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사태에 가장 큰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1. 원초적인 책임은 영국에 있다.(일본도 대동아전쟁을 통해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 150여 부족의 땅을 식민지지배를 위해 한 덩어리로 묶어버렸다. 미얀마의 기원이다. 이질적인 부족들의 결합이 정치적 불안정의 기원이고 군부쿠데타가 쉬운 이유이기도 했다. 실제로 군부의 학살에 대항하기 위해 소수민족들은 오랫동안 무장투쟁을 했다. 이들중 일부는, 마치 콜롬비아 공산혁명군이 그랬던 것처럼, 양귀비를 재배하여 비용을 마련했다. 국제사회는 인종청소 군부가 아닌 마약재배 저항군을 처리하기에 급급했다. 그들에게는 누가 학살을 당하든 자신들에게 피해가 아니지만 마약의 피해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2. 미얀마의 민주화 초입이라할 수 있는 2008년 발의된 신헌법은 국회의 25%를 군부가 차지하고 군대 및 경찰 통수권을 여전히 군 사령관이 갖는 등 한계가 많았고, 심지어 지도자인 수치여사는 대통령이 될 수 없게 되어 있어 실권이 없는 정신적지도자일 뿐이었다. 그런데 미얀마의 오랜 문제인 로힝야족 학살관련해서 국제사회는 근엄한척 거드름을 피우며 노벨평화상을 박탈하여 수치를 폐기처분했다. 수치는 군인의 단 한 명에게도 명령할 권한이나 힘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군부가 더 이상 수치를 고려하며 행동할 이유를 박탈했다. 수치는 중국과의 문제를 풀어나가지 않으면 미얀마 민주화가 불가능하고, 또 중국이 어느 나라든지 그 나라의 정권을 인정하는 태도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중국에 화해제스처를 보였는데, 여기에 불만을 품은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이 수치를 폐기처분한 셈이다. 사실 군부는 오랫동안 카렌족과 로힝야족 등 소수민족을 인종청소해왔다.
3. 미얀마에서 군부쿠데타는 늘상 반복된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천연자원을 해외기업에 팔아 벌어들이는 돈 때문이다. 그 돈은 군부 소유기업에 이전되고, 군인과 경찰의 급여는 대졸자 평균급여의 10여배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해외기업들은 군부가 제공하는 소수민족 노예를 통해 저비용으로 돈을 벌고 이를 미얀마군부에 상납한다. 이런 기업들에는 한국의 포스코도 포함되어 있다. 원래 대우그룹의 것이었다. 그래서 쿠데타에 성공한 군부 지도자가 늙으면 다시 새로운 군부가 중심이 되어 쿠데타를 하는 것이다.
4. 따라서 미얀마에서 반복되는 쿠데타와 군부독재의 진짜 이유는 바로 돈이다. 그렇다면, 대응방법도 분명해진다. 미얀마의 군부기업 뿐 아니라 이들과 협조하는 해외 다국적기업을 제재하면 된다. 아무도 그들과 거래할 수 없도록 경제제재조치를 취하면 더 이상 군부가 쿠데타로 얻을 것도 없고, 군경의 급여도 높일 수 없어 군부 내부로부터의 붕괴를 유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없었다. 지금도 미국은 군부소유기업에 대한 제재를 발표했지만, 그들과 거래해서 돈을 버는 자국 기업이 아닌 군부기업에만 발길질이다.
5. 그래서 조금 더 넓게 보면 미중갈등도 무관하지 않다. 진정한 G2로 인정 받으려면, 미중이 진지하게 국제사회의 문제들에 대해서 토론하고 대응방안에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미국이 서방측 기업들에 대해 제재조치를 취하면, 미얀마군부는 바로 중국기업들과 거래를 시작할 것이다. 미국은 이를 핑게로 근본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 계속 생색만 낸다. 결국 미중 양측이 미국의 인종차별과 혐오범죄, 중국 내 소수민족 문제를 가지고 서로 입씨름하는 동안 국제사회에서의 지도력은 전혀 없는 힘만 가진 깡패로 전락하고 있는 셈이다. 바이든 정부가 근본적으로 미중관계의 구조를 국제사회에서의 역할을 하는 G2로 바꾸지 못하는 이상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결국 미중이 미얀마문제를 해결하는데 합의에 도달한다면 국제사회에 G2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을 보여주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어차피 앞으로 오래동안 G1은 불가능하다.
