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요한복음에서 온몸에 소름이 돋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다음 말씀이 바로 그 구절입니다.

 

[요한복음 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 혹은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란 누구일까?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던 중에 떠오른 말씀이 바로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으신 내용입니다. [누가복음 41-13]에 있는 말씀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위와 영광을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며 마귀는 예수께 세 가지 시험을 합니다.

 

그 세 가지 중 첫째는 떡으로 대표되는 물질적 풍요입니다. 둘째는 권위와 영광으로 표현된 권력과 명예 그리고 그런 힘에 대한 숭배입니다. 셋째는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표현되었는데, 나의 필요를 위해 성경 말씀을 근거로 기적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은 매우 정교한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언뜻 보기에는 신앙심이 깊고 말씀에 의지하여 기적까지도 나타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목적이 내 사사로운 필요를 구함으로써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바로 이런 것들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사랑하는 세상에서 잘 적응하여 그런 방식으로 성공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런 자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런 세상에서 소위 잘 나가는 삶을 스스로 미워하여 그 길에서 떠나면 세상을 미워하는 것이요,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계속 요한복음을 읽고 있는데, 다시 15장에서 다음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말씀에 앞서 13장 뒷부분부터 15장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한 가지 주제를 말씀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다음에 다시 쓰기로 하고 오늘은 이 말씀에만 집중하기로 합니다.

 

[요한복음 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 아니라 예수를 미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내 묵상에 답해주시듯,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 세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를 미워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께서 세상에서 우리를 택하여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게 하셨기에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자꾸 이 말씀을 영적전쟁이니, 혹은 예수천당 불신지옥따위로 해석하려 하지 마십시오. 철저하게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왜 그런지는 다음에 쓰게 될 13-15장의 말씀에서 드러납니다만, 기다리기 힘드시면 직접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기독교인들이 욕을 먹고 삽니다. 개독교라 비난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한복음이 기록하고 있는 바로 그런 이유로 개독교라 불리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살지 못하고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똑 같이 살기 때문에, 아니 주님께서 미워하라 하신 세상을 오히려 더 악착같이 사랑하며 살기 때문에 그런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도 기독교가 아닌 개독교로 보이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타락하여 돌들이 '개독교여 제발 좀 변하라'고 외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공통의 토대란 여러 집단이, 비록 서로 이질적인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이슈나 주제에 대해서는 같은 주장이나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그 공통의 주장이나 생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비슷한 말로는 연대(solidarity)’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연대는 유사집단끼리 공동의 보조를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공통의 토대와는 다릅니다. 이 말은 영어의 ‘common ground’(이 말은 이곳 밴쿠버에서 발간되는 진보잡지의 제목이기도 합니다)를 우리말로 바꾸어 본 것입니다. 공동의 기반, 혹은 공통의 토대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 개념이 여러 시민단체들, 내 입장에서는 교회에서도, 신중하게 검토해볼 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입장에서 보면, 교회도 그렇고 각종 운동단체나 진보기구들도 모두 다 작은 차이에서 시작된 갈등이 끝내는 분열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서로 증오하며 으르렁거리기 일쑤이지요. 교회로 국한해서 말하자면, 작게는 개 교회의 분열에서 시작하여 교단으로의 분열은 대부분 작은 차이에서 시작된 갈등이 그렇게 만든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분열의 역사 뒤에는 그 조직의 중심 권력을 자기 혹은 자기편이 가지려는 헤게모니 싸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열의 역사에서 돌이켜 통합의 역사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있어야만 하고, 또 그런 움직임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고 믿습니다. 그러한 통합을 위해 우리가 먼저 정리해야할 머릿속의 개념이 바로 공통의 토대라는 것이지요.

 

먼저 교회라면 어느 선까지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배척해야 할 것인가 하는 기준이 되는 믿음의 공통의 토대를 작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사도신경이라든가 각종 신앙고백서들이 이미 오랫동안 이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백서들은 교단 중심으로 작성되거나 혹은 전통을 계승하고 있고, 특히 기독교의 변질된 모습에 대한 반성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 기독교 세계관이나 신앙고백들에 근거하여 새롭게 공통의 토대를 정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 교회나 교단은 이 토대를 기본으로 자기 교단이나 교회의 특징이 반영된 교육을 시킬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토대를 부인하거나 변질시키면 나와는 다른 집단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진보진영이 통합움직임을 보였을 때 제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바로 이런 공통의 토대가 없이 통합하고 있다는 걱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통합진보당은 진보라는 이름 자체를 우스개꺼리로 전락시키는 역사 앞의 죄인들이 되었지요. 소위 당권파 때문이었던, 유시민류의 본질 때문이었던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통합이 아니라 공통의 토대를 작성하고 여기에 기초하여 정책과 선거연대를 하는 것이었겠지요. 어차피 헤게모니 장악이라는 정치적 동물의 속성을 버릴 수 없다면 아예 다름을 인정하고 공통의 토대를 기초로 시너지를 얻는 게 더 바람직했다는 생각입니다.

