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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음악*사진&생각

디아스포라 기행

노대통령의 자살로 생긴 상처에 딱지가 생기기도 전에 들린 김대중대통령의 서거 소식은 이 여름을 참 견디기 힘든 잔인한 계절로 만들었습니다. 가장 허전한 것은 내게 살아있는 대통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실감이었습니다. 비록 그분들이 현직에 있을 때 나는 그분들과 다른 가치관과 정책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래도 마음으로 대통령임을 인정할 수 있었던 분들은 그들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잔인한 여름에 나는 예술작품을 소재로 삼은 소설과 여행기를 몇 권 읽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재일조선인 서경식교수가 쓴 [디아스포라 기행]입니다. [추방당한 자의 시선]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으로 <돌베개>에서 출판하였지요.

서경식 교수는 내가 오래 전부터 이름을 알고 있던 분입니다. 책속의 저자 소개를 보면 1951년에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에서 프랑스문학을 전공했다고 합니다. 1995년에는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수상했고 마르코폴로 상을 받기도 한 작가로 현재는 도쿄 게이자이대학 교수로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그의 경력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한국어판 서문에 밝혔듯이, 대학을 졸업하면 조국인 한국으로 유학을 떠날 작정이었던 그는 60년대에 먼저 조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두 형이 70년대에 모두 정치범으로 한국 감옥에 투옥되는 바람에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두 형이 바로 군사독재의 대표적인 해외교포 희생자이자 한국현대사에 대표적인 양심수로 분류되는 서준식, 서승 형제였던 것입니다. 그 시절 그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의 민주화를 간절히 원했지만 믿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 책은 이런 배경을 가진 그가 세계 이곳저곳의 음악과 미술, 그리고 문학을 살펴보는 예술기행을 다녀온 기록입니다. 물론 단순한 예술기행으로 오해할 사람은 없겠지만 사족을 붙이자면, 일관된 주제는 바로 ‘디아스포라’입니다. 디아스포라란 원래 ‘흩어짐’을 의미하는 말인데, 구체적으로는 예수가 죽은 뒤 로마가 예루살렘을 완전히 정복하고 학살과 탄압에 나서자 죽음을 피해 세계 각지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현대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자기의 땅에서 추방당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쯤 될 것입니다.

그는 세계 이곳저곳의 디아스포라들의 예술작품 감상이라는 형식을 빌려 그들의 역사적 배경이나 삶의 현실을 간단하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게 설명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자신의 처지를 예술에 담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 외부의 폭력에 의해 강제로 그렇게 되었는지를 담담히 써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런 글을 읽다가 문득 눈을 책에서 떼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대신 가슴으로 다시 책을 읽으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잘못된 지도자가 대중을 맹목적인 폭력배집단으로 만들어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몸서리치게 됩니다.

디아스포라라는 어원이 암시하듯이 많은 소재들이 유대인 디아스포라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야기의 시작과 끝 그리고 중간 중간 불쑥 재일조선인을 중심으로 코리안 디아스포라와 그 예술을 소개함으로써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한국인 디아스포라에 대한 것임을 구태여 감추려 하지 않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인 디아스포라가 해외입양아까지 포함하여 600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욱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 책을 너무 감상적으로 읽는다는 비난을 받는다 해도 말입니다. (2009.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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