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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미신/하나님의 경제학

하나님의 경제정의

하나님의 경제정의(이사야서 36-37장)


히스기야 왕은, 열왕기하 18장 3절을 보면, 다윗 왕처럼 하나님의 눈에 정직하게 행동한 왕이었다. 이 히스기야 왕 시절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 중에는 최근에도 묵상한 적이 있는 이사야 36-37장에 있는 히스기야 왕과 산헤립의 대결이 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제정의에 관하여 깊이 생각해 볼거리를 제공한다. 경제정의는 지난 대선 당시 거의 모든 후보가 모두 공약으로 내세웠을 만큼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이기도 하다.


간단히 당시 배경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솔로몬 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뉘어 북쪽은 이스라엘, 남쪽은 유다라는 분단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새로이 중동지역의 패자로 등장한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먼저 북 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 다시 산헤립 왕이 남 왕국 유다를 치러 왔다(열왕기하 18장). 그리고 당시의 유다 왕이 바로 히스기야였다. 이 전쟁을 기록한 것이 이사야 36-37장의 내용이다.


먼저 36장은 앗수르의 장수 랍사게의 도전적인 연설을 두 차례 기록하고 있다. 먼저 랍사게는 5-7절에서 세 가지를 선언한다. 1) 히스기야왕은 싸울 능력이 없다. 2) 이집트(애굽)는 너를 돕는 힘이 아니라 오히려 네게 해가 될 것이다. 3) 여호와 하나님에 관하여는, 히스기야가 그 산당과 제단을 없애버렸지 않느냐? 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두 가지 내용은 객관적인 사실로 보인다. 당시 유다는 앗수르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그 이유는 랍사게의 두 번째 연설에서 짐작할 수 있으니 뒤로 미루자. 이집트에 도움을 청하는 일이 결국 유다가 지팡이에 손이 찔리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말도 역시 사실이었다. 왜적의 침입으로 중국에 손을 벌렸던 우리 역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 왜적에게 피해를 입은 것이나 왜란이 끝난 후 우리가 중국에 당한 비굴한 역사나 별로 차이가 없다. 아니 국제관계는 언제나 그래왔다.


세 번째 주장은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히스기야는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적 타락을 개혁한 왕으로 유명하다(역대하 29-31장). 그중 대표적인 일이 산당과 제단을 헐어버린 일이다. 원래 산 위의 사당과 제단은 중동 지방의 대표적인 이방신이었던 바알을 숭배하는 곳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로 그 곳에서 마치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는 듯 바알에게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예레미야 19:5). 그래서 산당이나 제단은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이 '너희가 입으로는 여호와를 섬긴다 하면서 실제로는 바알을 섬긴다.'고 질책하던 바로 그 행위의 상징이다. 바로 그런 산당과 제단을 헐어버린 개혁을 랍사게는 하나님을 자기 산당이 헐리는 수모를 당한 신으로 오해한다. 그래서 그 신은 힘이 없다고 단정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토록 바알을 경계하셨는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문명이 만나는 무역과 전쟁의 고속도로였던 가나안 사람들은 더욱 더 번영하고 싶은 욕망으로 좋으신 하나님(엘)을 대체하기 위해 신의 아들인 바알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탄생한 바알은 농사와 다산, 성장,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적당한 비를 관장하는 신이다. 바알을 섬기는 것은 그 목적이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합왕이 바알 신정통치자(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하여 저지른 일 가운데 하나가 탐나는 이웃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주인을 죽였던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다(열왕기상 21장). 이 사건은 권력도 돈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희년의 법에서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드러난다. 레위기 25장은 안식년과 희년에 관한 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8-55절은 희년의 법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먼저 희년은 7년마다 반복되는 안식년이 7번 반복된 다음 해이다. 즉 7x7=49이므로 49년째가 되는 안식년의 다음해인 50년째의 해가 희년이된다. 희년이 되면 모든 사람들이 원래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던(여호수아 11:23, 13-19장) 각자의 토지(기업)로 돌아간다. 즉 중간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다른 사람에게 팔거나 저당 잡혔던 땅을 대가없이 되돌려 받는다. 따라서 토지의 거래 가격은 희년까지 남은 해의 수로 정하였다. 노예도 해방한다. 물론 안식년과 희년에는 경작을 금하였기 때문에 49년, 50년째 되는 2년간은 휴경하게 되고 51년째부터 다시 경작을 시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48년째 해의 소출로 3년간 먹을 수 있는 양을 주시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는 모든 토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전제가 있다. 희년이 될 때까지는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통해 사유재산의 확대가 가능하지만 부는 물론이고 종의 신분도 대물림되는 것은 방지하는 제도이다. 하나님의 성품인 공평과 정의, 그리고 사랑이 경제제도를 통해서도 실현되는 법이다.

 

자 이제 다시 이사야서로 돌아가 보자. 36장 12절부터는 랍사게의 두 번째 연설이 나온다. 특히 눈여겨 볼 대목은 16, 17절이다. 랍사게는 유다 백성에게 ‘너희가 항복하면 자기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게 될 것이며, 포도원이 있는 땅에 이주시켜 주겠다.’고 한다. 공산주의자들의 선언이 있기 수천 년 전에 이미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이렇게 음식과 땅을 미끼로 유다의 항복을 유인했던 것이다. 이 말은 뒤집어 보면 당시 유다의 백성들의 다수는 극심한 가난으로 먹을 게 부족했고, 토지도 부자들에게 다 넘겨준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외적의 침입에 대항하여 싸워 지켜야 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히스기야 왕이 산헤립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던 이유였을 것이고 산헤립은 심리적 항복을 유도한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매우 간결한 히스기야 왕의 승리였다. 아니 하나님의 승리이다. 37장은 바로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37장 30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 왕에게 와서 말한 하나님의 징조이다. ‘2년간은 스스로 난 것을 먹고 3년째에는 경작하여 그 열매를 먹는다.’는 것이다. 바로 희년이다(성경적 경제의 기초원리, 대천덕, CUP, 1989). 희년이 바로 하나님이 보여주실 구원의 징조라는 것이다. 그리고 36절은 어느 날 아침 앗수르 진중의 18만 5천 병사가 몰살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산헤립은 얼굴에 열이 나 돌아갔지만 결국 자식들에게 살해된다(역대하 32:21). 이로써 하나님은 희년을 지키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을 입증해 보이셨다.

 

이 기록은 우리에게 경제정의에 관한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사람들 사이에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절대 빈곤층이 늘어나며 부와 가난이 세습되면, 언제나 균등 분배를 미끼로 이들을 미혹하는 세력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미혹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부와 가난의 세습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것이 진짜 문제이다. 하나님은 이를 죄 없다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고 잔혹한 고통의 시대를 맞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 번째는 이를 피하는 길이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는 희년의 정신뿐이라는 점이다. 우리 주님이 바로 그 희년을 선포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은 이사야 61장의 예언과 이를 인용한 누가복음 4장 18-19절에도 밝혀 놓으셨다.

 

신정국가 시대의 제도를 그대로 도입할 수는 없겠지만, 희년의 정신이 반영된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스스로 희년의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애국이기도 하고 그것이야말로 진짜 반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