6. 결국 다시 내전이 시작될 조짐이다. 말이 내전이지 화력에서 절대적인 차이가 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일방적으로 희생될 지 정말 걱정이다.
미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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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사태에 가장 큰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버마(미얀마)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버마(미얀마)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한국에 돌아와서 캠페인 관련 업무를 마무리 한 후 보고회를 가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캠페인에 참여하셨고 그 분들께 결산보고를 하기 휘한 자리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짧은 기간 동안 가서 보고 들은 버마(미얀마) 문제를 설명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버마문제
오늘은 그날 정리해서 말했던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일종의 중간결산인 셈이지요. 아직 정리해볼 부분이 많이 남은 상태로 짧은 기간 동안 생각했던 것을 중간결론 삼아 미리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실태랄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점들을 정리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방문했던 메솟지역은 인구가 15-16만 명쯤 된다고 합니다. 이중 버마 이주노동자가 10만 명이나 됩니다. 즉 버마 이주노동자를 고용하여 산업이 형성된 도시라는 뜻이지요. 이들 이주노동자들은 태국의 법정 최저임금의 반도 안 되는 급여를 받고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버마(미얀마) 내부에서는 실질 임금이 메솟지역보다 더 적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합법, 비합법적 수단으로 국경을 넘어와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경제적인 문제라면 버마 내부가 더 심각하다는 것이지요.
버마 내부의 더 큰 문제라면, 메솟지역에 대규모 난민촌이 건설된 배경이기도 하지만, 소수민족에 대한 인종청소라고 합니다. 샨, 카레니, 몬, 칸, 아라칸 등 주요 소수민족들이 정글에서 강제 이주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IDP(internally displaced people, 국내 강제이주민)라고 부르는 데 짐작할 수 있듯이 강제 이주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들의 근거지를 습격하여 학살하는 인종청소 방식이어서 더욱 심각한 상태입니다. 다시 소개하지만 2008년 초쯤에 개봉되었던 <람보4>라는 영화에 이런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모든 종류의 문제가 다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착취문제, 이주노동자 자녀들과 난민촌의 교육 및 의료 문제, 내부에는 경제적 궁핍과 식량문제가 그리고 민주인사들에 대한 극도의 탄압이 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삶의 희망이라는 절실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내부의 소수민족들에겐 준 전쟁 상태에서의 생존이라는 처절한 문제가 있습니다.
민주화만이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길
사실 내가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돌아다니다가, 그리고 돌아와서 고민하면서 내린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민주화!> 민주화 되지 않고는 이 모든 문제의 해결 실마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아니 실마리를 찾겠다고 덤빌 엄두조차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피스라디오 2차 캠페인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주화의 길은 요원해 보입니다. 버마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 대부분이 국경관리가 허술한 나라들이어서 민주인사들이 쉽게 해외로 망명하거나 잠입할 수 있습니다. 버마 내부에 남아서 지속적으로 활동하지 않기 때문에 늘 새로운 사람들이 나와서 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조직적인 저항력이 키워지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밖에서 여러 가지 희망을 만들어가고 있지만 그들 대부분이 내부가 민주화 되면 금의환향할 생각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민주화 지원 외에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지금 당장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희망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민주화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 밖에는 없는 것일까요?
지금 할 수 있는 일들
몇 가지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주노동자, 난민들을 위한 교육을 지원하는 일입니다. 메솟지역에는 여러 개의 유치원과 학교들이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이 대부분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거리에 방치되어 폭력적인 문제아들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학교로 불러 모아 기본적인 교육을 시킴으로써 당장에는 스스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성인으로 기르고, 나아가서는 민주시민교육을 통해 바람직한 시민으로 성장하게 돕는 것입니다.
