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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미신/누가복음

나는 왜 누가복음을 읽는가? -믿음이냐 행위냐-

나는 왜 누가복음을 읽는가?

-믿음이냐 행위냐-

 

나는 어떤 상황을 복음적 관점에서 점검할 필요를 느끼거나 혹은 성경을 읽다가 어느 부분의 뜻을 분명히 이해하고 싶을 때면 누가복음을 읽습니다. 나는 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지만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훈련을 오래 해온 경제통계학자로서 누가복음은 내가 믿는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이해하는데 가장 적절한 텍스트입니다. 그것은 누가가 스스로 밝혔듯이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것을 차례대로 기록(1:3)’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차례대로 기록했다는 점이 텍스트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나는 우리 주님의 모든 언행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순서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믿습니다.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 봅시다. 기독교인이란 성경이 기록한 하나님을 주로 섬기고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자 되심을 고백하며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경해석이나 이해의 핵심 열쇠는 예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셨는가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서가 갖는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이지요. 따라서 바울 서신을 읽을 때도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에 비추어 해석하여 그 의미의 한계를 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종종 반대로 바울 서신으로 복음서의 말씀을 한정하는 설교를 듣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성경해석이 아니라 바울교의 성경해석 방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는 방법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 말은 바울이나 바울서신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바울 서신을 해석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일부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다보면 예수교인지 바울교인지 정말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너무 잘 알려진 예를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해 봅시다. 성경을 조금 배운 후 스스로 성경을 읽다보면 가장 많이 혼란스럽게 떠오르는 주제는 믿음인가? 아니면 행위인가? 하는 갈등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2:8-9)

우리의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14-19)

이 말씀에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었다고 강조합니다. 어느 정도 강조하느냐 하면, 귀신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고 떤다고 합니다. 누가복음에는 4장에 두 번, 8장에 한번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두려워하며 소리를 지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귀신조차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을 믿고 두려워하는데, 믿는다 하고 행함이 없는 자는 바로 이 귀신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매우 도전적인 말씀입니다. 이중 한 곳을 봅시다.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4:33-34)

이렇듯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으니 혼란스럽습니다. 바울을 최고라고 여기는 많은 설교자들이 야고보서는 아예 설교에서 빼 버리거나 잘 인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중에 스스로 성경을 읽는 습관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 중에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아예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직한 태도는 복음서를 통해 이 두 구절의 모순을 해결하여 이해하고, 설교하며, 삶에 적용하려는 태도일 것입니다.

이 두 구절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복음서를 찾아봐야 합니다. 누가복음 191-9절 말씀을 봅시다.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삭개오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10)

저는 대학생 때 이 구절을 읽다가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일학교에서 믿음 좋은 삭개오에 대해 여러번 배웠지만, 그 내용은 보통 너무 믿음이 좋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사모하여 뽕나무(이전 번역 성경에는 뽕나무로 되어 있었습니다) 위에 올라 주님을 직접 보았다거나 우리 주님조차도 우러러보았던(나무 위의 삭개오를 올려다보았다는 의미의 우러러보았다를 존경한다는 의미의 우러러보았다로 해석한 것입니다. 개역개정판에서는 쳐다 보시고로 번역했지요.) 삭개오였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속에 담긴 중요한 의미는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의 우두머리였습니다. 로마는 특정 지역의 세금징수를 위해 세리를 임명했습니다. 임명된 세리는 급여를 받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거둬들인 세금 중에서 로마가 부과한 금액을 보내고 나면 나머지 돈이 자신의 수입이 되었기 때문에 국민을 속이는 일이 자주 있었던 데다, 자신의 돈벌이를 위해 식민지 지배자에게 충성을 했기 때문에 우리 역사에 비유하자면 친일파였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죄인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그런 사실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9:10-11)

