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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음악*사진&생각

생활편의와 환경의 공생 혹은 돈의 노예

이 사진은 내가 자주 산책하는 이웃 동네의 길가에서 찍은 것입니다. 사실 이런 종류의 나무 모습은 길가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조금만 신중히 사진을 보면 누구나 짐작하실 수 있는 상황입니다. 전기줄과 전화선 등이 어지럽게 지나가는 길가 주택에 있던 나무가 자라서(혹은 원래 이곳에서 자라던 나무를 살려서 주택단지를 개발하였기 때문에) 두 가지 이해가 서로 충돌하고 있는 현장이지요. 생활편의를 위해 나무를 잘라야하는데, 동시에 이렇게 크게 잘 자란 나무는 소중한 환경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를 수 없는 두 가지 이해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 두가지 이해를 이렇게 교묘하게 조화시키고 있습니다. 전기줄이 지나는 부분만 가지를 쳐내고 나무가 계속 자라도록 배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주택단지를 개발할 때 원래 그곳에 자라고 있던 큰 나무가 있으면, 그 나무를 베어내기 위한 허가 절차가 너무 엄격하고 대부분 기각되기 때문에 이들은 공사기간을 몇 개월 늘려서 그 나무를 그대로 공간에 포함시키는 설계를 합니다.


아름드리 나무가 밀집된 곳도 그냥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나중에 조경수 몇 그루 심는 우리나라와는 너무 다르지요. 가로수가 상가를 가린다고 볼썽 사납게 톱질 해서 이게 나무인지, 아니면 조형물인지 구별하기도 힘들게 만드는 우리나라와는 정말 다르지요.


그것도 우리보다 수십배나 넓은 땅을 가지고 있고 우리보다 더 적은 인구를 가진 나라, 나무가 너무 많아 나무만 잘라서 팔아도 이나라 사람 전체가 150년을 먹고 살수 있다는 데도 말입니다. 많은 인구와 좁은 땅을 가진 우리야 말로 수십년, 수백년 묵은 나무를 보존하고 살려서 우리 환경의 일부로 받아들여야만 그나마 조금 나은 환경 속에서 살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삼성의 백혈병 노동자들의 죽음, 쌍용차의 해고노동자의 죽음이 1%의 폭력 때문만일까요? 그들만의 욕심때문일까요? 우리는 사실 규모만 작은 또 다른 돈의 폭력자가 아닐까요? 우리 모두는 돈이 우상이고, 사람은 돈의 노예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