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음악*사진&생각

아미시의 은혜와 용서


아미시의 은혜와 용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6:12, 주기도문)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4-15)

2006년 10월 2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니켈 마인스에 있는 아미시 학교에 로버츠라고 하는 사람이 침입하여 여자 어린이 10명에게 총기를 난사하였고 이 일로 5명의 어린이가 죽고 5명이 크게 다친 사건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학교에 총기를 난사하는 사건이 있기 때문에 이 사건 역시 그런 사건의 하나로 지나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가 이 사건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피해자였던 아미시들이 보여준 용서와 화해 때문이었다. 사건 현장에서 자살한 범인 로버츠의 가족 역시 사랑하는 남편, 아버지, 아들을 잃었다는 점을 생각한 아미시들은 사건이 나고 몇 시간 후에 범인의 가족들을 찾아가 위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틀 뒤 두 손녀를 잃은 할아버지에게 갑자기 기자들이 질문을 던졌다.

      “범인의 가족에게 분노가 치미십니까?”  “아니오.”

“그들을 이미 용서하셨다는 건가요?”  “내 마음속에서는 그래요.”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하나님께서 도우셨으니까요.”

그들은 로버츠의 장례식에도 참석했을 뿐 아니라 은행에 로버츠펀드를 개설하여 그의 남겨진 가족을 위해 기부금을 모금했다. 전 세계에서 모금된 피해자 가족을 위한 기부금 중 일부를 로버츠 펀드에 넣은 것은 물론이다. 그렇다. 이들의 용서가 세계의 이목을 끈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아미시는 20여년 전만 해도 미국의 주류 기독교에서 이단 취급을 받았고, 영화 속에서는 문명을 거부하고 검정색 멜빵바지에 마차를 타고 다니는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이었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쯔빙글리와 같은 일부 종교개혁자들은 교회 개혁을 뛰어 넘어 예수의 가르침에 복종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교회를 주장했다. 그들은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음으로써 헌신을 상징화했기 때문에 갓난아이일 때 세례를 받았는데 다시 세례를 받는다 하여 재세례파(아나뱁티스트)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카톨릭교회나 다른 주류 종교개혁가들로부터 탄압을 받았는데 16세기 유럽 순교자들 가운데 40-50% 정도가 재세례파였다고 한다.

재세례파는 탄압을 피해 다니다가 결국 주로 미국에 정착하였는데, 이들은 메노나이트, 아미시, 후터라이트, 브래드런 등이다. 메노나이트는 도시화를 받아들여 도시 속에서 예수의 제자로 사는 삶에 관심을 갖고 평화운동을 주도하고 있으며, 아미시는 아직도 농촌에서 최소한의 문명만을 누리는 삶을 살면서 유기농업을 주도하고 있다. 혹시 이라크 전쟁 당시에 민간시설(병원이나 식수탱크 등)에 미군이 폭격하지 못하도록 인간방패라는 이름으로 보호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 중 주요 그룹이 아나뱁티스트였다.

이들은 어떻게 용서가 가능했을까? 재세례파는 16세기에 시작할 때부터 ‘예수를 따르는 것’을 가장 중요한 기독교인의 표지로 강조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봄, 가을 두 번 행해지는 성찬예배를 준비하면서 마태복음 18:23-35절의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를 설교한다고 한다. 베드로가 주님께 죄지은 자를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가를 묻자,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며 들려주신 비유이다. 왕에게 큰 빚진 종이 자신의 빚을 탕감 받고도 자신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아 결국 벌을 받는데, 그 비유의 끝은 이렇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18:35)

이렇게 그들의 설교와 교육의 중심에는 늘 용서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양육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말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한 아미시교회의 표어였다. “복음을 전하라. 그리고 만일 필요하다면 말을 사용하라.” 복음을 전하되 입이 아닌 삶으로 하라는 의미이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살아왔다면 지금 ‘개독교’라는 비난은 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무튼 이 표어는 니켈 마인스 사건을 통해 세상에 빛을 비추었다. 이 사건을 보는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용서와 화해를 되새겼던 것이다. 다음은 그러한 글들의 일부이다.

“만약에 부시 대통령이 스스로 주장하듯이 ‘주 예수를 따르는 자’였다면, 세상 만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육을 자행하려는, 제어할 수 없는 충동에 미친 듯이 끌려가는 ‘신자들의 나라’라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졸렬한 모조품의 등장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에 아미시 사람들이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책임을 맡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 만약에 9.11 사건 희생자들의 장례식에 비행기 납치범들의 가족을 초청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가 모두 고백하지만 결국 할 말을 잃게 만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아미시 사람들이 몸으로 실천한 기독교 신앙이다.”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런 용서와 화해를 실천에 옮기기는커녕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조차 버겁다. 아직 날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을 가슴 속 가득히 채우지 못하고 사는 탓일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골3:13)

(뉴스앤조이에서 출간한 <아미시 그레이스>를 읽고 쓴 글입니다)

'책*음악*사진&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하지 않은 발전은 발전이 아니다  (0) 2011.08.28
사랑의 승자  (0) 2011.08.09
아아, 윤이상  (1) 2010.02.23
아바타, 그리고 4대강???  (2) 2010.01.18
새해 받은 특별한 연하장  (0) 2010.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