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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미신/신앙의 질문들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

 


사실 우리 믿음은 매우 포괄적이어서 한마디로 정리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여러 가치관이 침투하여 기독교의 탈을 쓰고 앉아 있기도 합니다. 이런 오해를 풀어가는 작업의 하나로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말의 뜻에서 시작하여 그것이 어떻게 교회개혁으로 이어지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여호수아 1:7-8)

 

여기에 나오는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도 현대에 와서 가장 많이 오해받는 부분의 하나입니다. 이 좌우를 정치적인 좌파와 우파로 오역하는가 하면 중용사상을 따라 적당히 타협하고 살라는 주장으로 둔갑되기도 합니다.

 

사실 좌파와 우파라는 말은 18세기 말 프랑스혁명 당시 공화파가 의장석의 왼쪽에 앉고 왕당파가 우측에 앉음으로서 생긴 말입니다. 즉 왕의 절대권력을 수호하려는 사람들이 우측에, 현대 국가체제인 공화정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좌측에 앉았던 것입니다. 그 후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웠던 상공인들도, 왕정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농민과 노동자, 여성을 배제하고 자기들만으로 기득권을 가진 부르조아지 층을 형성하자 이제는 이들에 대항하여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좌파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좌파가 이제 우파가 된 것이지요. 결국 좌파든 우파든 세상의 권세를 잡은 자들은 언제나 우파로 변하기 때문에 좌우는 끊임없이 변합니다. 공산주의도 그래서 실패했던 것입니다.

 

중용이란 12세기 중국의 성리학자였던 주희가 4서(논어, 맹자, 중용, 대학)에 포함시킨 책으로 중용사상이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으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이를 구현하는 방법으로 희로애락의 감정을 발하지 않고 항상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말의 바로 앞뒤 말씀을 보면 이 말이 바로 “율법책에 쓰여 있는 대로 지켜 행하라”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세상이 말하는 좌우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중용사상도 아닙니다. 우리 주님도 이를 옳은 것은 ‘옳다’하고 잘못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라 하십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


그렇다면 율법책에 쓰여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출애굽기 20장~23장에 기록된 율법의 핵심 정신은 정의와 공의였습니다.

 

성경에서 정의는 하나님의 자비와 공동체 정신으로 약한 자를 긍휼히 여겨야 한다는 법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출 22:21~27)

 

공의는 힘 있는 자나 가난한 자, 돈 있는 자를 구별하지 말고 악을 공평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법입니다.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정의를 굽게 하지 말며 거짓 일을 멀리 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출 23:1~9)

 

그러니까 이 두 가지를 실천하며 사는 것을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삶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했던 것도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율법을 지켜 행하라는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혁명부터 시작해서 모든 혁명들의 시작도 바로 성경적 의미의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정치가 바로 서지 않았던 나라들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를 아모스 선지자는 아무리 제사를 드리고 찬양하고 예배를 드릴지라도 정의와 공의를 무시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우상을 지고 포로로 끌려 갈 것이라는 예언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4)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기윤과 너희 우상들과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든 신들의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암 5: 21~27)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무어라 하셨을까요? 예수께서는 이러한 율법을 폐하고 새로운 법을 세우기 위해 오신 게 아니라 이 율법을 완전하게 세우기 위해 오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 17~20)

 

우리의 의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만 못하다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율법의 완성을 위해 예수께서는 새 부대와 새 옷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 시대에도 여전히 정의와 공의는 없고 오직 형식만 남아 유대주의자들과 함께 구원을 도모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눅 5: 36~39)

 

그래서 우리 주님은 바요나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시고 그 반석위에 새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7~18)

 

이렇게 해서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율법의 두 가지 정신을 실천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지금의 교회도 이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새 교회가 이를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옛 사람들로는 새롭게 시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교회입니다.   (2010년초쯤에 가졌던 가족모임에서 설교했던 원고를 정리해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