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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미신/Willoughby Church

하나님의 심판(God’s judgement: an exclusivist outrage or the end of oppression?)


(사진은 지난 4월 말 BC주의 수도인 Victoria의 관광객이 가장 많이 다니는 해변 도로를 걷다가 발견한 구호입니다. 캐나다 원주민 여성 한분이 길바닥의 돌을 긁어서 글씨를 쓴 뒤 물감을 넣어 글씨를 보이게 했습니다. "No Justice on Stolen Land(빼앗긴 땅에 정의는 없다)")


지난 5월 6일 윌러비교회 부교역자인 마크 그란빌(Mark Granville) 목사의 설교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영어가 짦은데다가 이분이 호주분이라 발음도 익숙하지 않아서 조금 밖에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어느 할머니에게 했더니 그분은 웃으시면서 너 캐나다에 언제왔느냐고 합니다. 그래서 3개월 되었다고 하자 자기는 30

년 되었는데도 못알아 듣는다고 하십니다.^^ 이분의 블로그에서 그날 설교 내용을 다시 글로 쓴게 있어서 링크를 걸어둡니다. 


http://markrglanville.wordpress.com/2012/05/10/gods-judgement-an-exclusivist-outrage-or-the-end-of-oppression/

 

아내가 오늘 저녁 산책 도중에 오늘이 며칠이지? 하고 묻는데 대답을 하려고 따져보다가 오늘이 518임을 깨달았습니다. 518은 분노와 부끄러움이 겹쳐지는 날입니다. 분노는 모든 분들이 같으리라 생각됩니다. 부끄러움이란 강동경찰서 유치장에서 풀려난 뒤 광주 소식에 겁에 질린 나는 춘천과 운봉 등지로 숨어다닌 기억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늘 이 설교를 소개하는 이유는 정말 한국 교회와 다른 게 있기 때문입니다. 전문 번역을 하기는 그렇고, 그렇다고 영어 그대로 소개하면 많은 사람이 읽지않을 것 같아 간단히 요약합니다.


그의 설교는 우리나라에서도 만들어진 신이라고 번역되었던 도킨스가 쓴 "The God delusion"에서 인용한 다음 내용이 중요한 도전으로 제시됩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를 원한다면, 왜 그냥 용서하지 않고 스스로 고통을 받고 댓가를 지불했는가?" 자유주의 신학에서도, J.A.T.Robinson처럼, 사랑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노는 서로 공통부분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서구 사람들의 인식과 고난받아온 사람들의 인식은 충격적이리 만큼 서로 다릅니다. 편안하게 살아온 서구사람들에게는 모든 폭력을 공격적으로 느끼고, 하나님의 심판 선언에 대해서도 그렇게 반응합니다. 그러나 폭력과 압제 속에서 신음해온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수용 가능할 뿐 아니라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핵심 요소입니다. 멕시코의 신학자 호세 미란다(Jose Miranda)는 슬픔에 잠긴 세상에서 압제가 끝나는 정의의 날과 정의가 세워지는 것을 고대합니다. 압제자가 여전히 압제하고 있는 한 하나님의 샬롬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개입은 압제자에 대한 심판을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이사야 28:21 말씀처럼 '기이하고 비상한 사역'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인류가 심판으로 종말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며, 인내하시며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베드로후서 3:9)


그러나 무한히 참으심은 무한한 고통을 의미하기 때문에고통을 끝내는 것은 오직 심판밖에 없습니다. 압제자를 제거하는 것만이 샬롬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성경의 심판은 부유한 압제자들과 우상숭배자들에게는 나쁜 소식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고대하던 바이며, 축하할 일입니다. 성경의 심판은 단연코 좋은 소식입니다.


마크는 특히 서구인들을 향해 우리는 거의 모두 부유한 압제자들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불의를 참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에 다시 한번 매달리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심판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게되는 핵심이라고 합니다.


60-70년대 한국 교회는 군사독재 하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유신체제에서 내 기억에 의하면, 긴급조치 1호 최초 연행사건은 전주의 한 교회에서 설교를 위해 미가서 2장을 낭독한 직후 난입한 형사들에 의해 끌려간 모 목사님이었습니다. 말씀 선포도 하기 전에 오직 성경을 낭독한 것 만으로 형무소 신세를 진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아니 그 오래 전부터 한국 교회에서 구약성경은 십일조를 내라고 강요할 때나 인용되는 말씀으로 전락했습니다. 어느새 한국교회의 성도들도 서구사람들처럼 부유한 압제자가 되어 심판을 거북해 하는 존재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이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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