교육에는 몇 가지 다른 목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뛰어난 학생들을 발굴하여 한국어를 가르친 후 한국의 의과대학에서 교육시킨 뒤 다시 그곳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곳의 의료문제를 함께 해결 할 수 있습니다. 또 민주화된 버마에서 민주시민으로서 자유버마의 뿌리를 튼튼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자유버마감시자들(Free Burma Rangers)이 하는 일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인종청소의 희생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정글을 헤치고 다니면서 구조하고 치료 및 교육하는 그들의 활동에 필요한 물품이나 비용, 정글 사람들에게 필요한 약품이나 공책, 연필 등을 공급하는 일입니다. 이렇듯 이 모든 문제들의 근본적인 해결할 실마리인 민주화 이전에도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요나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버려져 큰 물고기 뱃속에 3일을 있었던 사람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의 사소한 부분이지만, 풍랑을 만나자 뱃사람들이 승객들에게 각자 자신의 신에게 기도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지금 버마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인지도 모릅니다. 종교가 무엇이든 이들의 구원을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작은 일이라도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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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부의 새로운 사기극 발표
군사정부의 새로운 사기극 발표
2월 9일 밤 그리고 2월 13일 오후
우리 일행은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DPNS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을 들은 후 8시 30분 쯤 DPNS사무실 앞에 있는 한 태국식당을 찾았습니다. 아직 저녁식사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여러 가지 태국 음식을 시켜놓고 나누어 먹기 시작합니다. 태국 음식이 원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방콕에서도 그랬는데, 보통 중국음식처럼 요리를 몇 가지 시켜놓고 나누어 먹다가 마지막에 밥으로 배를 채우는 방식이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한사람, 우리를 태우고 왔던 차를 운전했던 젊은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물으니 일이 있어 먼저 갔다고 대답할 뿐입니다.
그런데 린이 누군가의 전화를 받더니 매우 심각한 표정이 됩니다. 그리고는 아무리 식사를 하라고 재촉해도 식사 생각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하며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배도 고팠고 태국음식이 입에 맞는 편이어서 맛있게 식사를 했습니다. 우리가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렸던 린은 중요한 뉴스가 있다며 말을 꺼냅니다. 순간 내 머리 속엔 불길한 생각이 피어오릅니다. 사실 사무실에서 DPNS에 대해 설명을 들을 때 1995년 이곳 메솟의 난민촌까지 버마 군대가 밀어닥쳐 난민들을 무차별 학살했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하는 염려를 하면서 린의 입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린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염려했던 나를 비웃듯이 전혀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린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지만 엉뚱한 걱정을 하고 있었던 내게는 다행스럽게도 가벼운 일(?)이었습니다.
군사정부인 국가평화발전위원회(State Peace and Development Council, SPDC)가 저녁 8:00에 중요한 뉴스를 발표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2008년 5월 18일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국민에게 직접 개헌에 대한 찬반의견을 묻겠다는 것입니다. SPDC는 이 국민투표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면 2008-2009년 중에 개헌작업을 마무리 하고 2010년에 총선거를 치르겠다고 합니다.
새 헌법이 담게 될 주요 내용은,
1) 국회의원의 25%를 SPDC가 직접 임명한다.
2) 국가 비상사태 발생 시에는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군부에 넘겨준다.
3) 헌법의 개정은 군부의 동의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4) 외국인과 결혼했거나 자녀가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은 선출직 공직자 선거에 출마할 수 없다.
등입니다.
이 항목들 중에서 4번째는 야당 지도자이자 유력한 대선 후보인 아웅산 수치 여사의 정치 활동을 봉쇄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치 여사의 남편은 영국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새 헌법안은 민정이양이라기 보다는 군정을 영구화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린에게 슬며시 의견을 묻습니다.
Q: 이렇게라도 투표를 진행할 수 있다면 민주화의 첫 걸음을 시작할 수 있는 것 아닌가?
A: 만약 SPDC가 진정으로 민정이양의 뜻이 있다면 1990년 투표결과에 승복하고 당장 민정이양을 해야 한다.
Q: 1990년에 이미 국민투표에 승리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이번에도 승리할 수 있지 않을까?
A: 천만에, SPDC는 절대로 민주적인 투표를 할 리가 없다. 이런 투표를 하겠다는 것은 이미 지난 번 패배의 경험에 기초해서 불법선거 준비를 마쳤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Q: 무엇이 걱정인가? 유엔 감시 하에 자유 총선거를 추진하면 될 것 아닌가?
사실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은 13일 방콕에 나와서 방문했던 Altesian-Burma의 간사로부터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감바리 유엔특사가 아세안 국가들을 공식 초청해 버마에 대한 아세안의 브리핑을 요청했으나, 아세안 국가의 하나인 버마의 반대로 아세안이 거부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 감바리 유엔 인권특사가 지난해 버마를 방문해서 성과없이 끝났고 지난 1월부터 버마군사정부의 허락 하에 버마를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버마 정부가 이유 없이 이미 허락한 방문 일정을 계속 미루고 있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유엔은 버마에서 전혀 힘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상은 전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감바리 특사가 계속해서 유엔감시하의 국민투표를 요구했지만 군사정부는 끝내 거절했습니다. 심지어는 사이클론 나르기스의 엄청난 피해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투표에 참석할 수 없는 가운데 군부는 5월 10, 24일 강제로 투표를 실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또 한 차례 군사정부의 사기극은 자연재해조차 혀를 내두르게 하며 진행된 것입니다.
