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기적을 구하는 기도를 하거나 혹은 들을 때면 가졌던 의문이 있었다. 왜 현대 과학이 이룩한 엄청난 성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적으로 기적을 구하는가? 왜 어느 종교이든 기적을 구하는 일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가?

내가 많이 들었던 간증 중에는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OOO원의 돈이 필요했는데, 간절히 금식기도를 하는 중에 아무개가 어떻게 알고(혹은 우연히) 같은 금액을 헌금했다는 스토리가 많았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기적을 구한다면,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야할 기적이 나에게 오므로써 누군가에게는 절망이 되지 않겠는가? 그 금액이 필요했던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그것은 절망이라는 뜻이다. 이런 의문을 해결한 단초는 성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말했던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자를 구해주는 이야기에서 찾았었다.

누기복음 10장 30절 부터 시작하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원래 내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한 설명을 하려고 예수가 한 비유이다. 대략 이런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여행 중에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거의 죽을 지경으로 버려졌다. 그때 그 곳을 지나던 사람들 중에는 제사장이나 레위인(고대 이스라엘에서 레위인은 제사장의 가문으로 구별된 신분) 등은 그 자리를 피해 가지만 한 사람, 사마리아인(순혈주의 유대인에게 사마리아인은 혼혈이라는 이유로 경멸의 대상이다)은 강도 만난 자에게 응급조치를 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가 여관 주인에게 보살펴 주라며 돈을 주고 떠난다.

여기에서 기적은 무엇일까? 언뜻 생각하면 강도를 당한 자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만난 것이 기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자. 만약 그 사람이 기적을 만난 것이라면, 그 전에 강도를 만나 죽을 지경이 된 것은 뭐지? 처음부터 강도를 만나지 않는 것 혹은 우연히 강도가 기다리는 곳을 피해가게 되는 것이 기적이지 어떻게 죽을 지경이 된 뒤에 사마리아인을 만난 것이 기적이  될 수 있는가? 모든 사람이 기적을 구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모든 사람이 위기에 빠지고 다시 구조를 받아야 기적이란 말인가?  

내가 찾은 해답은 이 이야기를 뒤집으면서 찾아졌다. 기적은 강도를 당한자에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에게 일어났던 것이다. 구해줄 수 있는 치료제와 여관에 치료를 맡길 돈을 가지고 있었던 그에게 도와줄 대상이 나타난 것이 기적이라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나에게 기적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능력이나 재물 등으로 살릴 수 있는 사람이, 혹은 후원을 할 수 있는 대상이 나타났을 때 그렇게 실천하는 것이 기적이다. 그러니까 기적은 나에게 도움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를 해야 할 일이다.

성경은 우리가 살면서 무심코, 혹은 세상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그렇지 않다고 대놓고 뒤집어 버리는 책이다. 예를 들어 보자.


부자가 복이 있는 게 아니고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이야기 한다.

[6:20]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잔치를 할 터이면 부자들이나 높은 사람들처럼 무언가 거래가 될 만한 사람들을 청해야할 텐데, 오히려 가난한자 들과 몸이 불편한 자들, 그리고 저는 자들이나 맹인들을 청하라고 한다.

[14:13~14]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심지어는 종교적이 되려면 반드시 있어야 할 그 어떤 형상의 우상도 만들지 말라고 한다. 여기서 어떤 형상이라는 말은 여호와조차 형상화하지 말라는 것이다. 도대체 형상이 없으면 무얼 보고 예를 올리라는 것일까? 아니 어떻게 종교를 유지하라는 말일까?

[4:23]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또는 고난도 즐거워하라고 한다.

[벧전4:13]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아무리 봐도 이상한 책이다. 그런데 이렇게 관점을 뒤집는 이야기 중에는 정말 교묘하여 그 의미를 알아채기가 쉽지 않은 것들도 있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에 가끔 나타난다. 바로 그 이야기를 하나 나누어 보자.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로 유명한 내 이웃이 누구인가?’하는 질문이 오가는 [누가복음 1025-37]의 내용이다.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35절 생략)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이다. 어느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던진 질문으로 시작한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을 얻는 방법, 즉 구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은 질문하는 사람도 대답하는 주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대화는 쉽게 진도를 나간다. 그러나 함정은 그 다음 질문에 있었다.

 

이 사람이 다시 묻는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여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바로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야기를 다 하신 후에 질문자에게 역으로 질문을 하신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어라? 내 이웃이 누구냐니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고?

 

그렇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데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는 내가 상대에게 베푼다는 관점이 담겨있다. 상대보다 더 우월한 나의 관점 말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의 의미이리라. 그런데 우리 주님의 질문인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에는 사랑받는 이웃이 상대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관점이 담겨있다.

 

이런 관점의 전환은 매우 급진적이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내가 아니고 바로 그 강도 만난, 즉 남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의 전환을 이해하려면 이 이야기의 시작을 다시 읽어보아야 한다. ‘어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다시 말하면 어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 구원을 얻는 방법이 바로 하나님과 이웃 사랑인데, 이웃은 강도 만난 자가 아니라 바로 사마리아인이라는 이야기 전개 말이다.

 

강도 만난 자를 사랑한 그 사마리아인은 그 강도를 만난 자를 통해 구원을 받는 조건인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그래서 진짜 사랑을 받는 사람은 강도 만난 자가 아니고 사마리아인이다. 우리도 그렇게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다. 어떻게? 강도를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서. 하나님의 역설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12:15]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아직도 잘 모르겠다면 다음 말씀을 읽어보라. [마태복음 2531~46]의 말씀이다. 구원은 곤경에 처한 자를 살펴보는 사랑으로부터 온다.

 

(31~33절 생략)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44절 생략)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기독교는, 하나님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그렇지 않다고 대놓고 뒤집어 버린다. 그러니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살 것이라고 기대했다면, 미안하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오히려 자신을, 주변을, 세상을 돌아볼 때마다 불편해야 잘 믿고 있는 것이다. (2013,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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