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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미신/요한복음(John)

애국은 항상 옳은 것인가?

애국은 항상 옳은 것인가?

 

[요한복음 11:45~53]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학생 때 요한복음이 어렵다고 느꼈던 탓인지 조금씩 읽어 나아가고 있습니다. 학생 때 느꼈던 그 기분은 아마 내가 자라면서 교회에서 배워왔던 것과는 다소 뉘앙스가 다른 말씀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젊은 날, 누가복음에 빠져서 여러 차례 반복하여 묵상했던 탓인지 이제는 요한복음의 말씀이 낯설지 않습니다. 물론 누가와는 다른 관점에서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점이 오히려 새로운 감동을 주고 있고 또 많은 묵상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위에 옮긴 부분은 11장을 읽던 중에 잠시 멈추어 생각했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보이신 이적의 행진 중에 가장 극적인 클라이맥스는 바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이를 바리새인들에게 고자질을 한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아니 고자질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사역 현장에 나타나지 않아서 알지 못하므로 알려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속성으로 볼 때 전자일 것 같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교회 권력자들은 공회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합니다.

 

참고로 당시 이스라엘은 삼두마차 체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로마라는 감독 권력, 헤롯왕으로 대표되는 통치권력, 그리고 종교지도자들로 구성된 백성을 지배하는 권력이 서로 적당히 상대를 인정하면서 공생하는 구조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지배권력 중 하나였던 교회권력이 긴급회동을 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이 논의한 것은 놀랍게도 로마가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만들까 하는 우려였습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구원의 말씀이 사실은 로마권력과 같은 통치권력의 근본이념인 물질과 권력과 명예에 기초한(예수께서 광야에서 당하신 사탄의 시험처럼) 지배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기 때문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과 같은 극적인 사건을 통해 백성이 예수를 믿게 되면 로마가 자기 나라를 멸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식민지가 된다는 것은 자신들의 권력을 상실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첫째는 대제사장 가야바가 한사람을 죽여서 나라를 살린다는 애국심에 호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종교지도자의 애국심이 예수를 죽인 출발점의 하나가 됩니다. 두 번째는 그것조차도 그냥 개인으로 혹은 인간으로 한 행동이 아니고, 대제사장으로서 예언적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 예언이 예수의 구원 사역의 실체를 이해하고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라를 살린다는 애국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결국 서기 70년 예루살렘은 끝내 로마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멸망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살면서 애국하자는 주장이나 행동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한 울타리에 살면서 애국심은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애국심은 믿음의 한계 내에서 재해석될 필요가 있습니다. 애국심은 종종 다른 목적을 감추기 위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권력이 내적인 문제를 감추기 위해서라거나 혹은 지배권력이 자신들의 통치를 이데올로기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를 잘 분별하지 못하면 우리는 사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자리에 앉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애국심 자체가 우상이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