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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꼬라지/정치

2012년대선을 앞두고 솟아 나온 기억

1. 6월 항쟁 때였다. 나는 모교에서 시간강사를 하고 있었다. 모교의 한 여학생이 진압전경의 것으로 보이는 군화발에 밟혀 죽은 일이 있었다. 그 후배의 시신이 안치된 병원 영안실에 시신을 빼았아 화장해 없애려는 전경의 공격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루는 그곳을 지키다가 젊은 날의 혈기로 짱돌을 집어 던졌는데 그 때 약간 어깨가 어긋나는 느낌을 받았다. 그후 계속 약간 불편하지만 별로 심각하게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던 어깨가 한달쯤 전부터 많이 불편하다. 자다가 나도 모르게 오른쪽으로 모로 누우면 아파서 깜짝 놀란다. 신음소리도 냈나보다. 아내가 놀라 묻는다.


2. 오늘 새벽에도 아파서 잠을 깼는데, 꼭두새벽부터 전화벨이 울린다. 아내가 일어나 받더니 넘겨준다. 한국에서 시차를 무시한채 걸려온 전화이니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전화를 받았다. 전두환시절 대학에서 그 험난한 시기를 함께 통과했던 1-4년쯤 후배들이 광화문의 문.안 유세에 왔다가 한둘이 우연히 만나서 그곳에 있는 친구들이 있는지 전화했더니 5명이 있더란다. 이들이 모여서 내 이야기를 하다가 야 전화해보자 하면서 시간도 안따져보고 그냥 내 질렀나보다. 50씩이나 먹은 녀석들이 웬 유세장?


3. 그렇다. 당시 학생운동으로 그 후엔 노동운동으로 감옥신세를 지거나 지명수배자로 오랜 시간을 숨어다녀야 했던 그 녀석들이 지금 나이를 50씩이나 먹어서 다시 유세장으로 발걸음을 한 것은 우리 세대가 싸웠던 시대의 어둠을 완전히 끝내야 한다는, 다음 세대를 위한 마지막 발악이다. 다행히 청소해야할 그 쓰레기들이 다 한곳으로 모였으니 한방에 청소할 절호의 찬스이다.

4. 중간에 대학원 진학으로 방향을 틀어야 했던 나를 아직도 형이라 부르며 그리워하고 연락하는 그들이 고맙기만 하다. 당시에는 변절이라 욕할 법한 상황이었지만, 형에겐 그게 더 어울린다며 오히려 용기를 주었던 그들에게 진 그 시절의 빚이 나를 언제나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게 한다. 생각해 보면 내가 그들에게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고 사랑을 받을 만한 일을 한 게 없는데...

p.s. 그 학생의 장례식날, 강의가 있었다. 평소처럼 강의실에 가득 찬 학생들을 보며 화가 나서 장례식하는 광장으로 나가라고 소리치며 학생들을 내보냈던 기억. 종일 종로거리에서 전경과 장례행렬이 대치하고 있었던 기억. 그리고 당시 모교 총장님의 중재로 무사히 장례를 마쳤던 기억. 그 때는 대학 총장이라면 그분처럼 의가 무엇인지 분별하는 분들이 있었다. 지금의 대학총장들처럼 돈의 노예들 일색은 아니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