 줄이고 함께 나누는 체제는 유지될 수 있지만, 더 많이 독점하려는 욕심은 결국 체제 자체를 붕괴시킨다. 더 많이 독점하려는 것은 바알 혹은 맘몬주의 세계관이고, 여기에 대항하는 "유한한 욕구"의 대안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경제정의(이사야서 36-37장)


히스기야 왕은, 열왕기하 18장 3절을 보면, 다윗 왕처럼 하나님의 눈에 정직하게 행동한 왕이었다. 이 히스기야 왕 시절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 중에는 최근에도 묵상한 적이 있는 이사야 36-37장에 있는 히스기야 왕과 산헤립의 대결이 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제정의에 관하여 깊이 생각해 볼거리를 제공한다. 경제정의는 지난 대선 당시 거의 모든 후보가 모두 공약으로 내세웠을 만큼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이기도 하다.


간단히 당시 배경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솔로몬 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뉘어 북쪽은 이스라엘, 남쪽은 유다라는 분단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새로이 중동지역의 패자로 등장한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먼저 북 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 다시 산헤립 왕이 남 왕국 유다를 치러 왔다(열왕기하 18장). 그리고 당시의 유다 왕이 바로 히스기야였다. 이 전쟁을 기록한 것이 이사야 36-37장의 내용이다.


먼저 36장은 앗수르의 장수 랍사게의 도전적인 연설을 두 차례 기록하고 있다. 먼저 랍사게는 5-7절에서 세 가지를 선언한다. 1) 히스기야왕은 싸울 능력이 없다. 2) 이집트(애굽)는 너를 돕는 힘이 아니라 오히려 네게 해가 될 것이다. 3) 여호와 하나님에 관하여는, 히스기야가 그 산당과 제단을 없애버렸지 않느냐? 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두 가지 내용은 객관적인 사실로 보인다. 당시 유다는 앗수르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그 이유는 랍사게의 두 번째 연설에서 짐작할 수 있으니 뒤로 미루자. 이집트에 도움을 청하는 일이 결국 유다가 지팡이에 손이 찔리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말도 역시 사실이었다. 왜적의 침입으로 중국에 손을 벌렸던 우리 역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 왜적에게 피해를 입은 것이나 왜란이 끝난 후 우리가 중국에 당한 비굴한 역사나 별로 차이가 없다. 아니 국제관계는 언제나 그래왔다.


세 번째 주장은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히스기야는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적 타락을 개혁한 왕으로 유명하다(역대하 29-31장). 그중 대표적인 일이 산당과 제단을 헐어버린 일이다. 원래 산 위의 사당과 제단은 중동 지방의 대표적인 이방신이었던 바알을 숭배하는 곳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로 그 곳에서 마치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는 듯 바알에게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예레미야 19:5). 그래서 산당이나 제단은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이 '너희가 입으로는 여호와를 섬긴다 하면서 실제로는 바알을 섬긴다.'고 질책하던 바로 그 행위의 상징이다. 바로 그런 산당과 제단을 헐어버린 개혁을 랍사게는 하나님을 자기 산당이 헐리는 수모를 당한 신으로 오해한다. 그래서 그 신은 힘이 없다고 단정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토록 바알을 경계하셨는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문명이 만나는 무역과 전쟁의 고속도로였던 가나안 사람들은 더욱 더 번영하고 싶은 욕망으로 좋으신 하나님(엘)을 대체하기 위해 신의 아들인 바알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탄생한 바알은 농사와 다산, 성장,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적당한 비를 관장하는 신이다. 바알을 섬기는 것은 그 목적이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합왕이 바알 신정통치자(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하여 저지른 일 가운데 하나가 탐나는 이웃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주인을 죽였던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다(열왕기상 21장). 이 사건은 권력도 돈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희년의 법에서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드러난다. 레위기 25장은 안식년과 희년에 관한 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8-55절은 희년의 법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먼저 희년은 7년마다 반복되는 안식년이 7번 반복된 다음 해이다. 즉 7x7=49이므로 49년째가 되는 안식년의 다음해인 50년째의 해가 희년이된다. 희년이 되면 모든 사람들이 원래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던(여호수아 11:23, 13-19장) 각자의 토지(기업)로 돌아간다. 즉 중간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다른 사람에게 팔거나 저당 잡혔던 땅을 대가없이 되돌려 받는다. 따라서 토지의 거래 가격은 희년까지 남은 해의 수로 정하였다. 노예도 해방한다. 물론 안식년과 희년에는 경작을 금하였기 때문에 49년, 50년째 되는 2년간은 휴경하게 되고 51년째부터 다시 경작을 시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48년째 해의 소출로 3년간 먹을 수 있는 양을 주시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는 모든 토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전제가 있다. 희년이 될 때까지는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통해 사유재산의 확대가 가능하지만 부는 물론이고 종의 신분도 대물림되는 것은 방지하는 제도이다. 하나님의 성품인 공평과 정의, 그리고 사랑이 경제제도를 통해서도 실현되는 법이다.

 

자 이제 다시 이사야서로 돌아가 보자. 36장 12절부터는 랍사게의 두 번째 연설이 나온다. 특히 눈여겨 볼 대목은 16, 17절이다. 랍사게는 유다 백성에게 ‘너희가 항복하면 자기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게 될 것이며, 포도원이 있는 땅에 이주시켜 주겠다.’고 한다. 공산주의자들의 선언이 있기 수천 년 전에 이미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이렇게 음식과 땅을 미끼로 유다의 항복을 유인했던 것이다. 이 말은 뒤집어 보면 당시 유다의 백성들의 다수는 극심한 가난으로 먹을 게 부족했고, 토지도 부자들에게 다 넘겨준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외적의 침입에 대항하여 싸워 지켜야 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히스기야 왕이 산헤립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던 이유였을 것이고 산헤립은 심리적 항복을 유도한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매우 간결한 히스기야 왕의 승리였다. 아니 하나님의 승리이다. 37장은 바로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37장 30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 왕에게 와서 말한 하나님의 징조이다. ‘2년간은 스스로 난 것을 먹고 3년째에는 경작하여 그 열매를 먹는다.’는 것이다. 바로 희년이다(성경적 경제의 기초원리, 대천덕, CUP, 1989). 희년이 바로 하나님이 보여주실 구원의 징조라는 것이다. 그리고 36절은 어느 날 아침 앗수르 진중의 18만 5천 병사가 몰살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산헤립은 얼굴에 열이 나 돌아갔지만 결국 자식들에게 살해된다(역대하 32:21). 이로써 하나님은 희년을 지키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을 입증해 보이셨다.

 

이 기록은 우리에게 경제정의에 관한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사람들 사이에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절대 빈곤층이 늘어나며 부와 가난이 세습되면, 언제나 균등 분배를 미끼로 이들을 미혹하는 세력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미혹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부와 가난의 세습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것이 진짜 문제이다. 하나님은 이를 죄 없다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고 잔혹한 고통의 시대를 맞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 번째는 이를 피하는 길이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는 희년의 정신뿐이라는 점이다. 우리 주님이 바로 그 희년을 선포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은 이사야 61장의 예언과 이를 인용한 누가복음 4장 18-19절에도 밝혀 놓으셨다.

 

신정국가 시대의 제도를 그대로 도입할 수는 없겠지만, 희년의 정신이 반영된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스스로 희년의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애국이기도 하고 그것이야말로 진짜 반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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