사이클론 피해로 시체가 즐비한데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아세안은 듣지도 않는 독재자 탄웨에게 느긋하게 설교 중이라는 만평 -버마난민들의 저항신문 이라와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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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 여행에 나섰는가?
2월 8일
아침 5시 30분 인천공항을 향해 집을 나서면서
우리 세대는 미얀마라고 하면 잘 모른다고 하다가 버마라고 하면 “아하, 그 나라”라고 외치며 한국과 킹스컵 등에서 축구경기로 맞붙은 적이 많았던 동남아의 한 나라를 기억해 냅니다. 그리고는 “그게 이번에 군부가 시민과 스님 시위대를 학살했다는 그 미얀마야?”하고 되묻습니다. 영국과 일본의 식민지였던 그들이 독립한 이래 버마라는 국호를 사용하다가 어느 날 이 나라를 독재하고 있는 군부가 국호를 미얀마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버마는 해방 이후 계속 군부독재 하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88년 대규모 민주화 요구 시위가 있었습니다. 이때 시위가 1988년 8월 8일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하여 8888민주화시위라고 한답니다. 이 시위의 진압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만 3,000여명에 이른다지요. 그리고 그 당시 학생으로 시위를 주도했던 분들이 그 후 군부의 박해를 피해 해외에 나와 버마민주화 단체들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때의 시위장면을 담은 비디오는 YouTube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비디오는 내가 이번에 방문한 곳 중 하나인 DVB(Democratic Voice of Burma, 버마 민주의 소리)에서 제작한 것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TOgp3aTLVjM
8888시위 이후 군부 내에서 다시 쿠데타가 있었고 새로 권력을 잡은 군부는 시민과 국제사회의 압력에 굴복하여 1990년 국민총선을 실시하여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선거에서 민주 진영은 민족민주동맹(NLD)을 구성합니다. 군부는 NLD의 지도자 아웅산 수치여사를 연금한 채 선거를 치루지만 NLD는 무려 82%의 지지율을 획득하는 승리를 거둡니다. 군부가 지지한 국민통합당은 겨우 2%의 지지만 획득했을 뿐입니다. 그러자 군부는 다시 선출된 국회의원 100여명을 체포하고 독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2003년 데파인이라는 곳에서 아웅산 수치여사와 지지자들에게 테러를 가하기도 합니다. 수치여사는 1990년대 초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07년 9월이었지요. 다시 대규모 시위가 있었습니다. 8월에 처음 시작될 때는 급등하는 물가에 대한 항의 시위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88세대(8888시위의 지도자들이었던 당시 학생들을 일컫는 말이랍니다)들이 주도한 8월 시위였다고 하지요. 주동자들이 구속되고 소강상태에 빠지는 듯 했던 시위는 9월 들어 승려들의 시위참여로 다시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게 되었답니다. (사진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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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DC는 군부가 자신들을 지칭하는 이름입니다. 지옥에나 가라는군요. | 어떠세요?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있는 것 같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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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들이 거리로 나선 시위현장입니다. | 총기란 악마와 같아서 손에 들면 사용하게 되지요. 피로 범벅이 된 시위현장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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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버마, 이것이 시위의 목적이었습니다. | 그리고 일본인 프리랜서 사진작가가 피살된 장면입니다. |
1988년 당시에는 우리도 막 6월 항쟁을 거쳐 나와 민주화의 첫 단추를 꿰던 때였고 게다가 88 서울올림픽 때문에 그들의 소식이 내 귀에 크게 들리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2007년의 시위와 군대가 시위대에 발포하여 많은 시민들을 사살했다는 민중학살 소식은 지난 여러 달 동안 내내 내 마음 속에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광주항쟁과 부마항쟁. 그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도 서울의 봄을 운운하던 무렵 시위에 참여하였습니다만, 계엄이 내려지고 무기력하게 고향집에 내려왔다가 우연히 주한미군방송인 AFKN을 통해 처음 광주소식을 들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당시 시위에 특별히 한 역할도 없고 또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기에 돌이켜 보면 참 어이없는 일이지만 당시의 나는 무작정 겁에 질려 한 산골마을의 친구집에 숨어 지내다가 광주항쟁이 진압된 후에야 비로소 집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광주항쟁 시기에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는 사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지레 겁을 먹고 숨어 지냈다는 창피한 경험은 내 마음 속에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이 짐을 내려놓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예수가 그렇게 죽었다고 그래서 내가 살게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무고한 양민이 학살 되는 현실을 모른 채 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여행을 떠날 때는 모든 것이 너무 분명했습니다. '버마의 민주화운동은 여러 나라 여러 기구나 사람들이 지원할 것이고 결국 버마는 민주화될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 후에는? 민주화 이후에 국가를 이끌어 갈 정신무장이 잘 된 인재들이 길러지지 않는다면 악순환이 계속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박정희 사후에 더 악랄한 전두환이 등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해방 이후에 친일파가 여전히 한국의 현대사를 농락하고 있듯이 말이다'. 그래서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다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보고 들은 엄청난 현실 앞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습니다.
