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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미신/21세기의 기독교인

그리스도인과 환경보호


내가 그리스도인들과 이야기하면서 환경보호에 대한 생각을 물으면 대부분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환경보호는 좋은 일이잖아요. 그리스도인이니까 좋은 일에 동참해야지요.’ 맞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좋은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윤리적인 대답은 가끔 문제를 일으킵니다. 세상의 윤리와 성경의 윤리가 항상 같지는 않아 좋은 일에 대한 판단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세상의 윤리는 시대에 따라 또 환경에 따라 수시로 바뀌기도 합니다. 환경보호에 대해서도 성경적 관점이 아닌 세상 윤리를 기준으로 삼으면 교회의 입장도 그렇게 변덕스럽게 됩니다. 물론 성경이 환경보호에 대해 명확하게 이야기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심지어는 환경보호가 자연신을 숭배하는 것처럼 비칠 때도 있습니다.

정말 그리스도인은 환경보호가 좋은 일이니까 동참해야 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우리의 세상사를 시시콜콜히 이야기하는 책이 아닙니다만, 그러나 우리 삶의 중요한 기준(가치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규칙을 적용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사가 혼란스러울 때면 성경이 가르쳐주는 기준에 따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다스리는 존재, 사람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기록입니다. 마지막으로 만든 것이 사람이고, 이 사람에게는 특별한 명령을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위에 적은 창1:28의 말씀입니다. 1)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2) 땅을 정복하라. 3)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사실 이 하나하나는 기독교 신앙, 혹은 성경적인 삶(가치관)에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만, 결국 사람은 번성하여 땅을 채우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에서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다스리다는 말은 지배한다는 말과 다릅니다. 폭군은 지배하지만 선한 임금은 다스립니다. 다시 말해 다스리다에는 폭력성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영어단어로는 subdue인데 오늘날의 의미는 정복하다, 진압하다의 뜻이지만, subdue가 합쳐진 말입니다. due마땅한또는 합당한의 의미이고 sub‘~의 아래의 의미입니다, 합하면 마땅히 그러해야 할 모습 아래에 있게 하다정도의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생물을 마땅히 그러해야 할 모습대로 관리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은 자연신을 숭배하는 것과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우리가 관리자이기 때문에 그들을 숭배할 수 없습니다. 자연재해 때문에 산에 혹은 바다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땅에 정복당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파괴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생물의 관리를 위탁받은 존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학을 공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관리해야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지요.

 

생물을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

 

9:9~11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우리집 거실에는 멋없이 크기만 한 탁자가 하나 있습니다. 집에 오는 사람마다 웃으면서 집하고 안 어울린다고 돈 있으면 탁자 하나 사지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 탁자는 제가 어느 여름날,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만든 것이어서 내게는 너무 소중합니다. 생명도 없는 이 탁자 하나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께 이 세상 생물들이 얼마나 소중할지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노아의 홍수라고 말하는 대홍수 사건 이후에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무지개를 주시며, 언약하십니다. 누구와 했을까요? 성경은 모든 생물하고 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하고만 언약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착각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재림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으실 때(이사야 66:22)까지 이 땅과 하늘을 그리고 생물들을 관리할 책임을 맡은 하나님의 청지기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적용: 광우병과 줄기세포연구

 

이제 이런 기준을 실제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적용하여 봅시다. 첫째 적용 사례는 광우병입니다. 광우병은 되새김질을 하는 채식동물인 소에게 다른 소의 내장 등 버려지는 부위를 사료에 섞어 먹여서 생긴 병입니다. 비록 그렇게 함으로써 소들을 더 빨리 살찌울 수 있었지만 광우병이라고 하는 저주스런 병이 인류에게 왔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처음부터 채식을 하도록 만들어 놓은 동물들에게 같은 종류의 동물 사체를 먹임으로써 발생한 부작용인 것입니다.

애당초 많은 동물학자들이 이럴 경우 어떤 부작용이 나타날지 모른다고 경고했지만,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진화론적 가치관에 근거하여 허용했고 결국 이런 질병이 나타난 것입니다(진화론은 그것의 과학적 사실 여부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가치관에 있지만 이 글에서는 주제를 벗어나기 때문에 적지 않습니다).

또 다른 예는 몇 년 전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줄기세포연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줄기세포 연구를 불치병을 고칠 수 있는 획기적인 연구로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인간이 영생할 수 있을 것이란 허황된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줄기세포는 아직 신체기관으로 분화되지 않은 초기 세포입니다. 그래서 특정 신체의 질병을 대체하는 단계에 나아가려면 생명의 신비 자체를 밝혀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의 유전자정보를 주입하여 복제인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카톨릭 교회가 줄기세포 대신 성체세포를 연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체세포는 신체기관으로 분화한 후의 세포이기 때문에 그럴 위험이 없지요.

처음 연구를 시작할 때의 목표와 관계없이 자본과 인간의 욕심은 줄기세포 기술을 복제인간을 만드는 데 사용할 것입니다. 이 때 사용할 난자를 얻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이 희생됩니다. 가난한 젊은 여자들의 건강을 담보로 난자를 얻어 부자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그 과정에 만들어진 부산물인 복제인간은 도살됩니다. 생명경시 풍조가 넘쳐날 것입니다.

이런 사례들은 모두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물을 다스리지 않고 폭력적으로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교회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행위를 묵인하는 것이 바로 세속화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공격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키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는 사람(7:21)임을 의미합니다.

 

실천: 개인과 교회, 그리고 전체 한국교회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까요? 개인이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생각해보면 교회에서 종이컵 사용을 줄이는 것이 있습니다. 종이컵을 줄이자는 캠페인은 여기저기에서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캠페인은 남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강제로 또는 다 같이 하자라고 말하기 전에 그냥 나부터 실천합시다. 엄격하지 않아도 됩니다. 실수로 컵을 가져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긴 사람들부터 이런 일을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실천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가장 손쉬운 것은 예배당 지붕에 태양전지를 설치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태양전지를 국내에서 대량생산하고 있어 가격도 많이 싸졌다고 합니다. 게다가 예배당이 전기를 소모하는 패턴이 주중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다가 주말에 집중적으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산업체들이 전기를 많이 소비하는 주중에는 전기를 생산하여 한전에 보내주고 대신 사용량이 적어지는 주말에는 한전의 전기를 가져다 쓰면 됩니다. 시골 미자립 교회를 돕는 방법도 같습니다. 다달이 후원을 하는 것도 좋지만 태양전지를 달아주면 전기료를 통해 다달이 후원을 받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전체 한국교회 차원에서는 좀 더 큰 문제에 대해 세상을 향해 외치는 선지자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4대강사업 같은 일에 대해 전문위원회를 구성하여 검토하게 하고 성경적인 기준에 따라 말을 해야 합니다. 세상이 하나님께 도전하는 데도 아무 말을 하지 않으면서 전도와 선교를 이야기하는 것은 균형 잡힌 신앙태도가 아닙니다. 그것도 사람들 앞에서 우리 주님을 부인하는(12:9)’ 태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비록 완전할 수는 없지만 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실천하며 살기 위해 애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런 실천은 늘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또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남에게 동참하라고 폭력적으로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그저 내가 먼저 노력하고 선한 말로 동참을 권유하면 됩니다. 그 다음은 성령님의 사역 범위입니다. 개인이 할 일과 사회가 할 일에 대해 균형 잡힌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