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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미신/21세기의 기독교인

교회가 과부의 명부를 작성한 까닭과 공동체복지

교회가 과부의 명부를 작성한 까닭과 공동체복지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고독사라는 말이 관심을 끌고 있다. 그리고 고독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회복지전문가들은 공동체복지라는 방안을 말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편지를 보면 이미 초대교회 시절 교회는 공동체복지를 실천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교회가 전통을 다시 기억해볼 때인 같다.

 

고독사란 누군가의 죽음을 주변에서 상당 시간 동안 알지 못한 주검이 방치되어 있는 죽음을 말한다. 짧게는 며칠간, 길게는 수년 동안 주검이 방치되었다가 발견되어 우리를 충격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고독사를 포함하여 노인 인구의 급증으로 복지 수요는 증가하고 복지 인력을 늘이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회복지 전문가들은, 공동체복지라 하여 동네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는 것을 복지의 방안으로 제시한다.

 

사실 어느 시대나 가난한 노인의 문제를 안고 있다. 특히 여성 노인들이 문제가 된다. 크고 작은 전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크게 적었던 시대나 혹은 지금 우리나라처럼 평화시기에도 여성의 평균수명이 훨씬 길기 때문에 노인문제의 핵심은 언제나 과부의 문제로 귀결된다.

 

디모데전서 5장에는 이런 과부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먼저 과부는 가족(4) 책임져야 하고 가족이 없다면 친족(8, 16) 책임져야 한다. 효도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나 돌볼 가족이나 친족이 없는 참과부(NIV영어성경에는 widows really in need, 진짜 도움이 필요한 과부) 교회에서 명부에 올리라고 한다.

 

교회의 명부에 올린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할까? 10절은 선한 행실이 있었던 자로 한정하는 듯한 말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1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은 젊은 과부들에 대한 것으로, 학자들은 이런 말씀들을 근거로 교회가 재정적인 지원을 하고 교회 안의 선한 일을 하도록 했다고 해석하는 같다. 아무튼 적어도 교회가 참과부들에게 오늘날 사회복지제도가 해결하려고 하는 무언가를 제공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것이 재정적인 것이 되었든,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이 되었든, 혹은 다이든지 말이다.

 

특히 젊은 과부들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보면 참과부란 경제적 능력이 없거나 재혼이 불가능한 연령층의 과부들에 해당한다. 그런데 출애굽기 22: 22~24 보면 과부를 정의와 사랑으로 대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고, 율법서에는 여러 차례 이런 명령을 반복한다. 우리 주님도 과부를 옹호하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다. 따라서 그러한 참과부를 교회가 돌보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전통이 최근 빚어지는 고독사 문제나 혹은 공동체복지라는 관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교회 안에서 노인 신자들이 서로 의지가 되는 어떤 제도들이 마련된다면 교회가 바로 공동체의 역할을 하면서 고독사는 물론이고 다른 여러 문제들을 풀어갈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때 많은 교회가 잘못 적용했던 사례인 교회 유치원을 세우는 것과 같이 다시 양로원과 같은 시설을 만들자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무언가 할만한 일이 있지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