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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눈으로 설국열차 읽기: 기술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세계관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설국열차 읽기: 기술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세계관

이 영화는, 보는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기술적 세계관과 그 뒤에 숨은 맘몬주의를 슬쩍 드러내면서 무언가 다른 세계관(감독은 이를 드러내지 않는다)에 기초한 유토피아의 시작 혹은 기술문명의 실종의 표지로서 아담과 하와의 탄생을 보여준다. 나는 이 영화가 중간에 이르기 전에 지금 쓰는 이 글의 중요한 화두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보았다. 내가 기억력이 많이 부족한 터라 구체적인 장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영화를 이미 본 분들이라면 스스로 기억을 되살리면서 읽어 주시길 부탁드린다.







이 영화를 단순 무식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빙하기로 표현되는 생명체 종말의 위기에 완벽하게 통제되는 기차가 만들어지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거기에 걸 맞는 정치사회체제가 만들어진다. 이 체제는 교묘한 균형과 질서를 통해 유지되는데 이런 통제는 설계자인 최고 권력자의 손에서 나온다. 또 그에게는 정치인, 관료, 군인 등과 같이 그 체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일을 대신 하는 수하들이 있다. 이 체제는, 교육을 통해, (완벽한 기술을 상징하는) 엔진을 숭상하도록 함으로써 유지되는데 최고 권력자는 동시에 엔진교의 교주이다. 그리고 이 체제에 불만을 가진 한 그룹의 사람들(기층 민중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관람자의 자유이지만 어쩌면 99%라고 회자되는 집단일 수도 있다)이 그 체제에 도전한다. 그런데 그들의 도전 역시 목표는 엔진이 있는 곳까지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 칸의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끝 칸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엔진은 모두의 신이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술적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고, 그런 의미에서 전작이라 할 수 있는 <괴물>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면 이 영화가 이처럼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 이유를 반만 이해할 수 있다.

이 영화가 프롤로그에서 하는 이야기는 기술문명이 가져온 온난화와 다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살포한 CW-7이 가져온 빙하기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기술유토피아를 신봉하는 자들이 제시하는 환상에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인류는 환경오염이라는 괴물과 맞닥트렸다. 기술적 세계관은 태연히 그 환경오염을 극복하는 새로운 기술을 희망으로 제시하지만 이는 더 큰 재앙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잠시 석유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대기오염과 핵발전을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기술자들을 떠올려도 좋겠다.) 인류는 ‘멈추면 죽는다’고 외치며 욕망을 자극하는 기술적 세계관의 순환고리 속에 들어간 것이다. 결국 기술적 세계관이 욕망의 충족과 함께 가져다준 죽음의 덫을 피하기 위해 다시 기술적 세계관에 의존해야만 하는, 폭주하는 기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사람의 모든 가치 판단을 지배하거나 혹은 강요한다는 점에서 기술은 우상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체제의 문제를 건드린다. 계급 사이의 이동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으며(예를 들면 바이올리니스트 한 사람이 계층 이동을 하는데 아내도 버리고 혼자 이동해야만 했다), 앞 칸에 사는 자들의 호화판 생활에 비해 끝 칸의 삶은 비참한데 특히 이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운명적으로 결정된 사람들이다. 주기적으로 인구조절을 위해 부추겨진 저항(전쟁)이 일어나고 무참한 학살이 벌어진다. 정치인이나 관료, 군인 등은 최고 권력자의 이런 의도에 따라 이유 없이 사람을 경멸하고 차별하며, 학살하는 개일 뿐이다. 특히 죽었던 것으로 보였던 관료의 부활을 통해 이들이 사람만 바뀔 뿐 사라지지는 않음을 강조한다. 그래서 이들을 편의상 중간 칸이라고 부르면, 전쟁은 오직 끝 칸에서 이 중간 칸까지의 사람들에게만 벌어진다. 앞 쪽에서는 전쟁과 무관하게 고상한 문화를 즐기는 듯 보인다. 그러나 앞으로 더욱 나아갈수록 사람들은 식탐을 시작으로 퇴폐적 쾌락을 탐닉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두 짐승이다.

이 체제(기차) 안에서 밖을 보는 소수의 사람들이 이 체제를 멈추게 한다. 이 체제 밖에도 삶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열차의 문을 여는, 체제를 멈추게 하는 혁명적 변화를 시도하게 한다. 그래서 기차(기술적 세계관)의 파괴는 새로운 체제의 시작을 의미한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탄생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기술적 세계관이 제시하는, ‘멈추면 죽는 욕망의 순환열차’에 올라타면 시간이 지날수록, 기술이 더욱 발전할수록 다수의 사람은 소수의 부를 위해 봉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새로운 스마트폰이 나올 때마다 불과 1-2년 사용한 옛 폰을 내버리고 아우성치듯 몰려드는 소비자들은, 눈에 잘 안 보이지만, 환경오염을 촉진하여 자기의 소득 중 상당부분을 에어콘이나 공기청정기, 전기료, 심지어는 덜 파괴된 자연을 찾아가는 휴가비용과 같이 파괴된 환경 속에서 생존하는데 투입하게 된다. 따라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기술발전을 통해 실제로 돈을 버는 사람은 소수이며 이들은 부를 더욱 더 차별적으로 축적하기 때문에 갈수록 더욱 소수가 된다. (이쯤에서 FTA가 바로 이렇게 더욱 소수의 글로벌 부자를 만드는 수단이라는 점을 깨닫는다면 당신은 뛰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기술적 세계관은 결국 체제의 몰락을 가져오는데, 이는 기술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경제학의 문제이다. “유한한 자원과 무한한 욕구의 충족”이라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달성하려면 무한한 욕구를 가진, 사람의 수를 줄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서 경제학이 가장 발달한 미국이 건국이래 지금까지 전쟁을 그친 적이 별로 없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기독교인의 눈은 여기에서 빛을 발하여야 한다. “유한한 자원으로 유한한 욕구만을 충족”시키는 체제,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을 줄이고 함께 나누는 체제는 유지될 수 있지만, 더 많이 독점하려는 욕심은 결국 체제 자체를 붕괴시킨다. 더 많이 독점하려는 것은 바알 혹은 맘몬주의 세계관이고, 여기에 대항하는 "유한한 욕구"의 대안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