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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꼬라지

왜 우리는 꼭 정치를 하려고만 하는가?

왜 우리는 꼭 정치를 하려고만 하는가?

 

나는 지난 510, ‘어쩌면 사무소라는 어쩌면 이상하게 느껴질 이름을 가진 카페를 방문했습니다. 이 카페를 운영하는 젊은 커플은 시민단체의 활동가 출신으로 몇 년 전 그 동안 해오던 활동을 접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던 분들입니다. 이들은 옥수동 산동네를 지키고 싶어 현장에 살았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우울한 현실을 깨닫고 사라져가는 옛 산동네를 사진에 담고 기록을 남기는 일(‘옥수동 트러스트라고 합니다)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도 그 옆 약수동에 작은 카페를 내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중입니다.

 

[사진: 어쩌면 사무소 전경]

오랜만에 다시 만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쌍용자동차 철탑 농성을 끝내고 내려온 노동자들 이야기를 하면서 그 방법 밖에 없는 현실을 한탄하면서 눈물을 머금어야 했지요. 그러면서 회사가 해고하면 반대로 그래 엿 먹어라하면서 당당하게 걸어 나와 새롭게 일할 자리를 찾아갈 수 있는 적정기술에 기초한 사회적기업들이 활발한 나라는 불가능한 것일까 하는 고민도 나누었습니다.

 

재벌을 욕하면서 여전히 취업을 재벌에 의존하는 이 모순. 그러나 사회적기업 등 많은 아이디어들이 정부의 지원금 따먹는 사업으로 전락하였다가 지원이 끊기면 사라지는 현실을 탓해야 했지요.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소위 386고지론에 대한 의문제기로 이어졌습니다.

 

고지론이란 고위직에 올라가거나 정계에 성공적으로 진입하여 세상을 바꾸겠다던 주장입니다. 그들이 풀어 놓은 것은 후배들을 오직 고지 점령을 위한 소모품으로 이해했던, 그래서 선거 때만 되면 무리하게 후배들을 동원했던 386의 행태에 대한 허무한 웃음이었습니다. 386을 후배로 둔 세대 역시 만나면 흔히 내놓는 헛웃음이 있지요. 졸업하고 직장 생활하면서 감시의 눈을 피해 운동자금, 도피자금 대주었더니 정치인으로 화려하게 등장해서는 모든 것이 다 자기가 잘나서 그렇게 된 줄 알더라는...

 

그런데 토요일 한겨레신문에 마침 한국에 와있는 미국 올드도미니언대의 이진순 교수를 인터뷰한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대화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교수는 이를 성취지향성이라고 했지만, 이는 사실 우리가 그렇게 비난하는 성공지상주의의 다른 이름입니다.

 

토요일(11) 오후 늦게 내려오는 길. 내 머리 속은 꽉 막힌 고속도로만큼이나 복잡했습니다. 다른 길을 모색할 때가 되었는데, 아직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난 해 내가 내렸던 결론과 같이, 내가 해야 할 선택은 분명히 선거 때만 되면 다시 등장하곤 하는 고지론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 정치를 하려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만약 정치를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무언가 현재 정치보다 더 나은 가치를 실현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권력욕망에 사로잡힌 자이지 정치인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을 실천하는 일이 먼저인가 아니면 그것을 실현할 힘을 갖는 것이 먼저인가 물어볼 일입니다.

 

물론 힘이 있어야 혹은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치를 구현하는 일은 그런 것과 별개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재벌이나 부자들을 비난하지만 내게도 그런 돈이 주어진다면 나 역시 그렇게 변하지 않으리라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이는 성공한 일부 386들이 성공 후에 보여주는 행태이기도 합니다.

 

복지부문에서는 운동가들이 성공적으로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복지 부문도 위기라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부 지원이 없이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정부의 보조금 없이 자립할 수 없다면 여전히 풍전등화, 정권의 향배에 따라 운명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복지국가도 파쇼국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조금 더 민주적이고 복지가 잘 되어 있다는 미국에서 노근리 미군학살사건을 증언했던 노 병사가 연금 때문에 증언을 중단한 일이 그 증거입니다.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한 군산대학이 교육부의 유도에 따라 파쇼대학으로 전락해가고 있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경제적인 자립이 가능하도록 돕는 배후의 층이 더욱 두터워져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모두들 나 먹기 바쁘다고 말하는 사회에서는 복지도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작은 것도 나누는 시민가치관의 변화가 있어야 하고, 시민들 스스로 재벌에서 헤어 나와 자립하는 경제구조의 구축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소한 도농통합도시인 군산에서 대형마트들이 신선채소만큼이라도 아무개 때문에 매장을 축소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나오게 만들겠다는 무한도전 (로컬푸드 운동) 같은 것 말입니다.

 

여기에 정치도 뿌리를 두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정치조직 이전에 삶의 조직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의 조직이 성공한 후에 그 삶의 확산이 목표가 되는 정치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일까요? 박원순 서울시장이 아름다운 가게나 희망제작소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보다 먼저 깨달았던 사람들이 힘겹게 해온 일들을 기억하며, 여전히 꿈만 꾸는 자가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