그런 삭개오를 보시고 예수께서 그날 밤을 그의 집에서 유숙하겠다고 합니다. 삭개오는 기쁨으로 주님을 영접하였지만, 사람들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고 수군거립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삭개오는 서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주님이 내 집에 들어오신 것에 감동하여 행한 첫 선언이 바로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는 것과 부정하게 모은 돈을 네배로 갚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 때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구원의 선포가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했을 때 이루어진 게 아니고 그 믿음에 따른 행동의 실천을 선언했을 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네가 구원을 받았다는 선언을 들은 후에 행동을 약속한 게 아니고 행동을 선언한 후에 구원의 선포가 이루어졌습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이제 다시 구원이 믿음에서 오는가 아니면 행위에서 오는가 하는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바울의 말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할례와 같은 종교적 상징이나 고행과 같은 육체적 행위가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나는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삶을 살았기에 구원에 합당한 행위를 한 적이 없으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에 따르면 그 믿음은 바로 행위로서 그 존재를 입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삭개오 사건에서 주님은 행위 선언을 듣고서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따라서 행위로 뒷받침되지 않은 믿음의 고백은 허탄한 것입니다. 즉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증거로서의 행위를 말합니다. 결과를 중시하는 현대의 풍조로 보면 비슷한 말 같지만 근본을 따지는 성경적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뜻이 됩니다. 이렇듯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서로 다른 것 같은 말씀을 발견하면 복음서에서 우리 주님이 하셨던 행동이나 말씀에서 그 다른 말씀이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지 찾아야 합니다.

조금 더 이야기 해봅시다. 누가복음에 우리 주님이 구원을 선포한 기록은 두 번 나옵니다. 한글 성경에는 주님이 구원을 선포한 곳이 몇 군데 더 있습니다만 영어(NIV)성경으로 읽으면 나머지는 치료되다혹은 같은 뜻으로 온전해지다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오직 우리가 지금 읽은 삭개오사건과 예수님이 바리세인의 집에 초청 받아 갔을 때 그 동네의 죄지은 여인이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았던 때에 그 여인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7:44-50)

여기서도 믿음이 구원의 원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만 그 믿음의 확인은 그 여인의 고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그 여인은 예수님이 그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줄 곧 죄사함에 감격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믿음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표출을 보고 구원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적어도 누가복음의 기록으로는 주님께서 구원을 위해 다른 그 어떤 방법도 알려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맞습니다만, 문제는 그 믿음을 어떻게 입증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고 입증은 행위로서만 가능하다는 말이 됩니다.

믿음을 입증하는 행위로 삭개오가 보여준 것은 온전한 방향전환이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수탈하는 자에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는 자로 180도 변한 것이지요. 구원은 바로 자기 백성을 수탈하던 자리에서 자기 백성을 돌보는 자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처럼 완전히 삶의 가치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 완전한 변화가 바로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두 가지를 선언합니다. 하나는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공의(righteousness)의 선언입니다. 성경에서 공의란 윤리적인 인애를 의미하는 것으로 공동체로서 약자를 돌보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들을 읽어 보면 곡식을 수확할 때 흘린 것을 고아나 과부, 이방인, 나그네들을 위해 그대로 버려두라는 말씀처럼 율법의 상당 부분이 공의에 관한 것입니다. 룻기를 읽을 때면 반드시 이런 관점에서 보아스를 눈여겨 보아야합니다. 두 번째 선언은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정의(justice)의 선언입니다. 정의는 다소 법률적인 공평을 의미하는 것으로 힘이 있든 없는, 돈이 있든 없든 공평하게 대하라는 것으로 주로 판결을 할 때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레위기 19:15). 이는 현실적으로는 보통 권력자나 부자들의 힘을 견제하고 바로 잡는 것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찌며 (레위기 19:15) - 한국어 성경에는 공의로 번역된 이 부분의 영어번역은 justice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의 핵심은 바로 정의와 공의였습니다. 이런 사실은 아모스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임할 심판을 예언하면서 선포한 다음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5:21-24)

사실 우리가 죄사함을 받는다는 말은 의롭게 된다는 말이고 의롭다는 말을 성경에서는 두 가지로(정의와 공의)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의와 공의를 들여다보면 결국 사람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의는 글자 그대로 공동체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말이며, 공의는 부당한 권력을 억제함으로써 약자를 보호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 사랑이 구원(곧 영생 얻음)의 조건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한 율법교사와 우리 주님 사이의 대화를 들어 봅시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10:25-28)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율법은 가르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이 대답이 옳다고 하시며 그대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웃이 누구인지 설명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영생을 얻는 이 두 가지 방법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이 구원을 선포하신 두 사건과 일치합니다. 하나는 죄 많은 여인이 자기 죄를 회개하며 눈물로 예수님을 섬긴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삭개오사건입니다.

결국 구원은 우리의 죄사함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그 감격으로 우리의 삶을 180도 전환하여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그 믿음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거저 주신 선물이라고 해서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 결코 아닙니다. (2016.1.25.수정)