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로 치우치지 말라?

 


사실 우리 믿음은 매우 포괄적이어서 한마디로 정리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여러 가치관이 침투하여 기독교의 탈을 쓰고 앉아 있기도 합니다. 이런 오해를 풀어가는 작업의 하나로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말의 뜻에서 시작하여 그것이 어떻게 교회개혁으로 이어지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여호수아 1:7-8)

 

여기에 나오는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도 현대에 와서 가장 많이 오해받는 부분의 하나입니다. 이 좌우를 정치적인 좌파와 우파로 오역하는가 하면 중용사상을 따라 적당히 타협하고 살라는 주장으로 둔갑되기도 합니다.

 

사실 좌파와 우파라는 말은 18세기 말 프랑스혁명 당시 공화파가 의장석의 왼쪽에 앉고 왕당파가 우측에 앉음으로서 생긴 말입니다. 즉 왕의 절대권력을 수호하려는 사람들이 우측에, 현대 국가체제인 공화정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좌측에 앉았던 것입니다. 그 후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웠던 상공인들도, 왕정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농민과 노동자, 여성을 배제하고 자기들만으로 기득권을 가진 부르조아지 층을 형성하자 이제는 이들에 대항하여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좌파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좌파가 이제 우파가 된 것이지요. 결국 좌파든 우파든 세상의 권세를 잡은 자들은 언제나 우파로 변하기 때문에 좌우는 끊임없이 변합니다. 공산주의도 그래서 실패했던 것입니다.

 

중용이란 12세기 중국의 성리학자였던 주희가 4서(논어, 맹자, 중용, 대학)에 포함시킨 책으로 중용사상이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으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이를 구현하는 방법으로 희로애락의 감정을 발하지 않고 항상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말의 바로 앞뒤 말씀을 보면 이 말이 바로 “율법책에 쓰여 있는 대로 지켜 행하라”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세상이 말하는 좌우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중용사상도 아닙니다. 우리 주님도 이를 옳은 것은 ‘옳다’하고 잘못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라 하십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


그렇다면 율법책에 쓰여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출애굽기 20장~23장에 기록된 율법의 핵심 정신은 정의와 공의였습니다.

 

성경에서 정의는 하나님의 자비와 공동체 정신으로 약한 자를 긍휼히 여겨야 한다는 법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출 22:21~27)

 

공의는 힘 있는 자나 가난한 자, 돈 있는 자를 구별하지 말고 악을 공평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법입니다.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정의를 굽게 하지 말며 거짓 일을 멀리 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출 23:1~9)

 

그러니까 이 두 가지를 실천하며 사는 것을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삶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했던 것도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율법을 지켜 행하라는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혁명부터 시작해서 모든 혁명들의 시작도 바로 성경적 의미의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정치가 바로 서지 않았던 나라들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를 아모스 선지자는 아무리 제사를 드리고 찬양하고 예배를 드릴지라도 정의와 공의를 무시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우상을 지고 포로로 끌려 갈 것이라는 예언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4)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기윤과 너희 우상들과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든 신들의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암 5: 21~27)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무어라 하셨을까요? 예수께서는 이러한 율법을 폐하고 새로운 법을 세우기 위해 오신 게 아니라 이 율법을 완전하게 세우기 위해 오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 17~20)

 

우리의 의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만 못하다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율법의 완성을 위해 예수께서는 새 부대와 새 옷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 시대에도 여전히 정의와 공의는 없고 오직 형식만 남아 유대주의자들과 함께 구원을 도모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눅 5: 36~39)

 

그래서 우리 주님은 바요나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시고 그 반석위에 새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7~18)

 

이렇게 해서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율법의 두 가지 정신을 실천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지금의 교회도 이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새 교회가 이를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옛 사람들로는 새롭게 시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교회입니다.   (2010년초쯤에 가졌던 가족모임에서 설교했던 원고를 정리해서 올립니다)

지금은 이곳 시간으로 2012년 마지막 밤입니다. 이미 한국은 새해 첫날의 오후가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가족이 함께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가진 뒤, 1년을 돌아보고 2013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기도로 가족의 신앙나눔을 마쳤습니다.


오늘 나눈 말씀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에서 시편 1편으로 정했습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세상에서 말하는 복있는 사람과 성경이 말하는 복있는 사람은 그 근본이 전혀 다릅니다. 우선 끝에 있는 6절에서 거꾸로 시작해 봅시다. 세상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합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그리고 그 길의 끝은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심판과 연결됩니다. 의인의 길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다고 합니다. 이말은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 혹은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시편 37:18, 121:5) 그러나 악인의 길은 망한다고 심판이 예정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지요.


특히 시편 145:20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라고 말하십니다. NIV는 여기서 보호한다는 말에 앞의 '인정하신다'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번역하고 있습니다. 또 의인이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 심판이 없다면 박탈당하는 자의 아픔을 위로할 방법이 없습니다. 흑자를 내고 있으면서도 주주의 이익을 최대화 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직원을 모두 해고하고 필리핀으로 도주하려는 한진중공업의 경우를 이야기 했습니다.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노동자들이 나타나게 하는 그 경영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세상의 위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무심한 분이 아닙니다. 이집트 땅에서 외치는 이스라엘 노예들의 비탄의 소리를 들으시고 해방의 역사를 시작하셨던 분입니다.(출애굽기 2:23)


