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와 미신/21세기의 기독교인

2012 마지막 밤, 복있는 사람

지금은 이곳 시간으로 2012년 마지막 밤입니다. 이미 한국은 새해 첫날의 오후가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가족이 함께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가진 뒤, 1년을 돌아보고 2013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기도로 가족의 신앙나눔을 마쳤습니다.


오늘 나눈 말씀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에서 시편 1편으로 정했습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세상에서 말하는 복있는 사람과 성경이 말하는 복있는 사람은 그 근본이 전혀 다릅니다. 우선 끝에 있는 6절에서 거꾸로 시작해 봅시다. 세상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합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그리고 그 길의 끝은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심판과 연결됩니다. 의인의 길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다고 합니다. 이말은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 혹은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시편 37:18, 121:5) 그러나 악인의 길은 망한다고 심판이 예정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지요.


특히 시편 145:20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라고 말하십니다. NIV는 여기서 보호한다는 말에 앞의 '인정하신다'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번역하고 있습니다. 또 의인이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 심판이 없다면 박탈당하는 자의 아픔을 위로할 방법이 없습니다. 흑자를 내고 있으면서도 주주의 이익을 최대화 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직원을 모두 해고하고 필리핀으로 도주하려는 한진중공업의 경우를 이야기 했습니다.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노동자들이 나타나게 하는 그 경영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세상의 위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무심한 분이 아닙니다. 이집트 땅에서 외치는 이스라엘 노예들의 비탄의 소리를 들으시고 해방의 역사를 시작하셨던 분입니다.(출애굽기 2:23)


이제 다시 앞으로 가봅시다. 그렇다면 의인, 즉 복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율법이란 모세 5경, 특히 율법이 주로 기록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이 말씀을 모호하게 성경이라고 이해하면 다시 두 가지 문제를 안게 됩니다. 하나는 사실이당시의 율법은 이 책들이었음을 간과하게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사상에 적당히 물타기를 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두번째는 그 율법에 나타나는 사상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율법서를 읽으면 종교적 의제, 의식에 대한 내용을 빼고 보면 매우 분명하게 부각되는 하나의 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안식일-안식년-희년이라는 축입니다. 예를 들어서 십계명의 처음 몇개의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의제입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사회적인 윤리입니다. 이둘을 연결하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즉 안식일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명령에 이어 그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고, 안식일을 지키는 그 신앙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생활윤리를 나열하는 구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자는 안식일-안식년-희년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자라고 좁혀서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렵게 해석해서 이해해야할 그 어떤 다른 뜻도 없습니다. 그대로 직설적입니다. 안식일에는 너와 네 종이나 육축이나 네 집에 거하는 그 누구도 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안식이지요. 왜? 그것은 하나님도 창조하실 때에 엿새 일하고 하루 쉬셨기 때문입니다. 생명 있는 것들의 안식의 근거를 절대자인 하나님에게 둔 것입니다.

그말을 하기 위해 그 앞에 다른 계명이 필요합니다. 다른 신(우상)을 두지 말라(바알처럼 돈과 권력을 위해 다른 생명의 안식을 빼앗는 거짓 신이나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이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을 이렇게 좁은 의미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지만 이점은 분명합니다.


안식년은 여기에 추가하여 토지의 안식과 종족 중의 노예된 자의 해방을 명령합니다. 희년은 아예 모든 노예의 해방과 더불어 원래 자기 땅이었던 곳의 회복을 명령합니다. 부자나 가난의 대물림을 규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50년 동안은 자기 노력에 의해 더 부자가 될 수도 있지만 자기 노력이 아닌 부나 가난의 대물림은 안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이런 정신을 제도속에 녹여 넣어여 하고, 동시에 개인은 나눔을 통해 이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편 1편은 바로 그 율법을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율법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자는 그 말씀을 지켜 행하게 됨은 당연합니다. 그런 사람이 악인의 길이나 죄인의 길에서 떠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한 일은 그런 사람이 진짜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3절).


오늘 우리 가족은 이 말씀을 통해 2012년을 돌아보고 2013년을 생각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