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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미신/21세기의 기독교인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나 많은 글과 책이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도' 혹은 '선교'란 단어가 한국 교회에서 갖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생각해 보면 교회가 이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전도나 선교를 지상 최대 명령이라고 주장하는 말을 여기 저기에서 듣거나 읽었습니다. 이게 왜 지상최대명령인지, 사실, 나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전도나 선교가 지상최대명령이라고 말하는 것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리스도는 '사랑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전도나 선교가 지상최대명령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냥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지상최대명령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또 다른 논쟁이 있습니다. 선교 자체가 크리스텐돔(기독교왕국주의)적인 문화적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네 종교는 구원을 주지 않으니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이루라고 전하는 행위 자체가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전하는 방법이 "예수천당 불신지옥" 류의 메세지라면 그 전도 방법이 옳은 것인지 심각하게 검토해야만 합니다. '너 이거 가입하지 않으면 나중에 중병 걸려서 고생할 때 돈마저 없어 치료도 못받는다'고 공갈치며 보험에 가입시키는 공포마케팅처럼,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보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논쟁이 전파행위 자체를 금지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즉 종교의 자유는 믿음과 전파의 자유인데 이를 믿음의 자유로 크게 제한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가르치는 자가 오직 국가가 정해놓은 내용만을 가르치게 하는 것처럼 위험한 생각입니다. 객관화가 가능한 과학분야에서 객관화가 이루어진 내용만을 가르친다고 해도 상상력을 제한하는 어리석은 일인데, 하물며 십인십색의 해석이 가능한 인문사회분야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교사의 해석이 아닌 국가의 해석으로 제한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세뇌교육으로 변질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적 신념에 대해서 자기의 신념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정신적 폭력입니다. 기자가 어떤 사실을 알고 있지만 기사로 쓰지는 못하게 하는 것을 모든 사람이 독재라고 비난하면서 종교에 대해서는 이를 정의라고 말하는 이상한 논리입니다. 게다가 공산주의국가로 종교의 자유가 없다고 비난받는 중국조차도 믿음의 자유는 허용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다 그정도의 자유만을 허용해야한다는 주장이라면 분명히 심각한 일입니다.


심지어 나는 한 학자로부터 '기독교인들이 선한 일을 하는 것도 전도를 위한 것이니 선한 일도 하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들을 적이 있습니다. 나는 속으로 우리 주님이 하셨던 기도,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를 기억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선한 일 하는 것을 멈추면 세상이 얼마나 더 악해질까 혹은 그들을 대신하려면 얼마나 많은 세금과 얼마나 많은 인력이 필요할까를 헤아려 보지 않고 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미워보인다 하지만 소리없이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이 또 얼마나 많이 있는지 헤아려 본 적이 없는 사람의 말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에 신중한 자기 검열이 필요합니다. 이는 어떤 사람들처럼, 현대 사회가 이렇게 종교자유를 제한하려는 움직임에 대하여 기독교가 로마의 박해 아래 있을 때에 더욱 널리 퍼졌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용기 백배하자고 말할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가 로마의 박해 아래에서도 더욱 널리 퍼졌던 것은 그 시절 믿음의 선배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켜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더욱 늘어나게 했던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으로 세상을 감동시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이지 악다구니를 써서 오히려 세상이 그리스도를 욕하게 하는 사람들은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