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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World!/짧은여행 긴여운:자유버마

새로운 사회를 위한 민주당(DPNS)

새로운 사회를 위한 민주당(DPNS)

2월 9일 저녁

우리를 맞아준 것은 한국에서 이미 접촉해왔던 버마의 새로운 사회를 위한 민주당이라는 의미의 DPNS(democratic party for a new society)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한 직후 양초희라는 한국 여대생이 도착했습니다. 양초희씨 역시 한국에서부터 접촉해왔던 전남대 3학년 여학생으로 518기념재단에서 실시하는 국제인턴쉽 프로그램에 따라 Forum Asia라는 국제단체에 인턴으로 방콕에 왔다고 합니다. 이곳에서의 일이 주로 문서를 통한 운동인데, 여기에 답답함을 느꼈던 초희양은 좀더 필드에서 직접 뛰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여 다시 치앙마이에 있는 ERI(erath right international)이라는 단체에 파견되어 활동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ERI에서 하는 일은 한국의 대우인터내셔날이 버마 안에서 저지르고 있는 만행에 대한 국제 연대운동이었습니다. 그녀의 인턴 기간은 2008년 4월까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잠시 인사를 나눈 뒤 본격적으로 DPNS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종일 자동차 여행을 한 후여서 조금 피곤하기는 했지만, 2000년경에 미국을 여행할 땐 하루에 13시간 이상을 직접 운전하고 돌아다닌 적도 있기 때문에 아직은 체력이 남아 있습니다.

DPNS 홈페이지의 로고(http://www.dpns.org/)

DPNS는 1988년 소위 8888운동 당시에 대학생들이었던 학생운동 멤버들이 구축한 정당으로 전국에 걸쳐서 다양한 대학생들과 일부 지도자들이 참여한 정당이랍니다. 이들은 1988년의 시위로 달성하지 못한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해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정당을 결성하였는데, 당시에는 아웅 산 수지 여사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 (NLD)에 이어 전국적으로 25만 명의 당원과 120여 개의 지부를 거느린 대규모 정당이었습니다. 특히 대학생들과 청년층의 지지가 절대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1990년 5월 27일의 총선거에서 DPNS는 대중적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NLD의 승리를 위해 NLD에 대한 지지운동과 지원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표를 분산시켜 군사정부를 돕는 결과가 될까봐 아예 선거를 포기하고 NLD를 지원했던 것이지요. 이들의 행동이야말로 학생운동다운 발상 아닐까요?

결국 1990년 5월의 총선에서 전체 485의석 중 400여석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둔 후 DPNS는 군사정부에게 NLD로 정권이양을 요구하였고, 이에 군사정부는 DPNS를 타겟으로 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섭니다. 이에 따라 핵심 당원 1500여명이 구속수감되고 지도자들은 가택연금되었습니다. 또 선고기간도 대부분 장기간이었고 강제노역이 포함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약 백 명이 감옥에 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버마 내에서 민주화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DPNS 중앙위원회는 군부에 대한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안전한 지역에 본부를 건설하고자 1991년 태국-버마 국경지대의 자유지역인 마너플라우로 옮겨 당을 재결성하였습니다. 마너플라우에는 많은 버마민주화운동단체들과 소수민족군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DPNS는 역시 자유버마동맹(Democratic Alliance of Burma, DAB)과 버마연방국회(National Council of the Union of Burma, NCUB)의 멤버가 되어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DPNS는 이제 버마 내부에서 시민사회의 성장과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다민족간의 동맹을 유도하고 국제협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특히 당원들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다양한 교육과 전문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장래에 자유버마에서 경쟁력 있는 정당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심지어는 정책연구센터를 두고 분기별로 버마의 민주화를 위한 다양한 경험과 시각들을 전파하는 연구잡지를 발행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학생운동 출신이지만 정당운동에 관심이 없는 학생들은 한국의 한총련과 유사한 학생운동을 조직하거나 지하운동을 해왔습니다. 이런 지하운동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몬(Mon)족인 민꼬나잉(Min Ko Naing)이란 사람입니다. 뒤에 다시 쓰겠습니다만 가는 곳 대부분에서 수치여사의 사진과 함께 그의 사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버마전국학생연합(All Burma Student Federation Union, ABSFU)의 지도자였고, 지하운동도 이 단체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주로 시위를 조직하고 유인물을 배포하거나 정당 지지활동을 통해 학생과 국민 그리고 정치인을 이어 주는 다리가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