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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World!/짧은여행 긴여운:자유버마

고려인과 조선족

고려인과 조선족


다 아시다시피 우리 민족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이들 중 내가 오늘 이야기 하고 싶은 사람들은 옛 소련에 살고 있는 고려인과 현재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에 대한 것입니다. 이들의 유래와 현실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메솟을 들어가기 직전 태국군 검문소에서 보았던 미얀마사람들의 모습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직접 보지 못했지만 우리에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싶어서입니다.


먼저 조선족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봅니다. 원래 중국공산당은 공산주의 이념에 충실하여 소수민족을 피지배자들로 보지 않고 보호해서 함께 가야할 사람들로 보았기 때문에 소수민족들끼리 따로 모여 사는 자치구를 지정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 민족도 연변(옌볜)지역에서 자치구를 구성하고 살아 우리말과 글을 잃지 않고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해 왔습니다. 물론 이들의 이주가 시작된 시기가 조선시대였고 게다가 동맹관계에 있던 북한이 자신을 조선으로 부르는 등의 이유들 때문에 조선족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들 조선족들은 중국민화 된 한민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중국국민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중 관계가 개선되고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조선족의 가치가 돋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우리와 말이 통하는 같은 민족이라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 되어 저임금 노동자 유입의 가장 중요한 그룹을 형성하였으며, 중국 내에서도 한국과 관계를 맺고 있는 다양한 사업들에서 한국어 통역자로서 역할이 부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국이 시장경제체제를 심화시켜 나아가면서 당연한 결과로서 소수민족들의 민족 정체성이 자라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과거에는 동일한 국가 안에 수용되었던 소수민족들이 부분적으로 독립을 주장하는 단계에 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이에 놀랜 중국 당국은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을 바꾸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서북공정이나 동북공정 등으로 나타난 성장의 결과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방법에 의한 민족 동화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구 소련의 고려인들입니다. 먼저 고려인이라는 호칭의 유래를 살펴보면, 러시아어로는 한국인을 '카레이스키'라고 하는데 이는 코리언, 즉 고려인이 되어 구 소련 내 한민족을 고려인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옛 소련은 소수민족 흡수정책을 표방하여 연방 내 모든 민족을 다 자기민족으로 흡수하여 융화시키는 정책을 썼습니다. 이 흡수정책이라는 게 말이 융화이지 사실은 민족 말살정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들도 민족 정체성을 박탈당한 채 살도록 강요받았습니다. 이런 정책의 결과로 1세대를 제외하면 대부분 한국어를 잊게 되었고 혼혈화 되어 외모도 변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민족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당당한 한민족입니다. 


일제는 대동아공영권을 기치로 시작한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1939년부터 45년 사이에 약 72만 5천명의 한국인 일반 노동자와 14만 5천명의 군 징용노동자를 동원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한국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 중국, 사할린, 동남아시아, 남태평양의 광산이나 건설현장, 그리고 공장 등에 투입되었습니다. 물론 그밖에도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는 많은 노동자들이 전쟁 마지막 해에 터널, 비행장 혹은 다른 시설의 긴급 공사현장에 징발되었으며, 공장이나 군대의 매춘굴에 끌려간 여성과 소녀들의 수에 대해서는 기록조차 정확하게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중 15만 명 정도를 조선총독부는 사할린의 광산이나 비행장 혹은 다른 군사시설 건설에 투입하였습니다.


물론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가난에 찌든 사람들과 일제의 압제를 피해 도망 나온 사람들,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이 연해주일대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우수리강 일대에 정착하였는데 그 수는 파악할 수 없다고 합니다. 다만 1914년 블라디보스톡에 신 한인촌을 건설할 당시 고려인수가 6만3천명에 달했다고 하는 기록을 볼 때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1920년대에 연해주가 소련으로 귀속되면서 국경이 폐쇄되어 억류되었습니다. 반면에 사할린에 징용되었던 분들은 일제 패망 이후 억류됩니다..


연해주지역 교포사회가 전통적인 생활모습을 잃게 된 것은 스탈린 정권이 추진한 집단농업정책 및 러시아화정책이 본격화된 1928년 말 부터라고 합니다. 스탈린이 급속한 산업화와 농업의 집단화를 추진하면서 고려인들의 삶도 크게 변한 것입니다. 이에 비해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은 광복 2,3년 전에 강제로 동원되어 탄광에서 일한 동포들입니다. 해방 후 미국과 소련의 협정에 의해 일본인은 전원 일본으로 귀국하였지만 한인들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대로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한인들의 강제 이주 경로나 숫자 등은 교학사에서 발행한 고등학교 역사부도에 그림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스탈린 정권은 우리 교포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당시에 교포들을 수송하다가 일정한 간격으로 사람들을 떨어뜨려 고립시킴으로써 사실상 얼어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유명한 인류 잔혹사의 하나입니다. 이런 살인적 강제 이주는 1937년 9월에 시작하여 12월 중순에 완료되었습니다. 스탈린은 고려인을 강제 이주시키기 전에 고려인 동포 지식인 2,500명 총살시켰으며, 이주 고려인들은 이후 1953년까지 약 16년간 집단 수용소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수용소 생활에는 민족교육의 금지, 국가기관 취업과 취학의 제한, 사회․정치적 진출 봉쇄 등이 포함됩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이 모든 제한은 비로소 완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려인의 비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1991년 구 소련의 해체와 독립 국가들의 탄생에 따라 새로운 이주와 유랑의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마치 스탈린의 잔혹한 강제이주 시대처럼 고려인들은 다른 구 소련 내 소수민족과는 달리 모국으로의 귀국지원프로그램도 없고, 반겨주는 나라가 없기에 고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생존을 위해 유랑하거나 현지에서 정착하기 위해 오늘도 피와 땀을 쏟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