물론 이 여행의 직접적인 계기는 피스라디오(peace radio) 캠페인이었습니다. 버마 민중은 오랜 군부독재 하에서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군부 우두머리가 사실상 전제국가의 왕처럼 군림하면서 모든 국부를 독차지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모든 언론은 철저한 사전 검열을 통해서 차단되기 때문에 국민들은 점점 진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졌습니다. 다행히 몇 개의 라디오 방송이 해외에서 버마로 전파를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라디오만 보내줄 수 있다면 정말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피스라디오 캠페인입니다. 이 캠페인을 통해 모아진 기부금으로 라디오를 사서 태국-버마 국경지대에 보내기 위한 여행에 참여한 것입니다.
이 여행에는 이 캠페인을 주도했고 또 내가 창립 당시부터 참여했던 <함께하는 시민행동>의 오관영 사무처장과 이미희 간사가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행후기는 그 짧은 여행기간 동안 보고 들었던 많은 것들을 복기(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경기가 끝나면 경기과정 전체를 기억하여 다시 두면서 바둑공부를 하는데 이를 복기라고 한다지요)하면서 내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입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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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이며 잠을 들지 못합니다
2월 7일 밤
마음속의 상념으로 잠들지 못합니다. 잠이 들지 못할 때면 늘 그랬듯이 잠자리에서 슬며시 손을 뻗어 아내의 손을 잡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이내 손을 뿌리치고 등을 보이며 돌아눕습니다.
내가 버마 난민들이 있는 타이-버마 국경도시를 방문하여 그곳의 사정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아야겠다고 계획하고, 그 생각을 밝힌 뒤로 아내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언제나 내게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내가 계속 여행을 만류하는 말과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이 여행의 가장 큰 짐은 그 동안 내게 가장 좋은 후원자였던 아내를 설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내 삶의 반려자로 내가 하는 일에 큰 이의 제기 없이 20년 이상을 협력해주었던 아내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일까요?
처제와 통화한 듯 처제의 말이라며 차라리 여행비용을 돈으로 보내주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군산의 한 지역아동센터에 난방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매우 추운 곳에서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는데 차라리 그곳에 제대로 된 난방시스템을 갖추어주라고도 합니다. 마침 한 절친한 친구가 난방시스템을 갖추는 데 필요한 비용을 보내왔습니다. 나는 철부지처럼 아내에게 “이제 그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떠나도 되는 거지?” 라고 묻습니다.
사실 아내는 불안한 모양입니다. 내가 하려는 일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여 인간방패로 나섰던 유은하나 임영신님처럼 위험한 일에 뛰어드는 것이 아닌데도 아내는 두려운 모양입니다. 당연한 일이겠지요. 아마 조금이라도 내 신변에 위험이 있을까봐 그러는 것일 테니까요. 아니 한번 마음먹으면 주변에서 어떤 위협이 있을지라도 그저 묵묵히 내 길을 가는 내가 이다음엔 또 어떤 충격적인 계획을 들고 나올지 몰라 미리 겁먹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더욱 미안합니다. 이번 여행이 아니라 함께 살아온 지난 20년 세월이 말입니다.
그래서 밤새 잠들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웁니다. 여행의 출발을 앞두고 피곤하게 시작하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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