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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World!/짧은여행 긴여운:자유버마

나는 왜 이 여행에 나섰는가?

2월 8일

아침 5시 30분 인천공항을 향해 집을 나서면서

 

우리 세대는 미얀마라고 하면 잘 모른다고 하다가 버마라고 하면 “아하, 그 나라”라고 외치며 한국과 킹스컵 등에서 축구경기로 맞붙은 적이 많았던 동남아의 한 나라를 기억해 냅니다. 그리고는 “그게 이번에 군부가 시민과 스님 시위대를 학살했다는 그 미얀마야?”하고 되묻습니다. 영국과 일본의 식민지였던 그들이 독립한 이래 버마라는 국호를 사용하다가 어느 날 이 나라를 독재하고 있는 군부가 국호를 미얀마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버마는 해방 이후 계속 군부독재 하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88년 대규모 민주화 요구 시위가 있었습니다. 이때 시위가 1988년 8월 8일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하여 8888민주화시위라고 한답니다. 이 시위의 진압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만 3,000여명에 이른다지요. 그리고 그 당시 학생으로 시위를 주도했던 분들이 그 후 군부의 박해를 피해 해외에 나와 버마민주화 단체들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때의 시위장면을 담은 비디오는 YouTube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비디오는 내가 이번에 방문한 곳 중 하나인 DVB(Democratic Voice of Burma, 버마 민주의 소리)에서 제작한 것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TOgp3aTLVjM

 

8888시위 이후 군부 내에서 다시 쿠데타가 있었고 새로 권력을 잡은 군부는 시민과 국제사회의 압력에 굴복하여 1990년 국민총선을 실시하여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선거에서 민주 진영은 민족민주동맹(NLD)을 구성합니다. 군부는 NLD의 지도자 아웅산 수치여사를 연금한 채 선거를 치루지만 NLD는 무려 82%의 지지율을 획득하는 승리를 거둡니다. 군부가 지지한 국민통합당은 겨우 2%의 지지만 획득했을 뿐입니다. 그러자 군부는 다시 선출된 국회의원 100여명을 체포하고 독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2003년 데파인이라는 곳에서 아웅산 수치여사와 지지자들에게 테러를 가하기도 합니다. 수치여사는 1990년대 초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07년 9월이었지요. 다시 대규모 시위가 있었습니다. 8월에 처음 시작될 때는 급등하는 물가에 대한 항의 시위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88세대(8888시위의 지도자들이었던 당시 학생들을 일컫는 말이랍니다)들이 주도한 8월 시위였다고 하지요. 주동자들이 구속되고 소강상태에 빠지는 듯 했던 시위는 9월 들어 승려들의 시위참여로 다시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게 되었답니다. (사진참조)

 

 

 

 

 

 

 

SPDC는 군부가 자신들을 지칭하는 이름입니다. 지옥에나 가라는군요.

어떠세요?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있는 것 같나요?

 

 

 

 

 

 

 

 

승려들이 거리로 나선 시위현장입니다.

총기란 악마와 같아서 손에 들면 사용하게 되지요. 피로 범벅이 된 시위현장입니다.

 

 

 

 

 

 

 

 

자유버마, 이것이 시위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 프리랜서 사진작가가 피살된 장면입니다.

 

 

1988년 당시에는 우리도 막 6월 항쟁을 거쳐 나와 민주화의 첫 단추를 꿰던 때였고 게다가 88 서울올림픽 때문에 그들의 소식이 내 귀에 크게 들리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2007년의 시위와 군대가 시위대에 발포하여 많은 시민들을 사살했다는 민중학살 소식은 지난 여러 달 동안 내내 내 마음 속에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광주항쟁과 부마항쟁. 그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도 서울의 봄을 운운하던 무렵 시위에 참여하였습니다만, 계엄이 내려지고 무기력하게 고향집에 내려왔다가 우연히 주한미군방송인 AFKN을 통해 처음 광주소식을 들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당시 시위에 특별히 한 역할도 없고 또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기에 돌이켜 보면 참 어이없는 일이지만 당시의 나는 무작정 겁에 질려 한 산골마을의 친구집에 숨어 지내다가 광주항쟁이 진압된 후에야 비로소 집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광주항쟁 시기에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는 사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지레 겁을 먹고 숨어 지냈다는 창피한 경험은 내 마음 속에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이 짐을 내려놓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예수가 그렇게 죽었다고 그래서 내가 살게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무고한 양민이 학살 되는 현실을 모른 채 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여행을 떠날 때는 모든 것이 너무 분명했습니다. '버마의 민주화운동은 여러 나라 여러 기구나 사람들이 지원할 것이고 결국 버마는 민주화될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 후에는? 민주화 이후에 국가를 이끌어 갈 정신무장이 잘 된 인재들이 길러지지 않는다면 악순환이 계속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박정희 사후에 더 악랄한 전두환이 등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해방 이후에 친일파가 여전히 한국의 현대사를 농락하고 있듯이 말이다'. 그래서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다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보고 들은 엄청난 현실 앞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습니다.

물론 이 여행의 직접적인 계기는 피스라디오(peace radio) 캠페인이었습니다. 버마 민중은 오랜 군부독재 하에서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군부 우두머리가 사실상 전제국가의 왕처럼 군림하면서 모든 국부를 독차지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모든 언론은 철저한 사전 검열을 통해서 차단되기 때문에 국민들은 점점 진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졌습니다. 다행히 몇 개의 라디오 방송이 해외에서 버마로 전파를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라디오만 보내줄 수 있다면 정말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피스라디오 캠페인입니다. 이 캠페인을 통해 모아진 기부금으로 라디오를 사서 태국-버마 국경지대에 보내기 위한 여행에 참여한 것입니다.

이 여행에는 이 캠페인을 주도했고 또 내가 창립 당시부터 참여했던 <함께하는 시민행동>의 오관영 사무처장과 이미희 간사가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행후기는 그 짧은 여행기간 동안 보고 들었던 많은 것들을 복기(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경기가 끝나면 경기과정 전체를 기억하여 다시 두면서 바둑공부를 하는데 이를 복기라고 한다지요)하면서 내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입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