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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미신/신앙의 질문들

이순신 장군은 지옥에 갔나요?

이순신 장군은 지옥에 갔나요?

 

이 글의 제목은 내가 청년시절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 한 아이에게 받았던 질문이다.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예수를 믿지 않으면 모두 지옥에 간다는 의미)를 배운 뒤 아이들은 심각한 의문에 빠진다. 당시의 그 학생은 이순신 장군을 조선을 구했던 민족의 영웅으로 배웠고 그래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는데, 주일학교에 와서 그 분도 지옥에 가야한다고 적용할 수 있는 믿음에 대해 배웠으니 충격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게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있는 아내가 얼마 전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 아이는 고구려의 화려한 역사를 배우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예수를 믿기는커녕 알지도 못했으니 당연히 지옥에 간 것 아니냐는 고통스런 질문에 봉착했을 게다.

 

문제는 많은 교회의 교사들이 이 질문에 대해 너무 쉽고도 단호하게 그렇다.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으니 지옥에 갔다고 대답한다는 사실이다. 예수 믿는다는 말을 터무니없는 선민의식으로 둔갑시키고 있고 또 그래야만 믿음이 좋은 사람 혹은 바른 교리로 무장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현실이다.

 

구원의 문제는 우리가 결정할 권한이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이다. 이를 전제하고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살펴보자.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 로마서 2

 

바울이 율법과 구원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12절은 어떤 사람이 망하고 심판을 받는가에 대해 단호하게 범죄한 자라고 말한다. 율법이 있고 없고는 범죄한 자를 어떤 기준으로 심판하게 되는지를 나누는 기준일 뿐이다. 13절은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 선언한다. 주님께서 말하셨듯이 “[7: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를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14~15절은 율법을 모르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거나 변명하여 율법의 행위를 드러내어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때나 사람이 죄인으로 심판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율법으로 의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죄인인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얻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모르던 사람들은 믿음 대신 양심에 따라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다. 죄인인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 은혜인 것처럼 그들도 양심에 따라 비록 죄인일지라도 구원을 얻는 은혜라는 점에 모순은 없다.

 

한걸음 더 나아가보자. 율법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흔히 율법적이다라고 말할 때처럼 남을 심판하기를 즐겨한다거나 혹은 형식만 따르고 그 중심에 있는 의미를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주님께서 안식일에 하신 말씀이 바로 이런 상황에 대한 것이다. (마태복음 12, 10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두 번째 의미는 성경의 중심으로서의 율법이다.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주님과 율법사 사이의 다음 대화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22)

 

우리는 바울이 말한 율법이 바로 후자의 율법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주님이 책망하시던 외식하는 자들의 율법적인 행동을 양심이 변론할 것이라고 믿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다. 결국,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은 얼마나 이웃을 사랑했는가를 양심이 변론하여 심판을 피하게 된다는 의미가 된다.

 

나는 이스라엘이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그 몸서리치는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근본적인 출발점은 근거 없는 선민의식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자신들은 신이 선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해도 죄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신의 축복을 받게 될 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마찬가지로 근본주의 기독교, 특히 한국과 미국의 교회들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개독교가 된 것 역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왜곡된 믿음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믿는다. (2017.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