이제 다시 앞으로 가봅시다. 그렇다면 의인, 즉 복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율법이란 모세 5경, 특히 율법이 주로 기록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이 말씀을 모호하게 성경이라고 이해하면 다시 두 가지 문제를 안게 됩니다. 하나는 사실이당시의 율법은 이 책들이었음을 간과하게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사상에 적당히 물타기를 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두번째는 그 율법에 나타나는 사상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율법서를 읽으면 종교적 의제, 의식에 대한 내용을 빼고 보면 매우 분명하게 부각되는 하나의 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안식일-안식년-희년이라는 축입니다. 예를 들어서 십계명의 처음 몇개의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의제입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사회적인 윤리입니다. 이둘을 연결하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즉 안식일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명령에 이어 그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고, 안식일을 지키는 그 신앙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생활윤리를 나열하는 구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자는 안식일-안식년-희년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자라고 좁혀서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렵게 해석해서 이해해야할 그 어떤 다른 뜻도 없습니다. 그대로 직설적입니다. 안식일에는 너와 네 종이나 육축이나 네 집에 거하는 그 누구도 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안식이지요. 왜? 그것은 하나님도 창조하실 때에 엿새 일하고 하루 쉬셨기 때문입니다. 생명 있는 것들의 안식의 근거를 절대자인 하나님에게 둔 것입니다.

그말을 하기 위해 그 앞에 다른 계명이 필요합니다. 다른 신(우상)을 두지 말라(바알처럼 돈과 권력을 위해 다른 생명의 안식을 빼앗는 거짓 신이나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이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을 이렇게 좁은 의미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지만 이점은 분명합니다.


안식년은 여기에 추가하여 토지의 안식과 종족 중의 노예된 자의 해방을 명령합니다. 희년은 아예 모든 노예의 해방과 더불어 원래 자기 땅이었던 곳의 회복을 명령합니다. 부자나 가난의 대물림을 규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50년 동안은 자기 노력에 의해 더 부자가 될 수도 있지만 자기 노력이 아닌 부나 가난의 대물림은 안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이런 정신을 제도속에 녹여 넣어여 하고, 동시에 개인은 나눔을 통해 이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편 1편은 바로 그 율법을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율법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자는 그 말씀을 지켜 행하게 됨은 당연합니다. 그런 사람이 악인의 길이나 죄인의 길에서 떠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한 일은 그런 사람이 진짜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3절).


오늘 우리 가족은 이 말씀을 통해 2012년을 돌아보고 2013년을 생각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요한복음 묵상이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다음엔 이어서 히브리서를 묵상할 생각입니다. 이곳 윌러비교회의 지난 두 달 설교가 히브리서였기 때문에 다시 스스로 묵상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묵상하던 중에 주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시며 하신 말씀이 계속 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13장에서 15장 사이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13장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로 부터 시작해서 가룟 유다의 배신을 예언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서 새 계명을 주시겠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마지막 시간에 하신 가르침이 그 동안 반복해서 가르치셨던 '사랑하라'는 말씀이 또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그리고 교회에게 사랑보다 더 중요한 신앙고백은 없습니다. 이 말씀은 15장 12절에서도 또 반복됩니다.


[15:12~14]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여기에서는 더욱 극적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사랑하라는 것인데, 그 가르침대로 하면 우리가 곧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친구)를 위하여 가장 큰 사랑의 표시인 목숨을 버릴 것이고, 우리가 예수의 명대로 행하면 우리가 바로 예수께서 목숨을 내 주신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5장에 오기 전에 14장은 또 이런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4:10~15] 나는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4장 15절은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합니다. 종합해보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증거요, 예수님의 친구인 증거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계명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너무나 명백하고 너무나 단순하게 말씀하시고 있어 무언가 더 붙여야 하는 것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무언가 종교적인 게 필요할 것 같은데 아니면 좀 더 그럴싸하게 주를 섬기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다른 그 무엇도 예수님의 계명이 아니요 또 친구가 되는 다른 방법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14장 10절은 예수께서 하신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잘 보세요. 12절은 이어서 예수를 믿는 자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증거는 바로 예수께서 하시던 일을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일을 행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주께서 하나님께로 가서 우리가 그 이름으로(in my name) 구하는 것을 주께서 친히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말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구했을 때 혹은 기적을 구했을 때 주께서 행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의 일(즉 사랑하는 것)을 계속하고, 또 그것을 구했을 때 주께서 이를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14장 21절은 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오랫 동안 내 안에 이해할 수 없었던 말씀 하나가 번개 치듯 내 머리속에서 이해되었습니다. 마태복음에 있는 말씀입니다. 서기관이나 사두개인, 율법학자 등이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었지요.


[마태복음 22:35~40]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나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계명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서로 같다고 하신 것일까, 깊은 의문에 빠졌었습니다. 물론 구약의 율법들(특히 십계명)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같은 뜻임을 발견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명쾌하게 그것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었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주님이 직접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으신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15장 7-8절은 우리가 주께 구하면 주께서 이루어주시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하려고 하신다고 합니다.


이제 다시 정리해보면,


1. 우리가 예수를 사랑한다면 그의 계명을 실행해야 한다.

2. 그의 계명을 실행하면 우리는 예수의 제자요, 친구가 된다.

3. 그런데 예수가 주신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4. 예수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는데 그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5. 이둘은 사실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그 계명이 바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6. 우리가 바로 이를 주께 구하면 주께서 이루어 주신다.


주님의 가르침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종교적이지도 않습니다. 지금 바로 내가 실천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말씀이 더욱 더 나를 깨우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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