 

종교 간의 연대는 어떨까요? 사실 모든 종교가 다 같다거나 모든 종교가 같은 신에게 나아간다는 주장은 철학적으로 있을 수 없는 전제입니다. 그래서 종교간 연대를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거나 바라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안에 대해서 국한한다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서 아프리카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각 종교가 가진 신앙고백을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종교정신으로서가 아니라 각자의 서로 다른 종교적 관점에서 한 이슈에 대응하는 것이지요. 그 종교가 무엇이든지 우리는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적십자사를 기독교적 색채가 있다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슬람 진영은 적신월사라는 같은 역할을 하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결국 국제적십자사적신월사연맹(사진은 이들의 엠블럼)을 만들어 공동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요나서를 보면 요나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위협 받게 되었을 때 선장은 사람들에게 모두의 구원을 위해 각자의 신에게 기도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공통의 토대 운동을 생각하는 내 마음이기도 합니다


(사진은 지난 4월 말 BC주의 수도인 Victoria의 관광객이 가장 많이 다니는 해변 도로를 걷다가 발견한 구호입니다. 캐나다 원주민 여성 한분이 길바닥의 돌을 긁어서 글씨를 쓴 뒤 물감을 넣어 글씨를 보이게 했습니다. "No Justice on Stolen Land(빼앗긴 땅에 정의는 없다)")


지난 5월 6일 윌러비교회 부교역자인 마크 그란빌(Mark Granville) 목사의 설교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영어가 짦은데다가 이분이 호주분이라 발음도 익숙하지 않아서 조금 밖에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어느 할머니에게 했더니 그분은 웃으시면서 너 캐나다에 언제왔느냐고 합니다. 그래서 3개월 되었다고 하자 자기는 30

년 되었는데도 못알아 듣는다고 하십니다.^^ 이분의 블로그에서 그날 설교 내용을 다시 글로 쓴게 있어서 링크를 걸어둡니다. 


http://markrglanville.wordpress.com/2012/05/10/gods-judgement-an-exclusivist-outrage-or-the-end-of-oppression/

 

아내가 오늘 저녁 산책 도중에 오늘이 며칠이지? 하고 묻는데 대답을 하려고 따져보다가 오늘이 518임을 깨달았습니다. 518은 분노와 부끄러움이 겹쳐지는 날입니다. 분노는 모든 분들이 같으리라 생각됩니다. 부끄러움이란 강동경찰서 유치장에서 풀려난 뒤 광주 소식에 겁에 질린 나는 춘천과 운봉 등지로 숨어다닌 기억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늘 이 설교를 소개하는 이유는 정말 한국 교회와 다른 게 있기 때문입니다. 전문 번역을 하기는 그렇고, 그렇다고 영어 그대로 소개하면 많은 사람이 읽지않을 것 같아 간단히 요약합니다.


그의 설교는 우리나라에서도 만들어진 신이라고 번역되었던 도킨스가 쓴 "The God delusion"에서 인용한 다음 내용이 중요한 도전으로 제시됩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를 원한다면, 왜 그냥 용서하지 않고 스스로 고통을 받고 댓가를 지불했는가?" 자유주의 신학에서도, J.A.T.Robinson처럼, 사랑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노는 서로 공통부분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서구 사람들의 인식과 고난받아온 사람들의 인식은 충격적이리 만큼 서로 다릅니다. 편안하게 살아온 서구사람들에게는 모든 폭력을 공격적으로 느끼고, 하나님의 심판 선언에 대해서도 그렇게 반응합니다. 그러나 폭력과 압제 속에서 신음해온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수용 가능할 뿐 아니라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핵심 요소입니다. 멕시코의 신학자 호세 미란다(Jose Miranda)는 슬픔에 잠긴 세상에서 압제가 끝나는 정의의 날과 정의가 세워지는 것을 고대합니다. 압제자가 여전히 압제하고 있는 한 하나님의 샬롬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개입은 압제자에 대한 심판을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이사야 28:21 말씀처럼 '기이하고 비상한 사역'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인류가 심판으로 종말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며, 인내하시며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베드로후서 3:9)


그러나 무한히 참으심은 무한한 고통을 의미하기 때문에고통을 끝내는 것은 오직 심판밖에 없습니다. 압제자를 제거하는 것만이 샬롬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성경의 심판은 부유한 압제자들과 우상숭배자들에게는 나쁜 소식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고대하던 바이며, 축하할 일입니다. 성경의 심판은 단연코 좋은 소식입니다.


마크는 특히 서구인들을 향해 우리는 거의 모두 부유한 압제자들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불의를 참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에 다시 한번 매달리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심판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게되는 핵심이라고 합니다.


60-70년대 한국 교회는 군사독재 하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유신체제에서 내 기억에 의하면, 긴급조치 1호 최초 연행사건은 전주의 한 교회에서 설교를 위해 미가서 2장을 낭독한 직후 난입한 형사들에 의해 끌려간 모 목사님이었습니다. 말씀 선포도 하기 전에 오직 성경을 낭독한 것 만으로 형무소 신세를 진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아니 그 오래 전부터 한국 교회에서 구약성경은 십일조를 내라고 강요할 때나 인용되는 말씀으로 전락했습니다. 어느새 한국교회의 성도들도 서구사람들처럼 부유한 압제자가 되어 심판을 거북해 하는 존재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이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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